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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수월리 아삶공

가난한 수도승의 방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수도승 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것은 20대 때 부터였을거다.  

어쩌면 아버지의 기도 때문 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이 장녀를 까르멜 봉쇄 수도원에 보내려고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도 나무묵주가 나른해지도록 기도 하셨고 

나는 아버지의 기도를 깨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별을 거듭 하면서 

마흔이 넘어서야 딸 하나를 낳았고 이제 그 딸이 서른살을 훌쩍 넘겼으니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버렸다.  

내가 오십이 되어서 못내 못내 수도승이 되지 못 했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수도승의 옷이라도 입고 싶어서 바느질을 시작 했을수도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승들이 입는 발목까지 닿는 긴 통자루옷과 허리를 묶는 매듭이 필요해서 내 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수도승의 옷은 파는 곳이 없었으므로 —

그렇게 광목으로 옷을 지어 입은지가 어느새 23년이 지나고 

지금도 여전히 내가 바느질한 단순한 옷이 나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옷처럼 되었다.

책상 하나와 나무침대 그리고 가늘고 긴 옷장 하나. 스탠드 한개 있는 가난한 수도승의 방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이제 나는 그정도로 소박하진 않지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방을 갖게 되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는 내 방에서 책 읽고 글 쓰고 바느질하고 누워 쉴수 있는 다목적 방이다. 

나에게는 넉넉하고 만족스러운 방이다. 

오늘 일요일인데 모처럼 수업이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 삼아 청도 헐티재 너머 숲속마을 성모성당에 갔다가 신부님께 딱 걸렸다.  

성당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에 홀려서 아이들이 맛있게 먹고 함께 간 벗 경원쌤도 맛 있게 드시고 

나는 고기가 들어간 미역국과 맛있게 삭은 젓갈김장김치와 양파를 채썰어 무친 오이와 양파와 함께 정갈하게 졸인 감자와 잔 멸치볶음을 맛 있겠다고 들여다 보면서 먹지는 않았는데 

우리 모습을 보고 다가오신 새 신부님께 붙잡혀서 수월리 우리집에 오셔서 축성미사를 올려 주시겠다는 신부님의 유쾌한 선물을 넙죽 받아들이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나간 시간들이 시네마스코프처럼  지나갔다.  

부산 오륜대 명상의 집 

광안리 배네딕토 수녀원

장전동 예수성심수녀원

왜관 분도 수도원

대구 송현동 결핵요양원. 

20대 30대 내 생명의 주축을 이루던 샘터들을- 

50대 부터 내 신앙은 방향을 틀어 인도의 명상학교 학생으로 살아 오게 된다. 

요즘은 내 주변을 가톨릭 신자들이 에워싸고 엄청난 기도 화력을 쏟아 붓는 느낌이 든다. 

딸 솔이 결혼한 집안도 열심한 가톨릭 이다. 

내 아버지가 신부가 되지 못하고 내 어머니와 결혼 한후로 우리집안에 사촌 육촌 까지 신부가 3명. 글라라 봉쇄 수녀 1명 아우실리움 제속수녀 1명이 탄생 했다. 

결국 나의 영성은 가톨릭이 배경이고 수행은 불교쪽에 가깝고 명상요가는 인도의 전통 바그받드 기타에서 배웠다. 

나는 제속. 세속. 속가사람으로 평신도로 한 인간이자 한 여인으로의 일생을 살아 왔다. 

이제와서 불만족한 것은 없다. 

이런 것이 인생인가 보다 생각한다. 

비교적 내 스스로는 내 개인적으로는 괜찮다. 

재밌는 인생 이었다. 

결국은 하고 싶은대로 다 해 보았다.  

잘 했거나.

못 했거나. 

괜찮았다.  

은총의 삶 이었다. 

오월일일. 성모성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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