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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경전을 따르는 자 & 경전을 새로 쓰는 자

경전을 따르는 자 / 경전을 새로 쓰는 자

세상의 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해답이 팔만대장경 속에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과연 그런가? 이천년 전 네팔의 '카필라'라는 작은 왕국에 왕자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모든 것이 이루어가지리라"라는 뜻을 가진 고타마 싯다르타였다. 그는 왕이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예비되어 있었지만 스스로 부귀영화와 모든 것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을 걸었다. 영혼의 스승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그 누구보다도 혹독한 단식과 고행의 길을 걸었으며, 종국에는 어떠한 고행도 깨달음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지혜로 알게 되었다. 고행에 지친 몸을 유유히 자유롭게 흘러가는 네란자라 강의 맑은 물에 씻고 강가에서 우유를 짜던 수자타라는 처녀에게 신선한 우유를 얻어 마시고 원기를 회복한 뒤 보리수 아래로 가서 깊은 명상에 들어간 지 이레 만에 모든 것을 초월하였고 우주의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된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 다섯이었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추구해야할 것이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깨달은 심오한 진리를 일반대중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가 없었다. 심오한 진리를 누가 이해할 수 있으며 물질세계에 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인도와 네팔은 그 당시 불평등한 계급사회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붓다는 어리석은 대중을 반드시 저 구렁텅이로부터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인도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도 계급사회의 형성은 아리안 족이 철기문명을 가지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면서 시작된다. 아리안 족이 인도를 점령하고 보니 기후 등 사람살기가 좋아 인도에 정착하기로 하고 원주민을 하층민 삼아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았다고 추정된다. 모든 고대 왕조가 그러했둣이 피지배층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무력이 직접적인 수단이긴 했지만, 무력으로 원주민을 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아리안 족은 윤회사상과 인간의 계급화를 연결짓는 아주 그럴듯한 교리의 개발을 통해 일반대중의 의식개조 및 세뇌에 돌입한다. 당시 아리안족의 브라만을 위시한 최상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철저한 계급사회를 만들었고, 지금의 브라만이 잘 사는 건 전생에 선업을 쌓았기 때문이고 하층민이 인간대접을 못 받는 건 전생에 악업을 쌓은 때문이라고 세뇌하였다. 그리고 이번 생은 힘들지만 열심히 살면 다음 생에서는  브라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노예화하여 착취하고 학대하였다.


그런 불합리한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놀라운 진리를 설파한 석가모니는 혁명적인 종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 석가모니 자신은 신격화와 신비화를 철저히 배척했으며 오직 진리만을 탐구해나갈 것을 제자들과 대중에게 설법했다. 그러나 석가모니 사후에는 부처님의 진리해석에 많은 왜곡이 일어났다. 불경 변천의 역사에 대해 비교적 논리적으로 잘 요약된 인터넷 공개자료를 토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 생존 당시 인도와 네팔지역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힌두적 사고방식과 종교의식이 불교의 전파과정에서 융합되어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켰으며,  또한 제자들 중 부처님의 엄격하고 단호한 진리탐구의 방향에 대해 따르기가 힘들었던 사람들이 자기편리대로 해석을 하고 설법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마하가섭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되어 간다는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경전정리에 착수하였으며, 만장일치 회의 방식으로 경전의 내용을 다듬어 경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과정이 바로 제1회 불전 결집이다.


그 이후에도 인도 전역으로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여전히 진리와 교리가 변형과 왜곡을 겪게 되었고, 보수적 교단과 개혁적 교단간에 계율과 교리 해석의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전체적으로 보수파의 승리로 계율이 나름대로 확정 되었지만, 이에 반발한 그룹이 단독적인 교파 즉 '대중부파'를 만들었으며 이 사건을 '근본분열'이라  말하고 있다. 부처님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즈음에 대중부파는 다시 내부적 갈등에 의해  20여개의 종파로 나뉘어졌으며, 이를 소승 20부 또는 부파불교(아비달마)라고 불렀다.  이때 부파불교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제2차 결집이라 부른다.


