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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제9장. 목적

제9장. 목적

 

일어나는 본질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또한 중단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은 실재에 대한 경험을 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의 단순한 묶음이다. 우리 인간이 고통받는 원인은 실제로는 순간적이고 실체가 없는 순간적인 접촉에 집착을 발달시켜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간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비영속적인 본질을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과제다. 자신 안에서 항상 변화하는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일시적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이 일어날 때마다 반응하지 않고 그 감각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조건화된 낡은 마음이 의식의 표면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조건화와 집착이 멈추면 고통이 멈추어져 우리는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는 훈련을 요구하는 긴 과제이지만, 그 길을 따라가는 걸음에는 유익함이 많다. 최종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오직 인내하면서 꾸준하게 노력하고 계속하여 반복할 때 우리는 그 목표로 다가설 수 있다.

 

 

궁극적인 진리의 관통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데는 3단계가 있다. 첫번째 단계는 단순히 그것이 어떻게 되어지고 왜 그렇게 되는지 그 기법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그것을 실제 훈련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관통이다. 자신의 실재의 깊이를 간파하기 위해서 기법을 사용하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붓다는 외형적인 세계의 존재( 형태, 색깔, 맛, 냄새, 고통, 즐거움, 생각, 정서, 자신과 타인의 존재 )를 부정하지 않았다. 붓다는 단지 그러한 것들이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하나의 덩어리가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냥 외형적인 실재로만 지각한다. 구성요소는 보지 않고, 단지 겉으로 드러난 차이만을 일차적으로 인식하여 그것에 편애와 편견, 좋고 싫음의 분별을 덧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망과 혐오로 발달하는 과정이다. 갈망하고 혐오하는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형적인 실재를 구성하고 있는 것 이면의 현상을 지각하는 총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한 총체적인 지각 능력과 마음의 깊이를 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위빠싸나 훈련이다.

자기 검증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분명한 영역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양한 신체기관들에 대한 세밀한 검사를 해보면 어떤 부분은 딱딱하고 어떤 부분은 용액이며, 어떤 부분은 운동 중에 있거나 쉬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몸의 온도는 주변환경의 온도와 구별되는 것으로 지각될것이다. 이러한 모든 관찰은 보다 큰 자기 자각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모양이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외형적인 실재를 검사한 결과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별은 편애와 편견, 갈망과 혐오를 지속시킨다.

명상을 하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감각을 자각하는 훈련을 통해 더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보다 미세한 실재를 보게된다. 처음에는 다양한 신체부분에서 다양한 유형의 감각이 일어나서 한동안 머물렀다가 결국 사라진다. 여기서는 비록 피상적인 수준은 넘어서서 진전했지만 여전히 통합된 외형적인 실재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 차별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갈망과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계속해서 부지런히 훈련을 하면 곧 감각이 변화하는 본질이 존재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는 이제 몸을 통해서 미세한 감각의 일정한 형태가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물질이 아원자와 같은 극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는 현상을 지각하기 위해서 통합된 패턴을 넘어서서 꿰뚫어보게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미립자들의 순간적인 본질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제 우리 안에서 관찰되는 것은 피나 뼈와 같이 용액이거나 딱딱한 것이나 기체거나 또는 잘 생 겼든 못 생겼든 관계없이 모두 분류할 수 없는 진동의 덩어리로 지각된다. 마침내 분별을 일으키는 과정과 꼬리표를 다는 과정이 멈추어진다. 우리는 우리 몸의 구조 안에서 물질의 궁극적인 본 질을 경험한다. 그것은 계속해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이다.

마찬가지로 정신과정 역시 외형적인 실재에서 보다 미세한 수준까지 뚫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순간은 그 개인의 과거 조건화에 기초되어 있다. 다음 순간에 마음은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반응을 반복하고 그것이 갈망이나 혐오로 발전할 때까지 순간 순간 그것을 강화한다. 그러한 피상적인 지각으로 우리는 즐거운 것과 즐겁지 않은 것, 좋고 나쁜 것,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사이를 확인하고 분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외형적인 물질적 실재의 경우에서처럼 강화된 정서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강화된 정서를 관찰하기 시작하면 정서 또한 물질과 마찬가지로 용해되기 시작한다. 물질이 미세한 미립자들의 흐름일 뿐이듯이 그렇게 강한 감정의 덩어리 역시 감각에 대한 순간적 반응으로서 단순히 순간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조건화된 반응의 형태다. 일단 강한 정서가 미세한 형태로 용해되면 더이상 우리를 압도하는 강한 힘을 갖지 못한다.

