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 사띠Sati 빳타나Paṭṭhāna 숫따 (사띠 확립 정착에 대한 큰 경)》
"수행자들이여,
이 길은 중생들의 삶을 정화시키고, 근심과 슬픔과 번민을 극복하게 하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바른 길로 이끌어 마침내 무상정등각(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 줄임말로 정각)을 증득하게 하고 열반(닙비나nibbana, 니르바나;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ekāyana magga)’이니, 이름하여 '네(四) 가지에 대한 사띠sati(마음챙겨 알아차림; 念)의 빳타나paṭṭhāna(확립 정착; 建立, 住立, 處)'(한문 번역경전의 범용 표현으로 사념처四念處)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그것은 몸(身)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감각(受)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마음(心)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그리고 법法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이다."
<각주 : '신수심법身受心法 네(四) 가지에 대한 사띠(念)를 확립하고 정착(處)하는 수행'은 탐진치와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청정淸淨하게 한다.
탐진치와 번뇌의 제거는 순간적인(momentary) 제거, 일시적인(temporary) 제거, 완전한(total, complete) 제거가 있다. 순간적인 제거는 마음의 고요집중과 산란이 되풀이되는 초보 단계에서 고요집중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순간의 탐진치와 번뇌의 사라짐을 말하며, 일시적인 제거는 마음의 고요집중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되고 깊어진 연후에 한시적으로 탐진치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수행을 한동안 하지 않으면 탐진치와 번뇌는 다시 일어난다. 무상정등각을 증득하고 열반에 이르면 탐진치와 번뇌는 완전히 제거되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각주 : 초기불교를 대표하는 실實수행법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란 무엇인가. 팔정도를 닦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실라-사마타-위빠사나)의 실實수행(실제 수행, 본격적인 수행)인 사념처 수행은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에 대해 지속적으로 '마음챙겨 알아차림'으로써 경험하는 현상들의 본질을 깨달아 정각(해탈, 열반)을 증득하는 수행법이다.
사념처四念處는 부처님이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짯따로cattāro 사띠sati 빳타나paṭṭhānā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그 뜻을 풀이하자면 (신身·수受·심心·법法) ‘네 가지(cattāro; 四)에 대한 사띠(sati; 마음챙겨 알아차림, 念)의 빳타나(paṭṭhānā; 확립 정착, 處)’라는 뜻이다.
사념처 수행, 즉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 네 가지에 대한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를 확립하고 정착하는 수행은 사성제四聖諦의 실현을 최종 목적으로 하며 거기에 이르는 여러 절차를 망라한다.
사념처 수행은 남방 상좌부불교의 전통적인 명상법으로 알려져 있으며 위빠사나라는 이름으로도 (잘못) 알려져 있다.
사념처 수행은 고요히 집중된 바른 사띠라는 심리적 기능을 기초로 한다. 바른 사띠(samma·sati)는 바른 마음챙김과 바른 알아차림(sam·pajañña)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마음챙김이란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알아차림이란 그러한 상태를 지속하면서 개개의 현상들을 그때그때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실상과 진리에 눈을 떠 나가는 과정이 사념처 수행이다. 사념처 수행에는 고요히 집중됨을 뜻하는 사마타samatha의 측면과 통찰(깊은 관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vipassanā의 측면이 함께 포함된다.
사념처 수행을 위빠사나 일변도의 수행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경전에 설해진 사념처 수행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망라하는 포괄적인 내용을 지닌다. 예컨대 느낌(受)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수념처受念處)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포함된다(DN. II. 298). 그런데 그러한 느낌이란 일상적인 상태에서는 포착되지 않으며 ‘즐거움도 끊어지고 괴로움도 끊어진’ 네 번째 선정(第四禪)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이 반드시 사마타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마음(心)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심념처心念處)에는 내면에 깃든 탐욕이나 분노에 대한 알아차림이 포함된다(DN. II. 299). 탐욕이라든가 분노 따위는 사마타 혹은 선정의 상태에 이르면 저절로 가라앉는 거친 감정들이다. 따라서 탐욕이나 분노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을 내용으로 하는 사념처 수행은 일상의 상태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념처 수행에서 맨 마지막으로 설해진 법(法)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법념처法念處)은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거기에는 다섯 장애(오개五蓋), 오온五蘊, 사선정四禪定, 사성제 등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이 세부 내용으로 언급된다(DN. II. 300-314). 이들은 몸·느낌·마음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을 통해 실상과 진리를 체득하는 가르침을 망라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몸이나 느낌 등에 관련된 현상들이 일어남(生 또는 集)과 사라짐(滅)을 반복하면서 그 비실체성(無我, an·atta : 실체atta 아님an)을 드러낼 때 다섯 장애라든가 오온의 본질을 꿰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연장선에서 궁극에는 사성제의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
증지부 경전에서는 팔정도를 닦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실라-사마타-위빠사나)의 실實수행(실제 수행, 본격적인 수행)인 사념처 수행을 실천함으로써 계율을 닦는 수행(실라 바와나)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AN. V. 457-460). 또한 고요함을 가로막는 탐냄 따위의 내면의 장애를 제거할 수 있고, 육체(色)·느낌(受)·지각(想) 따위에 대한 집착(오취온)을 버릴 수 있고, 정신적 성취를 가로막는 갖가지 내면의 족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사념처 수행은 출가 수행자(비구, 비구니)들 뿐만 아니라 일반 재가 수행자들에게도 개방되어 널리 행해졌다고 전해진다(MN. I. 340쪽).
; 이 각주는 법보신문에 실린 글(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0172)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이다.>
<각주 : 부처님이 '신수심법 네 가지에 대해서 사띠를 확립하고 정착하는 수행 방법'을 설(설명)하신 경이 『마하 사띠 빳타나 숫따(사띠 확립 정착에 대한 큰 경; 대념처경大念處經), D22』와 『사띠 빳타나 숫따(사띠 확립 정착 경; 념처경念處經), M10』인데 두 경전은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경전은 신수심법의 네 가지 큰 분류 아래 호흡을 시작으로하여 16가지 소분류의 수행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경전은 팔정도를 닦는 수행의 실實수행(실제 수행, 본격적인 수행;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 매우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의 실實수행(실제 수행, 본격적인 수행)인 사마타-위빠사나의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방식 수행의 핵심 요체는 신수심법(달리 표현하면 자신과 세상)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사띠를 확립하고 정착하는 것이다
이 경전은 일상생활에서 신수심법을 사띠하는 수행과 사마타(호흡에 대한 사띠를 확립 정착하여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와 위빠사나[사마타 후에 선정 삼매에서 계발된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와 평점심을 사용해서 신수심법을 '사띠하여 이어보면서'(관찰하면서) 머무는 수행]을 모두 포함하여,
'신수심법 네(四) 가지에 대한 사띠(念)를 확립하고 정착(빳타나; 處)하는 수행' 방법을 상세히 설(설명)하신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경전이다
요컨대 부처님이 『대념처경, D22』과 『념처경, M10』으로 설(설명)하신 '사념처四念處 수행(신수심법 네四 가지에 대한 사띠念를 확립 정착處하는 수행)'은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 수행을 기초 토대로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사마타-위빠사나 상호의존) 방식으로 신수심법에 대한 사띠sati(마음챙겨 알아차림; 念)를 빳타나paṭṭhāna(확립 정착; 建立, 住立, 處)하는 수행이다.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실實수행(실제 수행, 본격적인 수행;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으로 좁혀가면 사띠와 사마디(삼매)가 남는다.
