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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인생이란 그러한 것


시어머니의 병명은 급성 뇌출혈 이었다. 

뇌하수체 근처 오른쪽 핏줄이 터진 씨티사진을 보여주는 의사의 설명은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며 산다고 해도 정상적인 활동은 어렵다고 했다. 

양한방병원의 허름한 중환자실에 방치되다 시피 누워 계신 어머니 곁에 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식을 잃은 어머니가 갑자기 어눌하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아버지를 찿으셨다. 

“너거 아버지 어디 갔노 ? 저기 버스 오는데 아버지 태워가야 하는데. 너거 아버지 어데 갔노? “ 

어머니는 안타까워 하셨다. 

나는 저승사자가 어머니에게로 오고 있음을 감지 했다 
아버지를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불쌍한 어머니, 평생 모진 고생을 하다가 이제 돌아가시면 어떻게 극락을 찿아 가겠습니까 ? 극락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가련한 영혼을 살려 주세요. 살아 생전에 극락을 알고 느껴서 마침내 극락을 찿아 갈수 있도록 세상의 삶을 좀더 허용해 주소서 ‘ 
손을 마주잡고 어머니 침대에 기대어 올리는 나의 기도는 절절 했다. 

어머니가 살아만 나신다면 아버지와 함께 모시고 제주도와 일본으로 여행 시켜 드리리라 다짐 하였다. 살아서 행복을 맛보고 극락을 찿아갈수 있도록 해 드리고 싶었다. ( 이때의 다짐은 끝내 이루지 못 했다 )

시어머니는 나의 친정 어머니를 늘 부러워 하셨다. 
나는 이상하게도 시어머니에게 연민이 있었다. 

다음 날 시어머니는 일반병실로 옮겨 졌다. 
일종의 요양병원 같은 곳으로 가난한 환자들이 거의 포기 상태로 찿는 종합병원이 아닌 조그마한 양한방 병원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어머니의 복수가 차 올랐다. 
의료진들은 무표정하게 링거 주사만 꽂아 주었다. 

‘관장 좀 시켜주면 안 될까요 ? ‘ 나는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애태워 말했다. 

조금 지나서 의사와 함께 온 간호사가 튜브로 관장을 하고 나서 어머니는 똥을 한무더기 쌌다. 

그리고나서 조금씩 의식이 돌아 왔으나 몸을 움직이지 못했고 의식도 어눌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남편과 시동생 내외 , 부모가 버리고 간뒤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난 장손 장호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사람이 교대로 어머니 병상을 지킬수 있도록 조 편성을 하였다. 

나도 요리학원 일을 해야 했고 그당시에는 요즘같은 직업 간병인이 없던 시절 이었으니까. 

평생 낙동강으로만 떠 도는 남편을 붙잡고 단단이 타 일렀다. 
평생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 , 부모님에게 낳고 길러주신 은혜를 갚을 기회이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번 날의 의무를 지키라고 강요 했다. 

그때는 그도 그 약속을 지켜 내었다. 

그마저도 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와 헤어 졌으리라. 

나는 죽을 쑤어서 어머니 입에 넣어 드리고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아와서 발가락사이의 때를 벗겨내고 씻어 드렸다. 더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한 내가 스스로도 낯 설었다. 

‘행예 , 행님은 괞찬아예. ? 나는 절대로 그렇게 몬하겠는데 행은 우째 그리 하세예? ‘ 하나 밖에 없는 착한 동서 였다. 
아들이 다섯이지만 세명이 소식이 끊겼고 둘째이자 맞이가 된 나는 동서가 시집올때, 언젠가 가버릴까봐 겁나서 내 딴에는 잘해 주려고 무척 애썼다. 
동서는 따뜻하고 착했다. 
(나로부터 물려받은 제사를 지켜 온지 십여년이 되었다)

어느날 이었다. 
‘제삿날이 언제고?’ 
‘왜요 어머니?’ 
‘제삿날에 할배 할매가 날 댈로 온다 했다 ‘ 

나는저승사자가 다시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어머니는 아직 의식이 온전하지 못할때 였다. 

동서에게 제삿날을 물어서 그날은 저승사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문을 지킬 참 이었다. 

제삿날 낮에 내가 어머니를 씻기고 앉혀서 죽을 입에 넣어 드릴때 였다 
드디어 저승사자가 나타 났나 보았다. 

‘야야. 할배 왔다. !!! 저기 저 바가지에 물 퍼온나 !!!’ 
‘예. 어머니 여기요 ‘ 
‘작은 아아는 어딨노? 니는 안된다. 작은 아아 오라 해라 ‘ 
어머니는 이 와중에 동서를 찿으셨다. 

연극처럼 진지한 대사가 오가는 동안 저승사자가 물러 갔는지 잠잠해 지고 어머니는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한달후 
휠체어로 산보가 가능하게 되었을때 어머니는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동래 서동에서 농사를 짓던 시댁에 들이닥친 산업화 재개발 현상으로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게 된 부모님들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버지는알콜에 의존해서 하루하루를 지탱했고 
어머니는 공장에 다니면서 첫째가 버리고 간 손녀와 손자를 키웠다 

집으로 퇴원한 날부터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극하게 돌보기 시작 했다. 
장이 서면 동래장에 가서 뇌경색에 좋다는 약초들을 사다가 정성들여 고아 어머니가 먹도록 했다. 
어머니는 예전 같지는 못해도 집안 살림을 꾸릴 만큼 건강이 회복 되었다. 

