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간단명료한 불교(요약)

간단명료한 불교 (요약) - (스티브 하겐 저, 이복희 역, 우리출판사)


1. 문제해결의 열쇠는 나에게 있다.

불교의 핵심은 ‘바로 보는 것’

확실한 치료방법이 없어 보이는 인간의 근본적 문제란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그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상대적이거나 조 건에 따른 변화에 의존하지 않는 인식, 즉 ‘전체’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그 많은 고통과 고민을 일으키는 의문과 딜레마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스스로의 혼란과 불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이 피하기 어려운 불확실성과 두려움 에 매이지 않을 것을 갈망한다. 하지만 대체로, 자신을 가두는 것이 정확히 자신의 혼란스 러운 마음 상태임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러한 무지와 비관적 사고 그리고 혼란에서 벗어나 총체적 실재를 인식한다기보다,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 이 경험은 어떠한 관념이나 믿음에 기초하지 않는, 직접적 인 직관 그 자체이다. 생각이 싹트기 전에, 관념에 빠져들기 전에 ‘보는 것(seeing)’이다. 이를 깨달음(enlightenment)이라 부른다. 우리가 원하거나 믿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현상을 ‘보는 것’이다. 총체적 실재에 대한 직관인 이러한 마음의 해탈은 실재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든 이에게 완전히 접근 가능한 것이다.

붓다의 메시지는 언제나 우리 스스로 고찰하고 바로 ‘보는 것’이다. 스스로 무엇이 사실인지 보게 될 때, 즉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실로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때 이를 받아 들이라. 그때까지는, 판단이나 비판을 미루도록 한다. 불교의 핵심은 ‘바로 보는 것’이다. 그 것이 전부다.

우리는 어떠한 가정이나 믿음을 가지고, 불교에 접근하거나 진리를 올바르게 구할 수 없다. 우리가 바라거나, 기원하거나, 또는 기대하는 대로 사물을 보려 하기보다 그것은 직접적 경 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불교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직관, 즉 직접적 경험 으로 시작한다.

뗏목은 버리고 가라

참된 불교는 실로 어떤 ‘주의(ism)’가 아니라 수행, 자각, 열림, 탐구의 정신이며 어떤 신앙 체계, 심지어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듯이) 종교가 아니다. ‘깨달은 자의 가르침’ 혹은 ‘붓다 의 가르침’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붓다의 가르침은 뗏목에 비유될 수 있다. 뗏목은 이 쪽 물가에서 저쪽 물가로 물을 건너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편 물가에 일단 다다르고 나면, 더 이상 뗏목은 필요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가 물가 건너로 여정을 계 속하기를 원한다면, 뗏목은 버리고 가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뗏목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아주 좋은 뗏목이었어. 아 주 요긴하게 썼어. 여행하는 동안 계속 들고 가고 싶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불교 의 가르침에 (어떠한 가르침이든) 집착하면, 궁극적으로 이는 방해가 될 것이다. 비록 붓다 의 말씀 안에 진리가 있긴 하더라도. 어떤 말도 즉 붓다의 말씀, 나, 그 밖의 누구의 말이라도, 당신을 대신하여 ‘보아줄 수’는 없다. 붓다가 오래전 나무 아래 앉아 하던 그대로 우리 는 우리 스스로 ‘보아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자신의 직접적 경험 안에서 얻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믿음을 수 용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가정되거나 상상된 것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물 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어떤 특정한 해석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진리는 어떠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보여지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문제가 실제로 무엇 인지, 또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무언가를 갈구한다. 우 리는 아픔과 상실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이러한 괴로움을 덜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는 바로 눈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게 괴롭고 지속적으로 불만스러운 상태가 존재의 첫 번째 실상 이다. 우리가 스스로와 남에게 가져오는 모든 고통, 즉 미움, 분쟁, 아첨, 속임수 등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가슴과 마음,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발생한 것 이다.

나아가, 만약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지 못한다면, 이 상황은 계속된다. 우리는 아이들 에게 이 무지를 가르칠 것이며, 세대를 이어가며 자신과 서로에게 같은 방식으로 이 무지는 더해져 갈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마음을 명료히 보았을 때, 이후 많은 이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이 사실을 깨우쳤다. 깨달은 자는 고통과 이를 멈추게 하는 수단 역시 자신 안에 놓 여 있음을 스스로 보았다.

이것은 문제가 없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붓다를 포함하여 우리들 모두의 삶은 어려움에서,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에 걸쳐 영원히 자유로 울 수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이 어려움에서 해방되리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 려,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을, 그들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살피도록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탁상공론식 철학이 아니다. 몽상도 아니다. 그것은 근본에 기초하고 그 근 본적인 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과 관계된 것이다.

불만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인간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함으로 특징지어진다. 불만은 바로 여기 우리와 함께 있다. 이것 이 인간의 삶에 대한 붓다 가르침의 첫 번째 진리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사랑하는 대상이 죽지 않으리라 여기거나 혹은 희망해야 하나? 깨어 있는 자는 ‘아니 오’라고 단호히 답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하늘에 떠 있는 허상이나, 원하는 대로의 소 망도 아니며, 또한 있는 대로의 우리네 삶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을 덮으려 하거나, 속이려 하거나, 왜곡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불만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일이 다. 즉 우리 자신의 무지에서, 실제 우리의 상황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함에서, 있는 그대 로의 현실과 다른 무엇으로 보려 함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현실과는 다른 무엇에의 소망, 갈망, 목마름이 우리를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 가르침의 두 번째 진리는, 이 불만이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난다는 점이 다.

세 번째 진리는, 우리는 스스로 불만의 근원을 밝혀내며, 그리하여 가장 심오하고도 실존적 인 상태로 이를 끝내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네 번째 진리는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깨우침을 경험하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러한 깨 우침은 때로 ‘니르바나(열반, nirvana)’ 혹은 ‘깨달음(enlightenment)’으로 불린다. 좀 더 정 확히 말하면 심해탈이 될 것이다.

붓다 가르침의 네 번째 진리는 여덟 가지 측면을 포함하는데, 이런 이유로 팔정도(eightfold path)로 불린다.

그러면 그 길이란 무엇인가? 그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며, 그런 다음 이에 대처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누구를 위해서나, 혹은 어떤 목적, 믿음 또는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순간 안에 온전히 있기 위하여, 사람은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게’되면, 우리는 자각하며 말하 고, 행동하는 삶을 영위해나갈 것이다. 지혜로운 말과 행동, 또한 그러한 삶이 자연히 뒤따 르게 되고 이는 실제로 삶에 적용될 수 있는 도덕성의 근간이 된다.

붓다의 다르마에 나타나는 윤리적 가르침은, 우리가 덕이나 엉터리 환심을 가장하거나, 혹 은 나중에 보답을 바라기 위해서 하는 선행이 아니다. 오히려 건전한 도덕성은 그 순간 안 에서 온전히 생겨난다. 이는 현실의 즉각성에서, 실제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에 토대를 두고있다.‘보상’은바로지금그리고여기라는‘즉각성’안에있는것이지 결코다른데 에 있지 않다.

팔정도는 또한 정진과 정념, 그리고 정정(正定)을 포함한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선정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선정과는 다르다. 편안함이나 어떤 특별한 마음 상태로 향하는 훈련이 아 니다. 이 선정은 단순히 여기 있는 것, 즉 매 순간 존재하며, 그리고 실제 일어나는 일을 알 아차림을 익히는 일이다.

