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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제7장. 지혜의 훈련

제7장. 지혜의 훈련

 

 

도덕훈련이나 집중훈련은 붓다만이 가르친 유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훈련은 붓다 이전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던 기존의 훈련방법이었다. 붓다 역시 자유의 길을 찾아서 사문의 길을 걷던 당시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에게서 집중훈련을 배웠다. 그래서 도덕훈련이나 집중훈련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전통적인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붓다 또한 도덕적인 행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했고, 기도나 의식이나 명상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축복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덕훈련과 집중훈련은 단순히 정신적으로 깊이 전념해서 몰입되는 상태로 여기서 종교적인 신비경험 이나 황홀함이 가능하다.

  집중의 수준이 초월상태까지 가지 않아도 실제로 아주 유익한 것이다. 심지어 아주 얕은 수준에서도 갈망하거나 미워하는 것으 로 반응하기 쉬운 상황으로부터 주의를 전환시킴으로써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분노나 다른 여러가지 감정의 덩 어리가 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천천히 수식관( 호흡을 하나에 서 열까지 세고 다시 열에서 하나까지 거꾸로 세는 방법 )을 하거나, 아니면 흔히 화두라고 부르는 특정의 단어나 만트라를 반복하기도 하고, 시각적인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초보적인 형태의 집중 방법도 있다. 그러한 방법들은 모두 주의를 감정의 덩어리가 올 라오기 전에, 다른 대상에 전환시킴으로써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 화스러워지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성취되는 마음의 안정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분명히 집중훈련은 우리가 정서상태를 조절하는데 엄청난 이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마음의 의식수준에서만 작용한다. 현대 심리학에서 프로이드가 무의식의 개념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거의 2500년 전에 붓다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존재를 인식했으며, 붓다는 그것을 아누사야(anusaya)라고 불렀다. 붓다는 주의를 전환시키는 방법이 의식수준에서는 갈망과 혐오반응을 효과적으로 다루지만 그것을 완전히 뿌리째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집중훈련에 의해서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고, 끊임없이 갈망하고 혐오하는 반응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서 잠복상태로 있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표면에는 평화와 조화가 있지만 마음 깊숙이에는 언제 격렬하게 폭발할 지 모르는 억압된 화산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붓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만일 나무가 뿌리째 뽑히지 않으면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잘려도때가 되면 나무는 여전히 새로운 가지를 낸다. 만일 갈망과 혐오 이면에 있는 마음의 습관을 뿌리뽑지 않으면, 고통은 계속해서 새롭게 일어날 것이다."

무의식적인 마음 속에 마음의 습관이 남아있는 한 언제든지 고통을 일으키는 상황에 처하면, 마음은 여전히 이전에 반응했던 습관대로 불쑥 감정의 덩어리를 드러내고 말 것이다. 우리는 몸에 종기가 생겼을 때는, 그것을 터뜨려서 끝까지 남기지 말고 뿌리째 뽑아내야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우리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좋지 못한 마음의 감정덩어리 역시 뿌리째 뽑지 않으면, 아무리 자제하고 억눌러 놓아도 언젠가는 폭발하거나 그것으로 인해서 병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붓다는 당시 인도에서 하고 있었던 기존의 집중훈련을 통 해서 도달가능했던 최고의 상태를 성취했지만 그것에 만족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붓다는 계속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길을 찾아야만 된다고 결심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붓다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을 보았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기탐닉의 길이었다. 그 길은 실제로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는 세속적인 길이다.

그러나 붓다는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길이 인간을 본질적인 행복으로 이끌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다. 세상에서 자기욕망이 항상 충족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고, 원치 않는 것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자기탐닉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그들의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실망하고 고통한다. 심지어는 자기가 원하는 욕망이 성취되었을 때 조차도 기쁨과 만족은 일시적일 뿐, 이번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 한다.

만족의 순간은 일시적이다. 자기탐닉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또 성취하고 나서는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면서 언제나 마음이 동요상태에 있다. 붓다는 이미 출가사문이 되기 전에 스스로 그 길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기탐닉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머지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을 고의적으로 삼가하는 자기제한의 길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모든 즐거운 경험을 피하고 즐겁지않은 경험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아주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길이 수행자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몸을 스스로 불로 지지거나 신체 일부를 절단 하거나 채찍으로 때리는 수행자도 있었다.