이때의 경전은 진실성이 떨어지고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부분이 많은 것으로 후학들에 의해 평가되었다. 그 이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은 불교를 국교로 하고 부파불교에서 연구해오고 정리한 경전을 토대로 부처님 사후 구전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經)과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律)과 부파불교에서 수백 년간 연구 되어온  아비달마의 논(論)들을 한자리에 모아 경율논(經律論) 3장(三藏)의 대장경을 편찬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약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라고 일컬어지는 3차 대결집이다. 바로 이 경이 남방으로 흘러 들어가 남방 소승경전의 전법인 팔리어 경전의 기초가 되었다.


아소카왕 사후 바로 마우리아 왕조는 붕괴되고 안드리아 왕국과 쿠산왕조 같은 소국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전통의 복귀를 주장하며  브라만제도의 부활을 시도했으며, 산스크리트 문법을 확립(BC. 2세기)하여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문화를 이끌어 나갔고, 마누 법전을 제작(BC. 1세기)하여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에 포괄하고 선진종교인 불교 이론도 흡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원형을 이 시기에 정립했다고 한다. 이러한 힌두교의 정립은 기존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대중부파 뿐만 아니라 상좌부파도 분열하게 되는데 불교계는 여전히 격랑 속에서 표류하는 꼴이었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이후 인도북부에 생긴 쿠산왕조의 카니시카왕은 예외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국가통치이념으로 불교를 채택했다. AD125년 경, 부파불교 내에 여러 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각 부파의 이설을 통일하고자 경율논 3장에 통달한 스님 500명을 선출하여 불전 결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4차 불전결집'이다. 이때는 각 부파의 학문적 논의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황이라 기존 팔리어 삼장에다가 이들이 만들어 놓은 광범위한 주석을 덧붙여 대장경을 편찬했다. 이때  만들어진 경은 팔리어로 쓰여진 3차 경전과는 다르게 힌두 귀족들이 사용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데 그만큼 브라만도 전통 문화와 힌두교의 영향력이 컸음을 반영한다. 나중에 이 경전들이 북방으로 전해져 한역대장경의 원전이 된다. 즉 동양3국에서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700년간에 걸친 부파불교의 이론이 크게 반영된 카니시카왕의 4차 결집의 산물로서 힌두교의 영향과 각 부파불교의 논리들이  많이 반영된 것이니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부처님 사후 500년이 지난 기원 전후 경에 부파불교의 현학성과 귀족주의에 반발하면서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상좌부의 부파불교는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철학적이고 난해한 법 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 알 수 있는 고급종교가 되어있었고, 승려들은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 아래 중생들과 유리된 엘리트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재가신자들과 개혁적인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논란만 일삼으며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만 누리고 있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을 구원하는 참된 불교가 되자고 대승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 승려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이라 공격하고, 스스로는 모든 것을 담는 대승이라 칭하면서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키고 자신들만의 경전을 편찬하게 된다.


그리고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던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고, 나가르주나(용수)는 공과 무의 사상을 정립하여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AD 1세기)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만들어지고 AD 2세기에 화엄경, 3세기에 법화경이 나타나게 된다. 이 무렵의 경전에는 '박티 신앙'의 영향으로 초기 경전에 없었던 다양한 부처와 보살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범천, 제석천, 금강역사,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이 그것인데, 모두 힌두신화에 등장하는 힌두신으로서 불교에서 신격화된 부처로 탈바꿈 하였다.


대승불교의 사상을 정립한 용수는 철학적 위상을 확립하였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경지를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관념의 불교로 변질시키게  되었다고 일부학자들은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한다. 처음부터 인도의 힌두적 브라만적 환경 속에서 생겨나 성장해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의 역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마침내 힌두교화 되었다고 불교사학자들은 말한다.


마지막으로 불교는 밀교로 변하면서 한층 왜곡과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대승불교가 성하던 7세기 중반 인도에서는 힌두적 관념에 물든 불교도들이 주술적 방법을 통하여 범아일여의 경지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인도적 주술과 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불교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렇게 변질된 불교를 밀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생각해 오던 많은 부분이 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으며, 제를 지내고 염불을 하고 진언과 다라니경을 외우며 불상과 탑에 복을 비는 것 대부분이 밀교적 형태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가 삼국시대(AD 4세기~8세기)로 인도의 다양한 불교(초기불교, 아비달마 불교, 중관 불교,  유식불교, 밀교)가 동시에  밀려들었지만, 이중에 부처님을 신과 같이 생각하고 복을 비는 밀교가 뿌리깊은 토속 민속신앙(산신, 칠성신 등)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받아들이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삼국의 불교가 호국불교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불교를 국교로 삼고 팔관회를 개최한 것이라든지,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십 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것 등, 모두 밀교적 신앙의 발로였으며 당시 궁중의식들과 법회의식들도 모두 밀교식 의례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억불정책으로 많은 불교종파가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면서 밀교종인 신인종도 중도종(삼론법성종)에 합쳐지고 다시 총남종이 되었다가 결국 선종에 통합되어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 밀교종파는 사라졌지만 불교 속에 녹아든 밀교의 형식과 관념은 계속되고 있으며 밀교의식과 기복신앙, 기도, 주문(다라니) 등이 중시되고 있는 것이다.


