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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목차 
서문 
편역자 서문 
입문 
제1장 추구 
제2장 출발점 
제3장 직접적인 원인 
제4장 문제의 뿌리 
제5장 도덕적인 행위의 훈련 
제6장 집중훈련 
제7장 지혜의 훈련 
제8장 자각과 중도 
제9장 목적 
제10장 삶의 기술 
부록 Ⅰ
부록 Ⅱ

 

서  문

나는 위빠싸나 명상법이 내 삶에 가져다준 변화에 영원히 감사한다. 내가 처음으로 이 기법을 배웠을 때, 나는 마치 막다른 골목의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왕도를 발견했다는 느낌이다. 그 후 수 년 동안 이 길을 따르면서 조금씩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위빠싸나 명상의 근본 목적이 분명해졌다.

나는 최종의 목적에 도달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이 방법이 그 곳으로 직접 나아가는 길이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이 길을 알게 된 것은 모두 Sayagyi U Ba Khin과 붓다 이래 이 기법을 지켜온 수많은 스승들의 덕분이다.

그러므로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길을 따르도록 격려함으로 그들 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비록 서방국가에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위빠싸나 명상기법을 배워오고 있지만 그 기법을 정확하게 설명해 놓은 책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적어도 진지하게 명상을 훈련하는 사람들에게 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위빠싸나 명상을 훈련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의 깊이를 더해주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도 자유의 행복을 경험하기 위해서 위빠싸나 명상법을 훈련하도록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부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내면의 평화와 조화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의 평화와 조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삶의 기술을 배우기를 염원한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행복하기를!    

-S. N. GOENKA

 

편역자 서문

지금껏 불교에 관한 많은 공부를 해왔지만 아직도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한 윤곽을 얻지 못한 분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또 요즘처럼 불교교리나 경전말씀에 관한 책들이 적지않게 많이 쏟아져 나온 예도 없다. 그러나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 부처님은 어떤 수행법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셨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적인 이해로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 삶 자체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흔히들 불교경전은 심오하고 이해하기에 난해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문제를, 고통의 문제를 삶 자체로서 몸과 마음으로 추구하고, 이해하고,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찾아 나섰으며, 자신 밖에 있는 그 어떤 대상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자기자신이 연구자가 됨으로써만이 성취 가능했던 실험적인 지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적인 이해나 논리적인 이해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자신을 이해하고자 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자세로서 자신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동시에 스스로가 연구자가 되어서 자신의 내면을 탐색해 들어갈때만이 가능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실천해가면서 실제로 느끼고 경험해가는 것이다. 결코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며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이해될 수 있는 종교적인 도그마가 아니다.

정말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로서 인간의 굴레, 인간의 조건,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에 대한 안내다. 즉 다시 말해서 경전은 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고 해방의 길로 나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지도다. 나아가서 계율을 지키고 여러가지 도덕훈련을 하는것은 해방의 길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종의 장비라고 볼 수 있으며,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뗏목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방과 자유의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세계, 내면의 세계를 잘 설명해주는 지도역할을 하는 경전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리고 특히 해방의 길로 나아가는 길에서 부딪치게 될 온갖 시련과, 암초와 풍랑에도 견디어 낼 수 있는 튼튼한 뗏목의 역할을 하는 도덕 훈련, 즉 계율을 지키는 일은 몹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도없이 길을 나서거나 지도를 잘못 이해한 상태로 나아간다면 필시 도중에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게 되며, 종국에는 자신이 목적지를 향해서 올바로 나아가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튼튼한 뗏목도 만들지 않고 무조건 물 속으로 뛰어든다면 잠깐 동안은 헤엄쳐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의 삶은 제한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도 늙어가고 있으며 죽어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지도만 해석하고 뗏목만 만들고 있을 것인가? 평생을 지도만 읽고 연구하거나 아니면 뗏목에는 참나무가 좋으니, 소나무가 좋으니 하면서 아까운 생명을 소비할 것인가? 물론 목적지에 정확히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튼튼한 뗏목을 준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방향을 정확히 잡았으면, 그리고 웬만큼 뗏목이 만들어졌으면 일단은 출발해야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훌륭한 지도를 가지고 있고 잘 이해했다고 해도 실제로 그 곳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뗏목을 잘 만들고 뗏목의 재료와 모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튼튼하고 훌륭한 뗏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무나 힘들고 정성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막상 강물에 띄워서 노를 저을려니 거센 물결과 폭풍우가 두려운가? 애써 만든 뗏목이 혹시나 갈라지거나 부숴질까봐 두려운가?

