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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부처님 가르침


우리는 과연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오늘 부처님 오신날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법法은 붓다의 가르침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 또는 빠알리어 담마Dhamm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물 수水 + 갈 거去'의 합성어인 법法은 '물 흐르듯 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물이 자연의 법칙(질서, 이치)에 따라 흘러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글자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되 거기에는 일정한 길(질서, 이치, 법칙)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법法은 '자연의 질서, 자연의 이치, 자연의 법칙'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다르마(담마)를 법法으로 한역한 것은 어느 정도 적절한 번역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뜻을 가진 다르마(담마)를 모두 법法으로 한역한 번역의 경직성, 그리고 무아無我와 같은 부적절한 번역은 한역(한문 번역) 경전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역 경전을 기반으로 불교를 접하는 승려들과 특히 일반 사람들에게 불교(붓다佛의 가르침敎)를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종교로 만들고 말았다.

무아無我는 붓다가 설법(법法을 설명說明함) 시 사용한 고대인도어(빠알리어) '아낫따an·Atta'(산스크리트어로는 an·Atman)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아낫따an·Atta'(an·Atman)는 'Atta(Atman;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 실체)가 아니다(an)'라는 뜻이다.

영어 un·happy의 un처럼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an은 단어 앞에 붙는 부정형 어두인데 모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 붙는다. 닛짜Nicca처럼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는 a가 붙는다. '아닛짜a·Nicca'는 'Nicca(항상)하지 않다(a), 즉 매순간 변한다'라는 뜻이다. 아닛짜a·Nicca는 '무상無常, 항상無함이 없다無'로 한역했는데, 무상無常은 별로 오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무아無我, 나(我)는 없다(無)'라는 말과 '아낫따an·Atta, 나(를 포함하여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Atta)가 아니다(an)'라는 말의 차이는 천지 차이다. 특히 부처님 가르침(佛敎, 佛法)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나 무아無我가 아낫따an·Atta의 오역(잘못된 번역, 부적절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잘 이해한 후에는 그 차이가 미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한자 문화권에서는 무아無我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익숙하니, 무아無我라는 용어가 '나를 포함하여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Atta; 실체)가 아니다(an), 줄임말로 비실체'를 의미하는 용어인 '아낫따an·Atta'의 번역어임을 명심해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부적절하게 번역된 '무아無我'라는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훗날 대승불교에 '공空'이라는 대체용어가 등장하는데 '공空'이라는 글자도 '비어있다, 없다'라는 뜻이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공空'이라는 용어도 '실체가 아님(비실체) 또는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는 용어임을 명심해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붓다는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닛짜(매순간 변함; 무상), 아낫따(비실체; 무아, 공空)이다"라고 천명했다. <법구경 제20장 길(道)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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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힌두교 등과 같은 모든 종교들이 있다고 믿는 영혼의 존재를 붓다(석가모니)만이 홀로 없다고 주장하는 불교(붓다의 가르침)는 아주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붓다는 ‘영원주의’ 사상을 하나의 극단주의로 간주한다. (또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하는 '단멸주의' 사상도 하나의 극단주의로 간주한다)

한 유행승이 붓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존귀한 선생님이시여, 자아 속에 영원한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유행승이여, 그렇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죽은 후에 영원하고 상주하고 불변하는 그것이 될 것이며 거기서 영원한 것으로 지속할 것이다. 아트만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부처와 그 제자들로부터 사변적인 견해와 선입견, 편견을 근절시키고 일체의 형성을 그치고 일제의 집착을 버리고 갈애를 소진시켜 탐욕을 끊고 소멸하는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을 듣는다. 그 설법(법을 설명함)을 듣고 나서 그는 '나는 전멸될 것이다. 나는 파괴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고 통곡하며 가슴을 쥐어뜯고 방황한다. 유행승이여, 이와 같이 그는 자아 가운데 어떤 영원한 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두려워한다." (월폴라 라훌라,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원제 What the Buddha Taught, 167-68에서 간접인용)

참고로 월폴라 라훌라Walpola Rāhula(1907-1997)는 스리랑카 출신의 승려이자 세일론대학교에서 박사를 받은 후 프랑스에서 활약한 불교학자다.

붓다는 또한 "내가 영원불변한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운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맛지마 니까야>에서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비구들이여, 그것을 받아들여 슬픔, 고통, 좌절, 재난을 일으키지 않는 영혼설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라."