초기밀교는 4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불교로 잡밀(雜密)이라고 하는데, 병을 치료하고 장수를 기원하며 비를 멈추게 하는 것 등 중생들의 현실적인 요구에 응하기 위해 나타난 변형불교로서 다라니경과 제불보살을 신앙하는 일군의 밀교경전 등이 이 시대의 산물이다. 중기밀교란 7세기경 인도에서 새롭게 성립한 '대일경'과 '금강정경' 등을 기초로 체계적으로 정립된 밀교로서 초기의 조잡한 잡밀에 비추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었다 하여 순밀(純密)이라고 한다. 


후기 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 속칭 탄트라 불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금강정경을 기초로 한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성적 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좌도밀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밀교에서는 진언을 외우면 우주의 신비한 힘을 받게 되어 인간의 힘이 무한자재에 이르게 되는데, 일념으로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면 마음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까지도 완벽하게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불교의식 때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우는 것은 이런 밀교의 영향인데 천수경의 여러 진언들과 반야심경의 주문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은 팔만대장경이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늘어난 불교 경전 속에 숨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하여 많은 사람과 종파의 견해가 포함되어 거대한 코끼리처럼 변해버린 경전의 몸체에서 코끼리의 일부분을 더듬어 보고 "코끼리는 이렇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님들처럼, 대중들이 팔만대장경의 일부분을 접하고 부처님의 진리인 양 오인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많은 왜곡과 변천과 퇴색으로 점철되었던 불교경전의 역사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우리는 경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불교경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성경과 코란도 그 편집과정이 불교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것을 각 경전의 역사를  공부해보면 쉽게 파악된다. 경전과 계율과 교리 향성과정에서 해석과 이해를 달리한 그룹과 집단들이 분파를 만들고 나름의 논리와 교리를 만들어 많은 대중을 현혹시키는 과정을 살펴보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불교나 비슷한 여정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사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도하기 위해 기록과 경전이 필요했으며 제자들에 의해 또는 종교분파에 의해 나름대로 해석과 기록이 남겨졌으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은 방대한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사해문서와 낙 함마디 문서의 발굴로 인해 초기교회가 종말론적 영지주의 성격을 지녔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교파들 간에 각각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들이 난무했으며 교세다툼이  치열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성서들은 각 사도들의 체험과 이해정도에 따라 각기 다를 수밖에 없었으며 말로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변질과 왜곡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성서기록들을 대상으로 현재의 신약성경의 형태가 결집되는 과정 중에 베드로파와 바울파가 대립하였으나,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주역을 맡고 바울의 시각에서 바라본 예수와 하느님의 진리를 기술한 내용들이 대거 신약에 포함되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 복음,베드로 계시록, 베드로 행전, 요한 행전, 도마 행전, 안드레아 행전, 에비온 복음 등은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외경으로 분류되어 잊혀진 역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결국 베드로과보다 세력이 강했던 바울파의 승리로 지금의 신약성경의 모습이 갖추어지고 많은 진실들을 담은 성서기록들이 아웃사이더로 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가 신구약 성경의 2대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전혀 아니며, 제자들이 전도의 필요성에 따라 만든 것으로 후대에 인위적으로 정리되어 편집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올바르다. 성경의 기록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기록되고 성경의 채택과정도 하느님이 직접 역사하셨다고 주장하는 많은 목사님의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발생과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 반응과 행동양식과 패턴이 유사한 과정으로 진행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과거의 경전은 비유와 설명을 그 시대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경전의 구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엄청난 문장적, 사실적, 사유적인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나" 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의 거울은 너무나 깨끗하게 사물을 비추는데 왜 거울이 희미하다고 했을까. 그 당시 만든 거울은 청동거울이 많았고 지금의 거울처럼 깨끗하게 상을 비추지 못했기에 희미하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과거의 경전은 과거의 생활상과 과거 사람의 정신적 수준에 맞게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 속에 담긴 진리는 변함 없지만 표현 방법상으로는 그 시대에 맞는 옷이 입혀져 있다. 겉옷만을 보고 진리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코란은 아라비어로 쓰여진 이슬람 근본성전을 맡한다. 코란은 알라신이 마호메트를 통해 내려진 많은 계시를 집대성한 것이며, 마호메트가 생전에 이 코란을 완성했다는 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후에 확정되었다고 보고 있다. 코란은 대개 하피즈라는 암송가들에 의해 구전되었고 하피즈의 기억 속에 존재했다. 마호메트 사후에 일어난 수백 년의 전쟁 속에서 많은 하피즈가 죽었고, 하피즈가 사라져가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제3대 칼리프였던 우스만이 코란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진 교우인 자이드에게 이슬람경전을 정리하도록 명했고, 이렇게 정리된 것이 바로 우스만 판이며 그 당시 이것과 같지 않은 다른 경전들은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결국 현재의 코란도 인위적 결집과정의 산물이며 편집자들의 취사선택에 의한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경전이라면 우리는 진리를 담은 종교적 감동을 주는 특별한 기록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기대를 갖고 코란을 읽으면 대체로 실망하게 된다. 성경의 구약도 그러한 면이 적지 않지만, 코란의 경우 이야기 내용이 빈약하고 모래를 씹는 듯한 법적규정, 너무나 상식적인 도덕적 훈계, 다신교나 이교도에 대한 집요한 비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감각적 묘사 등이 속어적으로 지겹도록 되풀이되는데 이것을 인내하고 통독하기란 매우 어렵다. 물론 이렇게 기술된 코란의 잡다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이 코란의 진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도 불경도 많은 세월이 흘러오면서 새로운 계율과 교리가 추가되었고 지금의 사회에는 적용할 필요조차 없어진 과거의 규율에 관한 것, 그리고 상식적이고 오래된 도덕적 교훈, 근거가 없는 신화적 요소, 장황한 신들의 이야기 등을 우리가 왜 외우고 해석에 골머리를 썩혀야 하겠는가...