그들은 그처럼 자신을 처벌하고 학대함으로써 갈망하고 혐오하는 마음의 습관을 치유하고 마음을 순수하게 한다고 믿었다. 그와같은 극단적인 금욕훈련은 비단 고대 인도에서만이 아니라 세 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적인 생활의 현상이다. 붓다 역시 출가 후 여러해 동안 그 길을 경험했다. 그러나 붓다는 자신의 몸이 뼈와 가죽만 남는 지경까지 가서도 여전히 마음은 해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수행방법을 달리했다. 육체를 처벌하고 학대하는 것으로는 마음을 순수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음의 습관을 끊기 위해서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불건강한 행위를 일으키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을 삼가하면서 보다 적절한 형태로 훈련하는 것이 좋다. 적절한 자기통제 훈련은 부도덕한 행동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탐닉보다는 한결 좋은 수행법이다. 그러나 만일 갈망이나 혐오를 제거하기 위해서 단지 자기억압적인 방법만을 사용한다면 오래지 않아서 정신적인 긴장을 위험한 상태까지 끌고 가게 된다. 왜냐하면 억압된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이면에 쌓여서 언젠가는 파괴적인 에너지를 방출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습관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진정한 평화나 안정을 누릴 수가 없다. 도덕훈련은 그릇된 마음의 습관을 통제하는 데 아주 유익하지만, 단지 의식적으로 결심하고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하는 ‘의지’만으로는 끝까지 지탱할 수가 없다. 집중력을 발달시키는 방법 또한 마음의 습관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집중력은 문제의 뿌리가 놓여 있는 마음의 깊은 심층에 까지는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해결방법에 불과하다. 낡은 마음의 뿌리가 무의식 깊이 박혀 있는 한, 진정하고 지속적인 행복은 있을 수 없으며 해방 또한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정신적인 습관의 뿌리 자체가 제거된다면 좋지 않은 행동에 탐닉할 위험이나 자기억압의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좋지 못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바로 그 욕망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욕망에 탐닉해서 추구하거나 있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데서 오는, 모든 긴장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시작된 근본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심층까지 관통해야만 된다. 정신적인 낡은 반응습관을 뿌리뽑기 위해서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보다도 더 깊은 마음의 심층바닥 끝까지 들여다 보는 방법을 붓다는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붓다를 깨달음으로 이끈 지혜의 훈련이다. 지혜의 훈련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발달시키는 것인데, 고통의 원인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인 통찰이다. 지혜의 훈련은 붓다가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스스로 훈련했던 수행법인 동시에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지혜를 훈련하는 방법은 붓다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언급하거나 인식한 일이 없다. 오직 붓다만이 발견하고 가르쳤던 유일하고 독특한 것이며 붓다가 가장 중시했던 것이다. 도덕훈련은 집중훈련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도덕훈련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집중력이 강해진다. 반면에 집중훈련은 지혜훈련을 돕기 때문에 집중훈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지혜가 풍부해진다. 그리고 지혜훈련은 마음의 어두운 부분과 부정한 부분으로부터 자유로움을 가져다 준다. 

도덕훈련과 집중훈련은 그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도덕훈련과 집중훈련의 근본 목적은 지혜로 이끄는 데 있다. 극단적인 자기탐닉과 자기억압 사이에서 우리가 진정한 중도(中道)를 발견하는 길은 오직 지혜를 발달시키는 데 있다. 도덕훈련을 하게 되면 엄청난 정신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행동을 피할 수가 있다. 또, 마음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통해 우리는 마음을 더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어서 자기점검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훈련으로는 궁극적인 해방에 이르지 못한다. 오직 지혜를 발달시키는 것만이 우리 안에 있는 실재를 꿰뚫어 볼 수 있고, 모든 무지와 집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고귀한 팔정도에서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 이해(正念)가 바로 지혜의 훈련에 해당한다.


올바른 생각(正思惟)

통찰을 발달시키기 전에 명상에서 반드시 모든 생각이 멈추어져야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여전히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각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한결같이 유지된다면 통찰훈련을 시작 해도 충분하다.

생각은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생각의 본질적인 패턴이 변한다. 혐오와 갈망은 호흡을 자각하는 훈련으로 고요하게 가라 앉는다. 마음은 적어도 의식수준에서는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즉 붓다가 발견한 법의 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호흡을 자각하는 훈련을 하는 데 뒤따랐던 어려움은 이제 지나갔거나 어느정도 극복되었다. 오직 법을 생각함으로써 법의 길에 섰을 때 다음 단계인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준비한다.

 

올바른 이해(正念)

올바른 이해가 진정한 지혜다.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우리는 진리를 깨달아야만 되고 사물이 나타나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아야만 된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궁극적인 실재를 경험하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관통해야만 하는 실재가 분명한 진리다.