사마타(선정 삼매 계발 수행; 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가 호흡 등 한 가지 대상에 '사띠를 집중하는' 것이라면, 위빠사나(통찰 지혜 계발 수행;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는 여러가지 대상(身受心法)을 '사띠하여 이어보는'(관찰하는) 것이다.>
<각주 : 념念은 '지금(今)+마음(心)'의 합성어로 고대인도어 사띠sati를 한문(중국어)으로 번역한 것이다. 사띠를 우리말(한국어, 한글)로 번역하면 현재순간(지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전념하여 ‘마음챙겨 알아차림'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하다.
한문 경전에서 념念(생각 념; 마음에 둠, 기억함)이라고 번역하는 사띠sati는 부처님 설법(법法을 설명함)에서 '마음챙김,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마음챙겨 알아차림, 빠자나pajāna(알아차림; 앎, 이해), 깨어있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사띠sati는 대개 빠자나pajāna(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사띠]과 알아차림[빠자나]으로 분리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정념正念이라고 한역하는 삼마사띠samma-sati도 대개 삼빠자나sam-pajāna(바른 알아차림; 바른 앎, 바른 이해, 분명한 이해)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삼마사띠와 삼빠자나를 분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참고로 삼빠자나sam-pajāna에서 ‘삼sam’을 빼면 ‘빠자나pajāna’인데, ‘빠자나pajāna’의 동사형이 ‘빠자나띠pajanati’다. ‘삼sam’은 흔히 ‘삼붓다, 삼보리, 팔정도의 삼마사띠(바른 사띠) 등등’에서처럼 단어 앞에 붙는 접두어로 ‘바른’이라는 뜻이다. 빤냐paññā(혜慧, 지혜; 반야는 빤냐의 한문 음사)의 동사형도 ‘빠자나띠pajanati(알다, 이해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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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身; kāya)에 대한 사띠(念)의 확립 정착(處) : 신념처身念處
"어떻게 수행자가 몸에서 몸을 '이어 보면서[anupassi]' 머무는가?"
<각주 : 부처님이 '사띠(念)를 확립하고 정착(處)하는 수행'(념처念處 수행)으로 제시하는 길(방법)은 "이어보면서[anupassi] 머문다. 즉 '이어서 사띠하면서, 또는 사띠하여 이어보면서'(관찰하면서) 머문다"는 것이다>
1.1 호흡에 대한 사띠(아나빠나사띠Ānāpana-sati)의 확립 정착
"수행자는 한적한 숲 속의 고요한 나무 아래나, 혹은 한적하고 고요한 곳(빈 방, 동굴 등)에 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전면前面(또는 콧구멍 주변, all round of entrance; pari-mukha)에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을 단단히 건립建立하여 앉는다."
<각주 :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 당시에) 이 수행에 적합한 한적한 숲은 대개 마을로부터 약 1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좌법에는 완전 가부좌(연화좌), 반가부좌, 평좌(버마식 좌법)가 있다. 평좌는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얹지 않고 둘 다 바닥에 놓는다. 의자에 앉는 것도 한 방법이나 너무 안락한 자세는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행자는
오직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오직 사띠하면서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pajānāti].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각주 :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호흡현상 자체를 면밀히 알아차린다. 짧고 긴 호흡 뿐 아니라 거칠고 미세한 호흡 등 모든 호흡을 알아차린다. 들숨과 날숨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린다. 이때 알아차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흡을 해서는 안 된다.>
"수행자는
‘호흡의 전 과정을 경험하면서[감각을 느끼면서; paṭisaṃvedī] 숨을 들이쉬자'라고 수련하며, ‘호흡의 전 과정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자'라고 수련한다.
‘신체 작용(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자'라고 수련하며, ‘신체 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내쉬자'라고 수련한다[sikkhati].
<각주 : 여기서 '수련한다'는 '식카띠sikkhati'(자기 자신을 훈련시킨다, 스스로를 연습練習시킨다; train oneself)를 번역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작용(行)이 고요해지면 호흡 또한 고요하고 미세해진다.>
<각주 : 부처님은 숙련된 도공을 비유로 드신다. 숙련된 도공은 ‘길게 돌리자’라고 행하면 길게 돌리는 가운데 길게 돌아가는 줄 안다. 행위와 인식[sati, pajānāti]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숙련되기 이전의 도공은 그러지 못하다. 돌아가는 현상을 잘 알아차리려고 하면 돌리는 일(행위, 行)이 어색해지고, 잘 돌리려고 하면 돌아가는 현상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오랜 훈련[수련; sikkhati]의 과정을 잘 거치면, 돌리는 행을 잘하면서도 돌아가는 현상을 잘 알아차릴 수 있다. 또는 돌아가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돌리는 행이 제어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면, 돌리는 행에는 신경 쓰지 않고 돌아가는 현상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있어도 원하는 만큼 저절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의식은 돌아가는 현상(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데도 기계(몸)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각주 : 사띠를 준비하는 일은 실實수행(실제 수행, 본격적인 수행;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이다.
부처님은 호흡에 대한 사띠(아나빠나사띠) 수행에서 "수행자는 오직 사띠하면서 들이쉬고, 오직 사띠하면서 내쉰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분명히 알아차리라[pajānāti]'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잘 (충분히) '훈련[slkkhati]' 할 것을 설하신다.
그리고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 수행을 제외한 나마지 15개의 소분류 수행주제에 대해서는 준비된 사띠에 의해 수행을 진행하는 과정만을 설(설명)하신다. 즉 이하의 경문들은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거쳐서 어느 정도 수준의 사띠가 준비된 상태에서 하는 수행 과정을 설(설명)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여러 경전에서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말하자면, 아나빠나사띠 수행은 불법佛法(부처님 가르침) 수행의 왕도王道라고 부를만한 것이다.
사띠를 준비하는 아나빠나사띠 수행 과정과 준비된 사띠에 의해 이하의 수행을 계속 진행하는 과정으로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사띠를 확립하여 정착하고, 이를 통해서 마침내 정각과 열반의 완성까지 나아가는 수행... 이것이 부처님이 『대념처경(마하 사띠-빳타나 숫따; 사띠 확립 정착에 대한 큰 경)』과 『념처경(사띠-빳타나 숫따; 사띠 확립 정착 경)』으로 가르치신, 정각을 증득하게 하고 열반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인 사념처 수행이다. 그러므로 사념처 수행의 기초(기반, 토대)가 되는 아나빠나사띠 수행은 가히 수행의 왕도라 부를만한 것이다.>
"수행자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이어보면서[anupassi] 머문다[viharati]'.
몸에서 (호흡이라는 현상 이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이어보면서 머문다.
몸에서 일어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이어보면서 머문다.
몸에서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이어보면서 머문다.
수행자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 정착된다."
