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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제3장. 직접적인 원인

제3장. 직접적인 원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모든 사람이 꿈꾸고 바라듯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그런 동화같은 세계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우리의 삶은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진리를 피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삶의 고통을 인정한다면, 그러한 고통은 왜 일어나는가? 고통에는 원인이 존재하는가? 만일 고통이 원인을 가지고 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통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 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거나,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 력해질 수 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해야만 된다. 아니면 만일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전능한 존재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 진다면, 차라리 그에게 더이상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든가 그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일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우리 인간의 고통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전지전능한 존재에 의해서 지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을 깨달았다. 존재하는 모든 현상에는 그 원인이 있듯이 고통 또 한 그 원인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은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서 비롯된다고 하는 인과의 법 칙(카르마)은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원인은 없다. 모든 고통의 원인들은 우리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카르마(karma, 業)

 

카르마라는 말은 마치 운명과도 비슷한 의미로 흔히 이해되어져 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것은 붓다가 의도한 뜻과는 정확히 반대된다. 운명은 뭔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고, 개인의 의지나 선택과는 거리가 먼 신의 명령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카르마의 본래 뜻은, 말 그대로 행위(行爲, act)를 의미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된다. 선천적 이든 후천적이든 행위하는 모든 존재는 자신이 행하는 행위에 의해서 속박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행위는 그것이 비천하면 비천한 대로, 고귀하면 고귀한 대로 그것이 곧 우리들의 삶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단순히 몸으로 행동하 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5감을 통해서 감지하고 지각하는 것과 의식 무의식을 통틀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을 말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치고 겪는 모든 것들은, 바로 자신의 의식 적 무의식적 행위에 의한 결과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말이다.(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따라서 우리의 행위가 바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도 바뀐다는 말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은 스스로 불러 일으키는 것이며, 당연히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 안에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붓 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인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

우리는 마치 복잡한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장님과도 같다. 운전을 배우지 못한 장님은 결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차를 운전하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차가 자기를 조정한다. 만일 사고없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원한다면 차를 조정하는 방법을 배워서 핸들을 잡고 직접 운전을 해야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무슨 행동을 어떻게 왜 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자각하고 우리가 정말로 가기를 원하는 곳으로 스스로를 인도하기 위해서 행위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된다.

 

 

행위의 세 가지 유형

 

행위는 몸으로 하는 신체적인 행위(身業)와 말로 하는 음성적인 행위(口業) 와 생각으로 하는 정신적인 행위(意業)가 있다. 대개 우리는 겉으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신체적인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만큼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 다음으로는 말로 하는 음성적인 행위에 비중을 두고 마음으로 짓는 정신적 행위에는 가장 적은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말로나 순간적인 의식으로는 밖으로 드러난 행위보다 내면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더 심각한 행위로 받아들인다. 때리거나 말로 상처를 주는 행위는 마음으로 나쁜 생각을 보내는 것보다 더 심각한 행위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모든 나라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법률과 도덕에 기초를 둔 견해다.

그러나 자연법과 우주법에 따르면 정신적인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 몸이나 말로 하는 행위는 행위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황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환자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서 의사가 수술용 칼을 사용해서 수술을 단행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환자를 죽게 한 경우와, 강도 살인으로 무고한 시민을 죽게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물리적 측면에서 보면 의사와 살인자의 행위는 똑같이 사람을 죽게 한 동일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의 행동은 양극단으로 떨어져 있다. 의사는 자비와 책임감으로 행위했고, 살인자는 분노와 미움으로 행위했다. 정신적인 행위에 따르면 각자가 성취한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마찬가지로 말로 하는 경우에서도 말을 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어떤 남자가 직장동료와 다투면서 바보라고 했다면 그것은 화가나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진흙에서 놀고 있는 자기 아이를 보고 어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사랑에서 나온 말이다. 이 두 경우에도 동일한 단어가 표현 되었지만, 마음 상태는 완전히 반대다. 그러므로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말에 담긴 의도에 있다.

