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도덕적인 행위의 훈련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지(無知)와 갈망(渴望)과 혐오(嫌惡)에서 비롯되는 고통의 원인을 뿌리뽑음으로써 고통을 뿌리뽑는 것이다. 붓다는 일찍이 인간은 왜 고통받며, 어떻게하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6년간의 고행끝에 그 목적을 성취했다. 그리고 붓다는 이후 45년간 자신이 발견한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붓다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고귀한 팔정도(八正道)라고 불렀다. 한번은 제자들로부터 그 길을 쉽게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붓다는 말했다.
모든 불건강한 행위를 삼가하고
건강한 행위를 닦아서
너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무나 분명한 설명이다. 누구든지 해로운 행동을 피하고 유익한 행동을 해야 된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해로운 것과 유익한 것이 무엇이며 건강한 행위와 불건강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자신의 전통적인 신념이나 견해대로 그것을 정의한 다면 일부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에 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제한되고 분파적인 정의를 만들게 될 것이다.
붓다는 특정집단이나 종파에 제한되는 해석 대신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인 해석을 내렸다. 평화와 조화를 방해함으로써 타인을 해롭게 하는 행위는 잘못된 행위이며 불건강한 행위다. 역으로 타인의 평화와 조화에 이바지함으로써 타인을 돕는 행위는 경건하고 건강한 행위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지적인 훈련을 수행함으로써가 아니라, 본질적인 자신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조건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온갖 삶의 어지러운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 고귀한 팔정도는 3단계의 훈련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 실라(sila)-모든 불건강한 육체와 말의 행위를 삼가는 도덕적인 훈련이다.
둘째, 사마디(samadhi)-자신의 정신과정을 의식으로 향하게 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집중훈련이다.
셋째, 빤냐(panna)-자신의 본질을 정화하는 통찰을 발달시키는 지혜다.
도덕적 훈련의 가치
법을 훈련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도덕적인 훈련으로부터 시작해야만 된다. 도덕훈련을 하지 않고는 올바른 수행으로 나아 갈 수 없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행동과 말과 행위를 삼가해야만 된다. 사회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한 행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행위가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먼저 우리자신을 해롭게 하기 때문에 삼가해야 된다. 마음의 동요나 갈망, 혐오없이 남에게 모욕을 주거나 죽이거나 강간을 하는 등의 불건강한 행위를 하는것은 불가능하다. 갈망하고 혐오하는 순간은 현재의 불행을 가져오고 미래에는 더 많은 불행을 가져온다.
붓다는 말했다.
"현재의 삶에서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자는 미래의 삶에서도 이글거리게 된다. 잘못을 행하는 자는 두 배로 고통받게 된다. 현재의 삶에서 행복하면 미래의 삶에서도 행복하다. 덕이 있는 자는 두 배로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천당과 지옥을 경험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자신의 내면 안에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불건강한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욕망과 혐오의 지옥불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건강한 행위를 했을 때 우리는 내면의 평화로 천국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건강한 말과 행위를 삼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먼저 자신의 해로움을 피하고 우리 자신의 유익함을 위해서이다.
도덕적인 훈련을 하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자신을 검증하고 자신의 본질의 깊이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아주 차분하고 고요한 마음이 필요하다.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태에서 마음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는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잔잔하고 맑은 호수가 자신의 깊숙한 바닥을 드러내 보일 수 있듯이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요되지 않는 마음을 요구한다.
마음이 채워질 수 없는 끝없는 욕망으로 가득차면 결국은 좌절과 분노를 낳게 되고, 그것은 다시 엄청난 불안과 동요로 넘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 보는 데 실패하게 된다. 우리가 모든 불건강한 몸과 말의 행위를 삼가할 때, 그때 비로소 마음은 내성(內省)을 하기에 필요한 평화스러운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도덕적인 훈련이 가장 필수적이고 선행되어야 하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법을 훈련하는 사람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뿌리뽑고자 하는 낡은 정신적인 습관을 더 강하게 만드는 행위를 할 수는 없다.
남을 해롭게 하는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반드시 갈망과 혐오와 무지에 의해서 일어난다. 타인을 해롭게 하는 행위는 곧바로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 역행하는 일이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나아가는 모든 걸음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행위를 훈련하는 것은 사회의 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 각자의 선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나아가서 개인의 선 뿐만 아니라 붓다가 가르치는 법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되는 필수적인 훈련이다. 고통을 벗어나서 해방의 길로 나아가는 여덟가지 방법인 고귀한 팔정도 가운데서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수단(正命)은 도덕훈련에 속한다.
