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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제1장. 추구

제 1장. 추구

 

우리는 모두 마음의 평화와 조화를 갈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서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행복은 우리가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하는 인생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때로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급해지거나 생활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부조화, 고통으로 인해서 삶의 회의와 불만족을 느낀다. 비록 순간적으로는 그러한 불만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해도 누구나 고통스러웠던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크고 작은 괴로움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우리는 모두 죽음의 고통에 직면해야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개인적인 불만족은 우리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자신과 삶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불행감을 느끼는 사람의 내면은 편치 못하고 불안하고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도 자연히 마음이 불편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흔히 전염성이 있는 피부질환이나 그 외 육체적인 전염병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인 불건강이 갖는 전염성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인 질병에 비해서 정신적인 질병의 전염성은 몇 배로 더 빨리 옮겨지고 결과 또한 그만큼 심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정신적인 정서상태의 전염성에 대한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전달하는 사람이나 전달받는 사람 둘 다가 서로에 대한 경계를 하지 않는다.

정신병이나 심각한 노이로제 증상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지나치 게 불안정한 사람이나 짜증이 많은 사람과 가까이 있거나 그 사람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지 않다. 분노심이 많은 사람이나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닮아가기 마련이다.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서로 닮는다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사소한 피부병을 앓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 사람은 물론이고 본인 자신도 자신의 병이 혹시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나 염려하게 되고, 만일 그것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병을 얻는다면 당연히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분노, 좌절, 불안정, 슬픔, 노이로제... 등등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긴장이나 상쾌하지 못함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둔감하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문제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으며 나아가서 개인이 겪는 갈등이나 긴장은 사회의 긴장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알고 보면 개인과 개인은 무관한 타인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타인의 문제가 더이상 타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더욱이 개인뿐만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지구촌 시대가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간의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국한시켜서 생각할 뿐 정신적 고통이나 갈등의 문제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는 갈등과 긴장과 고통속에서 생활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하물며 우리 개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우리 모두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로 묶여 있으며,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만무하다. 소수의 특정 지식집단이나 종교단체들이 지구전체가 오염되어 죽어가고 있는 막바지에 와서야 겨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독립된 존재들이 아니라 서로 결정적인 유기적 관계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미 25세기 전에 북인도에서 인간이 고통받고 있는 근본문제를 해결하려고 결심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수년동안 여러가지 방법을 찾고 시도한 끝에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는 방법을 발견했고, 고통으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경험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불행과 갈등으로 부터 벗어나서 궁극의 해방에 도달하는 목적을 성취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스스로의 무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데 나머지 삶을 바쳤다.

그가 바로 붓다(깨달은 사람) 로 알려진 고타마 싯다르타다. 붓다는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슨 신성한 존재라고 결코 주장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에서 다른 모든 위대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붓다는 전설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붓다의 생애에 대해서 어떤 신비한 이야기를 들었거나, 아니면 그의 기적적인 힘에 관해서 들었던가에 관계없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붓다 자신은 자기가 신성하게 되었다거나 신성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 일이 결코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분명히 인간 그자체로서 완전한 인격에 도달했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그가 성취했던 것은 인간이면 모두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붓다는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믿음의 체계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법(Dhamma), 즉 ‘자연의 법칙’ 이라고 불렀다. 그는 교리나 게으른 사색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우주적인 문제에 대해서 보편적이고 실제적인 해결을 제공했다. 그는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서 처음으로 가르치고자 했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통과 고통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겠다.”

그는 인간을 불행으로부터 해방으로 인도하는 것과 관계없는 것들은 논의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가르치는 것들은 붓다 자신이 창안하거나 아니면,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로부터 계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순전히 인간 그 자신의 노력으로 발견한 진리이고 실재였다.

그것은 붓다 이전의 사람들도 그렇게 했고, 붓다 이후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진리에 대해서 결코 독점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외형적으로 언뜻 보면 그가 가르치는 것은 그다지 논리적이지도 못하다.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의심받기에 알맞고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초개인적인 것이라고 붓다는 말했다.

당신이 남에게 들은 것이나, 과거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나, 아니면 일반적이고 공통된 견해라고 해서, 또는 경전 안에 쓰여진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신봉하지 말라. 단순한 연역이나 추론, 또는 겉으로 드러난 외형이나 어떤 견해에 대한 당파적 주장이나 그럴듯한 가능성, 또는 당신의 스승이 당신에게 그러하다고 가르쳤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라.