다양한 신체부분에서 다양하게 통합된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우 리는 신체구조를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보다 미세 한 감각의 일정한 본질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감각은 엄청난 속 도로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통해서 그것을 진동의 흐름으로 경험하게 된다. 몸의 어느 영역에서나 주의를 고정 시키는 자리에는 감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뿐임을 자각하 게 된다. 마음 속에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신체감각을 수반하는 것을 자각하게 된 다. 몸의 외형적인 형태와 마음의 감정적인 덩어리들이 용해되면 서 물질, 마음, 정신적 현상이 형성되는 궁극적인 실재가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진동임을 경험한다. 그러한 진리를 경 험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세상은 불타고

온 세상은 연기로 올라간다.

온 세상은 타고 있고

온 세상은 진동하고 있다.

그와 같이 모든 형태와 정서의 덩어리들이 용해되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중도를 발달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과학자가 현미경의 배율을 높임으로 사물의 보다 세밀한 현상을 관찰하듯이, 자각과 중도를 발달시킴으로 우리 안에 있는 보다 미세한 실재를 관찰하는 능력을 증가시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실재를 보는 능력을 증가시킴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실재를 경험하게 되면 그 순간 엄청난 희열에 휩싸이게 된다. 모든 인간적인 고통과 아픔은 소멸되고 평화스럽고 행복하고 축복에 넘친다. 붓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때마다 축복과 기쁨을 즐긴다.

지혜로서 그것을 깨달을 때 그는 불멸에 이른다.

축복은 명상을 훈련하는 과정에서 외형적으로 단단한 몸과 마음이 용해될 때 일어나게 되어 있다. 훈련과정에서 오는 즐거운 상황에서 기뻐하면서 그것이 마치 마지막 목적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중간 역이다. 결코 종착역이 아니다. 거기서 중도하차 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마음과 물질 저 너머에 있는 궁극적인 진리를 경험하기 위해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명상훈련에서 외형적인 것에서부터 미세한 실재로 관통해 들어가면 우리는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진동의 흐름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을 즐기다 보면 갑자기 그 흐름이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우리는 신체의 어느 부분에서는 강하고 즐겁지 않은 감각을 경험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아마 감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우리는 마음에서 강한 정서를 경험한다.

그때 만일 그 새로운 상황에 대해서 혐오를 느끼기 시작하고 되돌아 가기를 원하면 명상훈련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훈련을 하는 목적을 즐거운 경험은 취하고 즐겁지 않은 경험은 피하거나 극복하려는 일종의 게임으로 바꾼것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고 있는 밀고 당기고 끌고 끌리면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불행으로 향한 게임과 다를것이 없다.

그러나 지혜가 커갈수록 거친 감각이 소멸한 후에도 다시 나타나는 것이 뒤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위빠싸나를 어떤 특정한 종류의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조건화된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특정한 감각에 반응을 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키울 뿐이다. 우리가 중도를 취할 때 조건화는 사라지고 감각은 우리에게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유쾌하지 못한 감각을 반응없이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혐오를 뿌리 뽑을 수 있다. 즐거운 감각을 반응없이 관찰함으로써 갈망을 뿌리 뽑는다. 반응없이 중성적인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무지 또한 뿌리 뽑는다. 그러므로 아무런 감각이 없고 경험이 없는 것 또한 기본적으로는 좋거나 나쁜 것이다. 오직 중도의 자세를 취하고 머물 수 있을 때, 그것만이 좋은 것이다. 중도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조건화를 뿌리 뽑는 도구로서 모든 감각을 사용한다. 이것이 모든 조건화 된 반응습관을 향한 중도로 알려져 있는 단계다. 중도는 한걸음 한걸음 궁극적인 해 방의 진리로 이끈다.

 

 

해방의 경험

해방은 가능하다. 인간은 모든 조건화와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얻을 수 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모든 물질의 영역과 모든 마음의 영역을 넘어서는 경험의 공간이 있다. 그것은 이 현상의 세계도 아니고, 이 세계 밖의 다른 세계도 아니고 두 세계를 합한 세계도 아니고, 달도 해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그 세계는 일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죽음도 없다. 지탱도 없고 발달도 없고 환생도 없다. 그것은 고통의 끝남이다.

