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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가난한 수도승의 방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수도승 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것은 20대 때 부터였을거다. 어쩌면 아버지의 기도 때문 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이 장녀를 까르멜 봉쇄 수도원에 보내려고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도 나무묵주가 나른해지도록 기도 하셨고 나는 아버지의 기도를 깨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별을 거듭 하면서 마흔이 넘어서야 딸 하나를 낳았고 이제 그 딸이 서른살을 훌쩍 넘겼으니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버렸다. 내가 오십이 되어서 못내 못내 수도승이 되지 못 했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수도승의 옷이라도 입고 싶어서 바느질을 시작 했을수도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승들이 입는 발목까지 닿는 긴 통자루옷과 허리를 묶는 매듭이 필요해서 내 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수도승의 옷은 파는 곳이 없었으므로 — 그렇게 광목으로 옷을 지..
바깥 음식을 안 먹게 되면 믿기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바깥 음식을 안 먹게 되면 삶이 참으로 단촐해지고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대로 방향 잡기가 쉬워진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수 있다. 먹을수 있는 음식이 제한적이 될때 내가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과 실제로는 없어져도 살아가는데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이 생각보다 실제로는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을 단순하게 가볍게 살고 싶다면 자기 손으로 손수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살림을 잘 사는 생활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지름길 이다. 돈 버느라 지쳐 빠져서 살림이 엉망진창 일때 나는 불행 했고 우울 했었다. 돈 버는 일 보다 돈을 적게 쓰고 돈 버는 일로 낭비 되었던 시간과 생각과 돈의 에너지가 절약되니 내 삶의 질이 깊어졌고 자존감이 커져 갔으며 ..
내일의 해는 다시 뜨는 법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피안彼岸에 다다르다. 질풍노도의 시간을 통과하고 이제 피안에 다다랐다. 칠흑같은 어두움을 뚫고 들려오는 새소리와 개구리 소리 벌레소리 고라니소리 등. 등 밤에도 지저귀는 새들이 있구나. 인생사 모든 것을 몸소 다 경험해 보고야 말겠다는 굳은 소원을 가지고 이번 생으로 건너 왔나보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였다. 아마 30대 중반 이었을게다. 그때부터 내가 이번 생에 어떻게 살려고 했는지 짐작이 되기 시작 했다. 내 인생의 퍼즐 조각들이 전체 그림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 이었다. 삶과 죽음. 사랑과 실연. 배반과 좌절. 빛과 어두움. 희망과 염세. 이 모든 것이 뒤엉켜 혼란스럽던 10대와 20대를 통과 하면서 불꽃으로 내 살갗을 스스로 태우기도 해 보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방랑을 하기도 했었다. 이제 못..
우주의 법칙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부산 남산동 남산고등학교 올라가는 사거리 요리학원 골목길에 생식가게가 있었다. 우연히 들렀던 그 가게 주인은 그당시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물이 훤출한 남자 였다 외국어 대학 불문과를 나와서 잘 나가는 증권회사에서 일하다가 IMF 사태를 맞아 졸지에 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가 예기치 않게 기공을 만나 수련자로 살아가는 인생의 전환을 맞은 사내였다. 역시 예기치 않았던 인연으로 그 당시 부산대학에서 중국어문학을 가르치던 서모교수와 함께 그 사내와 기공수련을 했던 적이 있었다. 한 일년 정도 함께 수련을 하면서 파륜공을 만나 파륜공 수련을 하기도 했다. 파륜공의 에너지는 그 어떤 수련법보다도 막강했다. “ 언젠가는 피부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갈 것이고 그 다음에는 감기 같은걸로 수많은 ..
홀로 있을때라야 홀로 있을때라야 더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수 있기에 나는 홀로 있을 시간을 애써서 마련한다. 이 소리는 내가 가장 신뢰할수 있는 깊은 침묵의 시그널 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물론 충만하고 아름답지만 깊은 울림을 만질수는 없다. 내면 깊은 곳에서 떠 오르는 기억들과 진실은 거짓됨의 가면을 벗기고 참 모습으로 다가 온다. 때로는 얼굴을 돌리고 싶을때도 있지만 진실은 그 너머에 숨겨져 있고 좀 더 깊게 탐색을 해 들어가야만 만날수 있다. 나는 이 것을 신의 목소리라고 여기고 이 만남을 신과의 만남이라고 명명한다. 이 만남은 명징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세상은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고 법칙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며 법칙을 이해하..