오직 당신 스스로가 판단했을 때,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난 받고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수 행을 삼는다면, 그것들은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것을 포기해야만 된다. 그리고 반대로 완전하고 지혜로운 사람 에 의해서 비난받지 아니하고 칭찬받는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채 택해서 수행하면, 그것은 당신을 복지와 행복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러한 원리를 채택해서 훈련해야만 된다.

가장 신성한 권위는 진리에 대한 그사람 자신의 경험이다. 어떤 것이든 진리에 대한 진정한 경험없이 단순한 믿음만으로 받아 들여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이 논리적이고 실제적이고 유익한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반드시 검증을 해봐야만 된다.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수단만 가지고 누군가의 가르침을 검증하고 나서 지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만일 우리가 진리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유익함을 얻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직접 경험해야만 된다. 실제로 경험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것이 진정으로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붓다는 항상 직접적인 지식으로 그가 실제로 경험했던 것만을 가르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발달시키도록 고무시키고, 누구든지 자기자신의 주인이 될 것을 강조했다.

“너희들 각자는 너 스스로의 섬을 만들어라. 너 스스로 피난처 를 만들어라. 너 자신 이외에는 어떤 다른 피난처가 없다. 진리를 너의 섬으로 만들어라. 그외에는 어떤 다른 피난처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진리나 가르침 보다도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토대로 해서 자신의 마음자리를 만들어 가라는 의미다. 즉 누구든지 자기자신을 인생의 등불로 삼고 진정한 절대진리를 등불로 삼아서 본래 마음자리(깨친 자리)를 찾아가라는 의미다.  自燈明 法燈明 

어떻게 보면 기독교에서 말한 “네 십자가는 네가 지고 가라.” 는 말과도 상통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의지하고 커가면서 친구, 사회, 배우자, 스승, 나아가서 자식, 제자에게까지 끊임없이 의존하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는 분노하고 실망하고 미워하지만, 그러나 인생에서 진정으로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만 되고 책임을 져야만 되는 것은 오직 자기자신 뿐이다. 우리 각자가 진정으로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하게 견고한 땅은 스스로에 의해서 경험되고 입증된 진리, 법, 자연, 우주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가장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진리를 실현하는 데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쉽고 분명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붓다는 “나의 가르침은 바깥 세계와 내부 세계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스승의 가르침 속에는 어떤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붓다는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자연과 우주의 법칙이 가능한한 평범하고 넓게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엮어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을 교조로 하고 숭배하는 종파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의 존재 자체는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붓다는 주장했다.

붓다의 목적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그들을 맹목적인 믿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붓다는 자신에게 지나친 존경과 숭배를 표시하는 제자들에게 “너는 이 육신을 봄으로써 무엇을 얻는가? 이 몸은 썩어 없어질 물건이다.” 라고 말했다.

불교경전 가운데 지혜의 본질을 담고 있는『금강경(金剛經)』 에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한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사도(私道)를 행함이라. 고로 능히 여래(붓다)를 보지 못하리라(苦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곧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본다.”라고 한 붓다의 말과 상통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신성하고 위대한 존재라고 해도, 단순히 그 를 믿고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무지와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없이는 진정한 해방이나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 자체가 우선이지,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우선일 수는 없다. 붓다는 그의 전 가르침을 통해서 이점을 강조 했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고 당연하지만, 존경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보내기 보다는,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스스로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붓다의 삶이 끝나갈 즈음에 제자들로부터 지나친 존경이 붓다에게 주어졌을 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을 적절하게 존경하고 숭배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을 추앙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첫 걸음부터 마지막 걸음까지 꾸준하게 수행을 게을리 하지않는 사람들이며, 그들이야말로 바른 방법으로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길이다. 

