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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어. 그래서 빛이 새어들 수 있지. 일본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1436~1490)는 혼란스러운 정치보다 건축과 예술에 탐닉하며 문화인의 길을 걸었다. 그가 전국에서 불러 모은 재능 있는 화가, 음악가, 무용가, 꽃꽂이 선생, 서예가, 도예가, 그리고 공예가들로 인해 히가시야마(東山) 문화가 꽃피어났다. 그의 별장을 사찰로 바꾼 교토의 은각사(긴카쿠지)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단순하고 정적인 일본 미의식의 원류라 불린다. 일본 최초의 다인으로도 일컬어지는 요시마사는 중국에서 전해진 다도를 처음 체계화시켰다. 그에게는 특별히 아끼는 찻사발이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릇 바닥에 균열이 생겨 이를 대체할 그릇을 찾아 중국으로 반환시켰다. 중국 측에서는 그런 뛰어난 청자 그릇이 지금은 없다고 여겨 균열이 더 진행되지 ..
저도 작가님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작년 콜카타 기차역에서 만난 청년 여행자가 말했다. “저도 작가님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눈썹 사이에 붉은색 빈디(인도 여성이 이마에 찍는 작은 점)를 붙인 청년의 여자친구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려 한껏 자유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껴안아 주었다. 내 글을 읽었거나 번역서를 여러 권 소유하고 있는 이들은 그 젊은이처럼 나에 대해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여행과 진리를 추구하는 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 멋진 모습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구속을 거부하며, 꼭두새벽에 일어나(지금처럼) 글쓰기에 몰두하고, 북극성으로 방향을 정하는 뱃사람처럼 망망대해의 세상에서 영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자가 과연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 뭄바이 부근의 명상 센터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한 한국인 여성이 심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아서 내가 신경정신과 의원에 데려가게 되었다. 먼저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진료 예약을 하면서 증세를 설명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의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친절하게 맞으며 의자를 권했다. 검은 뿔테 안경에 지적인 인상이었다. 우리가 앞에 앉자 의사는 나에게 이름과 나이, 결혼 여부, 과거의 병력, 인도에 온 이유 등을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내 대답을 받아 적었다. 그러더니 나더러 입을 벌려 혀를 내밀라고 하고는 검안경으로 내 눈의 홍채를 살폈다. 그리고 두통과 환청에 시달리는지 물었다. 나를 환자로 착각한 것이다. 내가 아니라 옆의 여성 때문에 왔다는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의사는 내 외모와 분위기..
매장과 파종 스물네 살의 가을, 학교 부근에 월세방을 구했다. 유리창이 군데군데 깨진 낡고 오래된 4층 건물이었는데, 그중 한 층을 세 얻어 살림집으로 개조한 가족이 여분의 방 하나를 나에게 세준 것이다. 서울 근교의 한강변 창고에서 지내다 학교 앞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책을 벽에 쌓아 놓으면 겨우 누울 만큼 작은 방이었지만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고 무엇보다 세가 쌌다. 학교와 가까워서 수업을 빠질 염려도 적었다. 이미 한 번 낙제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또 낙제를 했다가는 제적당할 가능성이 컸다.주인 격인 그 가족의 가장은 성격이 난폭하고 술주정을 일삼는 남자로, 내가 입주한 첫날부터 자기 아내와 딸에게 폭언을 퍼붓더니 손찌검까지 했다. 그 나이에 이미 나는 일 년 넘는 노숙 생활에다 강변 창고에서 물난리를 겪는 등..
아침의 시 ​ 이따금 마음의 고통이 그대를 습격해 그대의 기쁨을 부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더 깊은 기쁨을 위해 그대를 준비시키는 것이니. 그것은 그대를 사로잡고 있던 가짜 즐거움들을 모두 쓸어 가 버리고, 그대 가슴의 나무에서 변색된 잎들을 흔들어 떨어뜨린다. 초록색 새 잎이 그 자리에서 자랄 수 있도록. 그것은 행복의 묵은 뿌리를 잡아 뽑는다. 그 아래 숨은 새 뿌리들이 환희의 토양 속으로 뻗어 갈 수 있도록. 아픔은 그대의 가슴으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는다. 훨씬 좋은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 잘랄루딘 루미 (류시화 옮김) 어느새 겨울이 와 붉은 잎들이 공중에 흩날린다. 저기도 붉은 잎, 그 너머에도 붉은 잎들. 계절의 변화만이 아니라 대기 중에 얼어붙는 마음이 있다. 그렇다, 심적 고통은 ..
