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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오늘 아침 해 뜨는 걸 보았나요?

저자 사인회에 온 한 여성이 "시를 쓰는 것이 꿈인데 쓸 수가 없다."고 했다. 무엇이 시 쓰는 걸 가로막느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른 일들을 하느라 바빠서."라고 말했다.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얼마나 솔직한 대답인가!

우리는 게을러서 어떤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분주해서 못 하는 것이다. 몇 해 전, 시를 쓰기에 적합한 노트를 발견했다. 크기가 적당하고, 줄 쳐 있지 않은 속지는 너무 매끈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연필로 쓰기 때문에 매끈하면 글이 미끄러질 뿐 아니라 연필심이 마찰되는 노랫소리가 나지 않는다). 표지도 두꺼운 합지여서 쉽게 해질 염려가 없었다. 그동안 여기저기 써 놓았거나 암송하는 시들을 정리할 기회였다. 속지 분량이 많지 않아 여러 권 구입했다.

초봄이고,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때라 바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앞마당과 뒷마당에 쌓인 지난해의 낙엽을 치우고 죽은 가지들을 잘라 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허물어진 담을 보수하고, 웃자란 황매화를 묶고, 집 안의 혼돈과 생활의 뒤엉킨 요소들도 정리해야 했다. 강아지 궁금이의 발톱도 깎아 주고, 10년 넘게 담 너머 내 집필실 뒷마당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뒷집 빌라 주민도 대담하게 수색해야 했다. 밀린 만남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여름이 되자 한가해져서 시작 노트를 펼쳤는가? 한두 번은 정좌하고 앉아 '인생시'를 탈고할 기대에 부풀어 연필을 깎기는 했다. 그러나 늦기 전에 라다크에 다녀와야 했고(10월만 되어도 눈에 길이 막힌다), 돌아와서는 번역서를 마무리해야 했으며, 겨울에는 크고 작은 할 일과 또 다른 여행이 대기하고 있었다. 해시계가 수백 바퀴 회전하는 동안 시작 노트에는 먼지가 쌓였다. 맨 앞 장에 그것을 산 날짜와 '하루에 한 편'이라는 각오만 뒷면까지 배기도록 적힌 채.

어느 해, 내 폴란드인 친구는 체코와 폴란드 국경을 동서로 뻗은 타트라산지의 호호워브스카 밸리에 만발한 크로커스 꽃을 보고 큰 위안과 감동을 받았다. 심장병이 재발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골짜기로 도보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마주친, 덜 녹은 눈밭에 끝없이 펼쳐진 수백만 송이의 꽃과 그 위로 비치는 햇빛을 보면서 삶의 의지와 용기가 되살아났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벵제 도브제(결국에 다 잘될 거야).'를 처음으로 그녀 스스로에게 말해 준.

그 후 해마다 4월 초면 '영혼의 씻김'을 위해 그 꽃의 계곡에 가고 싶었으나 갈 수 없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바빴기 때문이다. '바쁨'을 삶의 성공처럼 여기고 바빠 보이기 위해서. 혹은 열심히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몰아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심장에 나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붓다는 세 가지 게으름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잘 아는,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조금 더 잘 거야. 그러고 나서 또 잘 거야."라는 게으름이다. 두 번째는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어.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능력이 안 돼. 지금까지 실패만 해 왔어."라는, 자신을 무능력하게 여기는 게으름이다. "다른 사람들은 명상을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술을 끊을 수 없고, 화를 안 낼 수 없고,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없어."라고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게으름은 이것이다.
"바빠서 지금은 그것을 할 수 없어. 다음에 할 거야. 단, 이 일들을 먼저 처리하고 나서."
그런 식으로 시간의 빈틈을 계속 세속적인 일들로 채워 진리 추구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다. 일 분도 고요히 앉아 있지 않으려는 '바쁜 게으름'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으로, 텔레비전과 휴대폰과 오락과 뉴스 속으로 잠시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도피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것보다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게을러야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 게을러야 명상을 하고, 게을러야 신을 생각할 수 있다. 더 바쁠수록 우리는 삶의 중요한 문제들에 직면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중요한 문제들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두기 위해 바쁨을 유지하는 것을 '행위 중독'이라 부른다. 진정한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잊기 위해, 충분히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행복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 위해.

미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티베트 승려의 계를 받은 페마 초드론이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수행처를 방문하러 오는 스승을 맞이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마침내 스승이 도착하자, 황급히 달려나가 인사를 올렸다. 스승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늘 아침 해 뜨는 걸 보았나요?"

그녀가 '해 뜨는 걸 보기엔 너무 바빴다.'라고 대답하자 스승은 웃으며 말한다.
"너무 바빠서 삶을 살아갈 새도 없군요."
명상 수행을 하기 위해 출가했지만 초드론은 명상이 '분주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 순간의 현존으로 돌아오는 일'이라는 걸 잊었던 것이다.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 해도 다른 일들로 바쁘다면 그저 말에 지나지 않는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물을 일이다. 너무 바빠서 삶을 살아갈 새도 없는가? 너무 바빠서 해 뜨는 걸 바라볼 새도 없고,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잠시 침묵하며 앉아 있을 시간도 없는가? 더 중요한 것을 멀리해야 할 만큼 바쁜가? 연인을 만나듯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조금은 게을러져야 하지 않은가?

photo_Renata Czekalska <코로커스 핀 호호워브스카 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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