이와 같이 붓다는 중생(생명의 무리;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사람) 또는 일반 대중들이 지닌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과 염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토록 지속하여 존재하는 ‘영혼’이라는 실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힌두교가 주장하고 가르치는 ‘영원한 영혼’이라는 신앙은 거짓이고 환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관념(개념, 상상, 환상) 속의 존재인 영혼이라는 실체를 영원한 것으로 믿고 사모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나는 영원하고 상주하고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영원주의 사상은 어리석고 잘못된 극단적인 견해라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죽은 후에도 영원하고 상주하고 불변하는 그것이 될 것이며 거기서 영원한 것으로 지속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완전히 어리석은 견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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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 니까야>에 따르면, ‘아라한’(거룩한 자라는 뜻으로, 이는 깨달음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를 지칭한다. 붓다도 아라한이다)은 '나는 상주불변하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모든 번뇌를 제거한 자'라고 정의한다.

결국 아라한은 '자신과 세상 모든 존재가 아낫따(비실체; 무아), 즉 상주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실상)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나' 또는 모든 '존재'라는 것이 연기법칙에 따라 인과연기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연기현상이라는 진리를 완전히 바르게 깨닫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결국 몸(물질작용 무더기)과 마음(정신작용 무더기)이 조건에 따라 상호작용하여 일으키는 (비실체인,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닌) 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생(생명生의 무리衆,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이란 단지

‘무상(아닛짜; 매순간 변함) ·고(둑카; 근원적 괴로움을 내포하고 있음) ·무아(아낫따; 비실체)'라는 특성을 지닌 몸(물질작용 무더기; 색온)과 마음(정신작용 무더기; '수상행식'온)이

'인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의존'(연기) 작용하여 매순간 인과연기적으로 생기 소멸하며 변하는 연기적 흐름 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실상)을

수행(팔정도를 닦는 수행)을 통해서 직접 통찰(깊이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 붓다Buddha

한 수행자가 붓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스승님,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입니까?"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자들이여, 그는 자신과 세상이 지금(현재순간, 매순간) 사라지고(소멸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세상과 자신이 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자신과 세상이 현재순간(매순간) 일어나고(생기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세상과 자신이 없다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 <상윳따 니까야>

고정불변(동일)하고 독립(독자)적인 실체(Atman, Atta)로서의 내(我)가 있는 것(有)도 아니고, 연기적 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으로서의 내(吾)가 없는 것(無)도 아니다.

나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Atta, 我)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an)'(비실체, 아낫따an·Atta, 무아無我), 매순간 인과연기적으로 생기 소멸하며 변하는'(아닛짜a-Nicca, 무상無常) 하나의 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으로 존재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나와 세상이 지금 현재순간(매순간) 일어나고(生) 사라지는(滅)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내가(그리고 세상이) 있다는 것(有)에도 없다는 것(無)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이른바 양극단 즉 생멸生滅, 유무有無 .. (나를 기준으로한) 선악,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좋고 싫음, 사랑과 미움 .. 등등에서 벗어나라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다.

붓다의 수많은 가르침은 수행(팔정도를 닦는 수행)을 통해서 무명(무지, 인식의 착각, 의식과 무의식의 착각, 전도된 생각)을 극복하고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열반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는 존재가 이 세상(우주자연)에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와 브라만교는 붓다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와 브라만교가 모두 유신론과 유아론(실체론)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붓다는 영혼의 존재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조차도 부정하는 면에서 다른 종교 창시자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면에서 초기불교는 무신론적이며 무아론(비실체론)적인 세계관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영혼이나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자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에 유아론(실체론)은 환상(착각)이거나 거짓된 신념에 불과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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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자아라는 관념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악과 해로운 생각과 감정이 나온다고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자아라는 관념은 ‘나 자신’, ‘나의 것’ 등과 같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자아로 인해서 ‘탐욕’, ‘집착’, ‘증오’, ‘악한 의도’, ‘속임수’, ‘교만’, '질투', ‘더러움’과 같은 모든 해로운 생각과 감정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도 또한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를 비판하고 부정하였음을 보게 된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여기서 예수가 말한 ‘자기’와 부처가 말하는 ‘자아’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데, 결국 붓다와 예수는 인간의 이기적인 자아를 모든 악의 뿌리로 규정하고 부정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자아의 이기적인 속성은 하나의 ‘죄’라기보다는 고쳐야 하는 ‘질병’으로 본 것이고, 예수에게 있어서 이기적인 자아는 죄의 근원이요 중심인 것으로 단죄해야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자아에 대한 붓다와 예수의 생각의 차이는 바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의 개념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자아의 이기적인 속성을 무신론적 관점에서 하나의 정신적인 착각이나 질병으로 파악한 것이고, 예수는 이기적인 자아를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타락한 영혼으로 파악한 것이다.

