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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내가 태어났을 때




#1950년3월에 


내가 태어났을 때

앞산 용두산엔 봄바람이 불어 닥쳤고 

자갈치 앞바다에도 봄바람이 파도를 일으켰다.

자갈치 바다를 건너 영도로 갈 수 있는 영도 다리는 넘실거리는 싯퍼른 바닷물을 가르느라 

올렸던 다리를 가끔 내려 놓곤 하였다.

자갈치 시장에서 장을 본 사람들은 보따리를 안고 다리 끝에 서 있다가 다리를 들어 올리면 우루루 몰려서 다리를 건너 갔다.

내가 어렸을때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영도다리 앞에서 이 신기하고도 흥미로운 장면을 가끔 보았다.

내가 태어나서 백일이 되었을때 625전쟁이 터졌다.

한강다리가 끊기기전에 용케 난을 피해온 사람들이 물 밀듯이 부산으로 들이닥쳐 우리집 앞산 용두산에 천막을 치고 다닥다닥 붙어 살기 시작 했다.

부산시 광복동 1번지 2층 적산가옥 중 반을 떼 내어 피난 온 카톨릭 신부에게 내어 드려 우리집 일부가 난중 성당으로 변했다.

신부와 수녀와 동정녀들과 집을 잃은 일반신자들이 우글거리는 이 작은 성당에서 이제 갓 백일을 넘긴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 났다고 엄마가 말해 주었다.

신부가 되고 싶었던 나의 아버지에게는 하늘이 주는 절호의 챤스 였다.

엄마는 아기 였던 내가 땅에 놓일 새가 없이 신부님 수녀님들에게 안겨 있었다고 했다. 

사랑이란 사랑과 기도란 기도를 그럴수 없을 만큼 많이 먹고 자란 나에게는 전쟁통의 가난과 슬픔이 피해 갔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엄마는 검정색 빌로드치마를 뜯어서 레이스를 달아 원피스를 만들어 아기에게 입히고 한줌도 안되는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매 달았다.

물들인 인조와 뉴똥으로 치마 저고리를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해 질녘이 되면 우리집앞 광복동 남포동 거리에는 카바이트 불빛이 반짝거리는 야시장이 섰고 젊은 아버지는 입안이 볼록해져서 잘 다물어 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왕눈깔사탕을 사서 내 입에 물려 주었다.

“ 이왕성신부님이라고 계셨어. 얼마나 잘 생기고 멋지셨는지 신부님이 돌아 가셨을때 ~명동 지하성당 신부님 영안실에 소복 입은 전쟁 미망인들이 줄 지어 조문하며 슬퍼 했었지. ~ 신부님이 아직 젊은데 돌아가셨어. 신부가 주역도 공부하고 그랬어. 

니가 유아세례 받을때 이 신부님이 요세피나 라고 세례명을 지어 주셨어. 그러고 한참 주역 풀이를 하더니 성희가 이 담에 크면 시집도 보내지 말고 수녀원도 보내지 말고 지 하고 싶은대로 내 버려두라고 하셨어. “ 나는 엄마의 이 말을 수십번도 더 들으면서 자랐다.

가끔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가 평범해야 행복 한데 ~’ 

‘ 너를 누가 만족 시낄까 ? 물질만 가지고도 안 되고. 정신만 가지고도 안 되니 ‘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 였다.

내가 스물여섯, 돌아가실때까지 아버지는 단 한번도 나를 억압하거나 야단 친 적이 없었다.

오직 지켜보고 기도하고 사랑만 주셨다.

그랬을 것 이다.

내가 수녀도 , 중도 못 되고 ,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 한것은

내가 태어난 별자리가 그랬고 

태어난 사주팔자가 그랬으며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이 그러했음을 —

한때 나는 다른 역할을 원했었다

좀더 부드럽고, 원만하고, 잘나고, 우아하고, 기품있고, 지성도 있고, 매력도 있고, 실력도 있고 , 카리스마도 있는 —-

세상에는 너무나 멋지고 훌륭한 여인들이 많았다.

언젠가 하늘로 부터 온 역할이란 바꿀수 없고 피할수 없으며 바꾼다고 해서 더 멋져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활에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연 여배우가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연기파 조역 배우의 연기가 보여준 멋진 연기는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주연배우를 부러워 하지 않는 최고의 조연 배우가 되기로 결심 했다.

어느 누구도 대신 할수 없는 유니크한 나의 역할에 충실하자.

나는 여배우로써 

내 삶의 주인공으로써

오스카 상을 수상 하듯이 최고의 여배우가 되리라 결심 했다. 내 나이 50되던 때였다.

이때부터 나는 진실로 삶을 즐기기 시작 했다.

내 드라마가 이렇게 리얼한데 , 내 드라마가 이렇게 흥미진진한데 드라마를 왜 봐 ?

티브이와 책과 잡지와 신문을 치우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내 인생의 다음 장면이 어떻게 펼쳐 질지 너무나 궁금하고 흥미로와서 무수한 픽션들은 재미가 없었다

떠도는 얘깃거리들은 내 관심에서 사라졌다.

나는 누구인가 ? 

왜 여기 있나 ?

나는 이 떼제에 충실하려 했다. 

( 테제[these] :하나의 계기'를 뜻하는 헤겔 철학의 용어로, 정립이라고도 함)

시집도 보내지 말고 수녀원에도 보내지 말라던 이왕성신부님의 선견지명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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