붓다는 그 길을 8단계로 제시하고 팔정도(八正道)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고귀한 가슴이 되고, 성스러운 사람이 되며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고귀한 팔정도라고 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로 들어가는 통찰의 길이며, 진리를 실현하 는 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이 실재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피상적이고 외형적인 현실을 지각할 뿐, 그것의 본질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미묘한 진리와 궁극적인 진리,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진리를 경험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한 해방의 진리를 주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하는 이름은 무엇이라 부르든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 스스로를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은 비깥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언제나 외부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우리자신,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구조, 자신의 행동, 자신의 현실을 검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서 무지상태다. 우리는 그러한 무지가 얼마나 해로운지를 알지 못하며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우리 안에 있는 감정과 분노와 미움과 질투와 야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내면의 어두움은 추방되어져야만 된다.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먼저 얻어야만 된다. 그러므로 붓다가 보여주는 길은 내성의 길이고 자기 관찰의 길이다.

붓다는 말했다. “지각을 가진 마음을 포함해서 바로 이 깊은 육체의 심연 앞에서 나는 우주를 알았고, 그것의 기원과 그것의 끝과 그 끝으로 나아가는 길을 알았다.”

우주와 자연의 진정한 법칙은 스스로의 내면에서만 경험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법칙을 경험해 가는 길은 또한 자기정화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한 진리를 게으른 지적인 호기심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온갖 감정의 덩어리를 씻어내는 자기정화와 진정한 자기발견이라고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연구해야 된다. 자신의 내면을 주의깊게 관찰하다 보면,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행동이나 감정은 문제의 본질을 바로 이해해서 나온 것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습관과 그릇된 인식에서 나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들이 겪고 있는 갈등이나 긴장, 분노, 미움은 정말은 우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잘못된 인식에 의한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 또한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어두운 부분들은 우리가 그것의 존재와 작용을 인식함으로 제거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써 우리는 점차 그것들을 용해 시키고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평화로와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절대 순수와 평화로 가는 길은 계속적인 훈련과 실천을 요구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물론 일순간에 마음의 중심 을 꿰뚫는 갑작스런 관통이 일어날 수 있으나 그것은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 된 결과이다. 누구나 한단계씩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훈련해가는 과정에서 그 효과는 항상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단순히 미래에 더 많은 이익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에서나 아니면, 죽으면 천당에 가게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훈련의 결과는 지금 여기서 바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개인적으로 경험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길은 훈련되어지고 변화되어지는 가르침이다. 단순히 붓다나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러한 길이나 그 길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이해하는 것은 그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그 가르침을 실제로 훈련하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킬 때 만이 가치가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그것을 실제로 훈련할 때 구체적인 결과를 주고, 우리의 삶을 보다 긍정적이고 밝게 변화시킨다. 붓다는 말했다.

“어떤 사람은 경전 내용을 상당히 많이 암송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소를 세는 목자와 같다.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을 즐기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단지 몇 개의 경전 구절만을 암송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길에 서서 법의 삶을 산다면,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의 삶을 즐길 것이다.’’

길은 따라져야 하고 가르침은 심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의미없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훈련하는 데 있어서는 불교인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관계가 없다. 고통은 불교인이냐 기독교인이냐를 구별하지 않는다. 육신을 가진 우리 중생들은 모두가 고통한다. 그러므로 가장 효과적인 해결방법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 한다. 붓다가 가르친 자유의 길이 일상적인 삶과 동떨어진 은둔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제한된 훈련이 아니다.

물론 일정 기간 동안은 바른 훈련법을 배우기 위해서 전적으로 전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단 배우고 나면 그것을 매일의 삶 속에서 적용할 수 있어야 된다. 만일 그것이 진정으로 평화를 주는 방법이라면, 훈련을 통해서 일상의 삶 또한 보다 행복해져야 되고, 내면의 정서는 보다 조화롭고 평화로와야 된다.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도 보다 평화적이고 조화롭게 되어야만 된다. 주변과 사회에 긴장을 주는 대신에 모든 사람의 행복과 복지를 불러 일으키는 긍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어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따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그것은 곧장 타인의 삶을 방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과 이웃을 위해서 붓다가 제시하는 해방의 길을 따라야 하며,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법, 진리, 순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을 실제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그의 가르침을 바르게 인식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그러한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바로 삶이 예술자체가 되는 것이다.

 

 

문답(問答) Q&A ( 답변 : 고엔카 )

Q: 당신은 붓다에 관해서 계속 설명했다. 당신은 불교를 가르치는가?