월폴라 라훌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두 가지 관념에 사로잡혀있는데, 하나는 자기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보존이라는 것이다. 자기보호를 위해서 인간이 신이라는 대상을 만들고서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신에게 자기의 보호와 안전을 맡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아트만, 즉 영혼이라는 관념(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인데, 이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지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자기를 위로할 신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붓다는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고 영혼에 대한 믿음도 ‘환상이나 착각’ 내지는 하나의 ‘정신질환’으로 '고통과 번뇌의 근원(근본 원인, 뿌리)'이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잘못된 관념들, 즉 유신론과 유아론을 뿌리까지 뽑아버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러한 무지와 나약함과 두려움과 욕망 등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제거하고 파괴하고 그 뿌리를 잘라내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데 있다. 붓다에 의하면, 신이나 영혼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환상이며 공허한 것이다. (유신론과 유아론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복잡한 형이상학인 철학의 옷을 입고 인간의 불안한 마음을 미묘하게 표현한 정신적인 투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월폴라 라훌라의 이와 같은 종교심리학적인 분석은 프로이드의 사회심리학적 분석과 유사한데, 프로이드는 '종교(religion)는 인간들이 자연의 위협과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인 방어로서 생겨났다'라고 말한다. 또한 프로이드는 '종교(religion)란 나약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낸 창작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계를 환상으로 대하지 않고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대할 때 스스로 사라질 사회현상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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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유신론, 유아론(실체론)과 같은 잘못된 관념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있음을 직시하였고 사람들이 이를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면서 가까이하고 집착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사실 붓다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제거하여 세상의 그 모든 근심 걱정과 번뇌에서 자유롭게 되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기적인 욕망의 중심에 바로 신에 대한 관념(유신론) 그리고 영혼(또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관념(유아론)이 서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이나 영혼에 대한 우리의 관념(유신론과 유아론)이 해탈의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붓다는 정각을 증득하고 나서 당시 인도사회를 지배하던 브라만교의 핵심사상인 유신론과 유아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깨트리고자 했다. 하지만 붓다는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진 대중들의 관념을 깨트리는 것,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브라만교의 신앙에 세뇌된 대중들의 관념과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카스트 신분제도의 기득권층인 브라만 계급의 결사적이고 강력한 반발을 깨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러한 망설임을 극복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펴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붓다는 세계를 연못에 비유하며 말했다. "연못에는 아직 물밑에 있는 연꽃도 있고, 수면 위에 거의 올라와 있는 연꽃도 있으며, 물위로 올라와서 수면에 닿지 않은 연꽃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인간은 수행정도에 따라 수준차이가 있기에 소수의 사람이라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나는 하게 되었다." 마침내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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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붓다의 깨달음은 자신과 인간과 세상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각으로 깊고 넓게 관찰하고,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로 분석하여 얻은 통찰인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존재 혹은 개체로서 물질, 정신적인 다섯 가지 무더기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인간의 내부와 외부 그 어디에도 영혼이라고 불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무아론(비실체론)은 붓다가 중생(생명의 무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을 구성하는 물질, 정신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오온)에 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찰과 분석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무아론(비실체론)은 원인과 결과의 원리인 연기법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결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존재하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영혼(또는 자아)을 부정하는 것이 초기불교의 특징인데, 후대에 불교가 전파되고 대중화 되면서 이러한 붓다의 무신론적이며 무아론적인 가르침을 벗어나려는 경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 불교의 정신과는 아주 모순되게, 부처의 가르침 속으로 자아의 관념을 끌어들이려는 몇몇 학자들의 헛된 시도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학자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찬양하고 숭앙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불교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명철하고 심오하고 위대한 사상가라고 생각하는 부처가 그들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붓다가 아무리 무아론(비실체론)을 가르쳤고 강조하였다고 하더라도 일반 대중들이 영원히 지속되는 영혼(또는 자아)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유신론과 유아론을 주장하는 것이 모든 종교들의 특징이고, 후기 불교인 대승불교조차도 점차 유신론적이며 유아론적인 성향을 띠게 됨을 보게 된다.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난 이러한 후대 불교의 변질된 모습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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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신의 내면과 외면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자아,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통찰(깊은 관찰) 경험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수행, 즉 붓다가 가르친 '팔정도(정각에 이르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를 닦는 수행'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붓다佛의 가르침敎, 불교佛敎의 시작과 끝은 팔정도다. 꼰단냐를 비롯한 최초의 다섯 제자들에게 정각을 성취하는 바른 길(팔정도)을 가르친 초전법륜의 사성제('고집멸도'성제) 가르침을 시작으로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에게 팔정도를 닦는 수행의 실천을 간곡히 당부하는 마지막 가르침까지, 붓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가르침의 시작과 끝은 '깨달은 자(붓다)가 되는(정각에 이르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 팔정도'다.