태도는 사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한 인도인 수도자의 이야기이다.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소년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어머니가 음식이며 옷이며 모든 것을 챙겨 주었다. 따라서 그가 수도자가 되기로 했을 때 어머니는 걱정이 앞섰다. 누가 그를 위해 음식을 해 주고, 청소를 해 주고, 빨래를 해 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러했다. 요리는 공동으로 했지만 그밖의 모든 것은 혼자 힘으로 해야만 했다. 배우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것도 거의 매일 옷을 빠는 것은 시련이었다. 세탁기도 없고, 고작 양동이 두 개와 한 줌의 세제만 있을 뿐이었다. 옷을 세제와 함께 30분 동안 물에 담갔다가 깨끗한 물 한 양동이로 헹군 다음 흠뻑 젖은 옷을 힘껏 비틀어 짜냈다. 덕분에 ..
이야기의 발견 ​ "나는 이야기를 수집하며 살고 싶었다. 멋진 이야기들을. 수집한 이야기들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적당한 순간이 오면 주의 깊게 듣는 귀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마법에 홀린 듯 빠져드는 눈을 보고 싶었다. 모든 이의 귓가에 이야기의 씨를 뿌리고 싶었다." 이란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 마리암 마지디가 한 말이다. 글에 인용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어디서 발견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폭넓은 독서와 삶에 대한 성찰의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어서 나는 짐짓 겸손하게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이름난 스승에게 제자가 물었다. "매번 주제에 딱 맞는 예화를 찾아내시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스승이 말했다. "그것이 알고 싶은가? 그럼 한 가지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겠네..
나는 누구일까? ​ 누구든 말해 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든 알려 줘,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이 길이 나에게 옳은 걸까? 이 여행을 시작해야 할까? 내 꿈이 나는 두려워 그 꿈이 나를 망가뜨릴까? 내 꿈인데도 두려워 그 꿈이 나를 배신할까? 나는 달일까, 얼룩일까? 나는 재일까, 불꽃일까? 나는 물방울일까, 파도일까? 나는 고요여야 할까, 폭풍이어야 할까? 누구든 말해 줘, 내가 누구인지 나는 왜 존재하며,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지 나는 나 자신을 믿는 걸까?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중요하기나 한 걸까? 누구의 어깨에 기대어 울어야 할까? 누구를 찾아야 할까, 많은 길들 속에서 목적지를 잃으면? 진실을 말해야 할까, 침묵해야 할까? 가슴을 따를까, 아니면 그냥 부서지게 둘까? 경계선을 넘을까, 이대로 멈출까? 계속..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신념 ​ 지난여름 라다크의 레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독자가 내 숙소에도 찾아와 몇 번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한테 지나치게 잘해 주는 숙소 여주인 마담 쿤제스가 수상쩍은 눈으로 흘겨보며 내 유리잔에는 텃밭에서 재배한 박하 잎을 가득 넣고 그 고독한 여행자에게는 달랑 잎사귀 하나만 넣은 민트 티를 내오곤 해서 나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박하 잎 하나로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마담이 안 보는 틈을 타 얼른 잔을 바꾸곤 했다. 나는 민트 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서른 후반의 그 여행자는 뜻밖에 마셔 보는 야생 민트 티를 무척 좋아해 눈치 없이 석 잔이나 연거푸 마시는 바람에 마담 쿤제스의 눈총을 심하게 샀다. 밭을 가리켜 보이며 박하 풀이 가득하니 마음껏 마..
