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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루미에게서 배우는 다섯 가지 지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터키의 코냐 지방에서 활동한 잘랄루딘 루미는 13세기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교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37세에 종교를 초월한 떠돌이 탁발승 샴스 우딘 타브리즈와 운명적으로 만나 불과 며칠 만에 내적 혁명을 경험했다. 이후, 학자의 생활을 버리고 시인으로 변신해 죽을 때까지 수많은 시를 통해 ‘세상에 나 아닌 것은 없다’는 자신의 영적 깨달음을 노래했다. 수피 춤의 창시자이며 세계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으로 꼽히는 루미의 시는 오늘날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다.


1. 너 자신의 신화를 펼쳐라

그런 이야기들에 만족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들에.
너 자신의 신화를 펼쳐라.
복잡하게 설명하려 하지 말고.
누구나 그 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너에게 모든 것이 열려 있으니.

걸음을 옮겨라.
두 다리가 점점 지쳐 무거워지면
너의 날개가 펼쳐져
너를 들어올리는 순간이 올 것이니.

열아홉 살 때 나는 랭보처럼 방랑의 시를 쓰고 싶었고, 일 년 후에는 카뮈처럼 반항적으로 살고 싶었으며, 또 일 년 후에는 헤밍웨이처럼 아프리카를 횡단하고 싶었다. 헤세나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사색의 정원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다. 바슐라르 같은 미학적인 글들을 반드시 써야 한다고 벽에 써 붙인 것도 그 무렵이다. 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라즈니쉬처럼 수염을 기르거나 크리슈나무르티처럼 단정한 모습의 영적 스승 둘 다 매혹적이었다. 서른 살에 이르러서는 까비르나 루미 같은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으며, 마흔 살에는 바쇼처럼 파초로 둘러싸인 은둔처에서 시만 쓰며 (실제로는 명상서적 번역에 전념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리고 쉰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금 나는 나를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평생 함께 지내 온 나를.

세상에는 많은 영웅들, 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성공한 작가, 위대한 음악가, 뛰어난 화가와 배우들의 이야기가. 루미는 그들의 이야기에 만족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너 자신의 길을 걸어, 너 자신의 목적지에 이르라고. 네가 무엇을 원하며 어떤 것을 하려고 하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복잡하게 설명하려고 하지 말라고. 네가 걸으려는 길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럴 시간에 너 자신의 길을 걸으라. 그러면 그 길이 너의 신화가 될 것이고, 사람들은 자연히 너의 여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완전해지려면 약간의 불완전함이 필요하다. 내가 할 일은 '그들'이 아니라 나에게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다른 시에서 루미는 설명한다.
"그대가 힘든 시기를 통과할 때, 모든 것이 그대에게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때, 단 1분도 더 참을 수 없다고 느낄 때, 결코 포기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흐름이 바뀔 시간과 장소이기 때문이다. 새들은 자유롭게 하늘에 큰 원을 그린다. 어떻게 그것을 배웠을까? 추락하고 추락하면서 날개를 얻는다."


2. 세상은 내 노래의 메아리

세상은 산이다.
그대가 말하는 것마다
그대에게로 메아리쳐 돌아올 것이다.
'나는 멋지게 노래했는데
산이 괴상한 목소리로 메아리쳤어.'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학교 신입생 때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같은 과 선배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나를 정말로 자기보다 선배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얼마 후 사실을 알고 나서 분노했으나 내 잘못이 아니었다. 원인이라면 신입생답지 않게 너무 늙어 보이는 내 얼굴 때문이었다. 나아가 세상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것처럼 암울한 얼굴이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한 것이다. 졸업할 무렵의 사진을 보면 누가 학생이고 누가 교수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훗날 그 노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했는가? 많이 웃고, 많이 여행하고, 많이 사랑했다.

루미가 말하듯이, 우리는 거울이자 그 속에 비치는 얼굴이다. 우리는 고통이며 고통을 치료하는 약이다. 우리는 샘물이며 그것을 퍼내는 힘이다. 우리는 비밀의 보물 운반꾼이며 그 보물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잠을 자는데 그의 영적 스승이 전화를 걸어 말했다.
"제자여, 일어나게. 내가 지금 그대를 만나러 가는 중이네."
일 년 전 세상을 떠난 스승인데도 제자는 왠지 그의 방문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마침내 스승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 흰 옷에 터번을 두르고 나타났다. 스승은 긴 설명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저 위에 가서 지내며 위대한 성자와 학자와 스승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대에게 꼭 해 줄 말이 있어서 왔네. 나중에 읽어 보게."
그러면서 그는 탁자 위에 접힌 종이 한 조각을 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펴 보니,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싶으면, 먼저 그대 마음 안에 아름다움을 품으라.'


