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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투명한 스티커


우리는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지금 어떤 삶을 경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칭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은 글이다. 한 남자가 약속 장소를 향해 서둘러 차를 운전해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 가는 차가 거의 거북이 수준이었다. 경적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깜빡여도 속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려는 찰나, 차 뒤에 부착된 작은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장애인 운전자입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자는 금방 마음이 차분해지고 조급함도 사라졌다. 오히려 그 차와 운전자를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

약속 장소에 몇 분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남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차에 스티커가 붙어 있지 않았다면 참을성을 발휘했을까? 빨리 비키라고 더 심하게 경적을 울리며 욕을 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저마다의 등에 붙어 있는 투명한 스티커를 알아보지 못한 채 섣불리 판단하고 쉽게 화를 내는 것일까? 이를테면 이런 스티커들 말이다.

'일자리를 잃었어요.'
'암과 싸우고 있어요.'
'이혼의 상처로 아파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요.'
'자존감이 바닥이에요.'
'아직은 미소 짓기가 힘들어요.'
'그저 껴안아 줄 사람이 필요해요.'
'월세를 못 내고 있어요.'

우리 모두는 이 보이지 않는 스티커들을 등에 붙인 고독한 전사들이다. 따라서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참고' 친절해야 한다.

내가 아는 인도인 중에 아말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다. 음악가인 삼촌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타블라(인도, 파키스탄, 네팔의 대표 타악기)를 배운 아말은 음악대학에 들어간 스무 살 무렵에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타블라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다.

같은 대학에 시타르 전공자인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아말의 타블라 연주를 듣고 그 자리에서 반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아말의 연습실을 찾았다.

자신의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 속에서 아말은 그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연주의 차원이 달라졌다. 그녀가 앞에 있으면 혼을 다 쏟아부었으며, 그 힘과 열정은 북의 두꺼운 가죽을 찢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키르 후세인이나 라추 마하라즈의 연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아말 혼자만의 사랑이었는지, 그 여학생도 동일한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말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랑에 온 마음을 바쳤고, 그 감정을 온전히 타블라 연주에 담았다. 사랑의 환희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타블라만큼 잘 표현할 악기가 또 있겠는가. 두 번째 손가락으로 심장(북)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두드리는 음, 왼손 손바닥 끝으로 가슴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문지르는 음, 오른손 끝 손가락 두 개로 심장 중심 부근을 가볍게 튕기는 음,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가슴을 치는 음, 손바닥으로 심장 한가운데를 때리는 음......

그러나 연주는 거기서 갑자기 멈췄다. 감동적인 피날레와 청중의 환호는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여학생은 부모의 주선에 따라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아말은 큰 충격을 받았고, 고통을 견디지 못한 채 심장이 부서졌다. 타블라도 함께.

그 후 아말은 다시는 타블라를 연주하지 않았다. 음악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그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모두가, 그의 가족조차 그를 실성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어느 날 노천 찻집에서 내가 짜이를 권하며 '타블라 연주를 한 번만 들려달라.'고 부탁하자, 아말은 야윈 빰에 번질 듯 말 듯한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사랑에 전부를 걸었다. 그리고 전부를 잃은 사람이다."

당신이 북인도 바라나시의 뒷골목에 가면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느릿느릿 걷는 한 남자를 지나치게 될 것이다. 보통의 키에 갈색 피부,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품위 있는 곡선의 얼굴을 한, 그러나 시선이 약간 바보처럼 보이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과 순례자들과 여행자들과 소들에 걸구치면서 그는 그냥 이 세상 영혼이 아닌 것처럼 망연자실 걸을 뿐이다. 그가 바로 아말이다. '나는 사랑에 전부를 걸었어요. 그리고 전부를 잃었어요.'라고 적힌 투명한 스티커를 등에 붙인.

그를 떠다밀거나 비키라고 소리치지 말 일이다. 당신도 그처럼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 보았는가?

*

지난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사인회를 끝으로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출간 기념 저자 사인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동안 소중한 시간을 내어 와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줄서서 긴 시간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의 건강을 염려하고 '힘들지 않느냐?'고 연신 걱정해 주실 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자비와 연민이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번 사인회에 응한 것은 책의 홍보나 판매보다 긴 세월 저의 글과 번역서들을 읽어 오신 분들을 한 번쯤 만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한 분 한 분과의 만남이 진실로 좋았습니다. 좋은 글, 좋은 번역서로 보답하겠습니다.

art credit_Zhou 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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