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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가슴이 저절로 열릴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 것은 나의 주의나 주장이 아니라 내가 은연중에 행하는 행동, 혹은 혼자 있을 때 하는 행위이다. 영혼과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나 자신도 알아차림 없이 행하는 작고 사소한 행동들이 내 몸의 리듬을 결정하고, 마음을 드러내 보이며, 의식을 특정한 차원과 연결시킨다.

출판사에 새로 온 편집자가 인사차 찾아왔는데, 마침 내가 외부에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돌아왔더니 내 작업실의 강아지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무슨 마술을 걸었는지 그토록 예민한 궁금이가 벌렁 누운 채 그 편집자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내가 와도 보는 둥 마는 둥, 애정결핍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독자의 소포를 전해 주러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내가 원고를 탈고 중이어서 잠시 기다려야 했는데, 그 편집자는 마당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이제 막 봄을 뚫고 솟아오르는 수선화 싹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궁금이도 그 옆에 턱을 괴고서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작업실 마당에 있는 모든 나무와 풀들에 진심 어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 식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동물과 식물에 대한 그녀의 놀라운 친화력은 그녀가 누구인가를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해, 새로운 편집자와 일하는 것을 주저하는 나의 마음까지도 스스럼 없이 열게 했다. 그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가 출간하는 거의 모든 책의 편집을 출판사와 상관 없이 그녀가 담당해 오고 있다. 그 사이 궁금이는 세상을 떠나고 천둥이가 그녀의 다리를 껴안고 두 발로 서서 따라다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가슴이 자발적으로 열릴 때가 있다. 왠지 나 자신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까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타인에 불과한 우리를 연결시켜 서로 치유해 주며,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큰 행운이다.

심리학자 밀턴 에릭슨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팔러 다닐 때의 일화이다. 하루는 농가에 가서 어느 농부에게 책을 권하자 농부는 "난 아무것도 읽지 않고, 아무것도 읽을 필요가 없어. 난 그저 우리 돼지들한테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하고 말했다.

에릭슨은 "열심히 돼지를 먹이시는 동안 잠깐 옆에 서서 말씀을 나눠도 될까요?" 하고 묻고는 책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돼지 등을 긁었다. 자신도 어린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자 농부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말했다.

"자네는 돼지를 좋아하는군. 돼지들이 원하는 대로 등을 긁어 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네. 오늘 저녁은 나와 함께 먹고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면 어떻겠나. 책은 내가 사 주겠네."

농부의 근원적인 마음이 에릭슨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반응한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그 본성 차원에서 접촉하고 있다. 우리 가슴 주위의 장벽이 그 접촉을 가로막고 우리 스스로 분리되었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 순수한 차원을 우리는 늘 가지고 다니고 있으며 서로를 갈구하는 것은 바로 그 차원이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드러내며, 사상이나 주장이 아니라 그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준다. 어느 날 코끼리와 개미가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개미가 술래가 되어 코끼리가 숨었는데, 몸집이 커서 금방 발각되었다. 코끼리가 술래가 되자 개미는 코끼리가 들어올 수 없게 작은 사원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쉽게 개미가 숨은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개미가 평소의 행동대로 신발을 벗어 놓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painting_Marion Barr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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