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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이 세계 자체가 마야 였다


1988년 3월. 아침 열시경,

부산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오뎅가게로 가서 긴 대나무 꼬치에 꿰어진 오뎅을 두어개 먹은 뒤 뜨거운 오뎅 국물을 홀~ 홀~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가 두번째 비어진 오뎅 꼬챙이를 내려 놓았을때 

그가 먹은 오뎅값을 치루고 경주가는 버스표 두 장을 샀다.

그때 우리 나이는 서른여덟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푸슬푸슬 메말라간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키니 젊디 젊은 나이였다. 

그 당시에는 불혹이라는 40을 코 앞에 두고 늙음의 길목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에 쫓기고 있었다.

경주로 가는 버스안 창쪽에 앉은 나는 

"이담에 죽어서 하늘나라로 갔을때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그분께 보여드릴 내 삶의 부스러기들을 담은 작은 소쿠리가 필요해요." 중얼 거렸고. 

"살아가는 것이란 트라이앵글 이에요. 트라이앵글이 계속 겹쳐지면 결국엔 동그라미가 되죠" 

그는 작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열심히 말을 건넸다.

서로 맥락이 닿지 않은 자기만의 언어로 서로 다른 내용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해되거나 이해 받는 느낌이 들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덜컹거리면서 철로 건널목을 넘어 서라벌요에 닿았다.

우향 김두선선생은 아낌없이 초벌 구운 도자기들을 내어 놓았다.

‘ 낙동강에 흐르는 대웅전의 북소리를 들어 주소서’ ‘부산요리학원 문요셉피나 ‘

그는 커다란 분청 항아리에 그렇게 내 글자체를 흉내내어 글을 새겨서 시뻘건 불길이 날름거리는 장작가마에 넣었다.

에밀레종을 만들던 아사달을 기다리다가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를 보고 걸어 들어가 죽었다는 아사녀의 전설이 깃든 서라벌 요 앞의 연못가에 서서 그를 사랑했던 여인이 연못으로 걸어 들어간 이야기도 들었다.

5월에 온천장 식물원에서 결혼예물로 들고 온 것은 그날 서라벌요의 불길에 구워졌던 분청자기 였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흐른 오늘 아침 ,

내가 늘 앉는 거실의 녹색 벨벳의자에 등을 기대고 하염없이 흐르는 상념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푸석푸석하게 늙으며 메말라간다는 느낌은 사라진지 오래다. 

내 몸은 더 생기가 넘치고 힘이 자랐다

그와 결혼후 살아온 이야기는 숨가쁘다.

나를 알거나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반대한 결혼이었다.

나만 몰랐던 사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 그 남자는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머물지 못하는 바람 같고, 흐르는 물 같으며 , 불행을 불러오는 낭인이었으므로.

나는 억세게 불어 오는 댓바람을 결연하게 마주하며 결혼을 강행했다.

"차라리 강이 되어라. 강과 하나가 되어라"

내가 살아 남을수 있는 길은 그를 강으로 내 모는 길 밖에 없었다.

그를 강신령에 싸 보낸 뭍의 삶터에서 굳건히 서서 가족들을 보살피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왜 그토록 한사코 그를 강으로 내 몰았던 혼잣만의 그 삶을 부여안고 황토먼지 폴폴 피어오르는 흙길을 걸었을까?

그렇게 30여년을 지나는 동안 그의 부모님과 나의 엄마 오빠 동생의 장례를 치루어 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의 엄마가 세상을 하직하고 땅에 묻힐때

나는 비로소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꼈다.

이제는 아이 하나.

그 아이도 바야흐로 독립을 앞두고 있다.

기나긴 여정이었다.

나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삶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92세에 이승을 하직한 엄마는 80세 후반부터 살아감이 지루하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이셨다.

저승보다 이승 이라고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인지는 알수 없다.

저승으로의 강을 건넜던 기억은 사라져서 남아있지 않고 

그토록 드라마틱 했던 이승의 기억은 또렷하기 때문에 이승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다.

너덜너덜한 이승의 기억조차도 한사코 움켜 쥐고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은 저승으로 가는 미지의 두려움 때문이다.

아쉽게도 인생이 짧다고들 말 하지만 나에게 나의 인생은 결코 짧지 않았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 하였다.

온갖 이야기들이 지글거리는 세상의 허무를 뼈속 깊이 알아 버렸다.

세상에서 탐닉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기게 된 허무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한 인간이 오는 것은 그의 존재 전부가 오는 것이다 ‘ 어느 시인의 말이다.

한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대하드라마 이다.

나는 내가 중심이 되었던 대하드라마에 한동안 열중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사그라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시는 이승에 돌아오지 않는 것 이었다.

해탈을 하든 해탈을 하지 않든 

누구나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 영원한 이승 이라는 것을 지각한 뒤로는 허무조차도 포기 해야만 했다.

진공과 충만은 같은 것 이었다.

이승과 저승이 나뉘어 질수 없듯이 쪼개거나 분리 됨이 없는 홀로그램 우주 안에서 

피어 흐트러지는 한송이 꽃이거나 명멸하는 한줄기 빛인 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율도 널부러짐도 환영 이었다.

이 세계 자체가 마야 였다.

그러나 흥미진진 했다. 즐거운 인생 이었다.


PS : 1988년 5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난후, 1990년 10월5일 아침에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아이 아빠는 레코드가게에 가서 드볼작의 아메리카. 신세계 교향곡 씨디와 빨강색 장미 한송이를 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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