지도를 입수했으면, 그리고 대충 읽을 줄 알면 현지로 나아가면서 확인해 가야 되지 않겠는가? 뗏목을 만들었으면 일단은 출발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더욱이 남의 뗏목 모양이나 재료를 논의하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면서 자신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도중에 고장난 뗏목을 수리해야 되지 않겠는가? 공연히 가보지도 못한 목적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쟁하거나 뗏목의 모양과 재료를 가지고 평생을 소모할 필요가 있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자신이 실제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탐색하고 확인하면서 찾아낸 마음의 영원한 휴식처, 절대자유의 세계, 절대행복의 세계에 대한 설명인 동시에 그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안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해방의 세계로 들어가는 지도를 입수하고 훌륭한 옛목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훈련을 위한 장비를 준비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훈련은 아니며 더욱이 수행의 목적은 아니다. 경전을 이해하고 계율을 지키는 일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따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감정의 덩어리들을 용해시키면서 미워하고 분노하고 갈망하고 집착하는 마음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을 탐색하고 외부세계가 아닌 내면의 진정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가? 이 책은 바로 그 해답을 주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삶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죽어야 되는가?....” 등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방황하다 보니 그것과 관련된 주제의 책을 읽게 되고 자연히 종교적으로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생시절에는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성당도 열심히 다녔지만, 솔직히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 것만으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했다.

대학과 대학원 과정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것이 나자신을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역시 자신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자신이 알고 싶어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왜 그토록 힘겨운 마음의 방황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또하나의 제도와 낡은 관습에 강요당했을 뿐,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주지도 않았으며, 나를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가 처음 하느님의 개념과 부처님의 개념을 접했을 때는 무조건 믿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들의 말대로 그냥 믿으면 내 삶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분명 그것은 잘못된 이해였다. 하느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삶의 문제가 더 급했다. 죽음의 문제도 내게는 중요했지만 현재를 살고있기 때문에 삶의 문제, 존재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냥 당신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신다. 진리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보다 더 중요하고 중요한 일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은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왜 일찍부터 사는 일이 그렇게도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왜 그렇게도 외롭고 괴로운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지도를 얻었다. 나는 이 책을 읽은 후부터 그 지도를 따라서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나는 이제 나의 이 육신과 마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내면의 여행을 시작했다.

나는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지금껏 내가 찾아 헤매던 모든것을 알려주는 지도다. 이 책 속에는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영원한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지도가 들어있다. 하느님을 믿든 부처님을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실로 삶의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과 뭔가, 보다 변화하고 발전적인 삶을 꿈꾸는 의식의 변혁, 의식의 진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얻은 지도를 함께 들여다 보면서 다같이 마음의 저 심층을 여행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집단이기적이고 저차원적인 종교적 갈등을 극복하고 다함께 자신의 육신과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연구하고 탐색함으로써, 병리적인 자아도취와 에고이즘에서 벗어나서 보다 성숙하고 건강한 종교적인 삶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한다.

끝으로 이 책은 위빠싸나 명상법을 훈련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서 쓰여진 것인데, 그 내용과 짜임새가 너무나 감명적이었기에 나 자신의 이해와 설명을 덧붙여서 옮겼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원문을 옮기는 데 충실하기 보다는 저자의 의도와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부록 II는 순전히 나 개인의 글 임을 밝혀둔다.

-1994년 6월 보스톤에서 서광 합장

입   문

한동안 당신이 살고 있는 장소와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세상살이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모든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접촉을 피하고 아주 기본적인 활동 외에는 눈을 감고 깨어 있으면서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 모든 주의를 유지시키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상상해보라. 당신이 배꼽을 응시했든 화두를 들었든 호흡을 세든, 또는 그것이 현실도피든 자기추구든 함축된 의미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명상에 대한 공통된 표현은 바깥 세계로부터의 철수다. 물론 거기에는 기법이 있다. 그리고 명상은 도피가 되어서는 안된다. 명상은 바깥세계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와 직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외부현실과 접촉하면서 바깥에서 정보를 구하고 신체적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 깊이 숨어있는 것을 탐색해 보려고 하기 보다는 우주공간이나 바다 밑바닥을 탐험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우주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바로 그곳에 있다. 그것은 지구 밖의 먼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존재하고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을 탐색함으로써 우리는 세계를 탐색하고 우주를 탐색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세계를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현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현실이 어떠하다고 믿고 있거나 아니면 현실에 대해서 지적이고 관념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을 관찰하면 우리는 곧바로 현실을 알 수 있고, 현실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내면의 세계를 탐색하는 한 가지 방법은 위빠싸나 명상법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실을 검증하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이 명상법을 통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숨겨져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며 잠재력을 개발하고 자신의 복지와 타인의 복지를 위한 통로를 열어 줄 수 있다.

