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집중대상에 대한 정념正念(삼마 사띠; 바른 알아차림) 수행, 달리 표현하면 사띠 초점 확립 수행'을 통해서 정정正定(삼마 사마디; 바른 선정 삼매)을 닦는(계발하는) 수행이 깊어지면, 고요집중의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 능력이 활성화(각성) 되면서 사띠의 집중력과 정밀도가 극대화된다.
사띠가 극도로 각성, 집중, 확장되면 몸(물질작용; 사대 작용)과 마음(정신작용; '수상행식' 작용)의 매 순간 생멸 변화를 따라잡아 직접 경험으로 바르게 관찰(정견正見; 삼마 딧티)할 수 있다.
자동차 사고와 익사 사고를 당했던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들면, 자동차 사고가 나는 그 짧은 순간에 마치 시간이 쭈~우~욱 늘어나는 것처럼 사고의 각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명확하게 관찰되는 경험을 한 적이 두 번 있다. 또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한강에 빠져서 죽을 뻔한 경험이 있는데, 물에 빠져서 호흡이 안 되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잠시 지나고 나면, 물에 빠진 상태에서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그 때까지 살아온 전 생애에 대한 기억이 느리게 돌아가는 무성영화의 장면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지나간다. 물리적인 시간은 불과 몇 분(minutes)에 불과 할지 모르지만, 그 시간이 쭈~우~욱 늘어난 것처럼 그 회상의 시간이 몇 시간(hours)이 되는 것처럼 굉장히 길고, 회상 장면들이 상세하고 명확하게 관찰된다. 이처럼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은 다르다. 들은 얘기로는 야구 선수가 관찰(또는 사띠)의 집중 능력을 키우는 훈련(수련)을 하면, 타석에서 공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으로 느리게 보이면서 야구공이 수박만큼 크게 보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공이 실밥까지 또렷하게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모두 그 순간에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 능력이 어느 정도나마 각성, 집중, 확장되면서 생기는 경험이다.
영화관에서 영화 필름의 영상이 빠르게 생멸(명멸)하면서 흘러가면 필름 개개의 정지 영상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보여서, 또는 생(生)하는 것만 인식되고 멸(滅)하는 것은 인식이 안돼서, 그 개개의 정지 영상이 만들어내는 영화 속 인물이 매 순간 생멸 없이 연속해서 실제로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잠시나마 착각하여 희노애락을 느끼는 것처럼, 몸(물질작용; 사대 작용)과 마음(정신작용; '수상행식' 작용)이 매 순간 생멸하며 흘러가는 것이 너무나도 빨라서, 또는 생(生)하는 것만 인식되고 멸(滅)하는 것은 인식이 안돼서, 매 순간 생멸 없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지고, '나'는 항상 동일한 존재(실체나 주체)라고 착각한다. (10년 전의 나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조금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항상 동일한 존재라고 착각한다)
남미의 어떤 야외극장은 영화 스크린을 두꺼운 강철 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에게 총을 쏘기 때문이란다. 만약 관객들이 빠르게 생멸(명멸)하며 흘러가는 개개의 정지 영상을 인식한다면 그 영화 속 인물이 하나의 실체로서 움직이며 존재한다는 착각의 실감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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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선정 삼매인 제4선정 삼매에 들었다 나오면 고요집중의 사띠능력이 극대화된다. 이 상태에서 자신과 주변의 사물을 사띠하면 미시적으로 매 순간(찰라) 생멸하는 깔라빠(붓다가 설한 물질의 최소단위; 요즘 시대의 용어로 원자나 소립자)를 관찰할 수 있다. 양자역학 실험에 의하면 소립자는 1초에 10^23번 생멸한다고 한다. 이렇게 뻐르게 생멸하는 물질의 생멸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집중력과 정밀도가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능력이 필요하다.
물론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은 다르기 때문에, 수행자에게 관찰되는 깔라빠의 생멸주기는 물리적 생멸주기(1초당 10^23번)와는 다르다. 일전에 어떤 비구 둘이 자신들에게 관찰되는 깔라빠의 생멸이 1초에 몇 번 인지를 알아보려고 실험했다는 얘기를 듣고 황당했던 적이 있다.