월폴라 라훌라는 붓다의 사성제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사성제의 고성제(괴로움의 고귀한 진리)가, 어떤 사람들이 잘못 상상하는 것처럼, 불교도들을 우울하고 슬픈 삶으로 이끌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사성제의 도성제(실천방법의 고귀한 진리; 팔정도를 닦는 수행)를 실천하는 진정한 불교도(불자;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는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들에게는 공포나 탐욕이 없다. 그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때문에 변화나 뜻하지 않은 재난에 대하여 흥분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언제나 평온하고 고요하다. 붓다는 음울하거나 음산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언제나 미소 짓는 사람’이라고 불리었다.......

불교(붓다의 가르침)는 진리의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우울하고 슬프고 후회하고 통탄하는 음산한 태도와는 아주 정반대이다. 기쁨이 정각과 열반을 이루기 위해 연마해야 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비록 삶에 고뇌가 따른다고 하더라도 불교도는 그것에 대하여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괴로움을 못 참고 화를 낸다고 해서 괴로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더하게 하여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필요한 것은 화를 내거나 못 견뎌하거나 하지 말고 괴로움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등 괴로움의 문제를 수행(붓다가 가르친 팔정도를 닦는 수행)으로 통찰(깊이 관찰)해서 그로부터 생기는 지혜, 용기, 힘 등을 가지고 그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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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Buddha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를 뜻하는 고대인도어로 일반명사다. '고타마Gautama 붓다Buddha'(이른바 석가모니불)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불佛, 즉 불타佛陀'는 고대인도어(산스크리트어 & 빠알리어) 붓다Buddha를 중국어(한문)로 음사(음역)한 것이다. 우리말(한국어, 한글)로는 '부처'라고 음역한다.

그러면 깨달은 자, 븟다는 무엇을 깨달았나?

붓다는 법法을 깨달았다.
붓다는 법法을 깨닫고 나서 법法을 가르쳤다.

붓다의 가르침인 법法은 '깨달음의 내용'(붓다 자신이 깨달은 내용인 법法)과 '깨닫는 방법'(붓다 자신이 깨달은 방법인 법法; 깨달음의 길)을 통칭한 것이다.

붓다가 가르친 '깨달음의 내용'은 '존재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다.

붓다가 가르친 '깨닫는 방법'은 '팔정도(깨달은 자가 되는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를 닦는 수행'이다.

붓다는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를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나서 언어란 실제가 아니라 실제의 근사치일 뿐임을 명확히 이해했기 때문에 '자신이 깨달은 내용(실상과 진리)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즉 어떤 말(Word; 언어)로 어떤 용어와 표현으로 어떤 수준으로 어떻게 설(설명)할 것인가?'를 매우 고심했다.

붓다는 소수의 지배계층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당시 붓다가 활동하던 갠지스강(항하恒河) 유역에서 대중(일반인 또는 민중)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고대인도 민중어인 마가다어(당시의 공용어 역할을 했던 마가다어는 당시 갠지스강 유역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마가다국의 민중어)를 사용해서

듣는 사람의 수준(근기; 경험,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가지 능력-이해력, 인내력, 집중력.. 등)과 처지(처해 있는 상태; 사정이나 형편, 환경, 상황.. 등)에 맞춰서, 비유적, 우화적, 시(게송)적, 문학적, 함축적, 서술적, 분석적, 종합적, 논리적, 과학적(=경험적+합리적) 표현 등 다양한 표현 방법을 사용해서,

당시의 다양한 대중들(예컨대, 브라만 계급 ... 불가촉천민 계급, 정치인, 군인, 상인, 농민 ... 남녀노소 등)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법法('실상과 진리' 그리고 '팔정도와 팔정도를 닦는 수행')에 대한 다양한 수준의 수많은 설법(법法을 설명說明함)을 했다.