A: 나는 주의나 학설에 관심이 없다. 나는 법, 즉 붓다가 가르친 것을 가르친다. 붓다는 결코 어떤 주의나 종파적인 가르침을 가르친 적이 없다. 붓다는 모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유익하게 될 수 있는 삶의 기술을 가르쳤다. 무지상태에 있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해롭다. 지혜를 발달시키는 것은 모두에게 유익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기법을 훈련할 수 있고 그리고 거기서 유익함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것이고, 유대교인은 훌륭한 유대교인이 될 것이며, 모슬렘인은 훌륭한 모슬렘인이 될 것이며, 불교인은 훌륭한 불교인이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훌륭한 인간존재가 되어야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훌륭한 불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어떻게 훌륭한 인간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Q: 당신은 조건화 되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한 훈련은 정말 로 마음의 조건화의 일종이 아닌가. 설사 긍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A: 그것은 반대로 탈조건화의 과정이다. 마음에 어떤것을 부과하는 대신에 그것은 자동적으로 해로운 특징을 제거함으로써 건강해지고, 긍정적인 것만 남게 한다. 부정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긍정을 드러내는 것이며, 긍정은 순수한 마음의 기본적인 본질이다.

 

Q: 그러나 기간이 지나면 특정한 자세로 앉아 있거나, 어떤 방식 으로 주의를 향하는 것이 조건화의 형태이다.

A: 이 게임이나 기계적인 의식을 그렇게 행한다면, 그때는 맞다. 당신은 마음을 조건화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빠싸나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위빠싸나를 바르게 훈련하면 당신은 스스 로 진리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자연적으 로 이해가 발달하고 그것이 이전의 모든 조건화를 파괴한다.

 

Q: 세상을 잊어버리고 하루종일 앉아서 명상만 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지 앉은가?

A: 만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사실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적이지 않고 건강한 마음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이다. 당신의 몸이 병들었을 때, 당신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병원에 간다. 그렇다고 당신이 전 삶을 거기서 보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상 적인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자신과 타인의 유익한 삶을 위해서, 그리고 정신적인 건강을 얻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것이다.

 

Q: 타인이 고통받고 있는데 혼자만 행복하고 평화롭게 머물러 있 는 것은 순전히 무감각한 것이 아닌가?

A: 남의 고통에 민감하게 된다는 것이 반드시 함께 슬퍼져야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분하고 중도적인 자세로 머물러 있어 상대방의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 만일 덩달아서 같이 슬퍼하고 흥분한다면 그것은 불행을 가중시킬 뿐 상대방에게는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더욱이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Q: 왜 우리는 평화의 상태로 살지 못하는가?

A: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명함이 없는 삶은 착각과 환상 의 삶이다. 그것은 동요되고 불행한 삶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 한 책임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건강하고, 조화롭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를 관찰하고,  진리를 관찰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Q: 그러한 기법이 신체도 치료하는가?

A: 부수적인 효과로서 몸의 증상도 치료한다. 많은 신체적 증상 은 정신적인 긴장이 해결될 때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만일 마음이 동요되면 신체적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 마음이 차분하고 순수해지면 자동적으로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마음의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대신에 신체적 질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마음도 몸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신체적인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이 훈련에 참여한 사람들이 훈련을 하는 동안에 그들의 관심을 오직 질병에 고정시키는 것을 보아왔다. “오늘은 더 나아졌는가? 아니,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은 좋아졌는가? 아니, 좋아지지 않았다.’’ 훈련시간을 모두 그러한 방식으로 낭비했다. 그러나 만일 훈련의 의도가 모두 순수한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었다면 많은 질병이 명상의 결과로 자동적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Q: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A: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내면 깊숙이로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실재를 관찰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벗 어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능력을 확인하 고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Q: 당신은 인간이 경험하는 부정적인 측면, 즉 고통에 의해서 압 도되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예를들면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에 의해서 주도되는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우리가 긍정적 측면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음의 진정한 본질이 다. 마음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항상 순수한 사랑 으로 충만되고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만일 부정적 측면을 제거한다면 그때 긍정적 측면이 남고 순수성이 남는다. 전 세계가 그러한 긍정적 측면으로 압도되도록 각자가 노력해야 된다.

 

 

인생의 행로를 걷는 것

북인도에 있는 어느 한 도시에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들으러 오는 큰 센터가 있었다. 매일 저녁 붓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수년동안이나 붓다의 가르침을 들으러 왔지만 그 가르침을 실제로 수행한 일은 없었다.