꽃과 돌멩이 한 사두(힌두교의 방랑 수행자)가 갠지스 강변에 가부좌를 하고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붉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배경으로 새들이 무리 지어 날고, 순례자들을 가득 태운 배들이 천천히 흘러갔다. 명상을 하기에 더없이 평화로운 장소였다. 사두가 앉아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비 왈라(빨래꾼)가 아침마다 빨래를 하는 장소가 있었다. 그날도 도비 왈라는 당나귀 등에 위탁받은 세탁물을 산더미처럼 싣고 와서는 바닥에 부려놓고 일을 시작했다. 대충 비누칠한 빨래를 둘둘 말아 물가의 평평한 돌에 힘껏 내리쳤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일을 한 도비 왈라는 잠시 짜이(차와 우유와 향신료를 함께 넣어 끓인 인도식 홍차) 한 잔을 마시며 숨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물가에서 풀을 뜯고 있는 당나귀가 걱정된 그는 강둑에 하릴없..
네가 보여!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은 덤불 숲에서 나오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면 이렇게 소리친다고 한다. "네가 보여!" 그러면 덤불에서 나오던 사람도 이렇게 화답한다. "나도 네가 보여!" 이것이 수 세기 동안 내려온 부시맨들의 인사법이다. 어느 책에서 이 인사법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먼저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관계의 본질적 의미가 담긴 지혜로운 전통이다. 오늘날 우리는 '내가 보여? 나를 먼저 봐 줘.'라고 요구하는 자기 주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를 돋보이기 위해 부와 지위와 명품들로 치장하며 그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아니면 비이성적일 만큼 과장된 에고를 갖는다. 그래서 점점 더 가짜 인간이 된다. 나도 혹시 '네..
얀테의 법칙 한 스승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데 새 옷을 차려입고 몸에 향수까지 뿌린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제자들이 놀라서 쳐다보는 가운데 스승은 반갑게 그 신사를 껴안았다. 남자가 떠난 뒤 제자들이 말했다. "어떻게 저토록 속물스럽고 세속적인 사람을 다정하게 껴안을 수 있죠? 전혀 영적인 사람이 아닌데." 스승이 말했다. "그대들이 어리석어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의 의식 수준에 도달하려면 그대들은 한참 멀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욕을 행한다 해도 그의 영적 수준에는 못 미칠 것이다. 그에게는 다림질한 옷을 입거나 향수를 뿌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무엇을 입고 무엇을 행하는가에 관계없이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적 높이에 도달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그는 훌륭한 구..
충분하다 충분하다. 이 몇 마디 단어들로도 충분하다. 이 몇 마디 단어들로 충분하지 않다면 이 호흡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호흡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이렇게 여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삶에 이렇게 열려 있기를 우리는 거부해 왔다. 다시 또다시. 바로 이 순간까지. 이 순간까지. - 데이비드 화이트 (류시화 옮김) 햇살 가득한 봄날, 숲에는 정적이 깃들었다. 새들은 날개 속에 고개를 묻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바람도 어린 잎사귀들 위에서 쉬고 있었다. 구름조차 하늘을 떠다니는 걸 잠시 멈추기로 한 듯했다. 그렇게 완벽한 고요가 이어지고 있을 때, 작은 울새 한 마리가 문득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산다는 것은 무엇이지?"뜻밖의 심오한 질문에 놀라 다들 울새를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기척을 내긴 했으..
오늘 아침 해 뜨는 걸 보았나요? 저자 사인회에 온 한 여성이 "시를 쓰는 것이 꿈인데 쓸 수가 없다."고 했다. 무엇이 시 쓰는 걸 가로막느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른 일들을 하느라 바빠서."라고 말했다.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얼마나 솔직한 대답인가! 우리는 게을러서 어떤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분주해서 못 하는 것이다. 몇 해 전, 시를 쓰기에 적합한 노트를 발견했다. 크기가 적당하고, 줄 쳐 있지 않은 속지는 너무 매끈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연필로 쓰기 때문에 매끈하면 글이 미끄러질 뿐 아니라 연필심이 마찰되는 노랫소리가 나지 않는다). 표지도 두꺼운 합지여서 쉽게 해질 염려가 없었다. 그동안 여기저기 써 놓았거나 암송하는 시들을 정리할 기회였다. 속지 분량이 많지 않아 여러 권 구입했다. 초봄이..