지혜는 받아들이는 지혜, 지적인 지혜, 경험적인 지혜가 있다. 받아들이는 지혜는 말 그대로 ‘듣는 지혜’로서 이를테면, 책을 읽거나 연설이나 강의를 듣는 등 타인으로부터 배운 지혜다. 타인으로부터 배우는 지혜는 다른 사람의 지혜를 자신이 채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된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과정이 자신의 무지로 인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신념, 종교 등을 가진 조직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 를 의문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아니면 타인의 지혜를 수용하는 이유가 갈망으로 인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조직사회에서 어떤 지도자들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나 전통적인 신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훌륭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선언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행위가 어떠하든 무조건 신을 믿는 자들은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는 축복은 사람의 마음을 자연적으로 끌기 때문에 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수용 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몇몇 목회자들은 믿는 자들은 천국으로 가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으로 간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에 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의문을 삼키고 집단의 신념을 받아들인다. 어쨌든 타인의 것을 받아들인 동기가 맹목적인 믿음이든, 갈망이나 공포이든 간에 받아들여서 아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빌려 온 것이다.

두번째 유형의 앎은 지적인 이해다. 독서를 하거나 타인의 가르침을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이 정말로 합리적이고 유익하고 실제적인가를 검증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적인 수준에서 만족이 되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은 여전히 자신의 통찰이 아니고, 자기가 듣고 읽은 지혜를 주지화(主知化)한 것이다.

앎의 세 번째 유형은 그자신의 직접적인 체험과 진리에 대한 개인의 깨달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얻어지는 앎은 마음의 본질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얻은 지혜를 삶으로서 직접 살도록 만드는 진정한 지혜다.

일상의 삶에서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지혜가 항상 필수적이고 타당한 것은 아니다. 불이 위험하다고 하는 사실은 다른 사람의 경고를 받아들이거나 연역적인 추론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 다. 불 속에 뛰어들면 화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불에 들어가 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그러나 붓다가 가르치는 법의 세계에서는 경험에서 오는 지혜가 본질적 이다. 왜냐하면 오직 직접적인 체험만이 우리를 과거의 낡은 정 신적인 습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아는 것이나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얻은 앎이 만일 우리들로 하여금 경험적인 지혜를 고무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한다면 유용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무런 의문없이 단순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굴레가 되고 경험적인 지혜를 얻는 데 장애가 된다.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단순히 진리를 사색하고 그것을 지적으로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만족하고, 그것을 직접 경험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지적인 이해는 해방을 돕는 대신 속박이 되고 만다.

우리들은 직접적인 경험과 명상에 의한 진리의 삶을 살아야 된 다. 오직 살아있는 경험만이 마음을 해방시킬 수 있다. 남이 깨달 은 진리가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한다. 심지어 붓다의 깨달음조 차도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 한 사람만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깨달음은 우리들이 따라가는 지표를 제공함 으로써 어떤 영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 리는 우리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작업을 해야 만 된다. 그러기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스스로 너 자신의 일을 해야만 된다.”

목적에 도달한 사람들은 오직 방법을 보여줄 뿐이다. 진리는 오직 자신 안에서만 살아 있을 수 있고 경험될 수 있다.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항상 우리와는 먼 거리에 있다. 오직 우리 자신 안에서 만이 실재에 대해서 직접적이고 살아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지혜를 얻는 방법 가운데 처음 두 가지 방법은 붓다만이 가르친 특별한 기법이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얻거나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 얻는 방법은 붓다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그리고 붓다가 살아있던 당시에 사람들이, 붓다는 다른 사람들이 가르쳤던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붓다만이 세상에 공헌한 유일한 것은, 진리를 개인적이고 실험적이고 체험적인 방법으로 깨달아서 임상적인 지혜를 발달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직접적으로 깨닫는 방법은 바로 위빠싸나 명상법 이다.

 

위빠싸나 명상법

  위빠싸나는 흔히 통찰의 번뜩임, 진리에 대한 갑작스런 직관으로 기술된다. 설명은 맞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상을 하는 사람이 그러한 직관이 가능한 지점까지 진전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이다. 그 방법을 통찰의 발달,  또는 흔히 ‘위빠싸나 명상법’ 이라고 부른다.

