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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꿈 같은 인생

 

그녀를 처음 본 것은 1978,9년 즈음의 부산.

조방앞. 부산진시장. 동아사약국 맞은 편 대명빌딩 2층 다방이었던 걸로 기억 된다. 대명빌딩 4층에는 생계형 요리학원이 있었다.

학원 안에 조그만 방 2개를 만들어서 딸 셋과 우리엄마, 그리고 엄마의 손녀딸과 외아들 부부가 살면서 요리학원으로 먹고 살던 시절이었다.
학원에 수강생들은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가난에 쩔은 남자 아이들로 외항선을 타고 돈 벌러 바다로 나가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요리학원으로 왔다.


요리를 배우려는 것보다 요리사면허증을 손에 쥐려는 것이 목적이었고 요리사면허증이 있으면 브로커를 통해 선원증을 발급 받을수 있었다.
선원증을 가지면 외항선을 탈수 있었고, 일단 외항선을 타면 배에서 하는 어떤 노동이라도 하면 되었다. 그들은 요리사면허증을 가지고 배를 타고 나가서 온갖 거칠고 궂은 노동으로 망망대해를 떠 돌아 다니며 달러를 벌어서 고국의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렸다.

어떤 이는 일, 이년에 한번씩 고국으로 와서 잠시동안 이나마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다시 바다로 나갔고 , 어떤 이는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마음에 드는 낯선 항구에 내려 밀입국을 시도 했고 그렇게 떠 돌다가 운 좋게 미국 땅에 정착 하는 이들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생각보다 거칠고 고생스러운 뱃 생활을 견디지 못해 중간에 아무 항구에서나 내려서 돈 한푼 손에 쥐지 못한채 다시 돌아 오기도 했다.

조방앞 부산진시장 철길 근처 부산요리학원 옆에는 새벽이면 출근길을 잇는 수천명의 여공들이 일하는 삼화고무 공장이 있었다. 수출하는 신발을 만드는 공장 이었다. 1960년대 70년대는 이들 근로 청소년들의 피와 땀으로 산업건설의 탑이 세워졌다.


젬마를 데려 온 것은 나보다 여섯살 위인 내 외사촌 언니 소피아 였다. 언니의 카톨릭 신학원 동창생 젬마.

그녀는 마산 출신으로 위장 노동자로 신발공장에 들어 갔다. 그녀의 애인은 서울 공대 출신으로 부산에서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했고 부산양서조합 멤버 였다.

그들이 결혼해서 첫딸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때 어느 날 밤, 남편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부산 송도바닷가 음침한 뒷길 혈청소로 끌려가서 고문 당하는 신랑을 찿아 낸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였다.

두손과 두발을 묶어서 막대기에 끼워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이른바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해서 온 몸에 피멍이 들고 발톱이 빠져나간 신혼의 남편을 찿아낸 젬마.

나는 그때 젬마로부터 그에 관한 고문 이야기를 들으며 몸서리 쳤다. 나로 하여금 군부독재로부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어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한 첫번째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부림사건'이다.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하기 위해 구치소 앞에서 길위에서 투쟁을 하는 젬마의 등에는 언제나 갓난아기 첫딸이 등에 업혀 있었고 젬마의 손에는 탄원을 위한 서명지가 들려 있었다.

세월이 지나 둘째아기가 태어났고 그 아기가 두 세살 쯤 되었을때. 늘 감시를 당하던 그녀에게 수배령이 내렸고, 수정동 부산진 경찰서 바로 곁으로 옮겨서 요리학원을 하던 우리집에 숨어서 한달여를 함께 지냈다.

여전히 학원 한 모퉁에 방을 넣어서 기거 하였으나 상당히 넓은 공간 이었고, 학원도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북적 대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보과 형사들이 이곳에서 젬마를 찿아내진 못했다.

아마 1985, 6년경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때는 엄마와 오빠 가족은 울산으로 이주 하였고 내 나이 서른 대 여섯 경 한참 잘 나갈 때였다.