‘그냥 보는 것’으로 충분해

우리가 일반적인 어리석음의 상태에 머무는 한 마음은 짜증스럽고, 괴로운 두카(苦, duhkha)로 특징지어진다. 사실 우리의 상황을 주의 깊이 진지하게 바라본다면, 세 가지 종 류의 두카를 경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 두카는, 직접적으로 오는 고통으로,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통 둘 다 해당한다. 우리 가 좋아하든 안 하든, 고통은 삶의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를 약으로 둔화시키거나 혹은 자신을 고통에 무디게 만들 수도 있으며, 피하기 위한 방법을 써서 최대한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두카의 두 번째 형태는 변화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현상은 끊임없는 변화와 흐름 안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엇을 향하든지, 보든지 또는 말하든지, 이들은 계속되는 흐름 속에 있다. 깨어 있는 상태에 반하는 일반적인 마음 상태에 있다면, 이 흐름은 불만, 혼란, 두카로 여겨진다.

또 그때 그러한 변화를 막으려는, 혹은 그대로 계속되게 하려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문제 를 커지게 한다. 우리는 힘이나 통제를 가하여 외적으로 이를 해결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관념화함으로써 내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마음 안에서 모든 것을 결정지음으로써 의 미나 목적 또는 안정을 얻고자 한다.

이렇게 하며 어느 한순간 상황을 마음 편하게 만들지라도, 이는 단지 순간적일 뿐이다. 일 시적인 상황을 둘러싼 주위의 모든 상황은 필연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변할 때, 잠깐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또다시 두카가 나타나게 된다.

일상적인 마음 상태에 머무는 한, 변화에 의해 피할 수 없이 생겨나는 이 두카에서 도망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대신, 대부분 세상을 즉 우리의 삶, 우 리의 관계, 일어나는 일, 다른 사람 등을 우리 식으로 만들려 애쓴다. 이러한 시도는 둘째 형태인 두카의 주된 근원이 된다.

이렇게 ‘보게’될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이르고 무엇을 통제하려 한다. 그렇게 함 으로써 자신과 다른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확신에 차 있다. 그 러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파괴, 즉 고통, 혼란, 그리고 정신적 육체적 피로, 즉 두 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통제와 같은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보는 것(seeing)’을 통해서다. ‘그냥 보는 것(just seeing)’으로 충분하다.

‘보는 것(seeing)’을 통해 ‘알’ 수 있어

고통의 두카 너머, 변화의 두카 너머, 존재(being)의 두카가 있다. 이 세 번째 두카는 앞의 두 가지 두카보다 훨씬 ‘보는 것’이 어렵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아주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 다.

당신 스스로를 별개의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 한,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또한 보 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의 존재가 ‘존재적 상황’ 안에 놓여 있다면, 그때 당신은 필연적 으로 존재적 상태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은 극심한 고뇌와 고통, 혹은 두려움 을 수반한다.

이런 형태의 두카를 경험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그냥 조용히 앉아 몇 가지 아주 근원적 인 의문들에 관해 당신이 그 답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곰곰이 새겨보면 된다. 당신 은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은 어 디로 가는가? 당신은 이러한 의문에 확신이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지 모르나, 당신 자신 의 직접 경험을 통한 그 어느 것으로도 답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직접적 경험을 명확 히 보면 존재함으로써 경험하는 이 깊은 불안은 사라질 수 있다. 당신이 볼 수 있을 때 마 음의 불편이 일시에 사라지듯이 ‘보는 것(seeing)’을 통하여 당신은 ‘알’ 수 있다.


2. 욕망을 죽이지 말고 보라

두카(苦)의 생겨남

붓다 가르침의 두 번째 진리는 두카(苦, duhkha)의 생겨남이다. 두카는 자신이 바라는 대상 을 얻으려는 간절함, 바람, 원함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갈망 혹은 욕망은 세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감각적인 욕망이다.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 나, 이는 또한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편하고 게다가 자극적인 육체적 쾌락 을 원하지만, 또한 훌륭하고도 지적인 자극, 즉 좋은 대화, 균형 잡힌 정서 생활, 즐길 수 있는 예술과 오락 등도 아울러 원한다.

두 번째로 욕망의 형태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다. 우리는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남아 있고,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에 대한 욕망을 포기할 수 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세 번째 형태의 욕망이 남아 있는데, 즉 존재치 않음으로의 욕망이다. 우리는 고통과 괴로움의 이 세상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두카는 이러한 세 가지 형태로서 마음속에서 끝없이 일어난다. 이를 깨닫지 못할 때, 우리 는 이 순간을 잊고서 무언가를 목마르게 원하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싫어함에 사로잡히게 된 다. 어떤 것은 간절히 다가오기를(혹은 머물기를) 바라고 다른 무엇은 멀어지기를 바란다. 사실상 인류의 모든 근심은 이 세 가지 형태의 갈망에서 생겨난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장 큰 고통은 모두 자신으로부터 오는 시달림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을 괴롭히는 것을 살펴보 면, 이들은 당신의 갈망, 욕망, 바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달아날 문은 없다

나의 스승이 들려준 어느 수행자의 일화이다. 그 수행자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선원에서 빠 져 나가고 싶어 했다.

선원에서는 순간순간 수행자가 경험하는 것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행위들 은 규정에 따라야 되고, 그리고 강요된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스승에게로 가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 나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스승은, “그래 좋다. 떠나거라”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문으로 향하자 스승은, “그건 자네 문이 아니야”라고 말하였다.

“오, 죄송합니다.” 당황한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두 번째 문을 찾아냈다. 그가 그 문으로 향 하자 스승은 “그 문도 자네 것이 아니야”라고 하였다.

“오!” 그는 또 다른 문을 둘러보았다. 그는 스승 뒤편에 스승의 시종이 보통 사용하는 작은 문을 볼 수 있었다. 그 문으로 향하자, 스승은 “그것도 당신 문이 아니야”라고 크게 소리 질렀다.

아주 당황스럽고 화가 난 그는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십니까? 다른 문은 없습니다! 제가 떠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나갈 수 있는 문이 더는 없지 않습니까?”

“자네가 나갈 수 있는 문이 없다면, 거기 앉아라”라고 스승은 말하였다.

스승의 “앉아라!”는 말은 거기에서 달아나려 하지 말고, 대신 실제 일어나고 있는 그 일에 마음을 두라는 의미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놓인 고통과 혼란에 종말을 고하는 유일한 길이 다.

불행히도, 우리는 문으로 향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벗어나 려 함으로써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문제- 깊이 자리한 마 음의 고통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그 아픔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깊이 자리한 문제의 문제는 어리석음이다.

좋은 시절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변화한다. 그리고 좋지 않은 시절도 바뀐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시절만 오게 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좋은 때가 저 절로 다가와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게다가 나쁜 때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멀리하려 하여 도 오게 된다.

물론 나쁜 시절을 원치는 않는다. 그러나 나쁜 시절도 좋은 시절처럼 우리의 통제 밖에 있 다. 싫어하는 때는, 상황을 바꾸려 무엇을 하더라도 상관없이 올 것이며 그리고 또 지나갈 것이다. 좋은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매 순간 그냥 단순히 충만히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는 단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계획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 떤 특별한 상황에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미래가 어떠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보다 오히려 현재에 있음에 노력을 집중하는 게 더 낫다는 의미다.