살림의 묘미 살림의 묘미를 살려내는 기술은 질서와 깨끗함이다. 깨끗함을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너무 많은 노동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아야 한다. 그 구심에서는 흔들림 없는 안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림의 묘미는 적절한 가성비가 있어야 한다. 젊었을때 수십년간 먹이를 계속해서 공급해야 했을때는 살림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 사냥과 살림의 균형과 조화가 이그러지면 온전한 생명활동이 유지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기우뚱 거리면서 생명력을 소진하다가 이제서야 원심과 구심의 적절한 궤도 안에 들어 왔고 매일 매 순간 바쁘지 않게 살림사는 묘미를 살려내고 있다. 매일의 질서와 깨끗함을 잘 유지하려면 물건을 줄이고 일거리를 줄이는 것이 상책이다. 구석구석 쌓이는 먼지를 털어내기 쉽게 구석마다 여백이 있어야 하고 딱 필요..
서울을 떠나며 코로나 팬데믹으로 예기치 않게 무려 두달 넘어 청도 수월리에서 자가유배를 즐기다가 어제 저녁에 상경 했다. 어디에서나의 루틴대로 어김없이 새벽 3:30 분에 깨어서 한시간 반동안 명상을 했다. 절에서는 새벽예불이라 할거고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라 할 것이다. 엄마 아버지의 기도 모습을 보면서 자란 나에게도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을 평범한 일상이다. 어제 청도를 떠나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오는 동안에 차창에 어둠이 스치듯이 많은 회상들이 스쳐갔고 연희동의 숙소에서도 뭔가 아슴프레한 기억들이 밀려 왔다가 사라지곤 한다. 이 회상들은 해변 언저리에 살며시 밀려 왔다가 자잔한 포말을 일으키며 바다로 흡수 되는 과정을 끝 없이 되풀이 하는 파도처럼 의미 없이 왔다리 갔다리 되풀..
'나'라는 존재 사위가 고요하고 물이 깊어지고 명징해 졌을때 손을 넣어 무심하게 한번 휘~젓기만 해도 가라 앉아 있었던 쓰레기들이 떠 올랐다. 샘을 여러번 청소했으므로 둥둥 떠다니는 쓰레기는 없다고 여겼다. 물이 맑고 고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물이 조금 흔들렸을 뿐인데 가라앉아 있는지 몰랐던 자잘한 부스러기 같은 이물질들이 계속 떠 올랐다. 그 이물질들은 지푸라기이거나 날카로운 금속 조각 일 때도 있고 미끌거리는 이끼가 낀 돌멩이 일 때도 있었다. 내 인생은 어찌보면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고, 어찌보면 드라마도 그런 대하 드라마가 없다고 여겨질 만큼 온갖 크고 작은 사회적 개인적 사건들과 격변의 이랑에 휩쓸려 왔다. 정신을 차리려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야 할 때도 있었다. 만약에 내 삶의 터전이 안전했고 오랫동안 등..
산다는 것은 어느정도 내가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되기까지 무려 20여 년이 걸렸다. 번뇌망상이 내 삶을 칡 넝쿨처럼 칭칭 감아서 내 삶이 그토록 고달프고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1997년 겨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정리정돈이나 청소를 내가 원하는만큼 깨끗이 못 하는 줄 알았고 내가 게을러서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살던 어느 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이 추려져서 생존하기에 꼭 필요한 몇가지만 남긴다면 내가 원하는 만큼 정결한 삶을 살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어왔다. 나는 내 머리속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현실화 되지못한 쓰잘데 없는 지적 욕망부터 처리하여서 나의 뇌를 소제하고 휴식을 주는게 절실하다고 느꼈다. ‘앎’이란 실제로 그렇게 ‘삶’에 적용하므..
