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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나는 자유로와졌다


도시를 탈출할 때

나에게 가장 절박했던 것은
밭 이었다
땅 이었다.
흙 이었다.


나에게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하늘과 산이 보이는 곳과
내가 먹을 채소를 손수 가꿀 땅이 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그 곳으로 가기 위하여
나는 가벼워져야만 하는 것을 깨달았다.

거미줄 처럼 얽혀 있는 규범의 관계를 이탈하지 않고는 얻을수 없는 세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가 타일렀던 그 자유에 목말랐을 때 였다.

진리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알고 싶지 않아도
자유 만은 얻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자유는
이슬만을 먹고도 살수 있는 자유. 

새처럼 하늘 높이
가벼이 날아갈 수 있는 자유였다.

나는 그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벼워지지 않고서
날아 오를수는 없을테니까.


제일 먼저 책들을 치웠다.

나에게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었고 자유를 가르쳐준 책 속의 글자들이 

내가 행동하도록 힘을 주지는 못했던 간극의 갈등을 벌해야 했다.

책속의 글자들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나의 뇌를 어지럽혔다.

니코스카잔차키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처럼. 성프란시스코처럼. 

새떼들이 머리를 쪼아대서 달아날수 밖에 없었던 그 절박함이, 

그 까마귀 떼들이 나에게도 달려드는 것 같은 상상이 극에 달했다.

나의 그 비정상의 상태가 어릴때부터 읽어온 그 수많은 책들의 활자 때문일거라고 여긴 나는 

책들을 가져다 버리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다.

책을 치우니 공간에 여백이 생겨 났고, 먼지가 덜 보였으므로 숨 쉬기가 좀 쉬워졌다.

청소해야 한다는 쫓기는 마음으로부터 게을러질수 있는 공식적인 공간이 좀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게으름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게으를 수 있는 자유였다.

두번째로 버린 것은 옷장에 쌓인 옷들이었다.

사람들을 불러 옷을 나누어 주면서 나는 남 모를 죄책감에 휩싸였다. 

나에게 필요 없어진 쓰레기를 가져가는 그들도 언젠가는 내다 버리게 될 그것들을 

가져가게 만드는 행위의 부끄러움 같은 것이 숨겨져 있었으나
달리 더 좋은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세번째로 내가 아끼고 탐했던 수 많은 도자기 그릇들과
반짝이는 크리스탈 그릇들, 멋진 문양이 새겨진 주석잔들 
인간문화재 이봉주선생이 뜨거운 불에 달구어서 두드려 만든 옥바리 방짜 유기 그릇들,
틈만 나면 사 모았던 골동 다식판 떡살들. 

개다리 소반과 소쿠리들. 담양 김규식선생이 조각한 섬세한 떡살과 다식판들.

이 물건들이 나를 저당 잡히고 자유를 방해 했다고 여겼기에
나는 서슴없이 애착과 함께 그 물건들 버리고 탈출을 감행했다.

남은 것은 이제 아홉살이 된 내 딸과
내가 갈아 입을 옷 두어벌과 밥 숟가락과 그릇. 덮고 잘 수 있는 이불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가벼워진 짐보따리를 끌고 처음 당도한 곳이 부산 북부 끝자락 두구동 이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란 꽃과 식물들을 파는 원예가게들이 즐비한 가난한 마을이었다.

이곳에 비어 있는 허름한 공장 판넬 사무실을 얻어 마당 한가운데를 파서 느티나무를 심고 블럭을 쌓았다. 

리어카에 흙을 실어다 블럭을 쌓아 만든 밭에 쏟아 부었다.

이제서야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밭뙈기를 손안에 넣게 되었다.

아이는 문이 덜컹거리는 푸세식 변소와 날아다니는 말벌과 사마귀가 무섭다고 하루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안나가 교통사고로 죽은지 두어달 지났을 때였다.

안나의 죽음으로 나에게 던져준 서사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느 날 좁은 골목길에서 씽씽 달리는 자전거에 부딪쳐서 뒤로 나둥그라진 나에게도 저승사자가 찿아 왔다. 

자전거의 동그란 바퀴가 나의 미간으로 달려드는 것을 본 것은 찰라의 순간이었고 

바닥에서 내 몸이 뻣뻣해져 가는 것을 느끼는 것도 섬광같은 찰라였다.

내가 이사한 공장의 철대문 안쪽에서 나를 대문 밖으로 밀어내려는 두 여인과 내 팔을 붙잡은 한 여인이 있었다. 