붓다의 설법을 기록한 경전 어디에 보아도 생멸주기를 설한 내용은 없다. 다만 마음(정신작용)의 생멸은 물질의 생멸보다 훨씬 더 빠르다고 설(설명)한 내용은 있다. 생멸주기가 얼마인지를 아는 것이 정각을 증득하는데 중요하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사실 몸(물질)과 마음(정신)이 매 순간(찰라) 생멸하는 무상無常(a·nicca)한 것이라는 사실(실상)을 깨닫는데 생멸주기가 얼마인지를 아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사실 수행자에게 관찰되는 생멸주기(심리적 시간)는 관찰 시 수행자의 심리상태(고요집중의 상태)에 따라 수행자마다, 관찰할 때마다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수행자에게 깔라빠의 미시적(순간순간, 찰라) 생멸이 관찰되면 자신의 몸과 주변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나'라는 항상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있다는 의식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불교(부처님 가르침)식 용어로 표현하면 '유신견有身見(고대인도어 sakkāya-diṭṭhi; 영어 view of identity), 즉 나를 포함하여 생명체와 사물이 '상주불변(늘/항상 동일;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Atta, Atman; 실체)라는 견해'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어디까지가 내 몸의 깔라빠이고 어디까지가 주변 공기의 깔라빠인지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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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생멸변화하지 않고) '나는 항상 동일하고 독립적인(독자적인) 것으로 늘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마음(정신)을 사람들은 ‘혼, 영혼(영원한 혼), 아트만Atman(또는 앗따Atta; 我), 자아自我, 우주아宇宙我, 대아大我, 생명의 근원, 진아眞我’ 따위로 이름(명칭; 개념) 짓고 부른다.
사람들은 몸(물질)과 마음(정신)으로 구성된 '나'라는 어떤 ‘동일한 주체나 실체가 한시적이든 영구적이든 독자(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여 (이러한 착각이 유신견이다), 그것에 애착하고 집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과 애착, 집착으로부터 그들의 인생에 온갖 번뇌와 괴로움이 근원(근본 원인)적으로 생겨난다.
해탈(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 여부는 ‘자아식自我識, 즉 스스로(自) 동일한 나(我)라고 착각하는 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을 완전히 멸할 수 있는가?, 또는 ‘나(我)는 항상 동일하고 독자적인 존재(Atta, Atman; 실체)라는 고정관념(고착화된 관념, 또는 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을 완전히 멸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예컨대 '붓다의 가르침'(불법佛法 또는 불교佛敎)을 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나(我)라는 실체가 없다(無)'(무아無我) 또는 '나는 늘 동일하고 독자적인 존재(실체; Atta, Atman)가 아니다(an)'(아낫따an·Atta, an·Atman)라는 사실(실상)을 당연한 논리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지식(또는 지식차원의 이해)일 뿐이다.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을 바르게 공부하여 바른 지식(또는 지식차원의 바른 이해)을 갖게 되었지만 체험, 체득, 증득은 아직 별개의 얘기다.
나와 모든 존재가 아니짜a·nicca(무상無常; 매 순간 생멸하며 변함), 아낫따an·atta(무아無我; 실체 아님, 실체 없음)인 것을 수행 실천의 직접 경험으로 체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무상(a·nicca; 나와 모든 생명과 모든 사물이 매 순간 생멸하며 변함)을 직접 체험하고 체득하는 것은 고苦(둑카dukkha; 나와 모든 생명은 근원적 괴로움을 내포하고 있음)와 무아(an·atta; 나와 모든 생명과 모든 사물이 상주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 아님)를 완전히 깨닫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필수조건)이다. 즉 무상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면 고와 무아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
(천안통과 숙명통으로) 무상, 고, 무아를 완전히 깨달으면 모든 번뇌와 집착이 완전히 소멸(멸진 또는 누진)되면서, 달리 표현하면 멸진통(또는 누진통)을 이루면서 삼명三明(세 가지 밝은 지혜; 천안명, 숙명명, 누진명)으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고 생사(인과연기적인 생멸 순환의 연기세계)를 초월하여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를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게 된다.
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