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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코끼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 

 

한사람이 있었다.

그는 코끼리를 갖고 싶었다. 그는 코끼리가 너무 좋아서 코끼리 한 마리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나 깨나 코끼리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뜨거웠다.

그는 차츰 알게 되었다. 당장 코끼리를 갖게 된다 해도 자신은 그걸 키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는 평범한 넓이의 마당을 가진 자그마한 집에 살고 있었고, 아주 가난하진 않았지만 농담으로라도 부자라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코끼리를 손에 넣는다 해도 그것을 데려다 놓을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날마다 코끼리를 배불리 먹일 만큼의 사료를 살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끼리가 과연 자기에게 오게 될지도 의심스러웠지만, 만에 하나 갑자기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을 유지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돈을 모으려고 밤낮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일차적으로 원하는 것은 코끼리이지 부(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잘 돈을 모을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코끼리를 너무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는 싫지만 돈을 모아야 했다.

왜 하필 코끼리냐고 사람들은 그에게 묻곤 했다. 개나 고양이 라면 쉽게 키울 수 있을 것 아닌가? 물론 그 자신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코끼리한테 사로잡혀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아직 코끼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코끼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

 

어느 만화(권교정,〈매지션〉)에서 읽은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 이자 당신의 이야기다. 그렇다, 삶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원하는 어떤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간절히 갈구하면 언젠가는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세상은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왜냐하면 거기 언제나 더 멋지고 아름다운 코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는 늘 욕망의 자유, 곧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이제 그것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날마다 들려오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과 같다.

"어서 코끼리를 원해. 코끼리를 소유하면 넌 더 행복해질 수 있어."

그리하여 당신은 코끼리 살 돈을 모으느라 일생의 시간을 다 보낼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코끼리 사료를 마련하느라 허덕일 것이며, 코끼리와 단 한 번도 즐겁게 노닌 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결국 그 코끼리 때문에 자신이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았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이 욕망의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숙명이다. 고타마 붓다가 6년 고행 끝에 니란자나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첫 번째 진리는 '인간의 삶은 두카'라는 것이었다. 두카는 흔히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나는 그것을 ‘행복의 부재’라고 옮기고 싶다.

 

행복의 부재.

 

당신과 나의 마음속에서 결코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한 코끼리는 불행한 코끼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불행한 코끼리는 머지 않아 술취한 코끼리가 되어버린다. 술취한 코끼리는 곧 행복의 부재에 대한 슬픈 증명이다. 그 코끼리가 당신의 마음속에 살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마음대로 다룰 수가 없다. 코끼리는 ‘행복의 부재’라는 쓰디쓴 술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술취한 코끼리가 어느덧 당신 마음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여기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시장에 앉아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그가 너무도 고통스럽고 행복하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는 얼굴이 붉게 충혈되고,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지만, 이내 그가 옆에 칠리를 수북이 쌓아 놓고 앉아서 하나씩 입 안에 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세상에서 가장 맵기로 소문난 인도산 고추가 아닌가. 칠리를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남자는 더욱 불편하고 불행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칠리 하나를 입에 넣는 것이었다. 전보다 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마침내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하는 거요? 한두 개 먹었으면 칠리가 얼마나 매운 줄 잘 알 거 아니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먹는 이유가 뭐요?"

매우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서 그 남자가 말했다.

"혹시 단맛이 나는 칠리 고추가 있을지도 모르잖소."

단맛 나는 칠리를 혹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매운 고추를 계속해서 먹는 고통스런 남자의 이야기 역시 다름 아닌 나의 이야기이고 당신의 이야기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문제이다. 우리가 삶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은 늘 어떤 종류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달디 단 칠리 고추에 매달리는 저 인도인 남자처럼 잘못된 장소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고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운 것이 곧 칠리의 본성이므로. 따라서 그 집착과 희망을 내려놓는 일은 진정한 단맛(그것이 사랑이든 행복이든)의 발견에 이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수십 번, 수백 번 우리는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어리석은 관점을 고수하는 한 당신은 여전히 매운 눈물에서 헤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코끼리이든, 단맛이 나는 고추이든, 혹은 훌륭한 배우자이든, 결국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포기 할 수 없는 마음’ 이다. 그것이 단순히 다섯 가지 감각적 즐거움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실제의 불만족과 행복의 부재를 심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이다.