위빠싸나 라는 말은 우리가 눈을 뜨고 보는 일반적인 의미의 ‘보는 것’을 의미한다. 위빠싸나는 자신의 내면의 실재를 관찰하는 특별한 유형의 통찰력이다. 그것은 주의를 주는 대상으로 자신의 신체감각을 취한다. 그 기법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각을 체계적이고 비감정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찰은 마음과 몸의 전실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왜 감각을 주의의 대상으로 취하는가? 우리가 실재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감각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5가지 감각과 마음으로 접촉되지 않으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감각과 마음은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문이고 모든 경험의 바탕이다. 어떤 것이든 5가지 감각과 마음에 접촉될 때마다 감각이 일어난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 과정을 기술했다.

“만일 누군가가 막대기 두 개를 가지고 서로 문지르면 마찰로 인해서 열이 발생한다. 마찬가지 원리로 즐거움으로 경험되는 접촉은 즐거운 감각을 일으킨다. 불쾌함으로 경험되는 접촉은 불쾌한 감각을 일으킨다. 중성적으로 경험되는 접촉은 중성적인 감각을 일으킨다.”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일단 접촉되면 감각의 불꽃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감각은 우리가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경험하는 연결고리다. 임상적이고 실험적인 지혜를 발달시키려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자각을 해야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감각에 대한 자각을 발달시켜야만 된다.

나아가서 신체적인 감각은 마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호흡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정신적 상태를 반영한다. 

정신적 대상(사고, 관념, 심상, 정서, 기억, 희망, 공포...)이 마음과 접촉하면 감각이 일어난다. 모든 사고, 모든 정서, 모든 정신적 활동은 신체 내에 있는 해당 감각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신체감각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마음을 관찰한다.

감각은 진리를 철저하게 관찰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딪치는 것은 모두 몸 안에서 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감각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교차로이다. 비록 감각은 본질에 있어서는 물리적인 것이지만, 2장에서 언급했듯이 네 가지 정신과정 중의 하나다. 감각은 몸 안에서 일어나고 마음에 의해 서 느껴진다. 시체나 무생물에는 감각이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실재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불완전하고 피상적인 것이다. 잡초를 완전하게 제거하려면 뿌리째 뽑아야 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다루고자 한다면, 겉으로 드러나고 의식 속에 떠오르는 감각의 덩어리 말고도 우리 안에 숨어있는 감각을 자각해야만 된다.

감각은 반드시 몸을 통해서 일어난다. 정신적 신체적 접촉은 모두 감각을 일으킨다. 모든 생화학적 반응은 감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는 아주 강한 감각이 아니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감각을 의식하기에는 주의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호흡훈련을 통해서 자각능력을 발달시킴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감각의 실재를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호흡에 대한 자각훈련은 의도적으로 호흡을 통제하거나 조절하 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빠싸나 명상훈련에서도 우리는 단순하게 신체감각을 관찰한다. 우리는 신체구조를 통해서 머리에서 발까지, 발에서 머리까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체계적으로 주의를 옮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에 특정한 감각유형을 조사하거나 고의적으로 피하지 않는다. 다만 오직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신체를 통해서 스스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감각은 무엇이든지 자각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객관적으로 자각되는 감각의 유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뜨거움, 차가움, 무거움, 가벼움, 가려움, 두근거림, 압박, 압축, 확장, 고통, 따끔거림, 맥박, 진동 등.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어떤 특별한 유형의 감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적인 신체감각을 관찰하려고 노력한다.

감각의 원인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도 말아야 한다. 감각은 앉아있는 자세가 힘들거나 몸이 아프거나 약해서, 심지어는 배 속에 든 음식물 때문에 가스가 차서 감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주의가 주어지는 신체부분에 서 일어나는 감각을 자각하는 것이다.

처음 훈련을 시작하면 신체 부분에 따라서 어느 부분에서는 자각이 잘 되고 어느 부분은 잘 안된다. 자각능력이 아직 제대로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강한 감각은 경험이 잘 되고 미세한 것은 경험이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신체부분에서 일어나는 강한 감각에 주의를 지나치게 오래 끌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체계적인 순서로 자각의 초점을 이동하면서 몸의 전 부분에 주의를 계속 준다. 집중훈련을 하면서 의식적으로 선택한 대상에 주의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그런 다음에 자신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대상에 주의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이제는 감각이 불분명한 신체부위를 빠뜨리고, 감각이 두드러진 부분으로 뛰어넘지 않도록 하는 데 사용하고, 또 일어나는 감각을 피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차례로 전 부분으로 자각이 이동하도록 하는 데 사용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점차 몸의 모든 부분에서 감각을 경험하는 능력에 이른다.