몸이나 말로 하는 행위는 순전히 내면의 정신적인 행위의 결과 이고 또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행위는 그 행위가 나타내고자 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본질에 따라서 적절하게 판단된다. 그렇다고 밖으로 드러난 행위는 무조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밖으로 드러난 행위 역시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밖으로 드러난 행위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의도다. 진정한 카르마는 정신적인 행위이며 그것이 미래의 결과를 낳는 원인이다. 붓다는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은 모든 현상보다 앞서서 일어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기 때문에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그대가 순수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때는 고통이 그대를 따를 것이다. 

마치 수레바퀴가 마차를 끄는 말의 발자국을 따라가듯이. 

만일 그대가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때는 행복이 그대를 뒤따를 것이다. 

마치 그림자가 결코 떨어져 나갈 수 없듯이.

 

 

 

고통의 원인

 

그러면 어떤 정신적 행위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가? 만일 마음이 의식, 지각, 감각, 반응의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들 중 어느 것이 고통을 일으키는가. 기본적으로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이 네 가지 요소들은 모두 고통을 일으키는 과정에 어느정도까지는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의식, 지각, 감각은 일차적으로 수동적이다. 의식은 단순히 경험되어지는 원자료를 수동적으로 접수하고, 지각은 접수된 자료를 범주별로 분류하고, 감각은 앞의 두 단계에서 일어난것을 신호한다.

이 세 과정은 단지 들어오는 정보를 소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화된 정보에 대해서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잡아당기거나 밀어내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외부로부터 들어온 정보에 대해서 마음이 반응하게 되면, 그것은 외부정보와 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행위를 일으키게 된다. 바로 마음의 작용 가운데서 들어온 정보에 적극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새로운 행위를 낳는 정보와 행위 사이의 연결고리가 반응이다. 붓다는 이와같은 현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그 원인으로서의 반응을 가지고 있다.

만일 모든 반응들이 멈추어진다면, 그러면 거기에는 더이상 고통도 없을 것이다. 고통의 진정한 원인인 카르마는 마음의 반응작용이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험에 대해서 싫다거나 좋다는 반응을 일으킨다. 물론 잠시 스쳐가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은 그렇게 강하지 않을 수 있고 심각한 결과를 주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적되면 상당한 영향을 가질 수 있다. 반응은 일상의 경험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그 강도는 누적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갈망이나 혐오로 발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매순간 수많은 정보 속에 싸여서 살아가고 있으며, 대부분의 것들을 별다른 의식없이 스치거나 자동적으로 처리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순간에 경험되는 것들 에 대해서는 그것이 싫다거나 좋다는 반응을 일으키면서 좋은 것 에 대해서는 좋기 때문에 그것을 또 경험하려는 갈망이 일어나고, 싫은 것에 대해서는 싫기 때문에 피하고 싶어하는 혐오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반복의 과정을 거쳐서 엄청난 에너지의 덩어리를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록 작은 바램이거나 단순한 즐거움이었다고 하더라도 궁극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으로 변화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결국 원하는 만큼 혐오하게 되고 만다.

따라서 갈망이나 불만족이 보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의 사고와 말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그만큼 깊어진다. 자연히 갈망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고통도 커지게 된다. 그러한 이유에서 붓다는 깨닫고 난 후 첫 설법에서 부터 고통의 근본 원인을, 지칠 줄 모르는 갈망(渴望)과 갈망이 일어나는 현상이나 존재자체에 대한 절대무지(無知)에 두었다.