라비아 알 아다비아 라는 수피가 있었다. 그녀는 불꽃같은 신비가로 알려졌고 수많은 구도자가 그녀에게로 찾아가 그녀의 마을은 정신적 메카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슬람교도인 하산이 그녀에게 찾아와 아침기도를 드리기 위해 코란이 필요하니 그녀의 코란을 빌리고자 했다. 그녀에게 코란을 빌린 하산은 책을 펼치고는 깜짝 놀랐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이 무슨 불경스런 짓인가? 그녀는 코란의 많은 부분을 고쳐놓았던  것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단어를 삭제하고 어떤 부분에선 한 페이지 전체를 빼버리기도  했다. 하산은 말했다. 이런 짓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코란을 고쳐서는 안 된다. 누가 예언자의 말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종교적 전통에 대해서는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신과 일대일로 만났다. 그리고 나의 체험에 의해서 그 책을 바꾸었다. 이것은 나의 책이다. 당신은 나에게 항의할 권한이 없다."


왜 종교 경전에 있는 모든 단어와 구절이 신성시 되어야 하는가... 누가 경전을 신성하다고 우리에게 말했는가... 종교적 지도자인가. 교단의 책임자인가... 율법 학자들인가, 경전해석 학자들인가...우리는 냉정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신이 아니며, 우리가 그들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제 알 아다비야의 견해를 가져야 한다. 수많은 경전에 대해 우리는 분석해야 하고 핵심을 비켜난 그 모든 것을 삭제해나가야 한다. 더 이상 과거의 경전에 기록된 모든 구절을 맹목적으로 신성시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과거의 경전에서 이제 버려할 것은 버려야한다. 우리는 이제 종교의 핵심 요체인 경전의 허와 실을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 교단의 교리와 계율의 허구성을 냉철히 분석해야 한다. 앞으로도 일반대중은 얼마나 더 과거의 경전에 목매달아야 할까?