두카는 선택이다

무지와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은 그냥 ‘보는 것’에 수반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하여 특 별한 무엇을 하는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일단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행동이 뒤따르게 된다. 욕망을 다루는 데 있어 문제는, 이를 억누르려고 할 때 욕망이 다른 곳으로 점점 커 지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욕망은 이전보다 더욱 세차게 타오른다.

우리는 욕망의 종식을 갈망한다. 우리는 또다시, 흔히 해오던 대로 붙잡으려 하며 강렬히 원한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으로,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문제이다. 이에 관해 또다시 같은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게 할 보호 장치는 없다.

이 문제를 제거할 유일한 길은 그것을 ‘보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만족이나 나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하거나 행하지 않음이 결코 문제는 아니 다. 이를 피할 수는 없다. ‘보는지’ 또는 아닌지가 문제다. 전적으로 문제는 바로 여기에 달 려 있다.

중국 선불교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승찬 스님은 그의 저서 『신심명』에서 가려내고 선 택하는 것이 마음의 가장 나쁜 병이라고 지적하였다. 독일인들의 속담에는 “선택하는 사람 은 누구나 고통을 겪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사실이다. 선택해야 할 때는, 즉시 마음이 불편해진다.

두카-고통, 괴로움-는 선택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두카에 더 많이 사로잡히게 되고 빠져나가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자유가 선택의 최대화에 있는 것으로 보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사실, 이는 속박의 한 형태이다. 진정한 자유는 선택의 최대화에 있 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선택이 거의 없는 삶 속에서 대부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자: 선택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결정하기는 더 쉬워진다.

내가 암에 걸렸을 때, 의사들은 내게 화학요법을 쓰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아스피린을 먹는 일조차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강력한 화학물질을 내 몸속에 넣는다는 것은 완 전히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가슴, 목과 복부 안에 있는 종양으로 몸무게가 줄어들고 매우 쇠약해졌다. 치료 없이는 단 몇 달의 삶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치료를 받으면 일 년 또는 더 이상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가능성이 있었다.

선택은 간단했다. 화학요법을 쓰기로 하였고, 이제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는, 마음의 자유가 선택에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선택은 항상 우리 삶의 변하는 상황 과 구체적인 일상에 놓여 있다. 사실 마음의 자유에 관한 한, 선택은 쉽다. 우리에게는 선택 이 아니라 깨닫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정신적 수행을 하는 목적이 나쁜 행위와 반대되는 좋은 행위를 하기 위한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완전히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요지는 오히려, 언제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지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무언가 얻으려 하는 목적을 지닌 채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경향 이 있다. 그러나 자연은 의도를 지니고 행하지 않는다. 붓다 역시 마찬가지다. 의도 없이 행 동한다는 것은 즉 전체를 보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나쁜 일에 반하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배우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확고하고 변하 지 않는 선이나 악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절대적이지 않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경향성뿐만 아니라 제한된 지식에 근거한 믿음이나 판단, 생각일 뿐이다.

인간의 삶이 처한 상황은 말이 달아나버린 중국의 현명한 어느 농부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 웃 사람들이 와서 그를 위로하였을 때, 그는 “잘된 건지 못 된 건지 그 누가 알겠는가?”라 고 말하였다.

그의 말이 다음 날, 한 무리의 다른 말들과 더불어 돌아왔을 때, 어리석은 이웃은 그의 행 운을 축하하러 다시 왔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누가 알겠는가?”라고 그 농부는 다시 말하였다.

전쟁이 일어나 남자들을 징집하러 군대가 지나가는데, 그 농부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졌기에 면제되었다. 어리석은 이웃이 이를 축하하러 왔을 때, 다시 그 농부는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예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무엇을 선이라 부르고 무엇을 악이라 부를까? 선과 악은 우리의 선택이 결코 아니 며, 나아가 당면 문제도 아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양측은 각자 신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각자 자신들이 옳 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링컨 대통령의, “신은 같은 일에 대해 동시에 찬성하고 반대 할 수 없다”는 지적에서 충분히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우리가 이 게임을 오래하면 할수록, 더욱더 우리 자신이 착각에 빠질 뿐이다. 선과 악의 비 교는 분명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엔 보다 근본적인 무엇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선이라고 여기는 당신의 생각이 그 밖의 다른 무엇에 반한다면, 당신이 선이라고 여기는 것 이 절대적이거나 확실한 것이 아님을 분명 알 수 있다.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불안정하고 상대적인 생각 너머에 있는 무엇을 찾고자 하는 희망은, 오로지 ‘보는 것’에 달려 있다. 상 대적인 세상의 불확실한 이중성을 벗어난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면, 우리들 마음의 경향성, 즉 우리의 의도나 의지, 갈애(渴愛) 등을 지켜보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

욕망을 없애려 하거나, 혹은 이를 막으려 애쓰지 말라. 욕망을 키우고 더 강하게 만들 뿐이 다. 요점은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보는 것’이다.


3. 생겨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희망은 있다.

붓다 가르침의 세 번째 진리는, 생겨나는 것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카도 생 겨난 것이기 때문에 또한 사라진다는 것이다.

두카의 소멸- 혼란, 슬픔, 그리고 상실의 끝-이 니르바나(nirvana, 열반)다.

붓다는 니르바나를 “생겨나지 않고, 자라나지 않으며, 그리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겨나고 자라고 조건 지워지면, 생겨나고 자라고 조건 지워진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 겨나지 않고 자라지 않고 조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나고 자라고 조건 지워진 것에 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 것이다.”

생겨나고 자라고 조건지워진 것은, 당신 자신을 포함하여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주변을 보자. 생겨나지 않고, 자라나지 않고, 다른 것들과 연관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실 제로 찾을 수 없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그리고 조건들에 반응하는 모두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이라는 구조 속에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고, 또는 조건적이지 않은 현상을 또한 지적하였 다. 이 조건지워지지 않은 양상은 직접적 지각으로 가능하며 이를 개념화하거나 규정지을 수 없고, 단지 ‘볼’ 수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상황은 결코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실 재적이고 진정한 참된 것이 존재한다.

여기에 실재가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끝없이 흐르고 변하는 것이라는 사 실을 기억하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영원을 갈망하나, 그 어느 것도 영 원하지 않기에 고통스럽다. 다만 이렇게 오고 가며 이 끝없는 생겨남과 사라짐만이 있는 듯 이 보인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운동으로 경험한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말하기를, 물질은 말 그대로 단 지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어떠한 기준으로 보든지 간에, 우리의 경험은 항 상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신체를 포함하여 물리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도 적용된다. 모든 세포 - 실제로 모든 세포 내의 모든 원자 - 도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보일 뿐이다. 우리의 몸은 순간순간 재생되며, 그리고 어느 순간도 같지 않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도 끝없이 움직인다. 생각, 느낌, 판단, 그리고 충동이 마치 꽃이 계절에 따라 피어났다 지듯이, 생겨났다 다음 순간 사라진다.

열반은,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이러한 현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어리석거나 제정신이 아닌 게 아니다. 단지 보지 못할 뿐으로,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따름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개인 또는 개체로서, 즉 시간을 통하여 끝없이 지속되는 독립된 존재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인간이라 부르는 것을, 붓다는 단 순히 ‘흐름’으로 보았다.