<각주 : 경전은 이어서 위와 같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 확립 정착된다."라는 후렴 경문이 이어지는데, 앞의 내용을 포함하면서 더 심화된 수행의 과정을 통해 사띠의 확립 정착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방법은 "이어보면서[anupassi] 머문다[viharati]. 즉 '이어서 사띠하면서, 또는 사띠하여 이어보면서' 머문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적’이란 자신의 몸을 말하며, ‘외적’이란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의 몸을 말하는 것이다.
호흡에 대한 간단없는 사띠(아나빠나사띠)로부터 '오직 호흡만이 존재하는' 경지를 지나면 선정 삼매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한 가지 대상에 대한 사띠의 고요한 집중은 선정 삼매 상태로 진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선정 삼매에 들었다 나온 후에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와 평정심으로 산란함이 없이 다른 존재의 몸(물질 작용 무더기)을 이어보면서(이어서 사띠하면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각주 : 주석자들은 흔히 대장간의 풀무를 예로 든다. 풀무의 바람은 풀무 부품(흡입구, 통풍관..), 대장장이 등 여러 가지 요소의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작용에 의하여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호흡도 물질적, 정신적 여러 가지 요소의 연기 작용에 의하여 일어난다. 수행자는 아나빠나사띠를 통해서 선정 삼매에 들었다 나온 후에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으로 '물질적, 정신적 여러 가지 요소가 연기(조건적으로 상호의존) 작용하여 호흡이(라는 현상이) 있다'는 사실(실상; 연기의 실상)을 이어보면서(이어서 사띠하면서) 명확히 관찰하게 된다.
경전에서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는 것은 오직 육체적인(또는 물질적인) 현상만이 있지, 거기에 인격체, 여자, 남자, 자아는 없다는 의미다. 즉, 몸에는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나, 인격체에 속한 것은 없다는 의미다. 수행자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몸에 대한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 정착되면, 몸에 대한 어떤 탐욕도 탐착도 사견邪見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각주 :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 생멸하는 무수한 물질적인 작용들이 드러난 물질적인 현상으로서의 '몸'이라는 현상과 이 물질적인(또는 육체적인) 작용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는 정신적인 작용들이 드러난 정신적인 현상으로서의 '마음'이라는 현상만이 있다. 하지만 이때의 '마음이라는 현상'에서도 '몸이라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남자, 여자, 인격체, 자아는 발견할 수 없다. 끊임없이 생멸하며 인과 연기적으로 이어지는 '몸(물질작용 무더기; 색온)라는 현상'과 '마음(정신작용 무더기; '수상행식'온)이라는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DN-a III, 765).
세상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요소는 오온('색수상행식'온)으로 환원된다.>
<각주 : 사마타samatha는 어느 한 가지 대상에 사띠를 고요히 집중하는 것이고, 위빠사나vipasannā는 여러 가지 대상을 사띠하여 이어보면서 여실히(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지만, 우선은 사마타가 어느 정도 계발되어야 위빠사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사마타에 의해서 계발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바탕으로, 지금(현재순간) 수행자에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들(오온, 色聲香味觸法), 달리 표현하면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이어보면서(이어서 사띠하면서) 여실히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각주 : 경전에 설해진 신수심법 네 가지 큰 분류 아래의 16개 소분류 수행주제들은 모두 사띠하여 '이어보면서[anupassi; 이어서 사띠하면서]' 머무는 대상이다.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로 수행을 시작하고, 사띠가 어느 정도 수준의 힘을 가지고 준비된 이후에는 소분류 수행주제들 중에서 수행자의 성향에 따라 대상을 선택하여 수행을 진행한다.
단,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의 소분류 수행주제들은 신념처身念處의 소분류 수행주제인 몸의 자세나 동작 등의 경우보다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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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몸의 자세(iriyāpatha;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수행자는
걸어갈 때는 '걸어간다'라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서 있을 때에는 '서 있다'라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다'라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누워 있을 때에는 '누워 있다'라고 분명히 알아차린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이어보면서(이어서 사띠하면서) 머문다.
몸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이어보면서 머문다.
몸에서 일어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이어보면서 머문다.
몸에서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이어보면서 머문다.
수행자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 정착된다."
<각주 : 1.2절의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 확립 정착된다."라는 후렴 경문은 1.1절의 '호흡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에서와 같은 맥락이다. 단지 '호흡'에서 '몸의 자세'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이하 절에서 후렴 경문은 생략한다.>
1.3 몸의 동작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수행자는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들아 갈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옷을 입고 발우(밥그릇)를 들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에도, 말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닌다.
이외의 다른 몸동작이 있을 때에도, 그러한 동작을 그때그때 분명히 알아차린다."
1.4 몸의 거친 요소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 부정관不淨觀 수행
"수행자는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그리고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이 몸은 살갗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직접 관찰한다. 수행자는 자신의 육신을 다음과 같은 거친 요소로 직접 관찰한다. 즉, '이 육신은 머리카락, 몸의 털, 이, 손톱, 발톱,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내장, 내장의 내용물, 위장, 위장의 내용물,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혈액, 땀, 지방질, 눈물,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1.5 몸의 (네 가지) 기본 요소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수행자는
자신의 육신을 (네 가지) 기본 요소(또는 작용)로 직접 관찰한다. 즉, '이 육신은 지[地; pathavi]의 기본 요소, 수[水; apo]의 기본 요소, 화[火; tejo]의 기본 요소, 풍[風; vayo]의 기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각주 : 육신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한문 경전에서는 ‘사대색四大色 또는 사대四大’라고 번역한다.
대색大色은 부처님이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한역한 것이다. 여기서 색色은 ‘물질’을 의미하는데 루빠rūp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루빠rūpa(물질, 물질로 이루어진 물체)는 색깔(色)과 형태(모양, 형체)를 지니는 것이 그 특징이다”라는 부처님의 설법(법을 설명함)에 따라, 표의문자의 특성상 한 글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루빠를 ‘색色’이라는 한 글자로 한역했다.
부처님이 설(설명)하신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물질[물체, 육체, 몸; rūpa]을 형성하는[bhūta] 기본[mahā] 요소(또는 작용)’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하다.
부처님은 사마타[사마디 바와나;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닦는) 수행]로 계발된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사용해서 신수심법(달리 표현하면 자신과 세상 또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을 이어보면서 여실히(있는 그대로) 통찰(깊이 관찰)하여, 자신과 세상(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실상(실제 상태, 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을 발견하셨다. 그리고 나서 설(설명)하신, ‘물질을 형성하는 기본 작용(또는 요소)’은 (1) 地[pathavi] 작용, 무거움(중력 또는 질량) 작용, (2) 水[apo] 작용, ‘수축, 응축, 인력, 잡아당김’ 작용, (3) 風[vayo] 작용, ‘팽창, 척력’ 작용, (4) 火[tejo] 작용, ‘변화, 열’ 작용이다.
물질의 기본 구성체(물질의 최소단위; 부처님이 사용하신 용어로는 깔라빠kalāpa)인 원자도 물질이기 때문에 극미하지만 얼마간의 ‘地[pathavi; 무거움 또는 질량] 작용‘이 있다. 이 무거움(질량, 地) 작용은 다른 작용, ’水[apo; 수축 인력] 작용’에 의해서 잡아당겨져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또 다른 작용, ‘風[vayo; 팽창 척력] 작용’에 의해서 어느 정도 밖으로 당겨져 형체적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또 다른 작용, ‘火[tejo; 변화] 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매 순간 변하고 있는 것이다.