첨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경전이 필요하다. 퇴색되고 빛바랜 경전이 아니라 생생하게 이 시대를 반영하는 살아있는 숨 쉬는 경전이 필요하다. 삼라만상과 물질계의 탄생비밀, 생물계의 탄생, 그리고 영혼과 정신에 관한 과거의 법으로 무장된 첨단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신경뇌과학, 정신과학이 모든 것을 구체적이며 명확한 설명을 줄 것이다. 미래의 지혜를 가진 자, 푸른 붓다들을 위한 새로운 경전은 과학을 통해 기록되어지고 있다. 우주의 진리와 비밀을 파헤치고 증명해나가는 과학적 사유와 연구내용이 새로운 경전의 기록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경전에 대한 허와 실을 밝히고 새로운 해석을 가할 수 있는 수준의 지성과 지혜를 가진 푸른 붓다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경전을 기록해야 한다. 깊은 과학적 사유로 이해한 이 우주의 진리를...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과거의 경전은  잊어버리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진리를, 신을 찾아야 하고 내가 체험한 것, 내가 새롭게 깨달은 것에 대해 나의 진실된 새로운 경전을 스스로 기록해나가야 한다.


죽은 붓다 / 살아있는 붓다


금칠을 한 황금색 불상들은 말이 없다. 높은 좌대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유언으로 불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건만 누가 왜 불상을 만들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약 500년간 불상은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이 때를 '무불상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나 불교가 더 넓게 전파되어가면서 눈앞에 보이는 부처님의 상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부처님 사후 500여년이 지난 즈음에 인도 북부지역 마투라와 간디라 지방에서 제일 처음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결국 불교가 형성되어가는 과정 중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과 진리를 이룬 한 인간으로 보기보다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로 부각시켜 나갔다. 


그런 신적인 존재로 부각시킨 부처님을 경배대상으로 삼아 수많은 부처님의 형상이 조각되어졌으며 이제는 사원과 불당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의 절은 많은 종교적 형상물들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나라에 불교 전파당시 대승불교와 미신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 밀교형태가 같이 혼입되어 들어오면서 많은 불상과 불탑, 탱화는 경배의 중요한 대상이  되어버렸다.

절의 입구에 들어서면 우리는 제일 먼저 무서운 형상의 사천왕상과 금강역사와 마주치게 되는데 금강역사는 인도에서는 문을 지키는 야차인데 불교에서는 인왕이라 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둔갑한 것이다. 사천왕상의 동방을 수호하는 지국천은  힌두신인 드리따라쉬뜨라, 남방을 수호하는 증장천은 비루다까, 서방을 수호하는 광목천은 비루빡샤,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은 바이슈라바나 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은 아와록까떼쉬와라, 지장보살은 크시티가르바,  미륵보살은  메이뜨레야,  문수보살은 만주슈리, 보현보살은 사만타바드라, 일광보살은 수르야쁘라바, 월광보살은 짠드라쁘라바, 십일면관음은 에까다샤무카, 범천은 브라만, 제석천은 인디라 라는 힌두신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절은 이런 힌두신상에 덧붙여 불교 전파당시 신도를 흡수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토속민간신앙의 모태인 삼신, 칠성신과 산신 등도 포함하여 다양한 신과 종교적 형상들의 전시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얼마전에 순천에 있는 선암사라는 절에 들렀는데, 문 입구에 사천왕상도 금강역사가 보이지 않았고 '육조구사'라는 큰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월이 지나면서 달마대사를 선두로 하는 선불교와 '사라하'라는 인물을 선두로 하는 탄드라불교의 두 줄기로 나누어졌다고 하는데, 선암사는 달마의 법맥을 이어받은 육조의 가르침을 중히 여겨 태고종의 본산이 된 절로 내 나름의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부처상과 관음보살을 모신 불상이 법당에 자리하고 있었고, 작지만 뒤편에 산신각도 있었다. 산신각을 구경하고 있던 나에게 한 스님이 다가와 이 산신각은 영험하여 기도하고 절하면 소원이 정말 잘 이루어지니 절을 해볼 것을 권하였다. 나는 애써 쓴웃음을 짓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부처님이 결코 불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음에도 사람들에 의해 경배대상으로 바뀐 법당의 불상과 탱화에 그려진 산신에게 왜 절을 올려야 하는지 그 스님에게 묻고 싶었다.