당신이 대부분의 사람과 같다면, 자신이 태어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자신의 존재함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따라가보자. 당신이 존재하게 된 것을 기억하는가?

물론 당신은 출생 때 시작된 게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수정될 때? 정 확히 수정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정자가 난자를 처음 만났을 때?

진실은 당신이 실제적 경험의 일로, ‘존재하게 됨’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동일성 내에서 그 앞에 있었던 무엇을 포함할 뿐이다. 모두는 그 앞의 조건에 따라 정해지 며, 그 앞의 것 또한 그 앞의 조건에 따라 결정되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 이는 계속 된다. 다른 표현으로는, ‘존재하게 됨’이라는 이 개념에 관해 매우 의외의, 모순적인, 그리고 규정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실재’가 있다. 세상이 있다. ‘스스로 그러함’이 있다.

이와 동일한 문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나는 컴퓨터로 이 글을 쓰면서 여기 앉아 있다. 그러나 내가 쓰는 글들이 언제 책이 되는가? 이 글을 쓸 때? 마지막 편집을 끝낼 때?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건넬 때? 아니면 인쇄된 페이지들이 묶여 나 올 때?

이 책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내가 처음 이 책을 쓰기로 생각하였을 때? 하지만 이 책은 수 십 년에 걸쳐 진행되어온 것이다. 내가 처음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을 때 이 책도 시작 되었는가? 이 책이 근거하고 있는 식견은 2,500여 년 전에 처음 가르쳐진 게 아닌가? 사실 이 책을 쓰는 일은 수백 년에 걸친 수많은 이들의 노력 그리고 통찰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 는 것이다.

또 끝은 어떠한가? 이 책(혹은 당신, 또는 나)은 어디서 끝나는가? 모든 것이 흐름이라고 한다면, 끝에 다다를 수 있는 책(혹은 당신, 또는 나)과 같이 영속적인 것은 없다. 지금 어 느 순간에 이 책을 만드는 물질은, 마지막 징후를 보이지 않는 끝없는 변형을 언제나 겪고 있다.

그리고 이 책(혹은 당신, 또는 나)의 본질이 물질에 있지 않고 정신적 또는 지적인 차원에 있다면, 또다시 우리는 시작도 사라짐도 없는, 오로지 끝없는 변화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태초에 신이 ~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신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시작도 끝도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는 것들이다.

먼저 보는 것으로 욕망을 줄이라.

앞에서 논의한 세 가지 욕망을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감각적인 쾌락을 위한 욕망은 단순히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는 욕망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는 그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당신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질 때, 어떻게 진 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욕망으로 이끈다. 우리는 죽지 않기를 원한다. 당신은 이 문제에 어 떻게 대처하겠는가? 태어난 이상, 당신은 죽게 되어 있다. 이는 단순 명료한 사실이다. 그 러나 우리를 꽉 붙잡고 있는 소멸에 대한 이 시각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면 어떻게 되나? 실제로 혼돈 위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견해로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자유로이 할 수 있는가? 문제는,우리가변화를단순히오고가는것으로보지않는데있다.대신단지흐름과 변 화만을 보여주는 직접적 경험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든 영속성을 수반 한다고 여긴다. 사물이 생겨나 한동안 지속되다가 그리고 다음 존재 밖으로 사라진다고 상 상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또 다른 욕망을 품게 되는데, 즉 비존재에 대한 욕망- 우리의 사라짐을 어떻게 해보려는 욕망이다.

이 세 가지 모든 욕망은 변화에 대한 혼란에서 일어난다.

붓다는 이 욕망을 끝내는 일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바로 또 다른 욕망이 아닌가? 그리고 하나의 욕망이 또 다른 욕망으 로 이르게 하지 않는가? 욕망이란 사그라들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연료를 다 태운 등잔처럼 우리는 욕망의 불꽃을 멈출 수 있으며 그 불꽃이 작아져서 꺼지게 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를 행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자아를 잊으라’는 것이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속에 빠뜨리면, 개구리는 튀어나오지만 만약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집 어넣고 서서히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죽을 때까지 거기 그대로 있는다.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건전치 못한 상황으로 너무 깊이 빠져들고 있을 때, ‘보고’ 그리고 ‘아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미끄러 운 경사 아래로 계속 내려갈 필요는 없다. 멈추고,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상황을 ‘볼’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위기로부터 이렇게 물러서는 일은 욕망을 줄이는 연습이 된다.

감각기관은 과도한 부하를 받으면 감각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일단 감각이 무뎌지면, 완전히 무감각해지기까지 더욱 과도하게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정확히 중독성 마약의 잘못된 사이클과 같다. 경험하는 전반적인 효과는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다.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먼저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방향을 돌려 찬찬히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압박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혼란스러움 에 이르게도 하고 명쾌함에 이르게도 하지만 우리는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제어 능력과 조화력이 있다. 우리는 사고로써 이를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 다. 하지만 우리는 ‘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으며, 또한 그 스스로 균형을 되찾게할수도있다.‘보는것’으로균형을되찾는일은불에손을넣지않는것처럼, 문 제가 되지 않으며 힘든 일도 아니다. 행위가 무엇을 수반하는지 ‘볼’수 있을 때, 더 이상 그것을 할 어떠한 충동도 생기지 않게 된다.

욕망의 초점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

욕망에 대처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욕망의 초점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있 다. 자아를 잊는 일은 우리가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과, 다른 생명체들과, 지구, 그리고 우주와 상호 연관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다른 존재를 제어하는 주된 힘으로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다른 모든 존재들- 그리고 실제로 역동적인 우주의 모든 움직임- 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를 잊을 무한한 기회가 있는데, 즉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나무를 심고, 시를 쓰고, 식사를 준비하고, 흙으로 뭔가를 만들고, 또한 당신의 상대편도 당신만큼 게임에 중요한 존재라는 점을 진심으로 이해하면서 함께하는 야구 등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욕망, 행위, 말, 그리고 생각 등은 제어를 통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이루 려는 방향에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이 실패하면 (계속되면 피할 수 없이 실패 하게 되지만) 고통을 받는다.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러한 제어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볼’ 수 있을 때, 제어 하려는 우리의 욕망은 자연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요점은 제어를 그만두게 하거나, 제어하 려는 욕망을 나쁘거나 잘못된 것으로 탓하는 게 아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과 인정을 통하여, 우리는 고통을 끝낼 수 있다.

제어하려는 욕망의 중심에, 자아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보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없어지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인식이다. 우리는 애당초 있지도 않았던 그 무엇에 매달리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에 대해 “그러나 대체 누가 그것을 원하겠는가?”라고 첫 번째로 반응할지 모른다. 그러 나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깊은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이 환영(幻影)이라면, 그때 그 환영에 대한 깨달음은 가장 완전한 자유 에 이르게 한다. 가장 큰 두려움은 각자 - 나 - 가 언젠가 소멸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확고한 실체가 있지도 않던 그 무엇이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는가?

붓다의 가르침은 각자가 근원적인 잘못에서 깨어나는 길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깨어날 때, 마치 태양이 떠오르자 밤이 물러나듯, 두려움과 근심은 자연히 사라진다.


4. 모든 길로 한꺼번에 이르게 하는 팔정도

‘바른’ 것은 ‘잘못된’ 것과 반대가 아니다.

