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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단순하고 소박한 삶

20여 년 전만 해도 미니멀리즘 같은 용어는 있지도 않았던 시절.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겹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로부터 약간의 도움이라도 얻기는 커녕 꽤 많은 부채를 물려받아 시작한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맨주먹으로 시작해도 자리잡기 어려운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리라. 기초자본금 없이 살아가는 자영업이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일일 일용직과 다를 바가 없다. 

벌어서 임대료 내고 코딱지 같은 홍보비 내고 한두 명 직원 월급 주고 세금 내고 나면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떼어 먹는 게 세금일테고. 임대료 밀리면 시설비는 하나도 못 건지고 다른 곳으로 밀려 나가야 한다. 

서른 살에 엄마로부터 떠밀려서 운영해야 했던 요리학원은 씨앗 빚을 감당하지 못한채 이자만 겨우 주다가 사회적으로 거센 변화가 몰려오면서 서너 달 적자가 이어지고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와 원금에 허덕이느라 일생을 탕진하였다.  

오십살이 되자 이러한 허깨비 같은 삶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첫 번째. 벌려고 애쓰기보다 소비를 줄여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IMF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보편적인 삶을 망가뜨릴 때였다. 그 당시에는 요리학원에 물밀 듯이 밀려드는 실직자들을 적당히 수용하기만 해도 운영비 이상의 수강료를 노동부에서 지급했다. 

일단 머릿수를 많이 채우면 돈을 벌 수 있었으나 수업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이고 실업자는 학원에 왔다 갔다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교통비와 하루 생활비(?)를 지급받을 수 있고, 학원은 부실한 기록만으로도 정부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고 공무원들은 통계 내기 바빴다. 

전국의 요리학원들은 빚을 내어서라도 학원시설을 확충했다. 시설이 크면 그만큼 더 많은 정부 지원 수강생들을 받을 수 있었고 돈을 벌 것 같았다. 

그때 나는 학원 문을 닫았다. 더는 그런 허황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매일 매일 너무 바쁘고 너무 피곤하고 마음이 들떠서 이리저리 방황하느라 찌들대로 찌든 나에게 모든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상으로 눈을 떠라 했을 때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책장 구석구석 쌓여있는 먼지들이었다. 

마음이 가라앉고 건강한 삶에 눈을 뜨자 곳곳에 쌓인 먼지가 가장 먼저 보였고 나는 청소와 살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이 청소를 해도 하루 이틀이면 또 다시 먼지가 소복이 쌓였고 이제는 그전에 내가 쓰잘데 없이 피곤할때는 보이지도 않았던 구석까지 신경 쓰였다. 

내가 외부의 상황에 사로잡히지 않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참된 나 자신을 만나려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쓰잘데 없는 물건들과 잡다한 인간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책과 옷과 그릇과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삶에 여백이 생기면서 어느 순간인가 단순소박 하게도  살아갈 수 있고 오히려 더 풍요롭게 살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첫번째는 먹성의 단순소박함 이었다. 먹는 것에 너무 많은 흥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참 많은 시간과 사유를 세이브 할 수 있었다. 

먹성이 단순해지면 살림살이도 단순해지고 인간관계도 단순해지고 상대적으로 빈 시간과 공간과 자산을 확보하게 된다. 비용도 훨씬 적게 든다. 

나는 비로소 제대로 숨 쉬기 시작했고 가슴을 펴고 하늘을 찬양하게 되었다. 숲의 향기를 맡을 여유가 생겼다. 공기는 싱그러웠고 햇살은 눈부시고 따뜻했다. 

매일 모든 사물을 깨끗이 씻기고 정화시켜 주는 물에게 감사했다. 땅은 나의 생명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드디어 나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살아 갈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목숨과 내 존재는 비용으로 환산할수 없을 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그 어떤 것 이라는 사실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할머니가 되었고 뭐라고 궁시렁거려도 그닥 흠 잡히지 않을 나이가 되었으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나이까지 살아야 한다면 꿈과 희망을 좀 더 길게 멀리 잡아야 하리라. 뭔가 하나를 이루어 내는데 적어도 20년은 정성을 기울여야 하리라. 인생이란 그만한 값어치가 있으리라. 

비록 하루하루 일용직으로 생활을 연명한들 어떠리. 결국은 살아 내었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수 있다면. 공기와 바람 흙과 물 태양과 햇빛. 숲의 정령들을 찬양할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 이리라. 

남녘의 숲에는 벌써 봄처녀가 와서 수줍어하며 문을 두드린다. 나는 봄처녀의 향내를 킁킁 맡으면서 아침 햇살과 신선한 바람을 집안에 가득 들여 놓고 먼지를 털어내고 걸레질을 한다. 

어제와 오늘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계속해서 듣고 있다. ‘오! 겨울 나그네여. 이제 외투를 벗고 함께 봄을 맞이합시다‘


#청도 #수월리 #평화가깃든아삶공

- 문성희 선생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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