붓다는 마음의 작용 가운데서 갈망과 혐오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반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들이 의식작용을 통해서 일단 있는 그대로 접수되고 나면, 지각작용은 그것을 정보의 성질에 따라서 분류하게 되고, 이어서 감각작용은 분류된 자료를 신호로써 전달하게 된다. 그러면 반응작용이 자신의 이전 경험에 따라서 싫다거나 좋다라는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반응하는것 가운데 어떤 반응들은 물 표면에 그려지는 선과 같아서, 물 위에 선을 그리면 그리자마자 사라지듯이 우리가 하는 반응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또 어떤 반응들은 모래사장 위에 선을 긋는 것과 같아서, 모래 위에 선을 그으면 잠깐동안 형태를 유지하다가 조수나 바람에 의해서 없어지듯이 반응 역시 한동안 우리의 마음 안에 머물다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 그런데 어떤 반응들은 끌과 망치로 바위에 깊이 새겨진 것과 같아서 바위가 부식되어서 바위자체가 부서져서 없어지지 않는 한 흔적 또한 없어지지 않듯이, 반응 역시 육신이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지워지지 않거나 긴 세월이 걸린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 항상 뭔가와 관계를 하면서 반응을 서로 주고 받는다. 그러한 과정에서 마음은 새롭게 생산되는 반응들을 보존한다. 하루가 지나면 대부분의 사소한 것들은 잊어버리지만, 적어도 그날 하루 가운데 인상적이었거나 중요했던 것들을 한 두 가지는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한달이 지나면 또 대부분은 잊어버리지만, 그중에서 깊이 새겨진 것들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면 역시 한해 동안에 자신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었던 것들은 가슴에 남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불행한 경험들을 평생을 안고 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도 수시로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미 지나가고 없는 아득한 과거의 기억에 의해서 새로운 고통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마치 이미 지나가버리고 없는 과거의 사건을 마치 현재의 순간에도 그대로 경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반응하면서 혐오의 반응을 눈덩이 굴리듯이 점점 더 크게 만들어서, 마침내 헤어나지 못하고 현재의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 속의 시간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반대의 경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행복했던 경험을 수시로 떠올리면서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기 보다는,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 속에 매달려서 또다시 그와 같은 경험을 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이미 지나가고 없는 사건에 집착하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과거의 크고 작은 기억 속에 사로잡혀서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늘상 변화하는 현재 속에서 새롭게 하기 보다는 항상 과거에 끄달려서 현재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존재와 환경은 알게 모르게 또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물처럼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화하는 순간 순간을 살지못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의 삶에 존재하는 고통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고통의 원인을 이해 함으로써 마음의 작용을 조종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고통으로부 터 벗어나는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씨앗과 열매

 

씨앗이 열매를 낳듯이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농부가 똑같은 땅에 두 개의 씨앗을 심었다. 하나는 사탕수수 였고 다른 하나는 아주 쓴 열대나무 씨앗이었다. 두 씨앗은 똑같은 땅에서 같은 물과 햇빛과 공기를 받으면서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열대나무 씨앗은 쓴 맛을 가진 섬유조직으로 자랐고, 사탕수수 열매는 단 맛을 가진 섬유조직으로 자랐다.

원인이 자연환경 때문인가 아니면 신이 어느것에는 단맛을 주고 어느 것에는 쓴 맛을 주는 잔인한 선택때문인가? 아니다. 자연히나 신은 친절하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작용한다. 자연은 오직 씨앗의 특질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도왔을 뿐이다. 모든 영양분들은 단순히 씨앗이 가지고 있는 특질을 드러내도록 씨앗을 도왔을 뿐이다. 사탕나무 종자는 향기로운 특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탕나무는 향기로움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질 수가 없다. 열대나무 종자는 쓴 특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쓴 것 이외의 다른 특질을 가질 수가 없었다. 종자에 따라서 그 열매가 있는 것이다. 농부가 그 열대나무에게 가서 세 번 절하고 그 둘레를 108번 돌고, 그리고 꽃과 향과 양초와 과일과 온갖 향기로운 것을 공양 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 열대나무 신이여 ! 부디 나에게 향기로운 망고를 주소서. 나는 향기로운 망고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은 농부가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었다. 신은 그에게 망고를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일 누군가가 향기로운 망고를 원한다면 그는 망고나무 종자를 심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울 필요가 없으며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망고나무 종자를 심기만 하면, 바로 향기로운 망고를 얻을 것이다. 종자가 있기 때문에 열매는 열리기 마련이다.

우리의 무지(無知)는 종자를 심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쓸모없는 종자를 심고 있으면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열매가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 니라는 것을 알고 뒤늦게 망고를 달라고 울고 기도하고 매달린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다.

 

▶︎ 제 4장 : 문제의 뿌리

 

제4장. 문제의 뿌리

제4장. 문제의 뿌리 붓다가 말하기를 “고통의 진리는 그 바닥까지 탐색되어져야만 된다.”고 했다.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기 전날 밤 그는 고통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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