팔정도(the eightfold path)로 알려진 붓다 가르침의 네 번째 진리는, 두카의 종식을 위한 인식과 수행을 제시한다. 이것은 A점에서 B점으로 이르게 하는 길이 아니다. 이 길의 특징 은 우리가 그것에 근거하는 순간 모든 길이 한꺼번에 인식된다는 점이다. 각각의 단계와 더불어 우리의 지혜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방식은 바른 견해, 바른 의도,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살림(생업), 바 른 노력(정진), 바른 마음새김, 그리고 바른 명상이다. 이들 개별 항목을 살펴보기 전에, ‘바 른’이란 용어를 먼저 생각해보자. 붓다가 실제로 사용한 용어는 ‘삼마’(Samma)였다. ‘삼마’ 는 ‘바른’ 것으로 흔히 번역되나 ‘잘못된’, 혹은 ‘나쁜’, ‘악한’ 것과 반대되는 의미가 아니 다. 보통 우리가 ‘바른’이란 용어를 말하는 순간, 이미 ‘잘못’을 내포하며 이원성을 수반하게 된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원성은 단순히 왼편과 오른편, 어둠과 밝음, 좋음과 나쁨, 순수와 불순의 세계를 나타낸다. 그것은 무언가를 뒤쫓거나 다른 것에서 도망치거나, 또는 당신이 나와 다르면 그때는 당신에게 잘못된 무엇이 있다는 일상 적인 세계의 심리적 배경이 된다.

분명히 이는 붓다가 ‘삼마’로서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 용어는 훨씬 더 미묘한 무언가를 나 타낸다. 바르다는 것은 ‘적합하다’, ‘제대로 되다’, ‘이건 실재와 같은 의미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낫다. 팔정도에서 ‘바른’은 ‘잘못된’과 반대가 아니듯이, ‘보는 것’이 ‘보지 않음’과 반대가 아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편견, 사고, 그리고 신념으로 인한 혼란에 반하는 것으로 실재와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 ‘삼마’는 단편이 아닌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바른’이란 용어를, 잘못된 무언가와 대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깨달음에 이바지하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로 사용하고자 한다.

‘바른 견해’는 ‘전체’에 관한 것

팔정도 가운데, 첫째는 바른 견해다. 붓다에 따르면, 어떤 특정 견해에 매달리는 것은 실재 를 고정시키는 것으로, 세상을 그 생각 안에 가둬 넣으려는 것이며, 견해를 갖는 일은 어떤 장면을 바로 거기서 고정시키는 즉석사진과 같다. 일단 견해가 생기게 되면, 오래지 않아 그 견해는 다른 견해와 강력히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다음, 각각의 견해를 함께하는 사람 들이 그들끼리 뭉치면서 전체는 분열된다. 붓다가 ‘바른 견해’로 의미하는 것은, 결코 이것 이 아니다. 붓다의 ‘견해’는 일반적인 고착된 견해가 아니다.

하지만 붓다는 어떤 견해도 갖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도 옳지 않다. 붓 다가 ‘바른 견해’로 의미한 바는, 한 특별한 견해에 잡혀 있지 않는 것이다. 생각, 개념, 믿 음, 또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붓다의 견해는 세상의 지속적인 흐름이라 는 견지에서 한 가지 길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상이 실재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만 일 현상이 지속적인 운동 상태에 있다면 어떻게 현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 결코 고정불변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 고정불변하는 견해가 어떻게 정확할 수 있겠는 가?

우리에게 ‘바른 견해’를 제공하는 것은 세상에 관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역동적인 ‘전체’로서의, 세상 그 자체이다. ‘바른 견해’는 ‘전체적’이며 ‘전체’에 관한 것이다. 이는 모 든 것을 포함한다. 어느 것도 밖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한 견해는 명백히, 어떠한 다른 견 해와도 충돌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 수도 없다. 이미 그것은 전체로서의 역동적인 세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반하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다.

바른 의도는 깨어나고자 하는 결의를 갖는 것

팔정도 가운데 두 번째는 ‘바른 의도’다. 또 이는 ‘바른 결심’, ‘바른 동기’, ‘바른 생각’으로 도 불린다.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온 한 젊은이의 진정한 의도를, 소크라테스가 시험하는 이야기가 있 다. 소크라테스는 이 젊은이가 진리를 추구하려는 뜻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이 젊은 이를 강으로 데리고 간 후,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자신을 따라오도록 하였다. 물이 허리 깊이에 이르자, 소크라테스는 갑자기 그 젊은이를 붙잡더니 물 밑으로 밀어 넣었다. 자연히, 그 젊은이는 곧바로 몸부림치기 시작하였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그를 물에서 들어 올려, “자네가 숨을 쉬기 위해 투쟁하듯이 진리를 구하기 위해 투쟁할 수 있을 때, 내게 돌아오면 그때 자네를 가르치겠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른 의지’, ’바른 결심‘ 이다.

사실 ‘진리’는 다른 누구로부터 배울 수 없다. 이는 단지 자신의 결의를 통해서만 ‘보인다’. 깨어나고자 하는 결의를 갖지 못한다면, 스승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른 결 의’는 머리카락이 불에 타고 있는 사람에 비유된다. 당신의 머리가 불에 타고 있을 때, 끄기 위한 방법의 좋고 나쁨을 따지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타고 있을 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떤 선택을 하지 않으며 바로 행동한다.

팔정도 가운데 그다음은 ‘바른 말’이다.

‘바른 말’의 가장 분명한 형태는 거짓말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거짓을 피하는 도덕적 이 유가 무엇이든, 진정한 몇 가지 아주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팔정도는 마음이 너무 혼란스 러워지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당신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다(결국 우리가 깨닫는 것은 오로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다). 당신이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의 마 음은 곧바로 산란해진다. 이제 당신이 말한 내용, 말한 사람, 이야기의 진행 사항 등등을 계 속 기억하여야 한다. 여기엔 끝이 없다. 깨닫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게 된다.

‘바른 말’의 두 번째 요소는 거칠게 또는 무례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말은 불필요 하며, 품위가 없으며, 마음을 산란케 한다.

또 다른 면에서 ‘바른 말’은, 남을 나쁘게 말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피하는 것도 포함된 다. 시시한 잡담이나 남을 비방하는 것은 분명히,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바른 노력’은 매 순간과의 약속

팔정도의 네 번째는 ‘바른 행위’이다. 구속되지 않은 마음, 딱딱한 사고의 틀 속에 굳어지지 않은 마음에서 생겨나는 행동이다. 팔정도의 다섯 번째는, 바른 생업이다. 이 지구상에서 다 른 이들에게, 환경에, 또는 우리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물론 붓다의 가르침이 인정하는 직업군이 따로 있지는 않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열려 있는 마 음, 통찰, 정직, 그리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영위할지를 우리 각자가 깨닫도록 도와준다. 팔정도의 여섯째인 ‘바른 노력(바른 정진)’은, 매 순간과의 진지하면서도 지속적인 약속이 다. 이는 순간순간 우리의 파편화된 심리와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자발적인 포기이며, 또한 건전하고 선한 마음 상태를 북돋는 것이다.