3. 그대는 그대가 찾고 있는 그것

만약 빵을 찾고 있다면
그대는 빵을 갖게 될 것이다.
만약 영혼을 찾고 있다면
그대는 영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비밀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알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찾고 있는 그것이라는 것을.

이 삶에서 나는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왔는가?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이 백인 친구와 함께 뉴욕에서 가장 번화한 맨해튼 한복판의 타임스 스퀘어를 걷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려 대고,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고, 도시의 온갖 소음으로 귀가 안 들릴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그 인디언 남자가 말했다.
"어디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

백인 친구가 말했다.
"뭐라고? 제정신인 거 맞아? 이 소음 속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어떻게 들린다고 그래?"
인디언은 말했다.
"아냐, 분명히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그 인디언은 잠시 멈춰 서서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더니 도로를 건너가 시멘트 화분에 심어져 있는 관목 쪽으로 다가갔다. 가지들 밑을 살피던 그는 정말로 작은 귀뚜마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친구가 놀라서 소리쳤다.
"믿어지지 않아! 자네는 초인간적인 청력을 가졌군."
인디언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 내 귀는 자네의 귀와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단지 자네가 무엇을 들으려고 하는가에 달린 일이지. 자네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달린 거야. 내가 예를 보여 주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인디언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인도에다 떨어뜨렸다. 그러자 귀를 멍멍하게 하는 소음 속에서도 반경 5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동전 쪽으로 향했다. 인디언이 웃으며 말했다.
"봤지?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달린 일이야."


4. '그것'을 잃지 않는다면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시는 사랑의 시로 인용된다. 연인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동시에 이 시는 말하고 있다. 네 가슴속 푸른 불꽃은 무엇인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가슴속 푸른 불꽃을 잃지 않았다면, 그것들이 없다 해도 전혀 공허한 일이 아니다.

만약 내가 글을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오래 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웃고 떠든다 한들 무엇이 참 기쁘고 즐겁겠는가? 반면에 만약 내가 글을 쓸 수만 있다면 하루 한 끼 식사라도 족하지 않겠는가? 고독해도 충만하지 않겠는가? 더 진실하지 않겠는가? 이 진리를 나한테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이미 알고 있기에.

루미는 썼다.
"내 안에는 열정이 있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열정이."
그리고 또 이렇게 썼다.
"그대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이끄는 신비한 힘에 끌려가라. 그 힘은 결코 그대를 그릇된 길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5. 아름다움이 그대의 삶이 되기를

그대가 사랑하는 아름다움이 그대의 행동에서 스며 나오기를.
무릎을 꿇고 땅에 입맞추는 방법에는 수백 가지가 있다.

얼마 전 저자 사인회에서 만난 한 남자가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오래 전 고등학생 시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주최하는 문예현상 공모에 장원을 해 무시험 장학생으로 입학 자격을 갖췄으나, 사정에 의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평생을 트럭 운전사로 살아왔다고 했다. 놀랍게도 내가 동일한 자격으로 입학해 문학을 전공한 그 대학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와 내가 어떤 다른 삶을 살았는가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었는가이다. 어떤 길을 걸었든 오래 걸은 사람들은 같아진다. 노랫말이 필요없는 노래가 된다. 존 러스킨이 말했듯이 고통이 주는 가장 큰 결실은 무엇을 성취했는가가 아니라 그 시련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십 대에 나는 불후의 명시를 쓰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위대한 시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 나의 문학과 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쓰는 글이 본연의 나를 능가해서 더 멋있게 보이지 않는 일이다.

루미가 말한 대로 우리는 다리가 몇 개 달렸는지에 따라 이름을 붙이지만, 신은 내면의 정체에 따라 이름을 붙인다. 일상 속에 아름다움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그리고 땅에 입맞추는 내 방법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이 여행에서 실패한 것이다.

루미는 다른 시에서 썼다.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 주기를 강처럼 하라.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타인의 단점을 감추기를 밤처럼 하라.
화냄과 원망을 죽은 사람처럼 하라.
겸손과 낮춤을 땅처럼 하라.
인내를 바다처럼 하라.
자신의 있는 그대로 존재하거나
보이는 대로 존재하라.'


art credit_Santhosh Geo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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