단순하고 소박한 삶 20여 년 전만 해도 미니멀리즘 같은 용어는 있지도 않았던 시절.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겹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로부터 약간의 도움이라도 얻기는 커녕 꽤 많은 부채를 물려받아 시작한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시작해도 자리잡기 어려운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리라. 기초자본금 없이 살아가는 자영업이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일일 일용직과 다를 바가 없다. 벌어서 임대료 내고 코딱지 같은 홍보비 내고 한두 명 직원 월급 주고 세금 내고 나면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떼어 먹는 게 세금일테고. 임대료 밀리면 시설비는 하나도 못 건지고 다른 곳으로 밀려 나가야 한다. 서른 살에 엄마로부터 떠밀려서 운영해야 했던 요리학원은 씨앗 빚을 감당하지 못한채 이자만 겨..
시각정보가 뇌에 전달되는 시간은 찰나 눈을 속이면 뇌는 비치는대로 반응 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가? 수정체를 통해 들어온 사물의 스케치가 망막 스크린에 비추어져 시신경을 거치고 중추신경을 통해 시각피질에 도달하고 뇌의 중심부가 이 사물의 정체를 판독해 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찰라다. 내가 보고 있는 모든 사물은 느끼는 순간 이미 찰라로 미끄러져 사라져간 과거의 잔상일 뿐이다. 실제로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언제나 속임수에 지나지 않으며, 나는 수시로 그림자를 보면서 현재라고 기만 당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한다고 믿는 그것이 사실은 그림자일 뿐인데도 나는 그 환상을 붙잡고 늘어져야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러한 마야에 도취되는 순간들을 붙잡고 좋아하는 이 어리석음을 벗어던지고 싶진 않다. 벗어 던져 버리기에는 안타까울 만..
세상 모든 것은 신기루 같은 것 눈을 속이면 뇌는 비치는대로 반응 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가? 수정체를 통해 들어온 사물의 스케치가 망막 스크린에 비추어져 시신경을 거치고 중추신경을 통해 시각피질에 도달하고 뇌의 중심부가 이 사물의 정체를 판독해 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찰라다. 내가 보고 있는 모든 사물은 느끼는 순간 이미 찰라로 미끄러져 사라져간 과거의 잔상일 뿐이다. 실제로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언제나 속임수에 지나지 않으며, 나는 수시로 그림자를 보면서 현재라고 기만 당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한다고 믿는 그것이 사실은 그림자일 뿐인데도 나는 그 환상을 붙잡고 늘어져야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러한 마야에 도취되는 순간들을 붙잡고 좋아하는 이 어리석음을 벗어던지고 싶진 않다. 벗어 던져 버리기에는 안타까울 만..
나의 영혼은 나의 영혼은 저 먼 곳. 지구별의 중력을 넘어선 우주 저 너머 비물질 세계의 니르반담에 거하는 무한극소 한점의 빛이며 영혼들의 씨앗인 그분께 속하는 비물질적인 무한극소의 한 점의 빛이다. 이 빛이 햇살처럼 세상으로 내려와 가이아의 중력에 이끌려 들어와서 물질 원소들의 협조를 얻어 휴먼~빙. 생명이 되었다. 나의 영혼은 비욘드 월드 침묵의 나라. 평화의 나라에 속하고 나의 육신은 다섯 가지 물질 원소의 화합으로 몸을 이룬다. 내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내 몸은 분해 되어 다섯 가지 원소로 되돌려 진다. 내 몸은 색 이었다가 공이 되고 공 이었다가 색이 되며 끊임없이 영원히 순환된다. 아톰은 물질로 현현 되기도 했다가 다시 극소의 아톰으로 되돌려지면서 질량불변의 움직임으로 지구와 행성들을 출렁거리게 한다. ..
적막강산 寂寞江山 #寂寞江山 이다. 눈 앞에는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그 아래 활엽수들이 봄이 오면 틔워낼 움들을 숨겨서 품고 있다. 집앞에는 호수라기에는 너무 작고 연못 이라기에는 제법 큰 저수지가 살얼음들을 키워간다. 앞 마당에는 이육사선생댁에서 시집온 유서 깊은 항아리들이 놓여져 있고 겨울밤을 덮혀줄 소나무장작도 적당히 쌓여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달 가까이 수업을 할 수 없는 연희동 ‘시옷’을 떠나 오도 가도 안하고 수월리에 은둔하여. 하루종일 뜨개질을 하다가 마당으로 나가서 고요한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멍~하니 소나무 능선을 바라보기도 한다. 봄이 되면 나물을 뜯어서 쑥국을 끓이고 텃밭에 키운 허브로 샐러드를 만들고 상추를 뜯어서 비빔밥을 짓고 벚꽃을 가득히 밥위에 뿌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일렁일..