투명한 스티커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지금 어떤 삶을 경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코칭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은 글이다. 한 남자가 약속 장소를 향해 서둘러 차를 운전해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 가는 차가 거의 거북이 수준이었다. 경적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깜빡여도 속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려는 찰나, 차 뒤에 부착된 작은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장애인 운전자입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그 문구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자는 금방 마음이 차분해지고 조급함도 사라졌다. 오히려 그 차와 운전자를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약속 장소에 몇 분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남자는 문득..
나는 나다 세상 어느 곳에도 나와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부분을 가진 사람은 있어도 나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진정으로 나의 것이다.나에 관한 모든 것은 나의 소유이다. 내 몸과 내 몸이 하는 모든 것 내 정신과 그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사상들 내 눈과 내 눈이 보는 모든 형상들 분노, 기쁨, 절망, 사랑, 실망, 환희 등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 내 입과 그곳에서 나오는 정중하거나 달콤하거나 거칠거나 옳거나 틀린 모든 말들 크거나 나지막한 내 목소리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하는 나의 모든 행동들나의 환상, 나의 꿈, 나의 희망, 나의 두려움은 나의 소유이다. 내가 이룬 모든 승리와 성공, 모든 실패와 실수도 ..
루미에게서 배우는 다섯 가지 지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터키의 코냐 지방에서 활동한 잘랄루딘 루미는 13세기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교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37세에 종교를 초월한 떠돌이 탁발승 샴스 우딘 타브리즈와 운명적으로 만나 불과 며칠 만에 내적 혁명을 경험했다. 이후, 학자의 생활을 버리고 시인으로 변신해 죽을 때까지 수많은 시를 통해 ‘세상에 나 아닌 것은 없다’는 자신의 영적 깨달음을 노래했다. 수피 춤의 창시자이며 세계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으로 꼽히는 루미의 시는 오늘날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다. 1. 너 자신의 신화를 펼쳐라 그런 이야기들에 만족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들에. 너 자신의 신화를 펼쳐라. 복잡하게 설명하..
꽃 핀 가지- 헤르만 헤세 꽃 핀 가지가 바람결에 쉼 없이 흔들린다. 내 마음은 아이처럼 끊임없이 흔들린다. 맑은 날과 흐린 날 사이에서 욕망과 체념 사이에서. 꽃잎이 모두 바람에 흩어지고 가지에 열매가 열릴 때까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가라앉고 마침내 평온함을 찾아 인생의 소란스러운 유희도 즐거웠으며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때까지. - 헤르만 헤세 (류시화 옮김) 서정적이고 동화 같은 문체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헤르만 헤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스스로 말했듯이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소년시절에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자살을 시도했고, 그 후에 들어간 김나지움에서도 퇴학당했다. 에서 헤세는 썼다. "나는 어떤 훈육도 오래 견디지 못했다. 나를 쓸모 있는 사..
오직 그것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둘 중 하나의 세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생각의 세계 속에 있거나, 지금 이 순간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생각의 세계에 갇혀 지내느라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과 온전함으로부터 멀어진다. 인간은 사물과 현상을 지각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자신의 생각으로 왜곡해서 보는 데도 뛰어나다.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나무를 정확하게 보고 있다고 상상한다. 나무가 내가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마음의 해석, 나의 지식, 나무와 관련된 과거의 경험을 내려놓지 않으면 나무의 실체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 없이 다가갈 때 나무는 비로소 본래의 아름다움과 위엄과 신성함을 드러낸다. 한 그루의 나무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
여행에서 만나는 것들 지구 행성에 여행을 온 것이라 믿었다. 민들레 홀씨가 미약한 공기의 흐름에도 멀리 날아가듯, 언제나 길 위에 서 있고자 노력했다. 30년 동안 매년 인도를 여행하다 보니 인도인들보다 더 많은 장소를 가 본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 부임하는 인도인 외교관들도 내가 방문한 도시와 마을들에 대해 묻곤 한다. 북인도 우타르칸드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레와트 씨는 자신의 고향인 가르왈 히말라야 지역에서의 여행 경험을 들려주자 놀라움과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끌림은 누구에게나 강렬하다. 하지만 그 장소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가를 질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구와 만나 생의 교감을 나눴는가는 잘 묻지 않는다. 내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장소들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의 ..
