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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정념(正念; 바른 사띠)을 계발하는 수행의 실천


•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가르침(손가락에 비유)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들지 말고
지금 현재순간 정념(삼마 사띠)의 대상(달, 호흡 ..)만을
삼마(正; 바르게) 사띠(念; 전념하여 알아차림)하라는
정념(正念) 수행의 실천을 부처님께서 ‘말’로 강조한 가르침

• 염화시중(拈華示衆) : 꽃(華)을 집어(拈)들어 대중(衆)에게 보임(示)

지금 현재순간 정념(삼마 사띠)의 대상(꽃, 호흡 ..)만을
삼마(正; 바르게) 사띠(念; 전념하여 알아차림)하라는
정념(正念) 수행의 실천을 부처님께서 ‘행동’으로 강조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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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여섯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正) 알아차리는(念) 정념(正念) 수행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실천해 보면 부처님께서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말씀'하신 이유와 ‘말없이 꽃(華)을 집어(拈)들어 대중(衆)에게 보이시는(示), 염화시중(拈華示衆)의 행동’을 하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지금 현재순간 몸과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여섯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아차리는 정념 수행의 요체는, 아래와 같이 부처님께서 바히야 따루찌리야(Bahiya Daruciriya)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볼 때, 단지 ‘보여 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seen will be merely what is seen;

들을 때, 단지 ‘들려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heard will be merely what is heard;

후각, 미각, 촉각의 감각을 느낄 때, 단지 ‘느껴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sensed will be merely what is sensed;

정신감각(생각, 감정 등)을 인식할 때, 단지 ‘인식되어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cognized will be merely what is cognized.

이와 같은 방법으로 수행해야 하느니라. 바히야여!
In this way you should train yourself, Bahiya!"

- <Bāhiya Sutta, 바히야경(Ud 1.10, Udana 1.10)>

“보고, 듣고, ‘냄새, 맛, 촉감’을 느끼고, ‘생각, 기억, 감정 등의 정신감각’을 알아차림 하는 ‘여섯 감각’을 사띠(알아차림) 할 때 ‘눈에 보여 지는 것(눈의 감각)‘, ’귀에 들려지는 것(귀의 감각) ..‘ 등 ’여섯 감각‘만 있게 하여라. 아(我)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없이 ’여섯 감각 받음(受) 무더기(蘊), 수온(受蘊; 웨다나, 순수 감각)‘만 '있는 그대로' 삼마(바르게, 正) 사띠(알아차림, 念)하라”는 것이 부처님께서 바히야에게 가르치신 정념(正念; 삼마 사띠) 수행의 요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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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념 수행 시 ‘여섯 감각’ 증의 한 가지 대상(예컨대, 호흡에 대한 감각)만 있는 그대로 사띠(알아차림)하려고 해도 아(我)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 생각, 감정 따위를 사띠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감각인지 생각인지 감정인지 구분이 잘 되지도 않습니다.

특히 수행 초심자에게는 더욱 흔히 있는 일입니다. 들을 때 ‘들려지는 것, 귀의 감각’만 있는 그대로 사띠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我)가 개입된 판단 분별이 끝난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신나는 음악소리’ ‘내가 싫어하는 짜증나는 오토바이 소리’ '큰 소리 작은 소리, 조용한 소리 시끄러운 소리, 좋은 소리 나쁜 소리', '크다 작다, 조용하다 시끄럽다, 좋다 나쁘다' 등을 사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망할 일도 자책할 일도 아닙니다.

처음에는 몸과 마음에서 지금 현재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어떤 자극이든 어떤 현상이든 어떤 작용이든 어느 것이라도 능력이 되는 대로(포착이 되는 대로) 있는 그대로 사띠하도록 노력합니다. 

예컨대, 아나빠나(호흡, 들숨 날숨) 사띠를 할 때도 차갑다 뜨겁다 등의 판단 분별된 감각이 아닌 판단 분별이 일어나기 전의 감각(웨다나, 순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또렷이' 알아차리도록 노력합니다.

그렇게 꾸준히 정념 수행을 실천하면 점점 더 여섯 감각만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사띠하는 능력이 계발(啓發; 열리고 발전향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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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정념 수행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고 지식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부처님 말씀은 ‘손가락, 가르침, 정념 수행’을 지식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눈의 감각, 보여 지는 것, 달’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正) 알아차림(念)하라는 정념 수행의 실천을 강조하신 충고(또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말없이 꽃을 들어 보이신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가르침도, ‘눈의 감각, 보여 지는 것, 꽃(華)’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正) 알아차림(念)하라는 정념 수행의 실천을 '행동'으로 강조하신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가섭존자가 이해하고 염화미소(拈華微笑)로 화답한 것입니다.