팔정도의 일곱째인 ‘올바른 마음 새김’은 ‘바른 노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진정한 문제, 즉 고(苦)를 잊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마음 챙김’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 스스로의 마음 상태와 작용 그리고 때때로 우 리가 세상 속에 실제로 어떻게 연관되었는지를 알게 되고 정기적으로 재확인하게 된다. 이 러한 관찰과 자각을 통하여, 이들 각각의 정신 상태에서 행위하는 것에 친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팔정도의 마지막은 ‘바른 선정’ 또는 ‘바른 집중’이다. ‘바른 선정’은 마음을 모아 집중하여, 한곳에 몰입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8장에서 간단한 형태의 선정 방법에 대해 기본적인 소 개를 할 것이다.

팔정도 가운데 어느 것이든, 무조건 수용해서는 안 된다. 이들을 시험해보아야 한다.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과연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당신 스스로 살 펴보아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보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팔정도는 구속이 아니다.

불교 계율로 불리는 삶의 일반적 가이드라인은 팔정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 계율은 구속이 아니다. 흔히 열 가지로 명시되기에, 십계명과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이들은 계명도 아니고, 더욱이 규범도 아니다. 이는 좋아하고 싫어하거나 또는 근거 없는 생각, 일시적 기 분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떻게 직접적 실재 속에 사는가와 관계있다. 특정한 행위를 규정하 는 대신, 매 순간 깨어 있으면서 ‘보고’ 살도록 권하고 있다.

당신이 도덕적 규범에 엄격히 따르고자 한다면, 다양한 모순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오래지 않아 현실적인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진정한 도덕적 책임은, 매 순간 깨어 있음에 놓여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고착화된 규범들을 떠난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유태인 가족을 다락에 숨겨주고 있는데, 게슈타포 대원 두 명이 집으로 왔다고 가정하자. 이들은 그 가족의 행방을 당신에게 묻는다. 그들이 당신의 다락에 있다고 말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현명하고 자비로운 행위는 당연히 거짓을 말하는 것이 리라. 하지만 당신이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인 규범을 따라야만 한다고 느낀다 면, “오, 그들은 위층에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 면, 당신은 게슈타포 대원에게 그 가족이 친지를 만나러 다른 곳으로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짓을 말하는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할 일은 아니다.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 상태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상황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도덕적인 것은, 깨달음으로 이르게 하는 데 대단히 도움이 된다. 이것은 계율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문제를 어떤 딱딱한 공식을 적용하여 관념적인 형태로 만든다면, 금세 곤경에 처 하게 된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어떤 관념적인 공식에서가 아닌, 실재에 근거하여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계율이 아니라 상황과 자신의 마음의 경향성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5. 수행은 먹고 자는 일처럼 규칙적으로 하라.


‘바른 노력’은 자연스러움이다.

우리는 흔히 불가능한 목표를 실현하는, 우리 능력 밖에 있는 어떤 것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러므로 흔히 노력을 일종의 부담, 억지, 강압 등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팔정도의 여섯 번째인 ‘바른 노력’에는 그러한 부담이나 긴장, 강압이 없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바른 노력’이 ‘바른 견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른 노력’은 단순히 현재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여기 존재하며, 여기 머물고, 바로 이 순간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엇을 통제하려 하거나, 깨닫기 위해 분투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른 노력’은 자연스러움, 즉 행위의 자연스러움, 생각의 자연스러움으로 자연스러운 이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바른 노력’은 무엇보다 이미 우리 안에 생겨난 단편적이고 분열된 마음 상태를 제거하는 일이다. 일상의 마음 상태에서 세상은 많은 부분으로 분열되어, 다른 것들과 분리된 ‘저 밖 의’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그런 마음 상태에 있을 때, 사물은 조작하고 통제해야 할 그 무엇으로 보게 된다. 붓다는 이런 상태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데, 우리가 주어진 상황 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을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렇게 ‘보지’ 못할 때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힘의 대부분을 쓸 것이다.

우리는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시하면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허비할 것이다.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데 들이는 노력은, 의지의 힘을 통해 어떤 특별한 상황에 직접 들이 는 노력과는 다르다. 마음을 모으기 위한 노력은 ‘나는 불완전한 마음 상태를 보고 있다. 그 것을 없애야 한다’와 같은 사고 작용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신의 마음 상 태를 봄으로써, 즉 이것을 향하고 저것에서 멀어지려는 마음의 기울임을 봄으로써, 당신은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계속하여 ‘보게’ 만드는 일이다. ‘본다’는 것은 조각난 마음을 되돌리고 더 이상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는 일이다.

깨닫기를 원한다면 모든 결과를 잊어버려라

‘바른 노력’은 깨어 있고, 집중되어 있고 건전하며, 통합된 마음 상태를 생기게 하고 유지시 킨다. 우리는 모두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격언을 알고 있다. 우리가 절망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말이 물을 마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확 히 말하자면 마음이 정해놓은 어떤 일을 할 힘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좌절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특별한 결과에 집착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깨닫기를 원한다면 모든 결과를 잊어라. 대신 스스로 마음의 경향성을 관찰하라.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물가로 인도된 말과 같다. 깨달은 자가 우리를 물가 로 데려왔다. 그는 길을 안내하였다. 그러나 물을 마셔야 하는 것은 우리다. 그 일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의 무지는, 대부분 우리가 목마르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는 목마르다 는 사실은 자각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장소에서 물을 찾고 있다. 우리는 시원한 것을 찾으면서 불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목마름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흔히 잘못 알고 있다.

깨달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

깨닫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반대편의 과녁을 맞히고자 하는 것과 같다. 누구나 그렇듯 우 리는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의 중심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 만약 당신이 깨달음을 겨냥한다 할지라도 당신의 편향된 마음으로는 그것을 맞힐 수 없다. 당신이 다른 것들을 원하듯이 깨달음을 원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추구할 것이 아 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냥 이 순간 깨달음에 노력 을 기울이면 된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잘해야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 순간에 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 들은 종종 깊은 생각이나 망상에 빠져, 거의 ‘여기’에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바로 이 자리 에 있지 않기에 얼마나 많은 순간을 놓치고 마는가. 그리고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얼 마나 유리되어 있는지조차 일반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붓다는 끊임없이 이런 상황의 심각성을 지적하였다. 사실 깨달은 자에게 이 문제의 중요성 은 절대적이다. “깨달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미 죽은 것과 같다”라 고 붓다는 말했다.

삶은 오직 덧없고 끊임없이 변하는 바로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 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삶을 변하지 않게 미라로 만들고 어떤 고정된 견해에 집어넣는 짓 을 그만둔다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팔정도의 일곱 번 째인, ‘바른 기억’은 팔정도의 다른 일곱 가지를 모두 함께 엮어 우리를 지금 그리고 여기 실재로 되돌리게 한다.

감정의 배경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육체와 물리적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우리는 또한 현재 마음의 감정적 배경에도 주 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만 느낌을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려 노력하지 않고 단순히 지금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타자 간에 아무런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느낌은 일시적인 것으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결국 간단한 관찰을 통하여 선명한 느낌도 가라앉게 되며, 감정과 행동에 전 처럼 집착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느낌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그저 생겨나는 각각의 느낌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만약 자신의 느낌을 관찰하는데 내적 평가(이것이 좋다, 이것이 나쁘다, 나는 이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가 시작되면, 이러한 평가가 행해지는 것을 알아차려라. “나는 평가하기보다는 살펴보아야만 해”라고 더 이상의 평가를 할 필요가 없다. 단지 당신의 감정의 배경이 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그것에 주목하라.