'상주불변(고정불변; 늘 동일)하고 독자적인(스스로 독립적인) 존재'(실체)로서의 원자는 없다. 원자(깔라빠)로 구성된 모든 물질(물체, 육체)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 그리고 깔라빠(원자)로 구성된 모든 물질(루빠; 물체, 육체, 몸)은 실체(상주불변하고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미시(찰나)-일상-거시(성주괴공, 생로병사)적으로 매 순간 생멸(생기 소멸) 변화하며 순환(삼사라)하는 ’사대四大[地水火風] 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흐름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이다
이처럼 사대四大[地水火風] 작용이 ‘인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면’(연기 작용하면, 인연 화합하면)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라고 인식된다.>
1.6 죽은 몸(시체)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 부정관不淨觀 수행
<경문(묘지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관찰하는 내용) 생략>
<각주 :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묘지에서 하는 부정관 수행을 할 수가 없다. 고대 인도에서처럼 시체를 그대로 묘지에 버리는 장례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묘지에서 시체를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태국에서는 수행자(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들에게 의과 대학의 인체 해부시간에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시체의 썩어 가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수행을 할 수는 없으나, 전신해골을 전시해 놓아 백골관을 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수행처는 태국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태국의 동북 지역의 한 수행처에는 백골과 함께 생전의 사진(30대 중반에 죽은 여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방콕의 교외에 있는 한 수행처에서는 죽은 시체 네 구(남녀 각각 두 구)를 백골이 아닌 미라로 만들어서 수행자들이 관찰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죽은 시체나 백골을 보면서 하는 수행의 전통은 현재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그다지 하지 않고 있다.
죽은 몸(시체)에 대한 사띠 수행[부정관 수행]의 핵심은 수행자가 자기 몸의 속성도 이(시체)와 같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아서 육신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극복하는 데에 있다. 묘지에서의 부정관 수행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사념처四念處(네 가지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증에서 신념처身念處(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에 대한 설명이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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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느낌(受)에 대한 사띠(念)의 확립 정착(處) : 수념처受念處
"수행자는 현재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알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육체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육체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으면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각주 : 느낌은 대상(색성향미촉법)에 대한 감각 기관(기능)의 반응이다. 느낌에는 좋은 느낌, 나쁜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또한 느낌들은 세간적인 느낌과 출세간적인 느낌으로 대별된다. 출세간적인 느낌이란 선정 삼매 상태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느낌들에 대해 분명히 사띠하여 이어보는 것이 ‘느낌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수행이다.>
<후렴 경문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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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음(心)에 대한 사띠(念)의 확립 정착(處) : 심념처心念處
"수행자는 현재
탐심(갈망, 감각적 욕망, 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을 탐심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심이 없는 마음(無貪心)을 탐심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진심瞋心(혐오, 성냄, 미움, 두려움)이 있는 마음(有瞋心)을 진심瞋心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진심瞋心이 없는 마음(無瞋心)을 진심瞋心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치심癡心(갈망과 혐오에 대한 집착,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有癡心)을 치심癡心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치심癡心이 없는 마음(無癡心)을 치심癡心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졸음이나 몽롱한 상태로 인해) 침체된 마음을 침체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며, (심적 동요로 인해)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각주 : 앞 절에서 열거한 몸의 자세나 동작 등을 지식(교학) 차원에서 명백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사실 위에서 열거한 마음의 상태를 지식(교학) 차원에서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현재 마음 상태를 객관적으로 명확히 '사띠하여 이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의 힘이 약한 상태에서는 탐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 탐심을 다루는 법에 능숙하지 못하므로 탐심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하지만 수행의 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면, 탐심이 일어나는 순간 탐심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수행에 의해 어느 정도 길러지고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에 새겨진 지혜의 힘으로 탐심의 진행은 차단된다. 이것이 수행에 의해 길러진 사띠의 힘과 수행에 의해 길러지고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에 새겨진 지혜의 힘에 의해서 번뇌가 무의식적으로 제어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연습, 훈련, 수련)을 하다보면, 거친(rough, 얕은, 피상적인, 투박한, 무딘, 흐릿한, 들뜬, 느린, 미숙한, 불완전한) 사띠에서부터.. 점점 더 미세한(fine, 깊은, 명확한, 섬세한, 세밀한, 정밀한, 예리한, 또렷한, 분명한, 고요한, 빠른, 능숙한, 완전한) 사띠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준의 사띠가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얕은(피상적인, 무딘, 흐릿한, 미숙한, 불완전한) 지혜에서부터.. 점점 더 깊은(명확한, 예리한, 분명한, 능숙한, 완전한) 지혜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준의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된다.
탐심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탐심이 없는 마음과 같은 긍정적인 마음도 분명히 알아차려야 한다. 즉, 탐심을 알아차린 후 탐심이 사라졌으면, 탐심이 사라졌음을 이어보면서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부정적인 마음들은 사라지고, 긍정적인 마음, 탐심이 없는 마음, 청정한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긍정적인 마음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사라짐으로써 생겨난 긍정적인 마음도 집착의 대상이 된다면 결국 또 다른 탐심(부정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마음도 긍정적인 마음도 거부나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사띠(마음챙겨서 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때, 수행은 제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경험되는 것은 알아차림의 대상이지, 집착의 대상은 아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없어지고, 긍정적인 요소가 생겨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요소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바른 길이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좋은 마음의 순간들이 늘어나는 것은 수행이 향상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럴 때 향상된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띠를 지니는 것이 수행을 계속 바른 길로 인도하는 방법이다.
순간순간의 마음을 잘 살피고 사띠(마음챙겨서 알아차림)를 굳건히 지닐 때, 부정적인 마음은 점점 더 사라지고, 마음은 점점 더 청정해지며, 점점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사념처 수행, 즉 신수심법에 대한 사띠를 확립하고 정착하는 수행의 이로움은 바로 스스로 청정해지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지혜를 확립해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얻은 깊은 지혜의 힘으로 완전한 바른 깨달음(정각)과 최상의 행복인 열반(Nibbana; 완전한 행복)을 증득하는데 있는 것이다.>
"(선정, 삼매 수행으로 색계 삼매나 무색계 삼매 상태에 이르러) 커진 마음(大心)을 커진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며, (선정 수행을 닦지 않아서 욕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커지지 않은 마음을 커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색계 삼매나 무색계 삼매 수행으로) 향상된 마음을 향상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며, 향상이 안 된 마음을 향상이 안 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선정에 의해) 고요히 집중된 마음을 고요히 집중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며, 고요히 집중이 안 된 마음을 고요히 집중이 안 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선정 수행에 의해 일시적으로, 또는 사념처 수행을 완성하여) 번뇌로부터 벗어난 마음(해탈심解脫心)을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며,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非解脫心)을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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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法에 대한 사띠(念)의 확립 정착(處) : 법념처法念處
"어떻게 수행자가 법에서 법을 이어보면서(이어서 사띠하면서) 머무는가?"