기독교의 하느님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스라엘 민족들은 금으로 만든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이에 분노한 신은 선지자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돌에 새겨 받들게 하였다. 십계명에서 첫 번째 계명은 바로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이며,  두 번째는 "우상을 만들지 말며 섬기지 말라"이다. 그 당시 사회는 유일신 보다는 다신적 관념이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사회였을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런 종교의 패턴이었을 것이다.


아랍족의 뿌리는 베두인 즉, 사막의 유목민들이라 추정되며 이들은 사막이라는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동생활이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었다. 항상 부족간의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신적 요소와 다신교적 종교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부족의 결집을 위한 관행 즉, 순나는 곧 법이었고, 그 순나를 거스르는 것은 곧 처절한  죽음이었다. 부족간의 복수와 전쟁으로 항상 생사를 가늠하기 침든 상황 속에서 징크스가 만들어지고 주술적 미신적 요소가 양산되는 것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부족과 가문 중심의 폐쇄적 사회, 그리고 미신적이고 다신교적인 이슬람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그리고 미신적 종교와 관습의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아랍인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가 바로 세계 3대종교의 하나로 성장한 이슬람교를 만든 마호메트이다. 그는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여 신 앞에 인간은 평등하며 인간의 가치 평가는 가문과 부족의 이름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며 또한 부와 명예로 평가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유일신 하느님 앞에 얼마나 진실한가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혁명적 교리를 주창하였다.


마호메트는 큰 세력을 얻어 5년간 전쟁 끝에 종교적 수도인 메카로 점령해 들어가서 카바, 즉 성전으로 나아갔을 때 성전에 늘어선 수많은 신상(神像)을 한점의 망설임 없이 과격할 정도로 부수며 나아갔다. 수많은 이슬람 민족이 기도하고 경배를 하던 신들의 상들은 나름의 위안을 주었던 순기능적 종교적 역할이 전혀 없었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마호메트는 그런 신상들을 무참할 정도로 뭉개고 파괴해버렸다. 그 이유는 미신적 어리석음과 속박으로부터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슬람교도들은 그 어떤 신상도 만들지 않으며 신상에 대해 경배하지 않는다. 이슬람종교의 성지인 카바 중심부에는 천막의 휘장이 둘러져있으나 실제로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여하튼 아랍민족이 다신교적 형상을 만들어내고 경배를 해왔던 무지로부터 탈출하고 신의 형상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든 마호메트는 분명 존경받아야 한다.


부처님은 불상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지금까지 불교는 너무나 많은 불상을 만들어냈다. 아시아 전역에 도시와 산야에 흩어져 있는 불상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불교도의 경배 대상으로 새겨진 수많은 부처와 보살들 그리고 힌두신들의 상들을 마호메트와 같은 선지자와 종교적 혁명가가 나와 모두 부셔버릴 수는 없을까… 법당에 금칠을 하고 알수 없는 미소를 띠고 앉아 있는 불상을, 말하지 못하는 죽은 붓다의 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위안을 주고 복을 가져다 준다는 기복 신앙의 경배대상인 형상물로부터 이제 자유로워져야 한다. 누가 파격적으로 없애든 아니하든 과거 신의 형상은 어차피 사라진다. 실제적으로 형상을 파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런 형상이 사라지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죽은 붓다는 말하지 않는다. 더 이상 죽은 신을 만나기 위해 불상 앞으로 갈 필요는 없다. 살아있는 붓다, 지금의 우리 속에 살아있는 지혜를 말하는 붓다, 진리를 우리시대의 언어로 말하는 살아있는 붓다를 만나야 한다. 그들이 푸른 붓다이다. 우리는 이제 모든 종교로부터 해방시키고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게 하고 그 깊고 넓은 진리를 깨닫게 할 살아있는 푸른 붓다를 만나야 한다.


지배당한 자 / 깨어있는 자

절이나 사원이나, 교회를 가면 장엄하고 엄숙한 종교 형상물, 성가와 찬가 그리고 종교의식이 있다. 저절로 신에 대해 경배하고 기도를 올리고 신에게 구원을 간구하고픈 마음이 생기게 한다. 영혼의 스승으로 일컬어진 지두 크리슈나무르는 그런 것들은 어떤 감정을 이끌어 내도톡 교묘하게 고안되어 있다고 했다. 종교사회에서는 그것을 자연스런 신에 대한 경외심, 신앙심의 발로라고 말할지 몰라도 크리슈나무르티는 그것을 매혹됨,  내맡김, 떠맡김 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는 묻는다. 어떤 신들, 어떤 구루(스승), 어떤  리더들의 이야기를 매혹됨 없이, 내맡김 없이, 떠맡김 없이 냉철히 바라본 적 있는가...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우리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목소리 속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속에서,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우리 스스로 보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맙시다."