세 여인 모두 몸집이 자그마했고 말랑말랑하고 차갑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밀치면서 '왜 이러세요 ?'했다.

그때 구급차가 왔고 뻣뻣해진 내 몸이 차에 실려졌다.

'죽었나베''머리가 터진거 보니까 죽진 않겠네' 

사람들의 웅성 거리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고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느낀 나는 

비로소 안나가 이렇게 죽어 갔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순간 죽음의 공포가 번개불처럼 지나갔고 나는 이내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했다.

나는 평온함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때 남편의 얼굴이 보였고, 내 발가락을 만지작 거리고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울고 소리치면 엄마가 죽을것 같아서 울지도 소리치지도 못하고 엄마의 몸 한 끝부분에만 손을 대고 있었다. 

불과 백여일 전에 엄마 다음으로 믿고 사랑했던 이모가 땅에 묻히는 것을 목격했던 아이였다.

이때부터 아이는 엄마를 잃지 않기 위해서 울면 안된다는 것을 익혔을지 모른다. 

세상에 남겨진 것은 엄마 뿐이고 엄마가 죽으면 살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온몸으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일년이 지난 뒤에 우리는 임기리에 매추리공장 하던 공터로 다시 이사하였다. 

무너진 창고에 벽을 바르고 문을 달아 방 두개를 만들고 방안에 샤워 꼭지를 달았다. 

여전히 마당 저쪽 구석에 냄새나는 푸세식 변소가 있었다. 

아기때에도 유난히 냄새와 소리에 민감하던 아이에게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단 한번의 투정없이 자라났다.

훗날에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때. 

이 모든 일들이 힘겹게 치유해야할 트라우마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생존이 더 절박했었다.

살아 남음. 그 이상의 理想은 허구이고 사치였다.

나는 시멘트가 아닌 땅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메추리공장의 쓰레기가 산떼미고 땅은 자갈밭이었지만 곡괭이를 사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솔이어메 그래갖고 안된다. 이제 늦었다 '

한달이 넘도록 곡갱이질을 해 대는 내 등에 대고 동네 어르신들이 소리 질렀다.

'내 마음의 자갈밭을 간다네 

내 마음의 자갈돌들을 다 들어내고 

땅이 부드러워져야 비로소 씨앗을 뿌릴수 있다네. 

내 영혼이 자라 나도록 '

곡갱이를 땅에 내려 꽂을때마다 나는 밀라레빠의 십만송을 외웠고 

밤이 되면 광목을 펼쳐놓고 붓으로 십만송을 쓰고 또 썼다.

싸앗을 뿌려 싹이 날지 안날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돌멩이와 쓰레기를 파 내어 부드러운 흙의 속살이 드러나야 했다.

끝 없이 올라오는 돌멩이와 쓰레기를 푸대에 담아서 리어카에 실어 마당끝에 쌓아 두었다.

드디어 열평 남짓한 밭이 만들어졌고 때 늦은 씨앗을 뿌렸다.

수확을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숨 쉬듯이 매일 하여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결과는 하늘이 주는 것.

부드러운 흙에 떨어진 씨앗에 매일 물을 주면서
물줄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뿜어내는 무지개빛을 보면서 행복했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 숨 죽이고 있다가 기절을 했고 드디어 몸이 해체 되기 시작했다. 

씨앗의 입장에서는 숨막혀 죽는 생매장 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씨앗이 죽음을 받아 들이자 몸에서는 열이 나고 물이 흘러나와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에 말라 갔다. 

그렇게 형체가 사라지고 뭔가 뾰족한 힘이 생겨서 무거운 작은 돌과 흙을 비집고 나왔다.

아 아. 드디어 생명이 되었다.

하나의 씨앗이 사라지자 흙과 물과 공기 그리고 햇볕이 힘을 모아 새 생명을 창조 하였다.

연두빛 새싹은 나에게 살아야만 하는 희망과 당위성을 보여 주었다.

나도 그 죽어간 씨앗들처럼 살아가게 되었다.

내 밭에는 스무가지 이상의 채소들이 자라 났고
그것들을 먹은 내 몸은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흙이며 바람이고 물이며 햇빛인 나의 육신에게 감사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나는 바람과 흙과 물과 햇빛.

그 모든 것의 일부이자 전체였다.

그 어느것도 나를 그것들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자유로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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