살아있다는 것은 내 삶에 있어서 선택지가 단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나는 비로소 가볍고 자유로와졌다. 단순함은 명징성을 이끌어내 주었다. 모든 헛된 욕구가 사라지는 순간이 올때가 있다.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지쳐서 심심해질때 문득 휴식이 찿아오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생명의 존재로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 만이 삶의 정수(精髓) 라는 것.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음으로 생명의 투명성이 떠오르면 살아있음 그 한가지 만으로도 경이롭다. 어제 산나물 채개장 쿠킹클래스에 온 수강생 중에 15,6년 전 즈음 철마산 오두막에 온 적이 있었다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때 하룻밤을 재워 주면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시간과 시간의..
수행자 내 삶에 있어서 선택지가 단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나는 비로소 가볍고 자유로와졌다. 단순함은 명징성을 이끌어내 주었다. 모든 헛된 욕구가 사라지는 순간이 올때가 있다.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지쳐서 심심해질때 문득 휴식이 찿아오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생명의 존재로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 만이 삶의 精髓이자 에센스 라는 것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음으로 생명의 투명성이 떠오르면 살아있음 그 단 한가지의 경이로움만으로도 소스라친다. 어제 산나물 채개장 쿠킹클래스에 온 수강생중에 15,6년전 즈음 철마산 오두막에 온 적이 있었다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때 하룻밤을 재워 주면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
나의 삶은 지리산 누룩실 골짜기에 지으려는 나의 오두막은 ‘내 사랑 모드’의 오두막처럼 다락방 침실을 만들 것이고. 소로우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 처럼 단순하고 소박해야 한다. 오두막 안의 배치는 지금 나의 거처로 사용하는 상주의 ‘아삶공’과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숲 속에 짓는 작은 오두막은 클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자고 먹을 작은 침실과 따뜻한 부엌이 있으면 된다. 부엌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바느질도 하며 음악을 듣고 명상 하면서 반찬 없는 밥을 지을거다. 오두막 둘레에 커다란 돌들을 깔아서 데크를 만들고 대부분의 일상을 데크에서 보내리라. 데크에서 뒹굴고 꽃이나 곡식을 말리며 달과 별을 보고 일광욕을 할 것이고 때로는 춤을 출지도 몰라. 8월초 월요일 건축회의 때 발표할 나만의 오두막 설계. 언젠가부터..
나이듦의 혜택 나에게 늙어감은 참 좋은 것이다. 더 이상 불확실성으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이 없고 더 이상 좌절과 실패로 인한 쓰라린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는 나이. 이제 불안해 하며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 하지 않아도 되고 이대로 머물어도 누가 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나이. 구비진 길을 돌아 돌아 왔고. 가파른 길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발가락엔 물집이 잡히고 붉게 부풀어 올라 쓰라릴때도 있었지. 언젠가는 끝 날때가 있으리라고. 짐작은 하였지만. 갸날픈 실날 같은 앞 날을 아스라히 바라보이기만 하던 앞 날들을 막막하게 바라보곤 했었지.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가는 동안 세월이 가고 가고 가고 가더니. 어느새 다달았어. 이제는 스르르 손을 놓아도 될때. 녹색 벨벳의 낡아서 삐거덕 거리는 의자..
산다는 것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싶고 하루하루 살아 온 날들이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면 아득아득한데 말이다. 알고도 모를 일. 산다는 것. 엄마가 90즈음부터는 자꾸 “지업다, 지루하다” 하셨다. 그 와중에도 “다시 태어나면 너거 아버지와 다시 살아보고 싶다“고도 하셨다. “다시 태어나 다시 만나서 살게 되면 좀 더 좋은 아내이고 싶다”는 거였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한번씩 퍼 붓고 히스테리를 부렸으나 자주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도 오십대 중반에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늘 미안해 하셨다. 아버지가 돈을 못 벌고 엄마가 다섯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고 짜증 날때가 많았을까 싶은데 정작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만 남았나 보았다. 엄마가 스물두살. 아버지가 스물세살때 결혼 했다 했으니 못 살아도 삼..