올바른 말(正語)
말은 순수하고 건전해야 된다. 순수성은 불순함을 제거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한 말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이해해야 된다. 불순한 말의 행위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사실보다 더 보태거나 덜 말하는 거짓말, 친구들을 이간질하는 말을 옮기는 것, 뒤에서 사람을 치거나 욕하는 것, 다른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고 유익함이 없는 거친 말을 하는 것, 자신의 시간과 타인의 시간을 낭비하는 부질없는 잡담과 무의미한 수다와 같은 것들이다.
반대로 바른 말을 훈련하는 사람은 진리를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진실하고 정직하고 의지할 수 있고, 솔직하며 확고한 신념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다툼이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분열을 하나로 만든다. 또 조화와 평화를 즐기고 기뻐할 줄 알며, 자신의 말에 의해서 조화를 창조한다. 그러한 사람의 말은 점잖고 많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며, 친절하고 따뜻하고 정중하며 편안하게 해준다. 동시에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말할 줄 알며, 자신의 말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지, 법에 합당한지에 따라서 말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의 말은 기억할 가치가 있고 시기가 적절하며 아주 이성적이고 선택적이고 건설적이다.
올바른 행동(正業)
도덕적인 훈련에서 두번째 항목은 올바른 행동이다.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말을 할 때 자연적으로 따라온다. 말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하고 예의를 갖추어서 하면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렵다. 그러므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역으로 올바른 말을 하기 위해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을 함부로 하면서 올바른 말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행동은 순수해야 된다. 순수한 행동은 살아있는 생명을 소중히 다루고 타인을 해롭게 하는 거친 몸짓이나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않고 성적인 비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와 앉지 말아야 할 자리를 알며, 얼굴에 분노나 슬픔이나 괴로운 표정을 과장되이 짓지 않으며, 그 반대로 애써 괴로움이나 분노를 숨기느라 과장된 제스처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른 신체적 행동을 훈련하는 사람은 바른 자세로 앉고 서며, 거친 행동과 타인을 해롭게 하는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
계율(戒律)
낡은 습관을 버리고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을 기르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계율을 훈련하는 것이다.
[不殺生] -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할 것
[不偸盜] - 남의 것을 탐내지 말 것
[不邪淫] - 성적 비행을 하지 말 것
[不妄語] - 거짓말과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말 것
[不飮酒] - 자신의 몸을 해치는 약물이나 음식을 삼가할 것
이 오계(五戒)는 도덕적인 행위를 훈련하기 위해서 최소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것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지켜야 한다. 누구든지 살다보면 때로는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일시적으로 세상일을 내려놓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러한 순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훈련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다. 그런 때는 자연히 종교적인 만남이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들은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과 스트레스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심함으로써 마음을 분산시키거나 불안을 가중시키는 일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하고 안정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위에 제시한 5가지 계율 외에도 지나친 성행위나 비정상적인 성행동을 삼가하고, 때 아닌 때에 먹지 말 것이며, 모든 감각적인 즐김이나 몸의 치장을 삼가할수록 그만큼 맑은 마음을 유지할 수가 있다.
일상의 삶의 태도를 단정하고 절도있게 할수록 자기를 들여다 보는 데 필요한 차분한 마음과 깨어있는 마음을 북돋아 주고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애로부터 자유롭도록 도와준다. 특히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하는 일정기간 동안에는 일체의 성행동을 금하고 먹는 것과 잠자는 것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은 계율을 지키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절제있는 생활을 강조하는 도덕훈련이 마치 도덕훈련 자체가 수행의 목적인 것처럼 혼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훈련을 하는 것은 도덕훈련을 하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다.