호흡에 대한 자각훈련은 시작 단계에서 호흡은 흔히 무겁거나 불규칙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점차 차분해지고 가벼워지며 약해지고 미세해진다. 마찬가지로 위빠싸나 명상훈련 을 처음 시작하면 대개는 거칠고 강하고 불쾌한 감각을 경험한 다. 동시에 강한 정서적 덩어리가 일어나기도 하고 까마득히 잊 고 지냈던 생각이나 기억이 정신적 신체적 불편함이나 심하면 고 통을 수반하면서 일어날 수 있다.

때로는 갈망, 혐오, 게으름, 의심, 마음의 동요 등으로 인해서 자각훈련은 방해를 받게 되고 감각에 대한 자각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아무런 뾰족한 대안이 없다. 다시 한번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닦기 위해서 호흡에 대한 자각훈련으로 전환시키는 것 뿐이다.

그때 인내심을 가지고 패배감 없이 명상가로서의 우리는 그 모든 어려움이 오히려 초보적인 성공의 결과라고 받아들이면서 집중상태를 재수립하기 위해서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그러면 마음 깊숙이 묻혀 있던 낡은 정신적 습관의 조건화가 동요되면서 의식수준으로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 차츰 긴장감 없이 마음이 균형을 이루고 초점화 된 주의를 다시 얻게 된다. 그렇게 하므로써 강한 생각이나 정서의 덩어리는 지나가고, 감각에 대한 자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반복되면 강한 감각은 보다 규칙적이고 미세한 것으로 용해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상당한 속도로 일어나고 꺼지는 단순한 진동으로 변한다.

여기서 감각이 즐거운 것인가 불쾌한 것인가, 약한가, 강한가, 일정한가, 변화하는가 하는 점은 명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명상에서의 숙제는 단순히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불쾌한 감각의 불편함이나 유쾌한 감각의 끌림이 있어도, 우리는 작업을 중단하지 말고 주의를 분산하거나 감각에 끌려가서는 안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관찰을 하듯이, 우리는 우리자신에게서 일어나는 감각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다.

 

무상( 無常), 무아( 無我그리고 고통

명상을 계속해서 하다보면 우리는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우리의 감각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매 순간 모든 신체 부분에서 감각이 일어나고, 모든 감각은 변화의 한 징후다. 모든 순간적인 반응들은 몸의 전 부분에서 일어나며 전 자기적 생화학적인 반응들이다. 매 순간 정신과정은 변화하고 그것은 신체적 변화로 나타난다.

이것이 마음과 물질의 실재다. 마음과 물질의 본질은 일정한 모양이나 형태를 지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비영속적인 것이다. 매 순간 몸을 구성하고 있는 극미립자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모든 순간에 정신적인 기능은 차례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마치 외부세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 이전에도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위빠싸나 명상에 의해서 우리는 몸 안에서 직접적으로 비영속성의 실재를 경험한다. 순간적인 감각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본질이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임을 알려 준다.

몸의 모든 미립자, 마음의 모든 과정은 끊임없는 흐름의 상태다. 어떤 것도 한 찰나를 넘어서서 머무르는 것이 없으며, 매달릴 수 있는 단단한 중심도 없다. ‘나’나 ‘나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라고 하는 ‘나’는 실제로는 항상 변화하는 과정의 ‘조합’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체와 정신과정이 사실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가 사라지는 진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은, 거 기에는 진정한 ‘나’도 없고 영원한 자아나 에고도 없다는 또 다른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그렇게도 매달리고 집착하는 ‘나’ 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흐름의 과정이고, 정신적 신체적 과정의 조합에 의해서 만들어진 착각이다. 몸과 마음을 가장 깊은 바닥에서 탐색하면서 거기에는 어떤 불변하는 핵심이나 독립적으로 남아있는 영속적인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본다. 거기에는 오직 우리자신의 통제를 넘어서서 변화하는 비개인적인 현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다른 실재가 분명해진다. ‘나’, ‘나를’, ‘나의’ 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하는 노력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어떤 순간이나 어떤 감각에 매달려도 그것은 금방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고 하는 것도 사라지게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일시적이고 착각이며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이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몸 안에서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그 안에서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모든것을 진정으로 통각하고 이해한다.

 

마음의 평정(平靜) Composure, Calm, Peace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고통없이 살 수 있는가. 그것은 반응없이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것은 경험하려 하고, 어떤것은 피하려고 하고, 가깝게 당기거나 멀리 밀어내는 대신에, 그냥 단순히 모든 현상을 객관적으로 평형과 균형있는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막상 명상을 하려고 앉으면, 채 10분이 못되어서 무릎이 아파온다. 그러면 우리는 고 통을 싫어하고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싫어할수록 더 강하게 온다. 그리고 몸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만일 우리가 한 순간 동안이라도 몸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일시적으로라도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 우리 자신의 고통이라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사가 환자의 문제를 진찰하듯이 고통을 객관적으로 검사할 수 있다면, 그때는 그 고통 자체가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매 순간 변화하고 지나가며, 다시 시작하고 또 변화한다.