위빠싸나는 고대 인도의 팔리어로 통찰(insight)을 의미한다.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의 본질이고, 붓다가 말한 진리를 실제로 경험하는 방법이다. 붓다 자신이 명상훈련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으므로 명상은 붓다의 가르침의 근본이다. 붓다의 설법은 명상을 통한 그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고, 그가 성취했던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서 어떻게 수행해야 되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치고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가 가르친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출처가 확실한 경전에 보존되어 오지만, 명상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은 실제적인 훈련없이는 어렵다. 그 실제적인 훈련기법 중의 하나가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관찰하는 위빠싸나 명상법이다.

그런데 거기서 얻어지는 통찰이 모두 즐겁고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좋은 점은 확대하고 결점은 축소시키는 어떤 양면적인 특징이 있으며, 실제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이미지를 본다.

그러나 위빠싸나 명상에서는 자기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검열없이 전체 진리를 그대로 직면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어떤 측면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어려움도 지나가게 되어 있다. 명상의 과정은 내면의 깊은 변화를 일으키고 그 과정 동안에 얻어지는 정신적인 힘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고 삶을 보다 조화롭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위빠싸나 명상을 직접 훈련할 수 있는 안내서는 아니다. 다만 붓다의 가르침과 명상기법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하는 바램에서 GOENKA에 의해서 가르쳐지고 있는 위빠싸나 명상법의 윤곽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영학

한번은 젊은 교수가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 뒤에 긴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아주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러나 이론적인 부분은 탁월했지만, 살아있는 인생경험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가 여행을 하고 있는 배에 글을 모르는 나이 든 선원이 있었다. 그 선원은 매일 저녁 이 젊은 교수의 선실을 들러서 많은 강의를 들었다. 이 선원은 자연히 젊고 유능한 교수에게 상당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나이 든 선원이 장시간의 대화를 마치고 선실을 막 나가려고 하는데 젊은 교수가 물었다.

“노인장 지학을 공부한 일이 있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교수님?”

“지구과학이라는 거요.”

“아니오. 나는 학교 문턱에도 가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공부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노인장 당신은 인생의 4분의 1을 낭비했군요.”

그 말을 들은 늙은 선원은 침울한 표정으로 선실을 나갔다.

“저렇게 학식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분명히 사실일 것이다.’’ 라고 늙은 선원은 생각했다.

“나는 나의 인생의 4분의 1을 허비했다.’’

다음날 저녁 강의를 마치고 선실을 나가려고 했을 때 그 교수가 다시 물었다.

“노인장, 해양학을 공부한 일이 있습니까?”

“그게 뭔데요. 교수님.”

“바다에 관한 학문이오.’’

“아니오. 나는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공부라는걸 해본 일이 없습니다.’’

“노인장, 당신은 인생의 반을 낭비했군요.”

또다시 침통해진 선원은 선실을 나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내인생의 반을 허비해 버렸다. 저렇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다음날 저녁 다시 한번 젊은 교수가 나이 든 선원에게 물었다.

“노인장, 기상학을 공부한 적이 있소?”

“그게 뭡니까? 나는 들어 본 적도 없소.’’

“바람, 비, 날씨에 관한 학문이오.”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공부하지 못했소.”

“노인장, 당신은 당신이 살고 있는 지구에 관한 학문을 공부하지 않았고, 당신은 당신이 먹고 사는 바다에 관한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매일 부딪치는 날씨에 관한 공부도 안했습니다. 노인장, 당신은 당신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습니다.’’

나이 든 선원은 아주 불행감을 느꼈다.

“저렇게 배운 사람이 내가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나는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다음날은 나이든 선원의 차례였다. 그는 젊은 교수의 선실로 달려가면서 외쳤다.

“교수님, 당신은 수영학을 공부해본 적이 있소?”

“수영학? 그게 뭡니까?’’

“수영할 줄 아시오?’’

“아니, 모릅니다’’

“교수님, 당신은 당신 삶 전부를 낭비했습니다. 배가 바위에 부딪쳐 가라앉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가까운 해변까지 헤엄쳐 갈 수 있지만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빠져 죽을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교수님, 당신은 당신의 삶 전부를 확실하게 잃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학문과 이론을 공부했지만, 만일 수영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모든 공부는 무익할 것입니다. 당신은 수영에 대한 책을 읽고 썼을지는 몰라도, 그리고 그 이론적인 측면에 관해서 논쟁을 했을지는 몰라도 스스로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당신 자신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수영하는 것을 실제로 배워야만 됩니다.’’



▶︎ 제 1장 :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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