그러나 마가다Māgadha어는 사장되었고 마가다어와 가장 (거의) 유사한 고대인도어가 빠알리Pāli어인데, 이 빠알리어가 후대 제자들이 붓다의 설법을 기록한 경전 모음인 니까야Nikāya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빠알리어는 붓다의 설법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던 고대인도 민중어였기도 하다. (참고로 2001년 기준으로 인도에는 총 3,372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이중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 중인 언어는 216개, 헌법이 인정한 지정 언어는 22개이다)

언어는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한 이래,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인식경험을 기호화(개념화)한 것이다. 언어는 실제가 아니라 실제의 근사치(개념)일 뿐이다. 실제에 가까운 것도 있지만 실제와 아주 먼 것도 있다. 붓다는 실상과 진리를 깨달은 후 이러한 점을 매우 잘 알았기 때문에 언어의 사용, 즉 적확(=적절+명확)한 용어와 표현의 사용에 매우 고심했다. 이것이 우리들이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을 공부할 때 붓다가 사용한 용어와 표현을 왜곡없이 바르게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영어나 중국어(한문), 한국어(한글) 경전 등 번역된 경전을 읽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번역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번역자가 원저자와 유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한 원본을 훼손하지 않고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 경전과 같은 경우에 번역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서 적적한 번역 용어를 찾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원 용어를 그냥 사용하고 원 용어에 대한 설명을 하는 편이 낫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같이 무아無我와 같은 부적절한 번역은 한역(한문 번역) 경전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역 경전을 기반으로 불교를 접하는 승려들과 특히 일반 사람들에게 불교(붓다佛의 가르침敎)를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종교로 만들고 말았다.

붓다의 설법을 기록한 경전 모음인 니까야를 보면 붓다가 사용한 언어(용어와 표현)는 화려하고 장엄한 문체나 미사여구 없이 매우 소박하면서도 적확(=적절+명확)하다. (그러나 초기경전인 니까야에도 변질된 부분이 일부 있다. 이를테면 붓다의 신장은 보통 사람의 두 배나 되며 신체는 금빛으로써 32상을 갖추었다는 등 신격화된 표현으로 묘사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 시대에는 비록 붓다가 금빛 신체를 가졌더라도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인간의 신체를 가진 인간 붓다로 생각하고 있었다)

훗날 등장하는 금강경류, 화엄경류, 정토경류, 법화경류 등 소위 대승경전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문체와는 확연히 구분된다.(이러한 점도 훗날 등장하는 이들 대승경전들이 붓다가 직접 설법한 것을 기록한 경전, 소위 불설 경전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또한 이들 경전들에는 '팔정도를 닦는 수행'에 대한 내용은 없고, 유명무실해진 용어로서의 팔정도는 어쩌다 가끔 등장한다)

후대 대승경전으로 갈수록 더 많은 타방세계의 제불諸佛이 설해지고, 더 많은 다불사상多佛思想이 나타난다. 후대 대승경전에서는 붓다를 초월적 실재와 동일시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역사적 붓다를 소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전지전능한 붓다의 수많은 화신)로 화현시켜 중생들이 고통을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렇기 때문에 천백억화신으로서의 붓다는 나약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자비와 구원, 소원성취 등 모든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목적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하는 신神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붓다는 또한 아미타불(아미타바Amitābha 붓다Buddha)이라고 불린다. 결국 불교는 붓다를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인 신神과 동일시함으로써 불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종교religion적 열망을 충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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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수행을 통해서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나서, 자신의 수행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과학적)으로 정리하여, 자신과 같은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는, 달리 말하면 정각(무상정등각의 줄임말; 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 줄임말로 팔정도라 이름 짓고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바와나Bhāvanā는 계발 수행을 뜻하는 고대인도어)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쳤다.

붓다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 계발하는 수행, 닦는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고, 설법(법을 설명함) 시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사마디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를 닦는(계발하는) 수행'(깊은 빤냐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였다. ('실라 바와나'는 그냥 실라)

팔정도 바와나, 즉 실라(戒; 정어·정업·정명)•사마디(定; 정정진·정념·정정)•빤냐(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를 한문 번역경전의 표현으로 말하면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고 붓다가 사용한 고대인도어로 말하면 실라•사마타•위빠사나다.

부파불교(소승불교)든, 상좌불교든, 대승불교든, 중관불교든, 유식불교든, 밀교(티벳불교, 금강승불교)든, 선종(선불교)이든, 화엄종(화엄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든, 일본 법화종(남묘호렌게쿄, 나무묘법연화경교,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종파, 국제창가학회 SGI)이든, 조계종(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든...

붓다佛가 가르친 '깨달음의 내용'(깨달은 내용; 실상과 진리)은 어느 정도 유사하게 가르친다 할지라도,

붓다佛가 가르친 '깨닫는 방법'(실천법, 수행법)인 '팔정도를 닦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을 변질 없이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불교는 붓다佛가 가르친 법法(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을 온전히 가르치는 불교佛敎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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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라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해탈하기를)...

- 부처님 오신날 두손모음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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