도덕훈련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며 수단이다. 결코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서 나아갈 때 채택되는 수단이나 방법은 물론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이고 올바른 방법을 찾아서 실천해야 하는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고 거기에 매달려서 집착한 나머지 목적 자체를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일부 수행자나 신도들은 계율 자체에 매달리고 집착해서 계율을 강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뗏목의 역할로서 보지 못하고, 뗏목의 모양이나 재료에 신경을 쓰면서 평생을 허비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자신의 뗏목을 만들었으면 얼른 강에 띄워서 건너가야지 심지어 자신은 뗏목조차 만들어 놓지 않은 채, 남의 뗏목을 보고 모양이 좋으니 나쁘니 하면서 시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교회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야 된다는 절대절명의 신의 명령을 내팽개치고, 단지 신도수를 확보하는 일에 전념을 다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삶의 본질과 존재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무신론인이든 모두 자신의 삶의 질을 바꾸고 개선해가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자신을 위한 노력 자체가 타인을 위한 노력으로 저절로 바뀌어지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나와 너가 하나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정화하는 작업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포교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생활수단(正業)
우리는 육신을 벗어나지 않는 한 중생이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부양하기 위한 적절한 생활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올바른 생활수단은 5가지 계율에 위배되지 않음으로써 타인에게 해로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계율을 어기도록 권장하거나 남을 해롭게 하는 일을 자극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생활수단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타인에게 해로움을 주는 것과 관련된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생활수단이 무엇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어떤 자세로 임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서 의사가 전염병이나 독감이 유행하기를 바라거나 상인이 물건이 부족해서 물가가 오르기를 바란다면, 그것 또한 올바른 생활수단을 훈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므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사회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한다. 그러기 때문에 상인이 돈을 좀 벌었다고 해서 고객을 소홀하게 대접하거나 자신의 편리대로 일하는 시간을 조정함으로써 지나친 불편을 주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수행자들 또한 공양물을 받으면 모두의 선과 유익함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 작업을 해야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삿된 재주를 부림으로써 부처님을 상대로 또는 하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 해야 된다. 어리석은 집착과 탐욕으로 자연스럽게 돌고 돌아야 하는 것들을 가두고 쌓아서는 안 되며, 남는 것은 사회로 환원되어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서 쓰여지게 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이 자신을 부양하고 타인을 돕는 데 유용하게 쓰여지도록 노력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바람직한 생활수단이다.
의사의 처방문
어떤 사람이 병이 들어서 의사를 찾아 갔다. 의사는 그 사람을 검진하고 나서 몇 가지 처방문을 써주었다. 그런데 그사람은 검진을 받는 과정에서 과연 소문대로 의사에 대한 엄청난 신뢰를 갖게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기도방을 만들고 의사의 사진을 걸어 두었다. 그리고 그는 앉아서 그 사진에 존경을 보냈다. 그는 세 번 절을 하고 꽃과 향을 공양했다. 그리고 그는 의사가 그에게 써준 처방문을 꺼내서 아주 경건하게 읽었다. “아침에 두 알, 저녁에 두알.” 그는 매일 그 처방문을 암송했다. 왜냐하면 그는 의사에 대한 엄청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처방문은 그 를 도와주지 않았다. 하루는 그는 그 처방문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의사에게 달려가서 물었다.
“왜 선생님은 이 약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았습니까? 이 약은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의사는 다음과 같이 아주 지적으로 잘 설명해 주었다.
“잘 보시오. 이것은 당신의 질병이고 이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질병의 근본 원인입니다. 만일 당신이 내가 처방해준 약을 먹으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질병의 원인이 뿌리뽑힐 것입니다. 그 원인이 뿌리뽑히면 질병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마음 속으로 “과연 훌륭하다. 나의 의사는 너무나 지적이다. 그의 처방문은 너무나 유익하다.” 고 감탄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이제는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나의 의사가 최고다. 다른 의사들은 엉터리라고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 의사가 최고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전 삶을 논쟁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돕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의사가 지시한대로 약을 먹었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불행’이라는 질병이 완화되었을 것이다. 오직 그가 직접 약을 먹어야만 그 약이 그를 도왔을 것이다.
자신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모두 의사와 같다. 자비심 때문에 그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처방문을 준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발달시킨다면, 그들은 처방문을 경전으로 바꾸고 해방된 사람을 종교의 창시자로 바꾸어서 서로 자기네 창시자가 더 우월하다고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자기들이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의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하는 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고, 질병을 뿌리 뽑기 위해서 처방된 약을 먹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환자가 의사에 대해서 믿음을 갖는 것은 그 믿음이 환자로 하여금 의사의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촉진시킬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고 아울러서 의사가 권하는 약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하게 작용하는지를 안다면 환자는 그만큼 약을 믿고 기꺼이 복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사를 아무리 믿고 약의 작용을 잘 안다고 해도 실제로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병은 결코 치료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부처님을 믿고 경전을 잘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는 일이다. 많은 기독교인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성경구절을 외우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또 많은 불교인들은 열심히 염불하고 경전공부를 하면서 부처님이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누구든지 부처님을 바로 이해했다면 붓다가 가르치시는 해방의 길을 직접 걸어가게 된다. 타인의 수행태도나 공연한 교리해석이 나 계율을 지켰느니 말았느니 하는 일로 귀한 생명의 시간을 낭 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느님을 바로 이해하면 자신의 십자가는 내팽개친 채 남의 십자가를 가지고 시비하는 일은 없어 진다. 하느님을 알게 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일 과 그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지 비난하거나 협박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결코 당신을 선택하도록 했지 강요하거나 거짓 선전을 하시지 않았다. 체질과 질병의 종류에 따라서 전문적인 의사가 있듯이, 마음의 병이나 영혼의 병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따라 인연따라 종파는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냐 기독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창시자의 가르침을 얼마만큼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