또 마음에 대해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듣기 전에는, 우리 의 마음속에 보통 끊임없는 독백이 진행되고 있음을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정 말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한 단계 더 높아져 대화로까지 진행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많은 시간 동안 자신에게 속삭인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면, 잠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언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지를 의식하면서 호흡을 주시하 며 있어보라. 5분 동안만 이렇게 하고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마음이 수많은 생 각, 느낌, 망상에 휩싸이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관찰되지 못한 우리 마음은 크나큰 혼란과 고통의 근원이 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그 가정하에(생각과 전제의 대부분은 우리가 희미하게만 깨닫고 있을 뿐이다.) 행동 하고 있다. 더 나쁜 것은, 마치 생각하거나 믿는 것 속에 실재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종종 생각을 어떤 것으로 실체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생각이나 마 음 상태도 몸의 감각처럼 일시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두카 자체에 대해 기억해둘 것이 있다. 어떻게, 그리고 왜 그것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소멸시킬 수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삶 속에서 순조롭지 못한 상태에 대해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혼란이 스스로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봐야’ 한다. 그래야만 마침내 팔정도에 따라 이 두카를 종식시킬 수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른 기억’ 또는 ‘바른 생각’을 실천하는 데 있어 요체는 결코 자신을 책망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이다. 단지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필요하다. 무엇이 고통스러운 것이고 깨달음에 유익하지 않은지 ‘보는’ 법을 배우면 당신은 매우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꾸짖는 짓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매 순간 직접 경험과 함께하기

‘바른 기억’이 실제의 경험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면, 팔정도의 여덟 번째인 ‘바른 명상’ 은 매 순간 단지 우리의 직접 경험과 함께하는 것이다.

좌선을 할 때 초점은 최소한의 것, 즉 몸, 마음, 호흡에만 맞춰져 있다. 가능하다면 책보다 는 선지식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다. 또 다른 사람과 함께 명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다. 그리고 훌륭한 지침서인 도겐(道元) 선사의 『보권좌선의(普勸坐禪儀)』의 한 구절을 인 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명상을 위해서는 조용한 방이 적합하다. 알맞게 먹고 마시라. 모든 번잡한 일을 물리치고 하던 일도 멈춘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마음의 모든 움 직임, 모든 생각과 견해에 대한 판단을 멈춘다. 붓다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앉거 나 눕거나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

정해진 장소에 두꺼운 매트를 깔고 그 위에 방석을 놓는다. 매트 위에 무릎이 닿게 하고 책 상다리를 하고 앉는다. 옷과 벨트는 느슨하게 하며 몸을 바르게 한다. 그다음 왼쪽 다리 위 에 오른손을 올리고 오른 손바닥 위에 왼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리며, 두 엄지 끝이 맞닿 게 한다. 몸의 자세를 똑바로 곧추세우는데, 왼쪽이나 오른쪽, 앞이나 뒤로 기울지 않도록 한다. 귀는 어깨와 나란히 하고, 코는 배꼽과 나란히 있어야 한다. 이와 입술은 모두 다물 고, 혀는 입천장에 붙인다. 눈은 언제나 뜨고 있어야 하며, 코로 부드럽게 호흡하도록 한다. 일단 자세를 잡은 다음에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몸을 좌우로 움직여 안정된 부동의 앉은 자세로 들어간다.

이 방법은 바닥에 앉아서 명상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할 수 있다. 발은 바닥에 똑바로 세운다. 필요하면 방석이나 담요로 의자의 높이를 조절함으로써, 넓적다리가 바닥과 평행이 되도록 앉는다. 등은 바르게 세워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 앉은 자세가 안정되게 느껴지면, 이제 호흡에 주의를 기울인다. 등을 바르게 하여 앉아서 횡격막으로부터 깊숙이 그리고 충분히 호흡한다. 몸의 중심으로부터 호흡하라. 그리고 호흡에 집중한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용히 호흡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호흡을 강제하지 않으며 그냥 따르기만 한다. 숨을 들이마실 때는 그것을 의식하라. 숨을 내쉴 때 도 내쉬고 있음을 의식하라.

시작 단계에서는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매번 숨을 세는 것도 호흡에 집중하 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숨을 들이쉴 때 하나를 세고, 내쉴 때 둘을 세라. 열이 될 때까지 세기를 계속하고 다시 반복하라.

다시 호흡을 따라 하라. 그렇게 하는 동안 생각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에 방해받지 마라. 생각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없애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마라. 쫓아내려 애쓰지도 마라.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의식적인 마음의 모든 움직임을 끊는’ 법 이다. 당신은 직접 의지를 사용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많은 생각과 느낌으로 산만해져 호흡을 놓쳐버리면, 그냥 다시 호흡으로 돌아온다. 벗어났 다고 해서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다. 자신을 꾸짖는 일은 또다시 이탈하는 것이다. 하나 부터 다시 시작하라.

명상하고 있을 때, 자아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일어날 것이다. ‘난 이걸 할 수 없어’ 혹은 ‘난 다시 시작할 거야’, ‘난 이걸 잘못해’ 혹은 ‘난 이걸 제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 아’ 등등. 이러한 생각들은 아주 정상적이다. 단지 그들을 관찰하라. 그리고 내버려두라. 당 신이 그렇게 하기만 하면, 이들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어떤 특별한 마음 상태를 가지려 애쓰지 말라. 특별한 마음 상태란 없다. 그런 특별한 마음 상태를 갈구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다.

좌선은 최면이 아니다. 휴식도 아니다. 기분 전환도 아니다. 그저 호흡에 대한 자각, 그것이 전부다. 서서히 집중이 증가하면서, 날숨과 들숨을 셀 수 있다. 일단 당신이 규칙적으로 호 흡에 머물 수 있게 되면, 세는 일을 멈추고 호흡 그 자체만을 따르라. 이 간단한 지침 이상 의 것은 명상 그 자체가 당신에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규칙적으로 명상하라

사람들은 가끔 내게 얼마나 오래 또는 얼마나 자주 명상하며 앉아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각자에게 달렸다. 세상이 시끄러워지기 전인 조용한 아침이 좋은 때다. 또는 저녁도 좋다. 5분 동안 명상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서서히 조금씩 늘릴 수 있다. 20분 또는 30분이 적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당신이 얼마나 오래 명상하는가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규칙적으로 명상하는 것이다. 명상은 먹고 자는 일처럼 규칙적으로 하여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명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들이 당신의 자세에 대해 충고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 과 함께 명상을 하면 오랫동안 명상을 계속하는 데 든든한 격려가 될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라. 생각으로 혼란스러울 때 그것은 더 크게 확대되고 빠르게 시끄러워지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통제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은 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마음에 많은 여유를 주어라. 그러면 그것은 가라앉을 것이다. 생각이 저절로 멈 추게 내버려두라. 만약 그것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절로 그렇게 될 것이다.

생각, 느낌, 감정은 마음속에서 생겼다 사라진다. 그것은 머물지 않는다. 당신이 그들과 함 께 놀거나 자극하거나 발전시킨다면 그것은 계속 붙들고 늘어질 것이다. 또 다른 생각들로 가지를 치기 시작할 것이다. 앉아서 자신의 호흡을 따라갈 때,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바쁜 지 ‘보게’ 될 것이다.

