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연민 피로 -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


내가 아는 한 편집자는 연민심이 많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문제를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한번은 몇 사람과 산행을 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자신의 힘든 상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상에 갔다가 내려올 때까지 그 사람의 불행과 함께하느라 산을 감상할 수 없었다.

마치 티베트 불교의 통렌 수행을 실천하는 것 같다. 통렌은 '주고받는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대신 떠맡고 그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좋은 것, 건강과 행복을 준다고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수행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숨을 내쉬면서 그 사람에게 나의 건강한 기운을 내보낸다.

연민심과 공감은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고통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힘이다. 다만 그녀의 문제는 공감 능력이 남달라 타인의 고통에 쉽게 전염된다는 점이다. 분노, 배신감, 절망 등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의 영혼 안으로 밀려옴으로써 그녀 자신도 우울한 사람이 되어 갔다. 유머 감각이나 호기심을 잃었을 뿐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세상에 대한 실망감과 공허감에 시달렸다.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자신도 그것에 압도되어 정서적으로 고갈되는 것을 '연민 피로'라고 부른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도 그 고갈의 원인이다. 어떤 정신분석가는 이것을 번아웃 증후군, 즉 자신이 재가 되어 버리는 소진 증후군이라 명명했다. 말기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이나 매일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을 대하는 심리상담자처럼 고통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불행과 접촉하는 누구에게나 연민 피로가 일어날 수 있다.

그 편집자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심과 함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일이다. 상대방의 불행에 공감하되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평정심이다. 영혼의 소진 없이 돌보는 지혜는 연민과 평정심의 균형에 있다. 돌봄은 타인에 대한 돌봄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돌봄까지 포함한다. 나도 나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집 딸이 결혼해 멀리 떨어진 지역에 가서 살게 되었다. 시댁에서의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었다. 한번은 친정어머니가 다니러 왔다가 딸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았다. 딸과 대화를 해 보고 싶었지만 시댁 식구들이 들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에게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말하고 두 사람은 걸어서 근처 숲에 이르렀다.

숲에서 그들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 나무 아래서 어머니가 딸에게 말했다.
"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들을 다 말해 보거라. 나한테 말해서 너의 슬픔을 모두 내보내거라."

딸은 울면서 마음속에 가둬 두었던 이야기들을 전부 쏟아 내었다. 다 듣고 나서 어머니가 말했다.
"내 말을 잘 듣거라. 내가 매주 너를 만나러 올 순 없다. 그러니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이곳에 와서 이 나무에게 네가 겪은 힘든 일들을 이야기하거라. 이 나무가 나 대신 들어줄 거야."
딸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몇 달 뒤 다시 딸을 방문한 어머니는 딸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를 보고 기뻤다.
"너의 생활이 전보다 나아진 거니? 지금은 전처럼 힘들어 보이지 않는구나."
딸이 말했다.
"아녜요, 내 생활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얼굴이 훨씬 나아 보이는구나."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함께 숲으로 가자꾸나."

함께 걸으면서 딸이 말했다.
“엄마가 말한 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 숲에 가서 그 나무에게 모든 고민을 말했어요. 그랬더니 가슴속에 있던 고통의 짐이 훨씬 가벼워졌어요."

두 사람이 숲의 나무에 도착해서 보니 그 나무는 가지와 잎사귀가 거의 말라 있었다. 딸의 모든 고통을 흡수했기 때문에 나무의 정기가 다 소진된 것이다.

만약 그 나무에 앉은 새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면 어떠했을까? 바람에 춤추는 그 나무와 함께 춤을 추었다면? 그녀와 나무는 연민 피로가 아니라 연민 만족에 이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힘으로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art credit_Elicia Edijanto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