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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나'라는 존재

사위가 고요하고 물이 깊어지고 명징해 졌을때 손을 넣어 무심하게 한번 휘~젓기만 해도 가라 앉아 있었던 쓰레기들이 떠 올랐다. 
샘을 여러번 청소했으므로 둥둥 떠다니는 쓰레기는 없다고 여겼다. 물이 맑고 고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물이 조금 흔들렸을 뿐인데 가라앉아 있는지 몰랐던 자잘한 부스러기 같은 이물질들이 계속 떠 올랐다. 
그 이물질들은 지푸라기이거나 날카로운 금속 조각 일 때도 있고 미끌거리는 이끼가 낀 돌멩이 일 때도 있었다.  
내 인생은 어찌보면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고, 어찌보면 드라마도 그런 대하 드라마가 없다고 여겨질 만큼 온갖 크고 작은 사회적 개인적 사건들과 격변의 이랑에 휩쓸려 왔다. 
정신을 차리려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야 할 때도 있었다. 
만약에 내 삶의 터전이 안전했고 오랫동안 등 기대고 머물어 살 수 있는 고향 같은 것이 건재 했더라면.. 
만약에 한뼘 초원을 찿아 정처없이 떠돌아야 하는 유목의 인생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성장했겠지. 
그러나 머 지금의 ‘나’도 그런대로 괜찮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격랑의 변화무쌍하고도 위험하기 그지없었던 미지의 커튼을 걷어제끼지 못 했을 것이고 
늙어가는 지금 되돌아보는 나의 기억들은 자칫 맹숭맹숭 할 수도 있고, 지루한 시간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 이랄까 다행 이랄까. 내 인생 스토리라는 게 내가 다시 되감아 되감아 봐도 흥미가 진진하다. 
무료하다고 탓할새 없이 매일 매일 매 시간 웃고 박장치다가 한숨과 슬픔과 비애에 빠져 멈칫하다가도 그럴 만 하다고, 그럴 만 했다고 위로를 하기도 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노년의 고독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살아가고 있구나.  
살아오는 동안 후회될 만한 사건 사고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로 현실을 직면하고 결국 살아내었다는 사실 하나로 어느 정도 평점을 줄만 하다고 결론 지으려 한다. 
물론 나 만의 잣대를 가지고 제 멋대로 내리는 평가지만 머 어떠랴. 
그걸 가지고 우쭐대는 것도 아니고 좌절이나 열등감을 갖는 것보다는 훨 건강한 에너지일테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쫌 웃기는 말이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나는 내 인생 드라마가 무지 재밌다. 
내가 ‘위화’의 ‘인생’을 좋아하고 잊지 못하는 것은 상당 부분 내 인생과 푸구이 가족의 인생을 오버랩하고 동일시하곤 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객관화를 푸구이의 가족사에서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는 것은 길고 짧음과 관계없이 그냥 한순간에. 
어느 순간에 지구상에서 하나의 인간 생명으로 존재하면서 인간으로서의 희노애락 생로병사 애별리고를 겪는 그 과정을 각기 나름대로 겪어야만 한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장엄하고 존중받을 만 하며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을 탐구하고 싶어 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 
님 웨일즈의 아리랑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류의 책들을 한때 즐겨 읽었으며, 아우슈비츠 관련 영화나 소설, 다큐를 가능한한 샅샅이 찿아 보았던 이유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살아가는 동안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에게 삶의 과정이란 죽음이라는 대명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만이 주어진 무대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압도되었고 매 순간 죽기 위해서 살고 있음을 잊지 않았다. 
웰 다잉.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동안의 이 생생한 느낌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어떻게 달라지는가? 에 대한 물음이고 
살아있는 동안의 이 살아있음을 내가 어떻게 느끼고 의식하고 있는가? 에 대한 탐구였다. 
나는 이 살아있음의 의미를 알아내고 이해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 사는 동안 시간이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쏜살같이 흘렀다. 
때로는 찰라찰나의 영속성 안에서 무한의 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의식하는 존재로서의 나의 존엄에 소름 돋을 때도 있었고 
이 세상에서 보이고 만져지는 모든 사물의 유한함에 몸서리 칠 때도 있었고 
결국은 이 세상 만물이 한순간도 머뭄없이 변화의 유희 속에 있음을 알게되었다. 
이 모든 것이 홀로그램이며 신기루이고 환상이고 마야인것을, 삶도 죽음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계속해서 새로움과 미지로 미끌어져 들어가며 새로운 장면이 연출되는 것을 
마치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바라보고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면서 
나 자신을 기만하기를 밥 먹듯이 하고 숨 쉬듯이 하면서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그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인식하는 미묘한 아메바가 바로 ‘나’ 라는 것을.

- 문성희 선생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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