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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동화가 필요한 순간



동화와 현실 중간에서 살아가는 외국 친구가 한국에 와서 한 달 남짓 머물렀다. 거의 매일 만나서 함께 일을 한 후 점심을 먹고 시내를 산책하곤 했다. 겨울이었고 기록적인 한파가 연일 이어졌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도 히말라야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찻집이나 카페가 기웃거려졌다.

그런데 이 친구는 연신 감탄하며 "하늘 좀 봐! 정말 파란색이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찬 공기 탓인지 독특한 파란색이었다. 목이 긴 나는 추위가 파고들어 얼른 다시 움츠렸지만, 그 친구는 혹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가 인사동을 한 바퀴 돌고 조계사 경내를 지나 안국동과 정독도서관 앞뜰을 거쳐 삼청동과 가회동 쪽으로 긴 순례를 할 동안 계속 서울의 겨울 하늘이 지닌 아름다운 파란색을 예찬하는 것이었다.

그녀 덕분에 가깝게 파랗지도 않고 강렬하게 파랗지도 않은, 겨울 하늘답게 적절한 거리를 두고 우주 공간을 투영하는 무심한 듯한 파란색을 매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아름다움을 자각하는 순간 추위가 훨씬 견딜 만해졌다.

하늘에 대한 것은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다. 그녀는 매사에 그런 식으로 모든 일과 사물들 속에서 아름답고 기쁜 요소를 발견했다. 한번은 버스가 늦게 와서 한참 기다리게 되었는데 미안해서 택시를 타자고 하는 내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거리에 더 오래 서 있게 돼서 기쁘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마치 '기쁜 일 찾기' 놀이를 하는 동화 속 소녀 같았다. 그래서 함께 일을 하는 데도 즐거움과 단순함이 따랐다. 에고의 주장과 설득과 지시가 불필요했다.

그런 사람은 걸림이 없어서 자주 그리워진다. 그런 사람은 매 순간마다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에서도 삶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하늘 좀 봐. 정말 파란색이야!'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저 파란색을 가질 수 없다면 무엇으로 겨울의 가난을 견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 라자스탄 지방의 샴푸라라는 시골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바나스강이 흐르는 오지 쪽으로 갔더니 열다섯 채 정도의 오두막이 나타났다. 지도에 이름조차 없는 마을로, 사람들이 매우 우호적이고,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행복한 여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폭 1.2미터, 길이 4미터 정도의 한 장짜리 긴 천으로 된 전통 의상 사리를 몸에 두르고 있었는데, 독특한 풍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강으로 나가서 사리를 절반은 몸에 두른 채 절반만 풀어서 세탁을 했다. 그런 다음 그 절반을 몸에 두르고 나머지 절반을 풀어 세탁하는 것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것이 그들의 풍습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리가 한 벌밖에 없기 때문에 고안해 낸 빨래 방법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런데도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아열대 새처럼 떠들어서 보는 나로 하여금 행복이 전염되게 했다. 실로 동화 속 사람들이었다. 새는 해답을 갖고 있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감정이 좌뇌에서 간단히 처리되는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훨씬 많은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뇌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감정보다 불쾌한 감정과 사건을 묘사할 때 더 논리적이고 강한 말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달한 우뇌는 부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 그것이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동화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


photograph_Nacho Calo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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