거기에는 태어남, 되어짐, 창조됨, 조건화됨이 없다. 거기에는 이로 인해서 일어나는 태어나지 않음, 되어지지 않음, 창조되지 않음, 조건화 되지 않음이 없고, 해방되지 않음도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태어남, 되어짐, 창조됨, 조건화 됨이 없기 때문에, 해방은 태어남과 되어짐과 창조됨과 조건화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르바나( 열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궁극의 실재, 비 조건화 )는 죽은 후에 인간이 가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자신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열반은 부정적인 경험이 아니지만 우리가 열반이라고 하는 진정한 세계를 기술할 만한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로 기술한다. 모든 언어는 신체적 정신적 현상의 모든 범위를 다루는 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의 세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말이나 개념은 없다. 그것은 모든 범주와 모든 차별을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것이 무엇이 아니라는 말로만 기술할 수 있다.

실제로 니르바나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설명도 혼동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니르바나는 논의하거나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고통의 멈춤’에 대한 이 숭고한 진리는 스스로 깨달아야만 된다. 니르바나는 오직 그것을 직접 경험할 때만이 진정한 것이다. 니르바나에 대한 논쟁은 진정한 니르바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니르바나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형적인 실재를 벗어나서 그것을 꿰뚫어 봄으로써 몸과 마음의 소멸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외형적인 실재를 넘어서서 한층 더 깊이 꿰뚫어 볼수록 그만큼 갈망과 혐오와 애착을 그만두고 궁극적인 진리에 접근하도록 만든다.

한걸음씩 훈련을 하다보면 자연히 열반의 세계를 경험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서 열반을 갈망하는 마음조차 없어지면, 깨달음의 단계가 올 것인가에 대한 의심도 없어지게 된다. 법을 올바르게 훈련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깨달음의 단계가 오게 되어 있다. 다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조건화 된 반응의 축적과 그것을 뿌리 뽑으려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누구든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해방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어나는 감각을 아무런 반응없이 계속해서 관찰해야만 된다.

언제 우리가 궁극적인 해방의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그 길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으며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은 보장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마음상태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우리의 내면과 외면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중도를 유지함으로써 매 순간 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갈망, 혐오, 무지의 소거를 니르바나( 열반, 해방 )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 자체나 죽어서 가는 곳이 열반이나 해방이 아니고, 살아서 노력하고 훈련해서 경험해야 하는 세계다. 그리고 갈망과 혐오와 무지로부터 마음이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따라서 해방을 경험하는 정도가 다르다.

우리가 위빠싸나 명상법을 훈련하는 모든 순간에,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법의 세계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 미래에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는 법의 세계를 따라가는 모든 걸음에서 유익함을 경험해야 하고, 우리가 걷는 모든 걸음은 곧장 깨달음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의 낡은 습관에서 자유로운 마음은 평화스러운 마음이다. 그러므로 평화스러운 매 순간들이 쌓여서 우리를 해방의 길로 보다 가깝게 다가간다.

우리는 해방을 발달시키려고 노력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은 발달되는 것이 아니다. 해방은 단순히 그대로다. 다만 우리는 우리를 해방으로 인도하는 중도의 특질을 발달시키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반응없이 관찰함으로써 궁극적인 진리로 관통한다. 가장 높은 마음의 특질은 실재를 완전하게 자각하고, 그 자각된 실재에 중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열반에 이르는 수행의 두 날개 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

어느 날 붓다는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붓다는 행복을 가져다 주고 진정한 축복이 되는 다양한 행동들을 열거했는데 그것은 다음의 두 범주에 속했다. 가족과 사회에 책임을 다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행동을 수행하는 것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선은 다른 사람의 선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나의 선한 행동은 곧 타인의 선한 행동을 자극하고 나의 악한 행동은 타인의 악한 행동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붓다는 마지막에 가장 큰 행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싫고 좋은 일들과 부딪쳤을 때 여전히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오염된 마음을 만들어내지 않고 항상 안전하게 느낀다.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세계와 바깥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관계없이 인간은 긴장감이나 억압된 갈망과 혐오 없이 마음 깊숙이서 우러나오는 미소로 아주 편안하게 직면할 수 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즐거움이든 불쾌함이든, 원하는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어떤 것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으며, 때가 되면 모두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깊은 이해 속에서, 자기 앞에 놓여진 상황이 어떠한 것이든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인이고 아무 것도 당신을 지배하지 못하며 당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미소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이 마음의 완전한 중도이고 그것이 진정한 열반이다. 우리는 바로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서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현생에서 최고의 행복인 완전한 중도에 도달할 수 있다. 진정한 중도의 자세는 단순히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무관심이 아니다. 중도의 태도는 인생의 문제로부터 도피하거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위험을 숨기려고 하는 맹목적인 무관심이나 묵인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도의 자세는 언제나 현상의 본질을 올바르게 자각하고, 그 자각을 바탕으로 해서 어떤것에도 끄달리지 않는 태도이다.