팔리어로 된 불교 노래에 이런 것이 있다.

"모든 것은 죽는다. 죽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며, 나 역시 죽는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세상의 종교들이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꼽는 망상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모두는 이 즐거운 망상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목적은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부의 축적뿐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보같은 짓이다.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것, 관계를 갖는 것, 결혼하는 것, 집을 소유하는 것, 부를 축적하고 자동차를 사는 것, 다양한 즐거운 경험을 쌓는 일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여기 고대 인도의 왕 아쇼카 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아쇼카에게는 세속적이고 본능적인 즐거움에 빠진 비타쇼카라는 동생이 있었다. 형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기 때문에 비타쇼카에게는 쾌락에 탐닉할 많은 기회가 제공되었다. 오히려 왕은 나랏일을 돌보고 골치 아픈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동생인 비타쇼카는 책임질 일도 없었고, 형 덕분에 모두가 그의 앞에서 굽신거렸으며,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릴 수가 있었다.

불교도가 된 아쇼카는 이러한 동생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아쇼카는 왕이 입는 옷과 왕의 상징인 휘장을 방에 벗어 놓은 채 외출을 나갔다. 때마침 비타쇼카는 대신들과 함께 왕궁 안을 걷다가 왕의 옷과 휘장이 놓인 방에 이르렀다.

대신 중 하나가 왕의 동생에게 말했다.

"이 옷들이 맞는지 한번 입어 보시죠. 아주 잘 맞을 것 같은데요. 누가 압니까? 당신의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동생인 당신이 황제가 될 것입니다. 괜찮으니 어서 입어 보세요.”

처음에 비타쇼카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의 옷을 입고 휘장을 두르는 것은 반역 행위이며 대역죄에 해당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만심이 더 컸다. 그리고 누가 왕의 옷을 입는 것을 거부하겠는가? 이것은 모두 계획된 일이었고, 그가 왕의 옷을 입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순간 아쇼카 왕이 들어왔다.

아쇼카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동생을 심판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왕위를 빼앗겠다는 건가? 이것은 반역이기 때문에 네가 아무리 나의 형제라 해도 법을 집행 하겠다."

그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이 자를 체포해 사형에 처하라."

자비를 청하는 동생의 필사적인 애원과 해명에도 불구하고 아쇼카는 법을 지키겠다고, 그의 가련한 동생을 반드시 사형에 처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네가 내 동생이니 한 가지 특별 배려를 해주겠다. 네가 무척이나 왕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니, 앞으로 7일 동안 왕의 모든 권한을 즐길 수 있게 해주겠다.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 네가 원하는 모든 여자를 가질 수 있고, 원하는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내가 즐기는 모든 것을 너도 즐길 수 있다. 이 7일 동안 왕이 누리는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다. 그러나 7일 후에 너는 반드시 처형 당할 것이다. 그것만은 달라질 수 없다."

7일 후, 아쇼카는 사형장으로 동생을 불러 놓고 물었다.

"너는 모든 아름다운 여자들을 즐겼는가? 나의 주방장이 해주는 최고의 음식들을 맛보았는가? 너는 나의 악사들과 음악을 즐겼는가?"

비타쇼카는 어깨를 떨구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었겠습니까? 단 하루도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내가 곧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아쇼카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네가 깨달았구나. 7일 후든, 7달 후든, 7년 후든, 아니면 70년 후든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 어떻게 그 모든 감각적 즐거움들을 누릴 수 있겠는가? 곧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 때, 어떤 즐거움이 너를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7일 후든, 7달 후 든, 7년 후든 넌 죽을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동생 비타쇼카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는 진지한 구도자가 되었다. 죽음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분명하게 보게 해주었다.