독일에는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전설이 있다. 한 도시에 갑자기 쥐가 너무 불어나서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었는데, 키 큰 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금 천냥을 주면 쥐를 전부 없애주겠다고 제의를 했다. 시장과 시민들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 피리 부는 사나이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에 쥐들이 모여들었고 피리 부는 사나이는 피리를 불면서 수많은 쥐떼를 몰고 강으로 들어갔다. 쥐 떼들은 피리소리에 취해 강 속으로 들어가 몰살하게 된다. 그 일을 완수한 피리 부는 사나이는 시장과 시민들에게 금 천 냥을 달라고 하였으나 그 돈이 아까웠던 시장은 금 오십냥을  제의하였다. 화가 난 피리 부는 사나이는 돌아갔지만 나중에 다시 그도시에 나타나 피리를 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도시의 어린이들이 피리소리를 듣고 신들린 것처럼  모여들었고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에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그 후 아이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언제나 우리 사회에는 마술피리를 부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피리소리는 사람들의  넋을 빼놓고 그들을 추종자로, 로봇으로 만들어버린다. 히틀러는 피리 부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념과 강렬한 연설은 마술피리 소리와 다름없었고 독일사회는 마술에 걸린 듯 그의 의지대로 끌려갔다. 마치 피리소리에 이끌려 강 속으로 뛰어든 쥐들과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이끌려 산으로 사라진 아이들처럼... 

로봇처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들을 바라보고 아인슈타인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인가에 신들린 듯 넋이 나간 사람들, 무엇에 의해 자신의 영혼이 지배 되어버린 자들이 자기 자신은 올바르게 가고 있고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가... 어떤 종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종교적 구루(스승)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종교적 신비스런 체험에 지배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정치적 이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가... 독재자에 가까운 정치적 지도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물질적 욕망에 지배 당하고 있는가… 돈에 지배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권력과 명예욕에 지배당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에 우리는 객관적, 냉철한 탐구없이 너무나 쉽게 자신을 매혹됨, 내맡김, 떠맡김으로 안일하게 자신을 방치한 것이 아닌지 사색해야 한다. 어리석고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은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의존적이다.


최근에 경남 함안에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어느 절에 들른 적이 있다. 절의 규모는 매우 컸지만 왠지 모든 것이 을씨년스럽고 휑한 느낌이었다. 지인은 왜 그런지 설명해주었다. 금강경 설법을 기막히게 잘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분은 원래 있던 절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의 그 절터에서 천막을 치고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였고 신도들의 성금으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 스님은 시작부터 매우 큰 규모의 절을 구상했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공사를 하면서 신도들이 지원해주는 금액으로 감당이 안 되어 대규모의 사채와 은행돈을 빌리기 시작하였다. 그 돈을 메우기 위해 다시 큰 납골당 조성을 계획하였고 납골당이 분양되면 돈이 회수될 것이라며 절을 담보로 돈을 더 빌려 납골당은 조성했지만 막상 납골당 분양이 부진하여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신도들도 점차 줄어들어 빚에 시달리게 되자 지나친 스트레스로 지병을 얻어 결국 그 스님은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 절은 경매에서 형편없는 가격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다고 한다. 절 입구에는 108개의 관음보살상이 줄지어져 조성되어 있는데 관음보살상 앞에는 동전이나 지폐를 놓는 접시가 놓여 있었다. 지폐를 내면 108개의 동전으로 바꾸어주는 곳도 만들어져 있었다. 대형버스를 타고 사람들이 오면 동전으로 바꾸어 관음보살상 앞에 동전을 하나씩 놓고 108개의 관음보살상에 차례로 합장하고 기도하며 염주를 돌리면서 절에 올라가는 형식으로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던 것이다. 그 스님은 그 절에 그렇게 관음보살상을 경배하면서 올라온 신도들에게 다시 위압감이 느껴지도록 크게 만들어진 불상을 배경으로 높은 연좌대에 앉아 그의 장기인 금강경 강의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극락을 설명하면서 납골당 분양을 강권했을 것이다. 그 절의 모든 것이 많은 대중을 끌어 모아야 했던 이유와 함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절 입구에 조성된 108 관음 보살상 앞에 돈을 바치고 염주를 돌리며 복을 기원했던 많은 할머니들은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절 입구에 관음 보살상을 늘어세우고 돈을 바치도록 고안한 의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며, 어리석은 신도들의 기복신앙만을 더욱 부채질하게 만드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수나라 황제였던 양제는 엄청난 재물을 들여 수많은 절을 세우고 수많은 불탑과 불상을 만들고 많은 불경을 만들어 배포하고 스님들을 양성하여 불경을 공부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리고 그는 달마대사를 초청하여 물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불사를 추진했던 나의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달마대사는 냉정하게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할 수도 있는 황제 앞에서 어쩌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달마가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불사를 했지만 그것은 황제 자신의 공명심의 발로였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한 수많은 불상, 불탑 등 종교 형상물과 경전 판본 인쇄가 결코 부처님의 진리 탐구와 접근에 있어서 오히려 본질을 외면하고 중생을 미혹에 빠지게 할 뿐이라는 것을 강하게 일깨우고 황제자신도 진정한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해나가라는 뜻에서 한 말로 해석된다.