이러한 ‘염화시중 염화미소’의 일화가 ‘도(道; 진리)는 말(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말로 표현된 도는 도가 아니다”(노자가 지은 도덕경 중 도경의 첫 구절)라는 노장사상식으로 해석’되어, ‘부처님 가르침(法; 진리)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해진다’라고 해석하는 중국불교인 격의불교(노장사상에 의거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해석하는 불교)입니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禪宗)에서는 선(禪)의 기원을 이 ‘염화시중 염화미소’의 일화에 두었고, ‘부처님이 꽃을 든 까닭은?’이 선종 최초의 (노장사상식) 화두이자 대표적인 화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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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근본 이치/법칙; 道, 法)’를 말(언어)로 표현하여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실천(수행)을 유도하여 실천 경험(수행 경험)을 통해서 그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하는 것, 즉 사람들을 정각(실상과 진리에 대한 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많기는 하지만 부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정각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팔정도; 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을 계발하는 수행인 팔정도 바와나를 듣는 사람의 근기(경험-일반 경험, 수행 경험,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 가지 능력-이해력, 집중력, 인내력 등)와 그 사람이 처한 환경(처지, 상태)에 맞춰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미 선정의 자유자재와 네 단계의 무색계 삼매를 모두 이룬 수행(수행 경험) 상태였다고 추정되는 바히야 따루찌리야는 탁발하러 가시는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하여, 위의 <바히야경(Bāhiya Sutta)>에 기록된 바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수행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바히야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의 가르침을 따라 정각을 증득한 사람(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십대 제자를 포함한 이른바 천이백 아라한)

당시의 인구 추정치와 역사적 자료를 참고한 학자들의 추정치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활동하셨던 갠지즈강 중북부 지역에서 사문(재가, 출가를 포함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수효가 약 십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 중에서 약 천 명 정도(백 명당 한 명 꼴)를 당신과 같은 아라한(부처님도 아라한입니다.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아라한)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지혜(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자비('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바른 사랑) 속에서
자유와 평화와 행복에 머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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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노자, 장자의 가르침]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유사한 사상을 담고 있는 동양 사상이 노장(노자-장자) 사상입니다. 

노자, 장자가 가르친 도(道; 진리, 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 자연의 질서)와 붓다가 가르친 법(法; 실상과 진리, 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은 그 내용이 매우 일맥상통합니다. 구분하자면 노자, 장자가 가르친 도(道)는 진리에 대한 문학적(시적, 우화적) 표현이고 붓다가 가르친 법(法)은 과학적(논리적) 표현인 셈입니다. 

노자의 저서, <도덕경(도경 & 덕경)>과 장자의 저서, <장자>에는 '도(道)의 경지’(道 또는 法에 대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실천법, 수행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사실상 거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일화인 ‘노자의 산책’에서의 노자의 가르침이나, <장자>의 세번째 편인 양생주(養生主; 행복한 삶의 비밀 or 이치)에서의 장자의 가르침도 은유적(시적), 우화적(문학적) 표현이라 구체적인 명확함과 논리적 표현은 부족하지만 정념(正念; 삼마 사띠)의 가르침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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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2; 중국불교(선종)의 가르침] 

염화시중(拈華示衆)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열린 집회에서 많은 대중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던 중에 자신의 ‘깨달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문득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화(華)’는 연꽃을 뜻하는데, 염화시중은 바로 ‘대중에게 연꽃을 들어 보인다는 뜻이다. 이 영취산 대중 법회를 후세에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도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른 그 오묘한 진리를 말로써는 다 설명할 수 없어 연꽃을 들어 보인 것이다. 이 때 제자 중에 오직 마하가섭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아보았고, 그도 역시 스승의 깨달음을 말로서 대답할 수 없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를 ‘염화미소(坫華微笑)’’라고 말하기도 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다는 뜻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의 초조는 바로 보리달마(마하가섭)이다. 선종의 기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말없이 꽃을 들어 보였을 때 제자들 중 오직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나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고사(故事)에서 찾는다. 제 6조인 혜능의 제자인 영가현각(永嘉玄覺: 647~713, 당唐나라 승려)이 지은 《증도가(證道歌)》에서 보듯이, 선종의 전통에서는 마하가섭을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선법(禪法)을 받아 이어준 제 1조로서 숭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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