4.1 다섯 가지 장애[오개五蓋; 다섯 덮개]
"수행자는
법法으로서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이어보면서(이어서 사띠하면서) 머문다."
"수행자는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생겨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면 그것을 이어보면서 분명히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이어보면서 분명히 안다."
"수행자는
내적으로 '악의惡意(혐오, 미움, 분노)'가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惡意)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
<'악의, 혼침과 졸음, 들뜸, 회한, 회의적 의심'에 대한 반복 경문 생략>
... ...
<각주 : '감각적 욕망, 악의惡意(혐오, 미움,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흥분, 동요)과 회한(후회, 근심, 걱정), 회의적 의심'을 통칭하여 다섯 가지 장애[오개五蓋; 다섯 덮개]라고 한다. 경문은 이 다섯 가지에 대해 반복된다.>
<주석 : "내적으로 ... 확립 정착된다."라는 후렴 경문도 1.1절의 호흡에서와 같은 맥락으로 반복된다. 단지 '호흡'에서 '감각적 욕망, 악의惡意(혐오, 미움,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흥분, 동요)과 회한(후회, 근심, 걱정), 회의적 의심'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후렴 경문은 계속 생략한다.>
<주석 : 이하 법法으로서의 오온五蘊(생명체를 구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다섯 무더기, '색.수.상.행.식' 무더기; 세상의 모든 물질적, 정신적 요소는 오온으로 환원됨), 육내외처六內外處(여섯 가지 감각 기관/기능과 그 대상), 칠각지七覺支(정각으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요소)와 사성제四聖諦(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분명히 사띠하여 이어보면서 머문다.
법法으로서의 '오개, 오온, 육내외처(또는 십이처), 칠각지, 사성제'가 설해져 있는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법념처法念處] 수행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교리(설법 또는 교학)들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수행을 해 나가면서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주석: 다섯 가지 덮개(수행의 장애)를 극복하면서,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사띠하여 이어보면서 머무는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면, '정각으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요소'[칠각지七覺支]들이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고요히 안정되면서 수행에 대한 확신도 강해진다. 사띠라는 삼보장가[염각지念覺支]가 더욱 깊어지고 예리해지고,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라는 현상(法)에 대한 위짜야[vicaya, 擇; 조사, 분석, 탐구, 고찰]의 삼보장가[택법각지擇法覺支]가 심화된다.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 좋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더 정진에 힘을 가하게 된다[정진각지精進覺支]. 마음에서 (선정 삼매의 성취에 의해서 생겨난) 강렬한 기쁨[희열, 喜; 삐띠]을 경험하게 되고[희각지喜覺支], 마음과 몸은 점점 더 편안해지고 안정된다[경안각지輕安覺支]. 편안해지고 안정된 몸과 마음은 더욱 더 고요한 집중[사마디, 定; 선정 삼매]을 이루게 되며[정각지定覺支],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심신의 온갖 현상들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마음의 평정[우뻭카, 捨; 탐진치에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이 한시적으로 유지된다[사각지捨覺支]
칠각지 중에서 뒤의 네 가지는 선정(초선정~제4선정) 삼매의 성취와 관련된 것들이다.>
...
...
4.5 사성제四聖諦[네 가지 고귀한 진리]
"수행자는
법法으로서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를 이어보면서(이어서 사띠하면서) 머문다.
수행자는
'이것이 고苦[dukkha]다'라고 있는 그대로(여실히; yathābhūtaṃ) 이어보면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고집苦集[dukkha-samudayo; 苦의 발생, 원인, 시작, 근원]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이어보면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고멸苦滅[dukkha-nirodho; 苦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이어보면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고멸苦滅(dukkha-nirodha)로 가는(gāminī; 去) 길걸음[paṭipadā; 行道, 道跡]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이어보면서 분명히 안다."
...
"수행자들이여, 무엇이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또는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즉 고苦dukkha의 소멸nirodha로 가는 길걸음paṭipadā(行道, progress, practice, 실천)의 고귀한ariya 진리sacca'인가?
그것은 바로 '팔지성도八支聖道(또는 팔정도八正道, ariyo aṭṭhaṅgiko magga), 즉 고귀한ariyo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aṭṭhaṅgiko) 길magga'이니, 그 여덟 부분은
정견正見[sammā diṭṭhi; 바른 봄/관찰/통찰, 앎/이해/견해],
정사유正思惟[sammā saṅkappo; 바른 생각/사유],
정어正語[sammā vācā; 바른 말과 글],
정업正業[sammā kammanto; 바른 (신구의身口意) 행위],
정명正命[sammā ājīvo; 바른 삶/생활/셍계],
정정진正精進[sammā vāyāmo; 바른 노력/정진],
정념正念[sammā sati; 바른 사띠],
정정正定[sammā samādhi; 바른 삼매]이다."
<각주 : 길[magga; 道, path]과 길걸음[paṭipadā; 行道, progress, practice]
팔정도八正道[aṭṭhaṅgiko sammā magga]는 열반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길[magga; 道]이면서, 동시에 그 길을 걸어감 즉 길걸음[paṭipadā; 行道]이다. 열반으로 향하는 길[magga; 道, path, way, road]이 있고, 바로 그 길을 걸어가는 길걸음[paṭipadā; 行道, 道跡, progress, line of conduct, practice, 실천]에 의해 열반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열반으로 향하는 바로 그 길을 직접 걸어갈 때에만 비로소 열반으로 이끌리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신 팔정도는 길이면서 동시에 길걸음인 것이다.
참고로 중도中道는 부처님이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majjhimā[中, middle] paṭipadā[길걸음; 行道, progress, practice, 실천]'를 한문(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중행도中行道라고 한문으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보다 유사할 것이다). 'majjhimā paṭipadā'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양 극단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길걸음(길을 걸어감)'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하다.>
...
"비구(수행자)들이여, 무엇이 '바른 삼매[정정正定; 삼마sammā 사마디samādhi]'인가?
여기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불선한 것(不善法)들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의 탐색적 작용[위딱까vitakka]와 회귀반성적 작용[위짜라vicāra]이 있는(아직 남아있는) 상태에서, (세속, 감각적 욕망 또는 신체감각을) 멀리 벗어남에서 생긴 희열[삐띠pīti]과 행복[수카sukha]이 있는, 그리고 (그 삐띠와 수카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삼마사띠와 삼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a; 마음의 전일성]을 갖춘 첫 번째 선정(초선初禪, 초선정 삼매)을 성취하여 머문다."
<각주 :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 수행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마음의 다섯 가지 요소(현상 또는 작용)이 있다. (맛지마니까야中部 43 『유명대경有明大經』 MN I, 294)
(1) 위딱까vitakka(심尋; 탐색적 작용)
(2) 위짜라vicara(사伺; 회귀반성적 작용)
(3) 삐띠piiti(희喜; 희열)
(4) 수카sukha(락樂; 행복)
(5) 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a(심일경성心一境性)>
<각주 : 부처님은 삼매를 색계 삼매(호흡과 같은 물질적 요소를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와 무색계 삼매(허공과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로 구분하셨는데, 특히 색계 삼매를 자나jhāna(선禪; 선禪은 자나..선나..선으로 변천된 자나의 한문 음사)라고 칭하셨다.