수년이 지난 어느날 저녁 그 남자는 조금 일찍 와서 혼자 계시는 붓다를 발견하고는 다가가서 말했다.

“성자이시여, 제 마음에 일어나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법의 길에는 어떠한 의심도 없어야 된다. 그것을 명료하게 하거라. 너의 질문은 무엇인가?”

“네, 저는 여러 해 동안 명상센터에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래의 주변에는 저와 같은 많은 은퇴자, 수행승, 일반 남녀들이 있다는것도 알았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확실히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저는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들은 완전히 자유로와 보입니다. 저는 또한 그외 사람들도 자신의 삶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래이시여, 저와 다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그대로이고 더러는 더 나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으며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습니까? 여래이시여, 사람들은 완전히 깨달으시고, 자비로우시고 위대하신 여래의 힘을 믿고 옵니다. 왜 여래께서는 여래의 자비를 저희들 모두에게 고루고루 쓰지 않으십니까?”

붓다는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여, 그대는 어디에 사는가? 고향이 어디인가?’’

“여래이시여, 저는 코살라의 사바티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 그대의 생김새로 보아서 이 지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구나. 원래의 고향은 어디인가?”

“예, 저는 마가다의 수도인 라자가하에서 왔습니다. 저는 수 년전에 이곳으로 와서 정착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라자가하에 자주 가는가?”

“예, 거기에 많은 친척이 살고 있습니다. 친구도 살고 있습니다. 직업 거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분명히 사바티에서 라자가하까지 아주 자주 왕래하겠구나?”

“예, 해마다 여러차례 라자가하를 다녀옵니다.’’

“여기서 라자가하까지 그렇게 자주 많이 왕래를 하면 분명히 그대는 그 길을 아주 잘 알겠구나?”

“예, 여래이시여, 저는 그 길을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아마 눈을 감고도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여러 번 다녔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잘 아는 친구들이 분명히 그대가 라자가하에서 와서 여기에 정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구나? 그들은 그대가 라자가하를 자주 방문하고 돌아간다는 사실과, 그대가 여기서 라자가하까지 가는 길을 완전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구나? 그런데 그들 중에 가끔은 그대에게 와서 여기서 라자가하까지 가는 길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겠구나? 그럴때 그대는 그들에게 뭔가를 숨기고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아니면, 그들에게 그대가 아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는가?’’

“거기에 숨길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래이시여, 저는 그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동쪽을 향해서 출발하고 그리고 바나라를 향해서 가다가 가야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가면 라자가하에 도착한다고 저는 아주 쉽게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그러면 그대가 그렇게 분명하게 설명을 해주면 사람들은 모두 라자가하에 도착하는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여래이시여. 단지 묻는 사람도 있고 올려다 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설명하고 싶은 것이다. 젊은이여, 사람들은 내가 여기서부터 니르바나(열반, 깨달음)까지 가는 길을 걸어간 사람이고, 그래서 그 길을 완전하게 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를 찾아온다. 그들은 나에게 와서 묻는다. ‘무엇이 니르바나로 가고, 해방으로 가는 길입니까? 그리고 거기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습니까?’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것이 길이다.’ 만일 누군가가 머리를 바로 끄덕이고, ‘맞다. 아주 훌륭한 길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없다. 깨달음으로 가는 그 길은 훌륭한 길이지만, 나는 끝까지 걷기에는 자신이 없다.’ 든지, 그외 다른 핑계를 댄다면 어떻게 그러한 사람이 마지막 목적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누구도 나의 어깨에 얹어서 마지막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어깨에 걸머지고 마지막 목적지까지 갈 수는 없다. 기껏해야 사랑과 자비심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걸었던 방법이다. 그대도 할 수 있다. 그대가 실제로 걸어간다면 마지막 목적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각자는 스스로 걸어야 한다. 그 길에 한발을 옮겨 놓는 사람은 그 목적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것이다. 백 발짝을 옮겨 놓는 사람은 그 목적에 백 발짝을 더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다. 그 길에 모든 걸음을 걸은 사람은 마지막 목적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 제 2장 : 출발점

 

제2장. 출발점

제2장. 출발점 고통의 근원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실체를 이해할 때,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고 현명한 사람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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