꿈 같은 인생 그녀를 처음 본 것은 1978,9년 즈음의 부산. 조방앞. 부산진시장. 동아사약국 맞은 편 대명빌딩 2층 다방이었던 걸로 기억 된다. 대명빌딩 4층에는 생계형 요리학원이 있었다. 학원 안에 조그만 방 2개를 만들어서 딸 셋과 우리엄마, 그리고 엄마의 손녀딸과 외아들 부부가 살면서 요리학원으로 먹고 살던 시절이었다. 학원에 수강생들은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가난에 쩔은 남자 아이들로 외항선을 타고 돈 벌러 바다로 나가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요리학원으로 왔다. 요리를 배우려는 것보다 요리사면허증을 손에 쥐려는 것이 목적이었고 요리사면허증이 있으면 브로커를 통해 선원증을 발급 받을수 있었다. 선원증을 가지면 외항선을 탈수 있었고, 일단 외항선을 타면 배에서 하는 어떤 노동이라도 하면 되었다. 그들은 요..
진정한 삶 나는 이제 곧 진정한 삶이 시작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언제나 온갖 방해물들과 급하게 해치워야 할 사소한 일들이 있었다. 마무리 되지 않은 일들과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끝내고 나면 진정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방해물들과 사소한 일들이 바로 내 삶이었다는 것을.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 류시화 현재 나의 나이 때에 선생님께서 쓰신 글. 한 번 읽고 덮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이렇게 옮겨본다.삶과 인생에 대한 고민,방황을 나보다 더 많이 더 깊게 하신 선배 지구별여행자의 기록은 언제봐도 따스한 햇살, 선선한 바람, 시원한 단비와도 같아 나의 영혼을 춤추게 한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지혜와 통찰이 가득한 이 글들을 내 맘속에 오래도록 간직하게 되기를. 제1부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1. 나에게로 떠난 첫 여행 나의 첫번째 명상체험아름다운 기도신이 내 안에 들어오다 2. 귀 속의 바람 낮 동안에 내가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삶이란, 흔히들 말하는 대로 지금 전등불에 와서 부딪치는 이 벌레들처럼 덧없는 것일까?아니, 그러한 덧없음을 느낄 겨를도 없이 우리는 그저 삶의 물결..
이 세계 자체가 마야 였다 1988년 3월. 아침 열시경,부산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를 만났다.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오뎅가게로 가서 긴 대나무 꼬치에 꿰어진 오뎅을 두어개 먹은 뒤 뜨거운 오뎅 국물을 홀~ 홀~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가 두번째 비어진 오뎅 꼬챙이를 내려 놓았을때 그가 먹은 오뎅값을 치루고 경주가는 버스표 두 장을 샀다.그때 우리 나이는 서른여덟살이 되어가고 있었다.푸슬푸슬 메말라간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키니 젊디 젊은 나이였다. 그 당시에는 불혹이라는 40을 코 앞에 두고 늙음의 길목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에 쫓기고 있었다.경주로 가는 버스안 창쪽에 앉은 나는 "이담에 죽어서 하늘나라로 갔을때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그분께 보여드릴 내 삶의 부스러기들을 담은 작은 소쿠리가 필요해요." 중..
눈부신 가을을 기대하며 날씨가 화창했던 오늘 오후, 나는 저습지를 가로 질러 햇볕을 받으며 완만한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약 250미터 앞쪽에 단풍나무로 무성한 소택지 윗부분이 빛나는 황갈색의 산등성이 위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 소택지는 대략 3미터의 깊이에 100미터의 길이로 뻗쳐 있었는데 너무나도 강렬한 주황색과 적황과 노란색이 찬란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것은 그 어떤 꽃이나 과일 또는 지금까지 그려진 그 어떤 그림에도 결코 뒤지지 않은 멋진 광경 이었다. ——중략 —- 이 나무들의 휘황찬란한 색깔과 넘치는 활력을 보고 이것이 도대체 무슨 영문이며 , 나무들이 혹시 무슨 나쁜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이 읍의 교회 장로들과 독실한 신자들이 나와서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나..