우리가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 그러한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 는 고통이 더이상 우리를 압도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마 그것이 때로는 빠르게 지나가고 때로는 느리게 지나가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더이상 아픔으로부터 고통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분리되어서 그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의 길

자유와 마음의 균형을 발달시킴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해 방시킬 수 있다. 고통은 자신의 실재에 대한 무지(無知) 때문에 시작된다. 자신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마음은 모든 감각에 좋아하고 싫어하고 갈망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반응한다. 그와 같은 반응이 바로 고통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미래의 고통을 가져오는 사건의 고리를 만든다.

그러한 인과의 고리는 어떻게 부숴버릴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은 무지에서 비롯된 과거행동 때문에 시작되었으며, 마음과 물질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그러면 죽어야 되겠는가. 아니다. 자살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한다. 죽는 순간에 마음은 불행과 혐오로 가득차게 된다. 다음에 오는 생은 역시 불행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행동은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피해 갈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감각을 경험하는 여섯 가지 근본을 파괴해야 되는가? 두 눈을 뽑아내고 혀를 자르고 코와 귀를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몸을 파괴할 수 있는가. 다시 자살을 할 것인가? 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모든 소리와 모든 존재를 파괴할 것인가? 불가능한 일이다. 우주는 무한한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결코 그것을 모두 파괴할 수는 없다. 일단 우리에게 여섯 가지 감각을 지각하는 근본바탕이 존재하는 한,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접촉은 일어나게 되어 있으며 접촉이 일어나는 곳에 감각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곳이 고리가 부숴질 수 있는 지점이다. 결정적인 연결은 감각 지점에서 일어난다. 모든 감각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일으킨다. 그 순간 좋아하고 싫어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은 즉각적으로 증폭되고, 엄청난 갈망과 혐오로 강화되며 현재와 미래의 불행을 낳는 집착으로 된다. 그것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맹목적인 습관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위빠싸나 명상으로 모든 감각에 대한 자각을 발달시킨다. 아울러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를 발달시킨다. 즉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갈망이나 혐오나 집착없이 비감정적으로 감각을 검증한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일어나는 감각에 새로운 반응을 일으키는 대신 단순히 일어나는 감각을 지켜본다. 그렇게해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감각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체험하는 지혜와 통찰을 일으킨다.

그 순간 고통의 연결고리는 부숴지고 고통은 멈춘다. 더이상 갈망이나 혐오하는 새로운 반응은 없다. 그러므로 고통이 일어날 수 있는 원인도 없어진다.  

고통의 원인은 바로 정신적 행위 즉, 갈망과 혐오의 맹목적인 반응이다. 마음이 감각을 자각하면서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어느 방향으로 기울지 않고 중도를 유지할 때, 거기에는 고통을 일으키는 반응도 원인도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고통을 만드는 반응을 중단했다.

붓다는 말했다.

“모든 상카라(Sankara)는 영원하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진정한 통찰로 지각한다면, 그때 너희는 고통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이것이 정화의 길이다.”

여기서 상카라(Sankara) 라는 말은 아주 광범위한 뜻을 가지고 있다. 마음의 맹목적인 반응을 상카라 라고 부르는데, 그 행동의 결과나 결실 또한 상카라로 알려져 있다. 종자나 열매처럼 우리가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자신의 정신적 행동의 결과다. 그러므로 아주 넓은 의미에서 상카라는 이 조건화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창조되었든 형성되었든 관계없이 존재하는 모든것은 영원하지 않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러한 진리를 위빠싸나 명상훈련을 통해서 실험적 지혜로서 관찰할 때 고통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고통의 원인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즉 갈망과 혐오의 습관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해방의 길이다.