수업을 끝 낸 밤에 젬마와 나는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가족 이야기 친구들과 놀던 이야기. 운동권 내부 이야기 , 연애이야기로 매일 새벽까지 잠 들지 못 할때가 많았다.

그녀는 용맹하고 엄격한 투사 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달콤한 로맨티스트 이기도 했다. 그녀는 간들어진 감정을 쏟아 백치 아다다를 즐겨 불렀고 패티김의 구월이 오면도 즐겨 불렀다. 음치인 나에게 노래 강습도 했는데 그때 가르쳐 준 노래가 '잊으리' 였다. 매일 밤 잊으리를 지도 해 주면서 감정을 넣어야 할 곳을 지적해 주곤 했는데 음치에다 박자치까지 겸한 나로서는 난공불락 이었다.

또한 매일밤 사상교육도 이루어 졌는데 그녀가 유일하게 살패한 일이 있다면 나를 운동가로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젊은 청년기를 함께 무수한 날밤을 새우던 친구 젬마나 나나 이제는 늙은이가 되어서 옛날 이야기로 밤을 새울 때가 있다.

1990년대 중반 통도사 서운암 성파스님께 천연염색을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쪽 밭을 만들어 쪽을 심고 키워 발효시킨 염료를 직접 만들어서 옷감을 물들였다. 

불칼 같은 성격의 그녀로서 무언가 작업을 할때 처음부터 끝까지 한치의 빈틈 없이 명확하지 않음을 허용 할수 없는 그녀의 성품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녀의 큰 딸은 섬유예술가로, 작은 딸은 글쓰는 작가이자 에디터로 성장하여 40대를 바라보고 있고 뒤늦게 결혼하여 늦둥이로 태어난 내 딸도 서른을 넘기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구비구비 휘몰아치는 세파를 헤쳐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아직까지도 ‘친구’ 로 남아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우리가 지금 아이들 나이 즈음으로 젊었을때 그녀가 말했다.

“이 봐라 문원장, 요세피나. 우리 이담에 누구라도 먼저 죽으면 양지 바른 무덤가에 와서 소주 한 잔 부어 놓고 옛날 이야기 하며 오늘을 기억 하자” 라곤 했다.

그녀는 산청에서, 나는 서울에서. 아주 아주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몇 년에 한번쯤 내가 산청으로 가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주제의 이야기들로 밤을 새워 이야기 꽃을 피우는 것.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 친구들과 살았던 고향 이야기로 부터 질풍노도의 청년시절 추억과 회상들 절대 빠지지 않는 연애 이야기며 아이들 자라고 키우던 이야기.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

지구를 떠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지구를 떠나 멀리 멀리로 날아 오른다는 것은 또 얼마나 멋진 일일까 ? 가슴이 설레이기도 한다.

그동안 울고 웃었던 지구에서의 드라마를 생각하면 일장춘몽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일장춘몽이 아니라 눈 깜작 할 정도의 찰라 순간에 지나간 이미지에 불과 한 것 이라는 생각도 든다.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던 무수한 순간들. 그 찰라의 틈새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픔과 좌절. 절망. 설움과 고통과 번민. 후회. 참회. 성찰의 사건과 시간들이 지나갔고, 희열과 기쁨. 행복. 사랑. 희망. 기대. 자신감으로 차 오를 때도 있었으나, 그 어느 것에도 사실은 실체가 없었다.

꿈과 같은 시간들 이었으며, 살아 있는 동안 여전히 꿈을 꿀 것이다. 꿈 이편에서 보면 저 편이 꿈 일 것이고, 꿈 저편에서 보면 이 편이 꿈일테니, 산다는 것 자체가 거대하고 몽롱한 꿈의 세계를 헤메는 것. 꿈에서 깨어나 지구를 박차고 떠나는 그 날이 진정한 실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삶과 죽음의 사이에 놓인 '인생'이라는 화두는 뜨거운 감자 같고, 온 세상은 스펙터클하고 장엄한 서사시를 쏟아낸다.

때로는 엄청나게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위에서 표류하는 난민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어쨌던 나는 바다를 건너 피안에 도달 할 것이니까 살아볼만 했다고 결론 지으련다. 

- 문성희 선생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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