 

탄생은 곧 죽음의 선고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신이 삶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재정렬시킨다.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가? 공중에 던진 막대기는 무거운 끝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당신이 이 삶에서 계속해서 무겁게 축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의 부재, 코끼리에 대한 갈망, 단맛이 나는 칠리에 대한 헛된 바람, 혹은 분노, 질투, 이기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결국 무거운 막대기 끝이 되어 당신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 생의 다음 순간, 또는 다음의 생을 결정지을 것이다.

인도의 어느 방랑승이 말한 것처럼, 마치 당신이 쓰고 있는 터번이 불에 타고 있는 것과 같은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세계에서 당신을 묶고 있는 온갖 구속, 매듭, 계획과 일들을 내려놓고 때로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명상해야 한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몸을 데려가는 것, 몸을 건강하게 하고 먹이고 씻기고 하는 등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시간을 다 빼앗고 있다. 마음을 위한 시간은 언제나 매우 적게 남아 있다.

태국 출신의 위대한 영적 스승 아잔 차의 절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세상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됨을 기뻐하라.’

갈망과 갈구에 이끌려 우리는 너무 자주 세상의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는 수많은 방법으로 항상 잘못된 장소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것은 당신의 추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거울에다 화장을 하는 것과 같다. 그 거울 앞에 서 있는 동안은 만족스럽겠지만, 거울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순간 당신의 추한 얼굴이 나타난다.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 터의 자유.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가 ‘행복의 부재’였다면, 그의 두 번째 진리는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행복을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므로.

원한다는 것은 곧 고통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원하는 것이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먼저 훌륭한 영적 스승 아잔 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는 1918년 태국 북동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본적인 학교 공부를 마치고 절에 들어가 행자승으로 지낸 그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승려로서의 삶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절에 들어갔다.

승려가 되고 나서 5년 후, 아버지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세상을 뜨자, 아잔 차는 생의 무상함과 불확실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된 그는 비록 자신이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 팔리어 경전에 능통한 자가 되었지만, 생의 번뇌를 끝내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는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환멸을 느낀 그는 전통적인 공부를 버리고 탁발에 의지해 방랑의 길에 나섰다. 이때부터 수년간 숲속이나 동굴과 무덤가에서 잠을 자고 마을에서 걸식을 하며 태국 중부까지 4백여 킬로미터를 걸어서 방랑했다.

이 시기, 아잔 차는 중요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명상과 지혜에 대한 가르침들을 두루 공부했고 경전은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음을 느꼈다. 그때 그가 찾아간 위대한 스승 아잔 문은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남을 보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핵심이라고 일깨웠다. 이 간결하고도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잔 차에게 하나의 계시처럼 전해졌다. 그후 7년 동안 그는 숲속 수행자의 전통에 따라 지극히 간소한 삶을 실천하면서 더 깊은 명상을 위해 고요하고 외딴 장소들올 찾아 시골을 옮겨다녔다.

여러 해를 방랑한 끝에 아잔 차는 고향 마을에 초대받아 돌아갔다. 그는 고향 근처, 당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뱀들과 맹수, 심지어 귀신들이 있다고 알려진 파퐁이라는 이름의 숲에 정착했다. 수행승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말라리아와 형편없는 거처, 빈약한 음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모여드는 제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오늘날 왓농파풍이라고 불리는 이 절에 들어서면 샘에서 물 긷는 수행승들과 ‘명상중, 침묵할 것!’이라고 쓰인 팻말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수행승들은 자신들이 입을 옷을 직접 짜고 염색했으며, 필수품 대부분을 손으로 만들어 썼다. 그리고 고행승의 계율에 따라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탁발에 의지하고, 자신들의 소유물과 옷가지를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아잔 차의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가르침에 이끌려 외국인 구도자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 아잔 차의 수행처에 23세의 한 영국인 청년이 찾아왔다. 런던의 노동자 계층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했다. 17세 때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불교 서적을 읽던 중 그는 자신이 불교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1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태국 방콕으로 와서 스스로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하루는 친구가 아잔 차의 명성을 듣고 왓농파퐁에 가서 3일만 지내보자고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태국 북동부의 밀림으로 간 그는 3일이 아니라 9년을 아잔 차와 함께 생활했다. 그는 아잔 차로 부터 아잔 브라흐마(정식 이름은 아잔 브라흐마밤소 마하테라)라는 이름을 받았다.

