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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오직 그것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둘 중 하나의 세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생각의 세계 속에 있거나, 지금 이 순간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생각의 세계에 갇혀 지내느라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과 온전함으로부터 멀어진다.

인간은 사물과 현상을 지각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자신의 생각으로 왜곡해서 보는 데도 뛰어나다.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나무를 정확하게 보고 있다고 상상한다. 나무가 내가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마음의 해석, 나의 지식, 나무와 관련된 과거의 경험을 내려놓지 않으면 나무의 실체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 없이 다가갈 때 나무는 비로소 본래의 아름다움과 위엄과 신성함을 드러낸다. 한 그루의 나무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랜 옛날 뭄바이 해안에 바히야 다루찌리야라는 이름의 어부가 살았다. 진실한 삶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성자로 여겼다. 그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히야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다른 어부들은 목숨을 잃었으나 바히야는 나무 조각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헤엄쳐 육지에 닿았다.

뭍에 기어오른 그는 벌거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해안에서 주운 나무껍질로 몸의 일부를 가리고 먹을 것을 구걸하러 다녔다. 인도에는 나체 상태로 수행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벌거벗은 상태로 다니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고결한 성자가 왔다고 여기고 음식과 거처를 제공했다.

바히야는 명상 수행을 한 적도, 경전을 읽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옷을 입으면 성자 대접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다시 힘든 어부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람들이 선물하는 옷을 마다하고 계속 나무껍질 옷만 고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다루찌리야'는 나무껍질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무위도식하는 생활은 어느 날 한 구도자를 만나면서 중단되었다. 그 구도자는 바히야의 거짓된 삶을 금방 알아차리고, 더 늦기 전에 진실한 수행자가 되라고 충고했다.

거짓된 삶에 마음이 자유롭지 않던 바히야는 진심 어린 지적에 정신을 차리고, 그 구도자가 알려준 대로 슈라바스티라는 곳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다는 영적 스승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서인도 뭄바이에서 동인도 슈라바스티까지는 오늘날도 기차로 수십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바히야는 그 먼길을 한숨도 자지 않고 걸어서 며칠만에 주파했다. 그 속도와 지구력이 상상밖이라서 책에는 천신들이 그를 들어올려 하룻밤만에 공중이동을 시켰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아침 무렵 슈라바스티에 도착한 바히야는 곧바로 위대한 스승이 머물고 있다는 숲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은 지금 탁발을 하러 마을에 가셨습니다. 먼 길을 온 듯하니, 여기서 쉬면서 기다리면 곧 오실 겁니다."

바히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기다릴 수 없소. 나에겐 시간이 없소. 그 스승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고, 나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오. 그렇기 때문에 이곳까지 오면서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소. 스승을 만나면 그때 쉬겠소. 그분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말해 주시오."

바히야는 지체하지 않고 제자가 일러 준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한 수도자가 집집마다 다니며 음식을 얻고 있었다. 그 수도자를 감싼 평화와 고요를 감지한 바히야는 영적 깨달음에 이른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에게 다가가 길 한가운데서 절을 올리며 바히야는 말했다.
"당신이 완전한 자유에 이르렀다고 들었습니다. 저에게도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승이 말했다.
"지금은 알맞은 때와 장소가 아니다. 탁발을 하러 다니는 중이니 내 거처로 가서 기다리라."

바히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기다릴 수 없습니다. 죽음이 우리 둘 중 누구에게 먼저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대자유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승이 다시 말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지금은 음식을 탁발해야 하는 시간이다."

바히야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이란 없습니다. 어떤 위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고, 또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금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바히야가 세 번이나 간청하자 스승은 그의 절실한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길 한가운데 서서 진리를 전하려면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진리 전체를 압축해야만 했다.

스승은 말했다.
"바히야여, 그렇다면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어떤 것을 바라볼 때 다만 바라보라. 어떤 것을 들을 때 다만 들으라. 어떤 것을 감각할 때는 다만 감각하고, 인식할 때는 다만 인식하라. 그것들에 '나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않을 때 그대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고, 자유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볼 때는 거기 오직 봄만이 있어야 한다. 들을 때는 거기 오직 들음만이 있어야 한다. 감각할 때는 오직 감각만이 있어야 하고, 인식할 때는 오직 인식함만이 있어야 한다."

'나'의 해석과 판단을 개입시키지 말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보고 듣고 감각하고 인식하라는 것이다. 보는 나는 사라지고 단지 바라봄만이 있을 때 우리는 외부의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자유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품고 있던 바히야는 이 몇 문장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길가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몇 분만에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스승이 그 장소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히야는 새끼 가진 암소에 받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불교 경전 <우다니> 경에 실린 실화로, 그 스승은 붓다이다. 바히야가 죽은 것을 알고 붓다는 제자들에게 바히야의 시신을 거두어 화장하게 하고 그곳에 작은 탑을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수행자들이여, 바히야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진리에 따라 수행했으며, 진리에 대해 나와 논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죽기 전에 자유를 얻었다."

바히야는 붓다의 제자도 아니고 승려도 아니었으며 계율을 지킨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의 가르침을 얻고 깨달음을 얻은 것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그가 전생에 많은 수행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알프레드 아들러도 말했듯이, 사람에게 있어 진정한 변화는 백 번 각오하고 다짐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깨달을 때 찾아온다.

'단지 바라봄만이 있을 뿐, 보는 나는 없다. 단지 들을 뿐, 듣는 나는 없다.' 붓다가 어부 바히야에게 준 이 아름다운 가르침은 오늘날 명상 수행에서 자주 인용된다. 듣고 보는 것에 ‘나'라는 해석자가 개입할 때 왜곡이 시작되고 허구의 세계가 창조된다. 그 해석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믿는다. 그때 우리는 한 그루 나무, 한 송이 꽃, 한 사람의 인간에게서 멀어진다.


art credit_이정록, Jeong L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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