한문 번역 경전에서는 자나(색계 삼매)를 대개 선禪 또는 선정禪定이라고 번역하는데, 정定(고요할 정定)은 사마디samādhi(삼매三昧는 사마디의 한문 음사)를 한문으로 뜻 번역한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선정禪定은 '자나사마디'(선삼매禪三昧)다. 이하 자나(색계 삼매; 호흡과 같은 물질적 요소를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를 '선禪 또는 선정 또는 선정 삼매'로 표기함.
자신이 든 삼매가 부처님이 설(설명)하신 초선정 삼매인지 아닌지는 마음 상태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현상 또는 작용)가 있는지를 점검하고 확인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진정 무엇인가(어떤 것인가)는 초선정 삼매에서 나온 직후에 초선정 상태를 반조返照(되돌아 비추어 봄)해서 스스로 확인하고 알아내야 한다.
(1) 위딱까vitakka, 심尋(찾을 심), 심구尋求(찾을 심 + 구할 구) : (니밋따가 아니라) 지복至福[삐띠와 수카]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여 움켜쥐는(심구尋求하는) 마음의 탐색적 작용. 위딱까는 일종의 집착 작용이기도 하다.
니밋따nimitta는 초선정 삼매에 진입하기 직전의 마음 상태에 대한 물질적 표상을 말한다. 대부분의 경우 초선정 삼매 상태에 진입하기 직전에 니밋따가 수행자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사리뿟따(사리불, 사리자) 존자가 말했듯이 경우에 따라서는 니밋따 없이 초선정에 들기도 한다. (사마타 수행이 익숙해져서 선정의 자유자재를 이루면 손가락 튕길 사이에 입정할 수도 있다)
니밋따가 나타나면 집중대상(호흡 등의 까시나)은 니밋따로 옮겨진다. 초선정 삼매에 들면서 니밋따는 사라지고 집중대상은 지복至福(삐띠와 수카)으로 옮겨진다.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아비담마)에는 니밋따가 초선정~4선정 삼매 상태에서도 계속 있고 이 니밋따를 계속 사띠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부처님은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다.
(2) 위짜라vicara, 사伺(엿볼 사), 사찰伺察(엿볼 사 + 살필 찰) : 위짜라는 위딱까(일종의 집착 작용)에 의해 멀어지는 초선정의 지복을 다시 무의식적으로 집착을 반성하고(사찰伺察하고) 위딱까를 놓아버림으로써 지복으로 반복하여 되돌아가는 회귀반성적 작용.
위딱까-위짜라 반복 과정은 초선정 삼매 상태에서 아직 남아있는 마음의 미세한 흔들림(진동, 동요)이다.
(3) 삐띠piti, 희喜, 희열喜悦 : 고요한 희열, 기쁨. (수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다소 거친 기쁨)
(4) 수카sukha, 락樂, 안락安樂, 행복幸福 : 깊고 고요한 행복, 평온하고 아늑한 행복감.
(5) 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a, 심일경성心一境性(마음의 전일성) : 마음이 완전히 한 곳으로 고요히 모여 있는 상태, 순수 고요집중. 자아自我(스스로自 '나我'라는) 의식 사라짐; 고요한 멈춤, 시간의 멈춤, 시공時空 초월, 영원함, 궁극성, 비이원성非二元性(또는 무분별) 등으로 느껴지기도(경험되기도) 한다.
초선정에서는 '지복至福(지극한 행복), 즉 삐띠(고요한 희열; 다소 거친 기쁨)와 수카(고요한 행복)'에 대한 '미묘하고도 확실한 자각[삼마사띠와 삼빠자나]의 심일경성[찟따-에깍가따]'을 이루며 삐띠와 수카는 구분되지 않는다. 세 번째 선정(三禪, 제3선정 삼매)에 도달해서야 이 둘(삐띠와 수카)이 분리되고 수행자는 3선정 삼매에서 나온 후에 반조를 통해서 삐띠와 수카를 구분하게 된다.
‘삐띠와 수카’는 물질세계(오감각의 세계, 감각적 욕망의 세계-욕계欲界, 또는 속세)의 어떤 것도 능가(초월)하는 ‘지복至福(지극한 행복, 더 없는 행복)’으로 경험된다. 마음 상태에 위의 다섯 요소가 존재하고, 물질적인 오감각(신체감각)의 인식(전오식前五識)을 포함하여 그 외의 어떤 것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때가 초선정 삼매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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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정 삼매는 일상의식으로는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지극한 행복(지복至福), 신성한 황홀경, 마음의 청정함, 청정한 성스러움, 고요한 멈춤, 자아自我(스스로自 '나我'라는) 의식 사라짐, 비이원성(무분별), 궁극성, 시간의 멈춤, 시공(시간-공간) 초월 등의 느낌이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체험이므로, 그 체험(느낌)은 수행자를 압도한다.
이러한 초선정 또는 유사 근접 삼매의 체험에 압도되어 미혹한(현혹된) 사람은 이 체험을 자신이 믿는 어떤 '신(절대자,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하느님, 브라만,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의 거룩한 불의 신 .. 등)과의 합일 또는 접신, 신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종교religion적 신비체험)이나 축복' 따위로 오해하기도 한다.>
<각주 : 부처님은 선정 삼매를 닦는 수행을 위한 집중 대상은 반드시 호흡과 같이 ‘욕망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바르게 검증된 대상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비록 고귀한 어떤 대상, 어떤 신이나 신격화된 부처의 형상이라 할지라도) 자칫하면 그릇된 ‘욕망과 집착의 삼매’가 되어버려서 자신도 모르게 삶을 망치게 될 수도 있다.
예컨대, 무속종교(샤머니즘)의 장군신과 같이 사이비 종교에서 만들어낸 어떤 신의 형상을 대상으로 한 유사(근사) 삼매 상태(소위 접신 상태 등)의 경험(초자연적인 신비체험, 종교religion적 신비체험)에 현혹되어서 거기에 빠지면 삶을 망치게 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불의 신을 섬기는 조로아스터교는 BC 6~7세기 경에 고대 페르시아 지역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짜라투스트라가 창시한 종교다. 짜라투스트라는 샤머니즘적 다신교가 주류이던 당시 세계에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신 신앙을 정립하였으며 그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불을 숭배한다고 해서 배화교拜火敎라 불렸다. 참고로 부처님의 제자 중 가섭 삼형제도 한 때 불의 신을 섬기는 배화교(인도에 전파된 조로아스터교)의 지도자였다.
이들은 집중하여 몰입하는데 효과가 좋은 불을 집중 대상으로 한 개인적, 집단적 근사(유사) 삼매 체험을 자신들이 섬기는 거룩한 불의 신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신비체험(종교religion적 신비체험)의 종교의식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의 신을 증거하고 자신들의 신에 대한 신앙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조로아스터교(배화교) 뿐만아니라 샤머니즘의 샤먼(무당)이래로 다신교(브라만교, 힌두교)이든 유일신교이든 자신들이 믿는 신을 증거하고 자신들의 신에 대한 신앙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여러 형태의 근사(유사) 삼매 체험이 활용되었다. 만약 개인적 또는 집단적인 여러 형태의 근사(유사) 삼매 체험(그들이 주장하는 종교religion적 신비체험)이 없었다면 여러 형태의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믿음)과 그 신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섬기는 종교religion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각주 : 부처님은 '바른 삼매'[정정正定, 삼마 사마디; 바른 몰아 고요집중]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수행(수련, 훈련)을 '사마디(삼매) 바와나, 삼매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 사마타'라 칭하셨다.