위대한 스승 아잔 차는 세상을 떠나고, 지금 아잔 브라흐마는 그의 제자들 중 가장 지혜로운 수행승으로 꼽히고 있다. 아잔 차와 함께 숲 속 수행승으로서 철저한 배움의 시기를 보내고 난 뒤, 그는 또 다른 제자와 함께 호주로 가서 직접 벽돌을 쌓아 남반구 최초의 절을 세웠다. 오늘날 불교가 탄생시킨 중요한 스승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잔 브라흐마는 특유의 유머와 통찰력 넘치는 법문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한 존경 받는 명상 스승 중 하나이다. 매주 절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리는 그의 ‘금요일 밤의 법문’ (Friday Night Dhamma Talks) 동영상은 전 세계에서 매년 수백만 명이 접속해 들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의 법문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생의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스승 아잔 차는 말했다.

"깨어 있으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라.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흐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놓아 두라."

또 어떤 자리에서 말했다.

"세상을 살아가며 명상 수행을 하는 것, 다른 이들은 당신을 울리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는 종처럼 바라볼 것이다. 당신을 쓸모 없고, 나약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러한 스승 아잔 차와 함께 지낸 일화, 지난 30년 이상 수행승으로 지낸 자신의 영적 성장과 경험들, 고대 경전에 실린 이야기, 농담, 그리고 절에서 행한 법문 등을 모아 아잔 브라흐마는 한 권의 책을 냈다. 이 책은 몸 • 마음 • 영혼을 위한 안내서이며, 마음 속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도의 수행자들은 목에 염주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 그것을 자파 말라라고 하는데, 자파는 만트라를 반복해서 외는 것을 뜻하고, 말라는 목걸이를 의미한다. 완전한 나체 수행을 실천하는 고행승조차도 이 자파 말라만은 꼭 지니고 다닌다. 자파 말라는 108개의 염주알로 이루어져 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108은 완전한 숫자로 여기는 3의 배수이며, 그것을 3으로 나눈 숫자 역시 3의 배수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아잔 브라흐마는 이 전통에 따라〈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에 108가지 일화들을 담았다. 그 이야기들온 거미줄을 걷어내는 빗자루처럼 마음속에 걸 린 108개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걷어내어 준다. 완전한 삶, 사랑, 두려움, 고통, 분노, 용서, 행복, 자유 등이 그 주제이다. 많은 이 야기들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빛을 발하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몇몇 ‘오래된 이야기’들을 되살려내어, 아잔 브라흐마는 불교 서적들이 종종 범하는 난해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피하고 있다. 그 리하여 불교 승려가 쓴 책이라는 편견을 잊게 만든다. 그는 재미 있고 뛰어난 스토리텔러일 뿐 아니라 깊은 통찰력을 지닌 수행자로서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의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태양이 내리비치는 인도의 시장에 앉아 칠리를 먹는 남자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녁 무렵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괴로워하며 칠리를 먹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근처 가게 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 많은 칠리를 먹어도 단맛이 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왜 계속해서 먹고 있는 거요?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오?"

남자는 이제는 고통에 익숙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힘들게 참고 먹어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지않소? 지금 포기한다면 여기에 바친 내 시간들이 얼마나 아깝고 무의미하겠소? 이제 이것은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존재의 문제가 되었소."

당신과 나의 삶이 그러하다. 이제 그것은 단맛 나는 칠리에 대한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코끼리를 갖게 될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갈구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포기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린다. 당신은 진심으로 행복하고, 진심으로 만족하는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을.

류시화

 

세상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단 한 권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 이라는 책이다.

- 아잔 차

 

    

 

⫸ 심우도 이야기 보기 - '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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