명상에서 하는 모든 노력은 어떻게 하면 반응하지 않고 새로운 상카라를 일으키지 않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감각이 나타나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시작된다. 그처럼 짧은 순간에 만일 우리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갈망과 혐오가 반복되고 증가되어서 결국 의식적인 마음을 지배하는 강한 정서가 된다. 우리는 정서에 잡혀있게 되고 보다 훌륭한 판단은 뒤로 밀쳐져있게 된다. 그 결과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불건강한 말과 행동에 연루되게 된다. 우리는 한순간의 맹목적인 반응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을 창조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반응과정이 시작되는 지점, 즉 우리가 감각을 자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도록 허락하거나 강화시키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감각을 자각함으로써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반응없이 단순히 감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한 관찰은 갈망이나 혐오로 발달하거나 우리를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서로 발달할 수 없게 한다. 그 결과 감각은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마음은 어느 쪽으로도 반응하지 않으므로 균형잡히고 평화스럽게 남아있게 된다. 우리는 이제 행복하다. 우리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도 행복할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반응하지 않는 능력은 아주 가치있다. 우리가 몸 안에 있는 감각을 자각하고 동시에 중도를 유지할 때 마음은 자유롭다. 아마 처음에는 명상 기간에만 몇 순간씩 그럴 수 있을 뿐, 나머지 시간은 역시 마음은 감각에 대한 오래된 반응습관에 빠지게 되고 갈망과 혐오와 불행의 주변을 맴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복된 훈련으로 짧은 순간들은 수 초, 수 분, 수 시간이 되면서, 결국 낡은 반응습관은 부숴지고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게 머물 것이다. 이것이 고통이 멈추어질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일으키는 불행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다.


문답

Q: 지혜훈련을 할 때 왜 주의의 대상을 일정한 순서로 옮겨가야 하는가?

A: 당신은 마음과 물질의 전 실재를 탐색하기 위해서 작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의 전 부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느끼는 능력을 발달시켜야만 된다. 어느 부분이라도 그냥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당신은 또한 감각의 전 범위를 관찰하는 능력을 발달시켜야만 된다. 붓다는 그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몸 안에 있는 어느 곳에서도 감각을 경험한다. 그리고 감각을 경험하는 모든 신체 안에는 생명이 있다.” 

만일 지혜를 훈련하는 과정에서 주의를 순서없이 이동하거나 한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 체계적인 순서없이 이동한다면, 자연히 주의는 강한 감각이 있는 부분으로 끌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감각이 약한 부분은 주의를 주지 않으므로 무시하게 되고, 따라서 미세한 감각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관찰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피상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를 순서대로 이동하는 것은 반드시 필수적이다.

Q: 우리가 감각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 는가?

A: 스스로 자신을 테스트해 볼 수 있다. 만일 자신이 느끼는 감각이 실재인지 의심이 가면, 자신에게 두 세 가지 제안이나 자동 암시를 줄 수 있다. 만일 자신의 제안에 따라서 감각이 변화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럴때는 자신의 전 경험을 내던지고, 한동안 호흡을 관찰하면서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스스로 그 감각을 통제할 수 없거나 당신의 의지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의심을 버리고 그 경험이 진짜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Q: 만일 그러한 감각들이 실재라면 왜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느 끼지 못하는가?

A: 우리는 무의식 수준에서 반응한다. 의식적인 마음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매 순간 무의식적인 마음이 몸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느끼고 그것에 반응한다. 그 과정은 24시간 일어난다. 그 러하기 때문에,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벽을 부순다. 우리는 정신적 신체적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자각하게 되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자각하게 된다.

Q: 힘든 자세로 앉아서 고의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마조히즘(masochism)처럼 들린다.

A: 만일 당신에게 단지 아픔을 경험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학 대다. 그러나 단순히 아픔을 경험하라는 것이 아니고, 아픔을 객 관적으로 관찰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반응없이 관찰할 때 자동적 으로 마음은 아픔의 외형적인 실재를 넘어서서 그 미세한 본질을 관통하기 시작한다. 아픔은 모든 순간에 진동이 일어나고 사라지 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 미세한 실재를 경험할 때, 아픔은 당신을 조정할 수 없다. 당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고, 당신은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Q: 그러나 불편한 자세에서 오는 아픔은 혈액공급이 신체 어느 부분에서 중단되었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그 신호를 무시하는 것 이 지혜인가?

A: 맞다. 우리는 수천 년에 걸쳐서 우리가 해온 명상훈련이 해로 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해 왔다. 만일 그렇지 않다 면 우리는 그것을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 법을 훈련해 왔다. 그들 가운데 훈련으로 인해서 손상을 입은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몸이 보다 유연해지고 자유로와진 다. 아픔은 당신이 균형있는 마음으로 그것에 직면하는 것을 배 울 때 사라진다.

Q: 이를테면 시야와 눈, 소리와 귀의 접촉과 같이 여섯 가지 감각을 관찰하는 것으로만 위빠싸나 훈련이 가능한가?