부처님은 팔정도를 '바와나bhāvanā(계발 수행, 계발하는 수행, 닦는 수행)'의 측면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여 가르치셨는데, '바른 삼매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을 지칭하는 사마타는 '정정진(바른 노력/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바와나를 통칭한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계발되는 정정正定(삼마 사마디; 바른 삼매) 상태의 경험은 절대자, 신,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하느님, 브라만신,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거룩한 불의 신 .. 등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종교religion적 신비체험)이 아니라,
언제하든, 어디서하든, 누가하든 상관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과학적 경험처럼, 언제하든(2500년 전에 하든 지금하든), 어디서하든(인도에서하든 한국에서하든 미국에서하든), 누가하든 상관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마음의 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대한 경험이므로 일종의 과학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은 아니다.
바른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들어가면 외부의 오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신체 감각)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전오식 사라짐; 오감각으로부터의 해탈?) '나(我) 또는 내 몸'이 사라진 듯이 느껴진다. 무아無我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自)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자아의식, 아상我相)이 바른 삼매 상태에서는 한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기서 몰아沒我는 아상我相('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 또는 자아의식이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잠길 몰沒) 상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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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는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흔들림, 진동, 동요)가 가라앉음으로 인해 마음이 (더욱 고요한) 평온하고 집중된 상태가 되어, 위딱까-위짜라가 없는 삼매에서 생긴 희열[삐띠]과 행복[수카]의 정결浄潔[sampasadana]함이 있는, 그리고 (그 삐띠와 수카에 대한) (더욱)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삼마사띠와 삼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a; 마음의 전일성]을 갖춘 두 번째 선정(二禪, 제2선정 삼매)을 성취하여 머문다."
<각주 : 초선정 삼매를 이루는 마음 상태의 다섯 요소(현상 또는 작용)인 ‘위딱까, 위짜라, 삐띠, 수카, 심일경성[찟따에깍가따]’ 중에서 ‘마음 작용의 미세한 요동(흔들림, 동요)인 위딱까와 위짜라’를 가라앉히고, 더 깊고 고요한 ‘삐띠, 수카, 심일경성’, 이 세 요소만 남게 되면 그때가 2선정 삼매다.>
"수행자는 (상대적으로 거친) 희열[삐띠]이 가라앉음으로 인해 마음이 (더욱 더 고요한) 평정[우뻭카upekkha]한 상태에 머문다. 성인聖人(예류자~아라한)들이 말하는 '평정[捨; 우뻭카]에서 사띠[念]를 갖추어 행복[樂; 수카]에 머문다[捨念樂住]'고 하는, (더욱 더 고요한) 평정심[우뻭카]에서 오는 행복감[수카]에 대한 (더욱 더)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삼마사띠와 삼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갖춘 세 번째 선정(三禪, 제3선정 삼매)을 성취하여 머문다."
<각주 : 2선정 삼매 상태에서의 상대적으로 거친 삐띠(희열)를 가라앉히고, 더 고요하고 깊은 집중이 이루진 가운데 더욱 더 고요하고 깊은 수카(행복감)와 그 수카에 대한 심일경성(고요집중의 사띠)만 남게 되면 그때가 3선정 삼매다.>
"수행자는 이미 기쁨, 슬픔, 만족, 불만족의 느낌이 완전히 끊어졌고, 이제 괴로움[둑카]도 즐거움[행복; 수카]도 떠나서(벗어나서, 뛰어넘어서) (둑카와 수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우뻭카와 사띠의 청정함[upekkha-sati-parisuddhi; 捨念淸淨]이 있는 (또는 온전히 청정한 평정심에 의한 사띠의 청정함이 있는), 그리고 (온전히 청정해진) 평정심[우뻭카]에 대한 (온전히)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삼마사띠와 삼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갖춘 네 번째 선정(四禪, 제4선정 삼매)을 성취하여 머문다.
수행자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정정正定; 삼마sammā 사마디samādhi]'라고 말한다."
<각주 : 3선정 삼매 상태에서의 ‘수카’마저 가라앉히고, 더욱 더 고요한 상태에서 온전히 청정해진 평정심[우빽카]과 그 평정심에 대한 극도로 고요히 집중된 심일경성(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만 남게 되면 그때가 4선정 삼매다.>
<각주 :부처님은 사마타[사마디 바와나;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를 위빠사나라 칭하셨다.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 즉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깊은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사유)를 통해서 통찰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인 위빠사나에 필요한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 평정한 마음 상태), 즉 탐(갈망, 탐욕)·진(혐오, 성냄)·치(갈망과 혐오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평정한 마음 상태가 제 4선정 삼매에서 극대로 계발된다.
그러나 제 4선정 삼매에서 극대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도 삼매에서 나온 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잦아들어 사라지고 다시 탐진치와 번뇌가 되살아난다. 선정 삼매에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는, 수행자가 들었던 선정 삼매의 깊이와 수행자가 처한 주변환경(경계)에 따라 다르지만, 제 4선정 삼매에 들었다 나온 경우 길게는 수 일 동안 '한시적'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삼매에서 나온 후 법열法悅(삼매 체험으로 생기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취해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빽카(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를 이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법法)를 여실히(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통찰지(통찰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을 해야만 한다.>
<각주 : 사마타 후에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해 여러 가지로 깊이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하는 위빠사나를 하다가 몸이 피곤해지거나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 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가 약해지거나 또는 더 깊은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가 필요해지면 수행자는 하시라도 사마타를 해야 한다.
부처님은 팔정도 바와나(실라-사마타-위빠사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여기서 바와나bhāvanā는 '계발 수행, 계발하는(닦는) 수행'을 뜻하는 고대인도어다. 팔정도 바와나, 즉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를 한문 번역경전의 표현으로 말하면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고 부처님이 사용하신 고대인도어로 말하면 '실라•사마타•위빠사나'다
요컨대, 팔정도를 닦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의 맨 처음 단계(준비 단계; 교학 단계)인 '지식(교학) 차원의 혜(慧, 빤냐; 정견·정사유)를 닦는 수행'으로 계발된 지식(교학) 차원의 이해(견해, 또는 지혜)를 바탕으로, 5계 등의 계율을 지키는 실천을 포함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를 닦는 수행’을 자발적으로(스스로) 실천하여 청정한 생활을 닦고 여섯 감각기관(6근)을 단속하여 어느 정도(바른 삼매-정정正定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를 계발할 수 있을 정도) 6근('안이비설신의'근, 달리 표현하면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다.