내가 태어났을 때 #1950년3월에 내가 태어났을 때앞산 용두산엔 봄바람이 불어 닥쳤고 자갈치 앞바다에도 봄바람이 파도를 일으켰다.자갈치 바다를 건너 영도로 갈 수 있는 영도 다리는 넘실거리는 싯퍼른 바닷물을 가르느라 올렸던 다리를 가끔 내려 놓곤 하였다.자갈치 시장에서 장을 본 사람들은 보따리를 안고 다리 끝에 서 있다가 다리를 들어 올리면 우루루 몰려서 다리를 건너 갔다.내가 어렸을때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영도다리 앞에서 이 신기하고도 흥미로운 장면을 가끔 보았다.내가 태어나서 백일이 되었을때 625전쟁이 터졌다.한강다리가 끊기기전에 용케 난을 피해온 사람들이 물 밀듯이 부산으로 들이닥쳐 우리집 앞산 용두산에 천막을 치고 다닥다닥 붙어 살기 시작 했다.부산시 광복동 1번지 2층 적산가옥 중 반을 떼 내어 피난 온 카톨..
인생이란 그러한 것 시어머니의 병명은 급성 뇌출혈 이었다. 뇌하수체 근처 오른쪽 핏줄이 터진 씨티사진을 보여주는 의사의 설명은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며 산다고 해도 정상적인 활동은 어렵다고 했다. 양한방병원의 허름한 중환자실에 방치되다 시피 누워 계신 어머니 곁에 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식을 잃은 어머니가 갑자기 어눌하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아버지를 찿으셨다. “너거 아버지 어디 갔노 ? 저기 버스 오는데 아버지 태워가야 하는데. 너거 아버지 어데 갔노? “ 어머니는 안타까워 하셨다. 나는 저승사자가 어머니에게로 오고 있음을 감지 했다 아버지를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불쌍한 어머니, 평생 모진 고생을 하다가 이제 돌아가시면 어떻게 극락을 찿아 가겠습니까 ? 극락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가..
하나의 생을 살아 간다는 것은.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갈 때 잠시 헷갈린다. 얇고 가벼운 거미줄처럼 여린 육신의 옷이 벗겨졌을 때 잠시 머뭇거린다.이내 아무런 저항이 없어졌음을 깨닫고 중력 저 너머로 날아오른다.너무 가벼워요. 자유로와요. 행복해요.내가 사랑했던 내 동생 안나는 여러 차례 나에게 이런 메세지를 보냈다.나는 울며 돌아오라고 말했으나 안나는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세상을 남겨두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사랑했던 아이들과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속했던 모든 것들과의 이별의 무게가 더 이상 안나의 가벼움과 자유로움을 끌어 당기지 못했다.안나처럼 방금 몸을 빠져나간 영혼들이 나에게로 올 때가 간혹 있었다나는 에너지 상태인 몸을 벗은 그 영혼들을 감지했다.어떤이는 남기고 떠나게 되는 아이들 걱정 때문에 왔고어떤 이는 단지 안녕을 ..
나는 자유로와졌다 도시를 탈출할 때나에게 가장 절박했던 것은 밭 이었다 땅 이었다. 흙 이었다. 나에게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하늘과 산이 보이는 곳과 내가 먹을 채소를 손수 가꿀 땅이 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그 곳으로 가기 위하여 나는 가벼워져야만 하는 것을 깨달았다.거미줄 처럼 얽혀 있는 규범의 관계를 이탈하지 않고는 얻을수 없는 세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가 타일렀던 그 자유에 목말랐을 때 였다.진리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알고 싶지 않아도 자유 만은 얻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자유는 이슬만을 먹고도 살수 있는 자유. 새처럼 하늘 높이 가벼이 날아갈 수 있는 자유였다.나는 그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가벼워지지 않고서 날아 오를수는 없을테니까. 제일 먼저 책들을 치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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