A: 분명히 그렇다. 그리고 관찰은 감각에 대한 자각과 관련되어 야만 된다. 여섯 가지 감각바탕(눈, 귀, 코, 혀, 몸, 마음)에서 접촉이 일어날 때 감각이 처리된다. 만일 그것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하면 당신은 반응이 시작되는 점을 놓치게 된다. 대부분의 감각에서 접촉은 단지 간헐적으로 될 수 있다. 때로 당신의 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때로는 듣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는 모든 순간에 끊임없이 감각을 일으키면서 마음과 물질의 접촉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감각을 관찰하는 것은 비 영속성의 사실을 경험하기에 가장 접근가능하고 생생한 방법이다. 당신은 다른 감각의 문에서 관찰을 시도하기 전에 이것을 마스터해야만 된다.

Q: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관 찰한다면 진전은 어떻게 오는가?

A: 진전의 여부는 마음의 중도를 얼마나 발달시켰는가에 따라서 측정된다. 마음의 균형을 잡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진정한 선택 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감각을 변화시키거나 다른 감각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것은 일어난다. 그것 이 즐거운 것이든 불쾌한 것이든 이런 모양이든 저런 모양이든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모양 자체를 바꾸거나 변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헛된 것이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만나면 감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결코 감각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어나는 감각에 싫다, 좋다는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와같이 일어나는 감각에 아무런 반응없이 마음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분명히 진보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낡은 정신적 반응습관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Q: 그것이 명상 동안에는 가능할지 몰라도 어떻게 그것을 일상 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는가?

A: 일상의 삶 속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균형잡힌 마음으로 자 신의 감각을 관찰하기 위해서 약간의 순간들을 가져라. 그래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을 때, 당신이 하는 결정은 보다 좋을 것이다. 마음이 균형을 잃으면 당신이 내리는 결정은 어떤것이든 반응이 될 것이다. 단지 일어나는 감각에 대한 반사적인 반응이 아니라 보다 상황에 맞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마음을 중도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부정적인 반응에서 긍정적인 행동으로 삶의 패턴을 변화시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삶은 행동하는 것이지 일어난 접촉에 따라서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낡은 반응습관 때문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감각을 자각하는 순간을 놓치면 어느덧 우리는 일어나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싫고 좋음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반사적인 반응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두 개의 반지

어떤 나이 든 부자가 두 아들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한동안 두 아들은 전통적인 인도 방식으로 한가족이 되어서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아들은 서로 틀어져서 모든 재산을 반 반으로 나누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숨겨놓은 작은 보따리 하나를 발견했는데, 보따리 안에는 두 개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였고, 다른 하나는 몇 루피 정도 밖에 안되는 은반지였다. 다이아몬드를 본 형이 욕심을 내어서 “내 생각에 이것은 아버님이 다른 재산과는 달리 따로 보관하신 것으로 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인 것 같다. 그러니 다이아몬드는 장남인 내가 갖고, 너는 은반지를 갖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다. 동생은 하는 수 없이 형에게 양보하고 은반지를 가졌다. 그런데 동생은 마음 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아버지가 다이아몬드를 소중하게 보관하셨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 평범한 은반지를 왜 보관하셨을까?”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 보던 동생이 반지 안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 하였다. ‘이것 또한 변화 할 것이다. 

“아! 이것이 아버지의 만트라구나.” ‘이것은 또한 변화할 것이다!’

두 형제는 헤어져서 각자 다양한 삶의 문제를 겪으면서 살아갔 다. 그런데 다이아몬드를 가진 형은 마음의 욕심으로 점차 마음의 균형을 잃고 긴장하며 살면서 고혈압을 얻게 되었다. 밤에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으며, 약물복용에다 전기치료를 받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반면에 은반지를 가진 동생은 삶의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을 즐겼 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즐겼다. 반지를 보면서 이것 또한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변화가 왔을 때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진리를 확인하며 웃었다. 그는 또다른 어려움이 오거나 예상못한 일이 일어나도 그것 때문에 상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변화할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번 그의 예상대로 그냥 지나갔다. 모든것은 오르락내리락,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변화하며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단지 지나갈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는 변화하는 삶의 많은 일들 앞에서 언제나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다.

 

▶︎ 제8장. 자각과 중도

 

제8장. 자각과 중도

제8장. 자각과 중도 자각(自覺)과 중도(中道), 이것이 위빠싸나 명상이다. 이 둘을 함께 훈련하는 사람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만일 이 자각(自覺)과 마음이 좋아하거나 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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