갈망이나 혐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해방을 즐기면서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냉담한 무관심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진정한 중도의 자세는 신성한 무관심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그것은 역동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의 맑고 순수함의 표현이다. 맹목적인 반응습관에서 자유로워질 때 마음은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유익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중도를 유지함으로써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는 훌륭한 의지와 사랑,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자비심과 같은 순수한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자신에게 좋은것은 무엇이든지 취하려고 하고, 원하지 않는것은 애써서 피하려고 하는 속성을 떠나서, 이제는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것이 곧 나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것을 타인과 나누어 가질 줄 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해방의 평화를 경험하고,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와 같이 타인을 향한 훌륭한 의지의 발달이 위빠싸나 명상법의 논리적인 결론이다. 이전에는 말로만 봉사를 하거나 오히려 자신의 숨은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의도에서 드러난 사회활동을 했기 때문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갈망과 혐오의 낡은 습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정도 반응과정은 멈춰져 자기중심의 낡은 습관이 사라지고 훌륭한 의지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흐를 것이다. 순수한 힘을 가진 훌륭한 의지는 모든 사람의 유익함을 위해서 평화스럽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창조하는 데 아주 강한 힘을 갖는다.

항상 중도를 유지한다는 것이 마치 화가가 풍부한 색깔을 고루 갖춘 팔레트를 가지고도 회색만 사용하거나 아니면 피아노의 중간 음계만 사용하는 것처럼, 다양한 삶을 더이상 즐길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중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사실은 피아노는 장단이 틀린데도 우리는 연주법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피아노 다루는 방법을 모르면서 단순히 자기표현이며 건반을 두드린다면 오직 불협화음만 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피아노를 제대로 연주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그때 우리는 음악 을 만들 수 있다. 가장 낮은 음계에서 가장 높은 음계까지 우리는 모든 건반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연주되는 음악은 조화롭고 아름답다.

완전함으로 이르게 하는 마음을 닦고 지혜를 얻는 데서 기쁨과 축복과 중도와 자각과 진정한 행복을 경험한다. 중도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삶을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즐거운 상황이 일어나면 우리는 즐거운 순간에 대해서 완전하고 분리되지 않는 자각을 가지고 그 즐거움을 완전하게 맛볼 수 있다. 그 경험의 순간이 지나갔을 때 우리는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은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즐겁지 않은 상황이 일어났을 때에도 우리는 혼란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그 순간을 완전하게 자각하고 그 또한 잠시 머물다 지나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음은 긴장으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즐겁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처음에는 명상훈련을 심각하게 시작하지만 점차 여유롭고 행복한 웃음을 짓게 된다. 그것은 즐거운 순간에 대한 집착이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일체의 현상은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간다는 무상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깨끗해진 사람은 찌푸린 얼굴을 할 수가 없다. 마음의 고통이 제거되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웃게 되어있다. 해방으로 가는 길을 배우면 자연히 행복을 느끼고 순간을 충실히 살며 오히려 만끽할 수 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평화와 중도와 선한 의지를 표현하는 그러한 미소야말로 모든 상황에서 밝게 빛나는 진정한 행복이다. 이것이 법의 목적이다.

 

 

문답 Q&A

Q: 육체적인 고통을 치료하듯이 강박적인 사고를 치료할 수 있는가?

A: 마음에 강박적인 사고나 정서가 있다는 사실을 단지 받아 들여라. 그것은 깊이 억압되어 있던 것이 이제 의식수준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정서를 그냥 정서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정서와 함께 당신은 어떤 감각을 느끼는가? 신체수준에 아무런 감각을 일으키지 않고 정서가 존재 할 수는 없다. 그 감각을 관찰하기 시작하라.

 

Q: 그렇게 하면 특정한 정서와 관련된 감각을 찾을 수 있는가?

A: 일어나는 감각은 어떤 것이든 그냥 관찰하라. 당신은 그 정서 와 관련된 감각을 발견할 수 없다. 결코 그러한 시도는 하지말라. 그것은 무익한 노력이다. 이따금씩 마음에 정서의 덩어리가 일어날 때 신체적으로 경험되는 감각은 무엇이든지 그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감각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한 정서 또한 영원하지 않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보라. 당신은 그것을 관찰하는 순간 정서의 뿌리는 잘라지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Q: 정서와 감각이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A: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정서는 정신적이고 감각은 신체 적이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마음에서 일 어나는 모든 정서는 몸 안에 있는 감각과 함께 일어나게 되어있 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정서 자체는 마음의 문제이 고 마음은 전체 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Q: 의식은 몸의 모든 원자들 속에 있는가?