바느질 솜씨 음식 솜씨. 나물 캐는 솜씨가 뒤 따를자 없이 빼어난 두분 이었다. 

어느 날 추석에 시아버지는 자리에 누우신채로 ‘야야, 내가 이상하다 소화가 안된다. 벌써 두어달 되었다 ‘ 하셨다.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서동 시민병원에서의 검사결과는 말기 췌장암 플러스 위암 이라는 진단 이었다. 씨티 사진상의 암덩어리는 달걀만한게 두개 있었다.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아버지 연세가 있어서 수술 예후도 안 좋을 뿐더러 수술 하다가 돌아가실수도 있으니 집에서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생각 했다. 

6개월 시한부 여생. 내가 모셔야겠구나. 6개월이면 끝 날일이니 못 할 것도 없지. 

그렇게 두분을 모셔 왔다. 
그때는 이미 요리학원도 그만두고 산생활을 시작 할때 였다. 
단칸 방 이었다 
아들은 콧배기도 보기 어려운 나날들이 이어져 갔으니 두분 마음이 편치 않았을 수도 있었겠으나 평온한 나날 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해 드린 것이 없었다. 

멸치 한마리 들어가지 않은 된장찌개에 밥과 나물 두어가지 그것이 다였다 

아버지는 아침을 잡숫고 나면 두구동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 노포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대신동 종점으로 갔다가 왔다가 하며 시간을 보낸 뒤 저녁 무렵이 되면 집에 와서 조촐한 저녁을 드셨다. 
간혹 앙꼬빵이 담긴 검정색 비닐 봉지가 손에 들려 있을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부등켜 안고 있던 제삿상을 어쩔수 없이 나에게로 이전 시켰다. 몹시도 서운 했으리라. 

그러부터 7년후 어머니의 뇌경색이 다시 재발 되었고 119를 불러 응급실을 찿아 전전하는 동안 그는 여전히 낙동강에 있었다. 

엄마 아버지에게 당신은 하느님이네. 당신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들으시는군.  
그가 말했다. 

회복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대학병원에서 우리집 가까운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날 

곁에 아무도 없을때 나는 어머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는 가세요. 어머니. 남은 식구들에게 애착을 갖지 마세요. 어머니 생에 아무 도움도 안 된 자식들에게 연연해 하지 마세요. 

식물인간처럼 누워 계신 어머니가 이 말을 알아 들으셨을까 

팔십이 넘은 요양병원 원장님이 나를 불러서 이렇게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하고도 이렇게 깨끗한 환자는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아무리 의식이 오락가락해도 먹는 욕구만은 죽을때까지 놓지 않는게 사람 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김금순 할머니는 도인 인 것 같다고도 했다. 

나는 늘 어머니에게 극락을 잘 찿아갈수 있도록 극락을 그리고 마음을 평안하게 하시라고 말해 드렸었다. 

그 어머니가 6개월동안 입을 벌리지 않고 음식을 거부 하셨다. 

나는 이제서야 어머니를 보내 드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 했다. 

다만 주무시듯이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 하셨으면 했다. 

그는 그렇게 누워 계신 어머니를 차마 마주 볼수없어서 병원 로비에 서서 6충 어머니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만 노려 보다가 발길을 돌리곤 했다. 

어느날 명상을 끝낸 새벽 4시경 창가에서 서성일때 불현듯이 어머니 생각이 떠 올랐다. 

그때 마침 간호사로 부터 전화가 왔고 어머니가 잠들듯이 편안하게 운명 하셨다고 했다. 

그러부터 1년후 아버지는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돈 팔백만원을 큰 아들이 되어버린 둘째 아들에게 주고 몇 안되는 소지품을 정갈하게 정리하고 당신과 평생을 함께 한 아내와 함께 묻힐 땅 참전용사묘지 마련해서 뒤따라 가셨다. 
둘째 아들에게 주신 돈 팔백만원은 그 분의 전 재산 이었다. 

나애게는 팔천만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 돈 이었다. 

마지막 며칠전에 아들과 아버지가 화해하는 밥상을 마주하여 함께 밥을 먹은지 며칠 후 였다. 

어쩌면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단 둘이서 식당의 맛있는 밥을 사드린 것은 처음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물었다. 

왜 당신이 시부모님을 모시세요 ? 

왜냐면요 제가 형편이 제일 낫기 때문 이죠. 

나는 때때로 생각 했다. 

내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라 
생면부지의 남일지라도 내 곁에 내 돌봄이 필요한 노약자가 있다면 모른체 할수 있을까 ? 

그랬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다. 

옛날에 결핵환자들 밥을 하던 식모 살이때 
대구 송현동 대구결핵요양원 안 조그만 성당에서 목청 높히던 고 김동환신부님의 강론은 내 인생의 좌표가 되었다. 

‘예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당신들이여 
가까이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실되게 사랑해 보십시오. 그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될 것 입니다 “

브라마쿠마리스 명상 학교에서는 “너 자신에게 먼저 봉사 하라” 고 가르 친다.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 ‘ 

이제 나와 내 남편의 부모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갈 날이 다복다복 가까워 진다. 

인생 이란 그러한 것. 

많은 일들이 일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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