어느 정도 닦아진 실라(즉 초선정 삼매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청정해진 6근, 달리 표현하면 어느 정도 청정해진 몸과 마음)를 바탕으로 사마타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사마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가 계발된다. 발전향상된 사마타는 실라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키고, 발전향상된 위빠사나는 사마타와 실라를 더 발전향상시키며, 발전향상된 실라는 다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킨다. 이렇게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실라-사마타-위빠사나)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된다.>
<각주 : 선정의 자유자재
사마타(바른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에 숙달된 수행자로서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머무는 사람이라면 손가락 한 번 튕길 사이에도 입정入定(선정 삼매에 듦) 할 수 있다고 한다. 심신心身이 안정된 상태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깊은 잠에 드는 사람과 유사한 능력(?)인 셈이다
부처님 당시의 아라한들은 모두 손가락 한 번 튕길 사이에 입정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자재한 선정 능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경전에 기록된 선정의 자유자재는 아래와 같다
• 전향의 자유자재 : 언제든 선정의 조건들로 자유자재하게 전향함
• 입정의 자유자재 : 언제든 자유자재하게 선정에 입정함
• 머묾의 자유자재 : 언제든 선정에 들어 자유자재하게 머물 수 있음
• 출정의 자유자재 : 언제든 자유자재하게 선정에서 나올 수 있음
• 반조의 자유자재 : 언제든 자유자재하게 선정조건들과 선정상태를 반조함
어쩌다 한 번 경험하는 선정 삼매는 바와나-빤냐[수행 지혜 또는 통찰 지혜; 신수심법에 대한 미시-일상-거시적인 통찰(깊은 관찰) 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수행 지혜 또는 통찰 지혜]를 계발하는데 쓸모가 없다.
사마타를 숙달시켜서 선정의 자유자재를 계발하면 할수록 위빠사나(사마타로 계발된 초강력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사용하여 깊은 정견-정사유를 계발하는 수행)를 통해서 바와나-빤냐(수행 지혜, 통찰 지혜)를 더 발전 향상시킬 수 있고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 전체가 더 발전 향상된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실라-사마타-위빠사나)을 완성하고 정각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선정의 자유자재를 계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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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념처四念處(신수심법 네 가지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수행의 이익 : 사념처四念處 수행에 의한 깨달음의 보증
"수행자들이여,
누구든 사념처 수행을 위에서 예시한 방법으로 7년간 실천한다면 그는 다음 두 가지 과果 중 하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이루거나, 아직 집착이 다 가시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오하분결五下分結)가 다한 불환과不還果(아나함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7년은 고사하고 6년 동안 실천한다면 … 5년동안 … 4년 동안 … 3년 동안 … 2년 동안 … 1년 동안 실천한다면, 그는 이 생에서 아라한과를 이루거나, 아직 집착이 다 가시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가 다한 불환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1년은 고사하고 7개월 동안 실천한다면 … 5개월 동안 … 4개월 동안 … 3개월 동안 … 2개월 동안 … 1개월 동안 … 반 달 동안 실천한다면, 그는 이 생에서 아라한과를 이루거나, 아직 집착이 다 가시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가 다한 불환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반 달은 고사하고 1주 동안 실천한다면, 그는 이 생에서 아라한과를 이루거나, 아직 집착이 다 가시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가 다한 불환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이 수행은 중생들의 삶을 정화시키고, 근심과 슬픔과 번민을 극복하게 하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바른 길로 이끌어 마침내 무상정등각(위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 줄임말로 정각)을 증득하게 하고 열반(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ekayano maggo)’이니, 이름하여 (신수심법) '네 가지(四)에 대한 사띠sati(念) 빳타나paṭṭhāna(處; 확립 정착)'(사념처四念處) 수행‘이다.
이로서 사념처四念處 수행에 대한 가르침(설법)이 끝났다. 수행자(출가, 재가 수행자;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은 이 가르침을 듣고 환희에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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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념처경大念處經(마하Mahā 사띠-빳타나Sati-Patthāna 숫따Sutta; 사띠 확립 정착에 대한 큰 경), D22』과 『념처경念處經(사띠-빳타나 숫따; 사띠 확립 정착 경), M10』은 ‘사념처四念處 수행’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설법)을 기록한 경전이다.
'사념처四念處 수행'은 아나빠나사띠(호흡에 대한 사띠) 수행을 기초 토대로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사마타-위빠사나 상호의존) 방식으로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가지(四)에 대한 사띠(Sati; 念)를 확립 정착(Patthāna; 處)하는 수행법이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실라-사마타-위빠사나)의 실實수행(실제 수행, 본격적인 수행)인 '사념처 수행'은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에 대해 지속적으로 '마음챙겨 알아차림'으로써 경험하는 현상들의 본질을 깨달아 정각(해탈, 열반)을 증득하는 수행법이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포스팅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913880552257844&id=100009077529459' 을 참조해 보세요)
부처님은 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정각(해탈, 열반)에 이를 수 있는 수행 기간에 대해서 설하시면서, 사념처 수행에 의한 무상정등각(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보증하신다.
7년이라는 기간과 7일이라는 기간의 차이는 ‘개개인의 근기; 즉 살아오면서(윤회하면서) 겪은 경험(모든 일상적인 경험과 수행 경험), 그 경험에 의해 형성된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 가지 능력(이해력-이치를 이해하는 능력, 인내력, 집중력..) 등등의 차이’와 '얼마나 철저하고 치밀하고 바르게 수행[수련, 훈련, 식카띠sikkhati; trainning oneself, 자신을 훈련시킴, 스스로를 훈련시킴]을 하는가 하는 개개인의 수행의 차이’에 있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을 당시에는 바보라 불릴 정도로 일반인에 비해 지적능력이 매우 부족했던 쫄라빤따까(일명 바보 주리반특)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 년 간 수행하여 정각을 증득한 사람(아라한)이 되었다. 사리뿟따(사리불, 사리자; '사리'라는 여인의 아들子)는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15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고, 이미 네 단계 선정의 자유자재와 네 단계 무색계 삼매를 모두 이룬 수행 상태였다고 추정되는 바히야 따루찌리야는 탁발하러 가시는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하여 듣고 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수행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이나 아나함이 될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선택이다. 부처님은 길을 가리키는 분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누구도 그 길을 대신 가줄 수는 없다. 그 길은 각자 자신의 발로 한발 한발 걸어 나아가야 하는 것(길걸음)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각을 증득한 사람(아라한)이 되었다 (이른바 십대제자를 포함한 천이백 아라한) 당시의 인구 추정치와 역사적 자료를 참고한 학자들의 추정치에 의하면 부처님이 활동하셨던 갠지스강 중북부 지역에서 사문(재가자, 출가자를 포함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수효가 약 십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 중에서 약 천 명 정도(백 명당 한 명 꼴)를 자신과 같은 아라한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부처님도 아라한이다.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아라한).
부처님이 펼쳐 놓으신 바른 수행에 대한 바른 가르침[正法]이 오늘날에도 바르게 전승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정각으로 가는 올바른 길을 안내하기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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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좌) : 영국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부처님 초상화
사진(우상) : 십대 제자
사진(우중) : 부처님의 일생
사진(우하) : 법륜法輪(법의 바퀴), 부처님은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을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구르는 것'에 비유했다.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법륜(법의 바퀴)은 훗날 불교(부처님 가르침)의 심볼(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