엄숙하고, 경건하고, 웅장하고, 거대하고, 방대하고, 신비스럽고, 신기하며, 무섭고, 두려운 것들은 사람의 감각과 뇌를 정지시키고 마비시킨다. 수많은 종교적 의식과 행위 그리고 그런 의식과 행위에 필요한 종교 형상물과 상징물은 냉정한 분별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거대한 것, 비싼 금이나 보석으로 치장된 알지 못할 신비한 형상들, 묘한 분위기와 감정을 증폭시키는 소리와 음악, 묘한 암송의 반복이 이끌어내는 경의 독송 소리, 장엄한 종교의식 등은 사람들을 압도시키고 신 앞에 고개 숙이고 경외심을 일으키도록 고안된 도구의 하나이다.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처음 부처님은 인도사회의 미신적이고 관념적인 계급제도의 어둠을 부수고,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과 진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리고 진리 탐구 외에 우주의 실상과 이치에 맞지 않는 주문이나 비밀의식에 대해 말법으로 금지했으며, 기도니 주술이니 하는 기이한 원력으로 재난에서 벗어나려는 일체의 미신적인 수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나쁜 일을 비켜가게 하고 병마가 사라지며 밝고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해준다는 진언은 만트라(mantra)의 의역으로 본래는 베다의 주문을 일컫던 말로 보통 내용이 긴 것을 다라니, 짧은 것을 진언이라고 하여 범어 원문 그대로 외운다. 


부처님은 신비적 요소가 가득한 일체의 수행방식에 대해 반대하였다. 누군가가 진언에 대해 이런 표현을 남겼다. "부처님이 주문에 대해 말씀하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사실적인 인과의 이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문으로 하는 일이 좋아질 것 같으면 씨만 뿌려 놓고 가만히 앉아서 주문만 외우면 풍년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에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런 비법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말로 다라니를 정당화시켜도 그것은 이치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실이 없는 것이며, 이에 의지하게 되면 삶이 어두워지고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진리를 강조하고 신을 중시하지 않는데 있다. 불교는 스스로 밝은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초기 불교는 신을 중시하지 않으며 의례나 예배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 의지하여 진리를 깨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화되고 변질되면서 대승불교에 와서는 붓다가 중생 구원을 위한 신의 화신으로 변하게 됨으로써 불교가 실천의 종교에서 믿음의 종교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불완전하다고 여기며 그런 자신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 있는 끊임없는 우상을 만들어왔다. 그런 대중적 성향을 잘 알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대중을 이용하는 무리들이 항상 존재해왔다. 그들은 대부분의 정치가들이며, 종교교단의 사람들이며,  금융업자들이며, 스포츠나 연예인 스타를 제조하는 기획가들이다. 대중들은 왜 그들이 만든 것에 열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기도 하며, 시간과 노력 등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당장 그런 의문을 던져야하고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현재의 나를 강하게 지배하는 것은 종교인가, 초월적 신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물질적 돈인가, 명예인가, 권력욕인가, 아니면 게임이나 오락, 마약 같은 재미와 쾌락인가... 



⫸ '대승불교의 기원 & 만민구제와 자기구제의 차이' - 게시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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