명상하는 여우 어느 숲에 여우가 살았는데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양들의 숫자를 세고, 몸을 지치게 하기 위해 낮 동안 굴 안팎으로 뛰어다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몰래 소에게 다가가 따뜻한 우유를 짜 마셔도, 학자의 집에서 훔쳐 온 두꺼운 책을 읽어도 소용없었다. 잠자는 위치를 바꿔 봐도 정신이 더 말짱해질 뿐이었다.그때 올빼미가 건너편 숲에 사는 성자 여우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가 불면증 치료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여우는 한달음에 그 성자 여우에게 달려갔다.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자 성자 여우가 말했다. “그대에게 특별한 만트라를 알려 줄 테니 잘 기억하라. 밤마다 잠들기 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이 만트라를 암송하라."며칠 후 그는 ..
두 마리 새 두 마리 새가 한 나무에 앉아 있다. 똑같은 깃에 똑같이 생겼지만, 한 마리는 언젠가는 죽을 운명의 새이고 다른 한 마리는 불멸의 새이다. 죽을 운명의 새는 아래쪽 가지에 앉아 있고, 불멸의 새는 맨 위쪽 가지에 앉아 있다.아래쪽 새는 이 가지 저 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쉼없이 따 먹는다. 열매가 쓰면 불행해하고, 달면 행복해한다. 늘 부족함을 느껴 더 많은 열매를 원하며 다른 새들이 먼저 따 먹지 않을까 초조해한다. 하지만 위쪽 가지의 새는 먹지 않고 아래쪽 새를 바라볼 뿐이다. 이 새는 존재 그 자체로 행복할 뿐 열매가 달든 쓰든 관심이 없다. 좋고 나쁨, 행복과 불행에 흔들리지 않으며 완전한 고요 속에 앉아 있다.쓰디쓴 열매를 맛보고 괴로워하던 어느 날 아래쪽 새는 위쪽 가지에 앉은, 자신과 똑같이 ..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코끼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 한사람이 있었다. 그는 코끼리를 갖고 싶었다. 그는 코끼리가 너무 좋아서 코끼리 한 마리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나 깨나 코끼리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뜨거웠다. 그는 차츰 알게 되었다. 당장 코끼리를 갖게 된다 해도 자신은 그걸 키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는 평범한 넓이의 마당을 가진 자그마한 집에 살고 있었고, 아주 가난하진 않았지만 농담으로라도 부자라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코끼리를 손에 넣는다 해도 그것을 데려다 놓을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날마다 코끼리를 배불리 먹일 만큼의 사료를 살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끼리가 과연 자기에게 오게 될지도 의심스러웠지만, 만에 하나 갑자기 그 일이 ..
그것을 큰일로 만들지 말라 한 사람이 라다크 지방을 여행했다. 해발 3,500미터의 레 시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그는 다른 투숙객이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하고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말로만 듣던 고산병을 실감했다. 3층의 객실을 오르내리는 데도 숨이 찼다. 곧이어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움증이 밀려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속이 미식거리고 증상이 더 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숙소 주인이 하루만 쉬면 괜찮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조여 오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비싼 돈을 내고 대여한 산소호흡기도 별 효과가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고산병에 대한 공포가 커져만 갔다. 3일째 되는 날, 의사가 와서 진찰을 하고 혈중 산소 농도를 측정한 후 단순한 소화불량이라며 약을 처방했지만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결국 닷새 동안의 정해..
소울 케어 - 영혼의 돌봄 여행 갈 때 책을 들고 가지 않는 편이다. '세상이 곧 책'이라서가 아니라 여행지의 책방에 들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델리와 콜카타의 옥스포드 서점이나 북웜(책벌레), 맨해튼의 스트랜드 북스토어, 도쿄의 준쿠도, 카트만두의 필그림즈 같은 독특한 책방에서 책을 뒤적이며 하루이틀 보내는 것은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내전이 한창이던 스리랑카의 소도시에서 책방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을 오래 기억한다. 내가 지금까지 번역 소개한 명상 서적들은 거의 여행지의 서점에서 만난 책들이다. 오래된 서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지만, 옷가게나 휴대폰 매장으로 바뀐 그곳들에 가면 그 안에서 책장을 넘기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우리가 잠시나마 시간을 보낸 장소에는 우리 영혼의 일부가 남는다고 프랑스 소..