A: 맞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정서와 관련된 감각이 몸의 어디 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몸을 통해서 감각을 관찰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 정서와 관련된 감각을 관찰하고 있 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 정서 밖으로 벗어날 수 있다.

 

Q: 앉아 있기는 하지만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면 그래도 훈 련은 도움이 되는가?

A: 앉아서 호흡을 관찰한다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집중될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화 과정이 보다 깊은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감각과 함께 반응들이

시작되고 그것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단 몇 순간이라도 감각을 관찰하면 도움이 된다. 

 

Q: 명상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이 해방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가? 

A: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정말로 자유를 경험하는 사람은 신성하게 되고 순수하게 된다. 그들은 도덕훈련을 위한 계율을 파괴하지 않는다. 실수를 숨기는 대신에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의식이나 형식에 매달리는 것이 사라진다. 자신이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해방을 경험하도록 진실하게 도울 뿐 에고를 부추기지 않는다. 

 

Q: 정신분석과 위빠싸나는 어떻게 다른가?

A: 정신분석에서는 마음의 조건화에 강한 영향을 가지고 있는 과거의 사건들을 의식수준으로 회상해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반면,  위빠싸나는 실제로 조건화가 시작되는 마음의 깊은 수준으로 인 도한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에서 회상해내려고 하는 모든 사건은 이미 신체수준에서 감각이 등록된다. 위빠싸나는 몸을 통해서 일 어나는 신체감각을 관찰함으로써 명상을 하는 사람은 무수한 조 건화의 층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허용한다. 따라서 명상 을 하는 사람은 조건화가 발생하는 그 근원지에서 조건화를 직접 다루기 때문에 조건화로부터 빨리, 그리고 쉽게 자유로울 수 있다. 

 

Q: 무엇이 진정한 자비인가?

A: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마음이 자비로운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집착없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한탄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불행 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며, 또한 그들의 고통을 한탄하면서 당사자 보다도 더 흥분해서 개입을 한다면 그것은 또하나의 집착을 낳을 뿐이다. 어느 것도 진정한 법의 길은 아니다. 진정한 자비심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대로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봉사의 결과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고 실패하면 또다른 방법으로 돕는다. 즉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벗어나도록 돕는 행위 역시 중도의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며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다.

 

Q: 위빠싸나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A: 깨달음은 자신을 검증해가면서 조건화를 제거하는 것으로 성 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는 작업이 위빠싸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작업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어떤 사람들은 위빠싸나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않았지만 수행과정에서 그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는 옛날이나 지금이 나 그들 나름대로의 수행방식과 용어를 가지고 많은 훌륭한 수행 승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체계적 으로 훈련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했기 때문에, 자신은 어느 정도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 하지 못한다.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 위빠싸나 훈련에서는 깨달음 으로 나아가는 길을 단계적으로 훈련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름병 채우기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빈 병을 주고 동네 식료품 가게에 가서참기름 만원어치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소년은 기름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넘어져서 기름을 엎질러 버렸다. 반이나 비어버린 병을 보고 소년은 기름 반 병을 잃어버렸다고 울면서 돌아왔다.

어머니는 다시 아들에게 만원을 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런데 그는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넘어져서 기름을 반이나 엎질러 버렸 다. 이번에는 소년이 생각하기를 병이 깨어져서 아예 기름 한 병 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반 병이나 남았으니 매우 다행이 라고 여기면서 오히려 기뻐했다. 그래서 소년은 처음에는 반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울었고 두 번째는 반이 남은 것 때문에 웃었다.

그런데 소년의 어머니는 또다시 심부름을 시켰다. 돌아오는 길에 역시 소년은 넘어졌고 마찬가지로 기름은 반 병 밖에 남지를 않았다. 소년은 두 번째처럼 웃었다. 드디어 소년은 이해했다. 기름 반 병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머지 반 병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래서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기름 반 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값을 벌어서 한 병을 채우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위빠싸나다. 기름을 반 병이나 잃어버렸다고 대책없이 우는 것이나, 반 병을 잃고도 한 병 모두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웃는 것도 불완전한 반응이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현실주의고 낙천주의인 것이다.

 

▶︎ 제10장. 삶의 기술

 

제10장. 삶의 기술

제10장. 삶의 기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편견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편견은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가정을 토대로 우리는 자아를 우주의 중심으로 만들면서 자아를 가장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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