나의 글 쓰기 '작가(writer)는 글을 쓰는 사람이며, 기다리는 사람은 웨이터(waiter)이다’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한때는 주로 밤에 글을 썼지만 새벽에 글을 쓴 지 오래되었다.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20분 명상을 하고 오후 3시까지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 나는 타고난 재능을 지닌 작가나 번역가가 아니기 때문에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문장이 마음에 안 들거나 한 단락도 완성하지 못해 오전을 다 보낼 때도 있다. 여행 중에도 거의 예외가 없다. 새벽 기차 안에서 글을 쓴 적도 많다.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렸다면 한 편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가 쉬워서 달리는 게 아니듯 글쓰기가 쉽다면 아마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생의 모순이다. 글쓰기가 너무 ..
세 가지 질문 '원하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을 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마음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할 때 얼마나 빨리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얼마나 빨리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는가?' 스승과 제자가 시장에 가기 위해 숲길을 지나고 있었다. 꽃향기와 새들의 지저귐에 흠뻑 반한 제자는 자신과 스승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음을 느꼈다. 순수 존재의 행복이 마음을 채웠다. 자신도 이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자유의 상태에 가까웠다고 여기며 미소 지었다. 시장에 이르렀을 때 제자는 숲에서만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앞에서 걸어오는 한 여성을 보는 순간,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애인의 모습이 떠올라 애증이 엇갈렸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또한 화를 내며 아이를 때..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타라 브랙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바닷가에서 놀던 일이었다. 파도 속에서 헤엄치고 소나무숲과 모래언덕을 뛰어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사춘기 때 시련이 닥쳤다. 집안에 내려오는 유전 질환이 발병해 몸을 움직이는 데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모래사장을 달릴 수 없었고, 그다음에는 자전거를 탈 수 없었으며, 마침내 수영도 불가능해졌다. 그녀를 집에 남겨 둔 채 가족과 친구들이 바닷가로 떠나던 장면을 그녀는 기억한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무너져 내렸다.하루는 개를 데리고 혼자 해변을 걷고 있었다. 마음 뒤쪽에는 여전히 슬픔이 있었다. 하지만 하늘의 광활함도 느낄 수 있었다. 소금기를 실은 바람이 코를 간질였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이유 없는 ..
수도승과 제자 한 수도승이 제자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밤이 되어 머물 곳을 찾던 그들은 황폐한 들판 한가운데에서 오두막을 발견했다. 헛간 같은 집에 누더기 옷을 입은 부부와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집 주위에는 곡식도 나무도 자라고 있지 않았다. 여윈 암소 한 마리만 묶여 있었다.수도승과 제자가 하룻밤 잠자리를 청하자 그 집 가장이 친절하게 맞이하며 우유로 만든 간단한 음식과 치즈를 대접했다. 가난하지만 너그러운 그들의 마음씨에 제자는 감동받았다. 식사를 마친 수도승이 그들에게 도시와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먹고사는지 물었다. 아내가 쳐다보자 남편이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에게는 암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우유를 짜서 마시거나 치즈를 만들어 먹습니다. 남으면 마을에 가져가 다른 식량과 바꿔 ..
연민 피로 -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 내가 아는 한 편집자는 연민심이 많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문제를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한번은 몇 사람과 산행을 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자신의 힘든 상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상에 갔다가 내려올 때까지 그 사람의 불행과 함께하느라 산을 감상할 수 없었다. 마치 티베트 불교의 통렌 수행을 실천하는 것 같다. 통렌은 '주고받는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대신 떠맡고 그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좋은 것, 건강과 행복을 준다고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수행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숨을 내쉬면서 그 사람에게 나의 건강한 기운을 내보낸다. 연민심과 공감은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고통은 인간 삶의 가장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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