호흡은 명상에 있어 유일한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내부와 외부, 당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명상을 위해 다른 대상을 사용한다면(가시적 대상이나 소리, 또는 생각 등 어 느 것이든) 그 근본적 이원성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노동에 불과할 것이다. 여전히 ‘저 밖에’ 어떤 것이 존재하며, 여전히 당신이 존재할 것이다. 마음 의 경향성이 존재할 것이며, 동경과 혐오, 고통과 혼란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주의를 바로 이 경계선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면, 점차 그 경계가 해체되 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사이에는 처 음부터 어떤 경계도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일과처럼 명상에 다가갈 수는 없다. 명상은 전적으로 그 자체를 위하여 행해지는 것 이다. 명상에서 아무것도 얻으려 기대하지 마라. 깨달음까지도 기대하지 마라. 진실로 깨달 음을 원한다면, 단지 이러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도록 하라. 탐욕스러운 마음이 소 위 당신이 원하는 것에 반하고 있음을 알아차려라.

만약 실재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단지 그것을 생각하거나 숙고하거나 이론화하거나 논의하 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직접 부딪혀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탁상공론식 철학이 아니라 철저한 실천이다. 단지 관념을 얻기 위해 명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비록 눈에 보이 는 어떤 것을 얻는 데 소용없는 것이긴 하지만, ‘바른 명상’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 는 가슴 저린 필요에 부응하는 활동이다. 무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 목적 없이, 그 자체 를 위해 ‘바른 명상’을 하라. 사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무엇을 얻으 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자세가 아니며 ‘바른 명상’이 아니다.

‘바른 명상’은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즉 무엇을 만들어내거나 조작하거나 소유하거나 집착하 지 않는 지점, 노력하지도 게을리 하지도 않는 바로 그곳이다.


6. 진리는 모두가 ‘볼’수 있는 지금 이곳에 있다.

고통으로부터 깨어나기

두카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운명처럼 여겨진다. 인간으로서 습관적으로 경험을 개념화하고, 자아를 생각한다. 이 자아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직접적 경험과 모 순되는, 말 그대로 불가능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아가 우리 내부의 어딘가에, 우리 몸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존재한다고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자아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는 한, 스스로의 경험을 전혀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완전히 불가사의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현실의 경험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깊은 실존적 고뇌에 시달린다. 우리가 실제로 감 지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자아를 마음에 품고서 그것이 없어질까, 상처받을까, 불 행해질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옷을 벗듯이 자아에 대한 생각을 쉽게 털어낼 수는 없다. 그것은 저항하기 어려운 하 나의 착각이다. 그것에 대해 무엇이 착각인지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의 경험에 주 목하는 것이며, 자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개념이 현실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일단 ‘나’라는 것을 찾을 수 없음을 ‘보게’ 되면 마음은 자유롭고 두려움은 사라진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이야기나 장치에 기대지 않고도 이 고통에서 깨어날 수 있다. 우리가 결 국 착각으로 고통받고 염려하여 왔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허깨비로는 실재를 볼 수 없어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영속적인 자아나 영혼이 하나의 착각이며 상상의 산물 임을 ‘보았다’. 아마도 세상의 수많은 면면도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음을 이해하 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끝없는 흐름으로 바람, 파도, 강물, 컵, 책을 ‘보기’보다는 오히 려 이들을 확고하고, 계속되며, 개별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상상한다.

우리는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사물에 무언가 있다고 본다. 경험의 흐름, 완전한 움직임을 ‘보는’ 대신 수많은 분리된 사물들의 광대한 확산을 상상한다. 우리가 ‘저 밖’에서 발견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자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또 다른 실수를 하게 된다. 자아를 상상해내고 이 개념을 무아라는 개념 과 대립시켰듯이, 이번에는 존재와 비존재라는 대립되는 개념의 또 다른 묶음을 받아들인 다. 우리는 자아와 무아의 경우처럼 이 개념 모두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허깨비라는 것을 ‘보지’ 않음으로써 이원성에 거듭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로는(다른 모든 개념과 마찬가지로) 결코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

붓다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유려하게 표현했다.

이 세계는 대개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견해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바른 지혜로 세계 가 생겨남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사람들에게, 세계의 비존재 개념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를 바로 ‘볼’ 때, 즉 우리가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따로 떨어진 어떤 지속적이며 불변하는 자아의 개념이 생겨나기 전, 단지 직관에만 의지할 때 비존재의 개념 은 생기지 않는다. 비존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애초에 존재의 개념을 붙잡고 있는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우리가 혼란, 두려움, 떨림을 경험하는 것은 ‘나’와 ‘나와 분리된 세계’라는 인식을 단지 철저히 믿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바른 지혜’로 세상의 사라짐을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리고 모 든 것의 덧없는 모습을 우리의 개념으로 가리지 않고 ‘본’다면, 영원한 자아라는 개념은 생 기지 않을 것이다. 비록 생각과 느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영원한 자아라는 개념은 존재하 지 않을 것이다. 오직 마음의 평화만이 남고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나’ 또는 ‘세계’의 생멸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러한 착각은 모두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직관만으로는, 즉 개념 작용이 부재할 때는 자아의 개념도, 자아 밖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관념도 생겨나지 않는다. 존재의 개념을 가정하는 경우에만, 상주론이나 허무주의의 두 가지 불행한 극단 중 어느 하나로 몰려가거나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신세로 내몰린다.

붓다는 이들 견해 중 어떤 것도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모두 깨달을 능력이 있다

붓다가 “바른 지혜를 지니고 직관하는 자들에게...”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 말한 직관은 우 리 모두에게 지금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붓다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같 은 것을 직관한다. 우리는 바로 지금 진리와 실재를 직관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깨달음 의 희망이란 전혀 없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 순간에 깨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반면 붓다는 깨어 있는 자다. 그것이 전 부다. 감각의 활동, 즉 세계에 대한 감각적 경험은 붓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붓다와 보통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지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 작용에 있다. 붓다(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경험을 설명하는 데 쓰이는 개념, 관념, 믿음, 선입견들을 덧씌우는 잘못된 습관이 없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깨달을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붓다)은 이런 것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붓다는 개념화할 때(그들도 그렇 게 한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개념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이며, 개념을 실재로 착각하는 데 있 다.

깨달은 사람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각과 개념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들은 실제 ‘보 는’ 것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붓다는 이러한 알아차림을 ‘바른 지혜’라 불렀다.

실재는 ‘보는’ 것에만 있다

우리는 생각과 믿음을 포장하고 다시 재포장하면서, 끊임없이 조직하고 재조직해나간다. 그 러나 이제 그런 식으로는 결코 실재에 이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실재는 ‘보는’ 것, 즉 직관하는 것에만 있다. 어떠한 수단도 필요하지 않다. 진리와 실재는 단순히 생각을 틀로 짜맞추려는 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다. 사실, 진리를 우리의 생각과 믿음 속에서 찾으 려 할수록, 우리의 의혹은 커져갈 뿐이다.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정당성을 위해 모두 필 연적으로 다른 것에 기대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의심스럽고 혼란스럽다. 의심은 바로 믿음 의 뒷면이다. 우리가 믿음을 지향하는 순간, 그와 함께 의심이 생겨난다. 그 둘은 자아와 타 자,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직관에 의 존하는 대신 실재에 대한 어떤 고정된 시각을 지니게 되는 순간, 불가피하게 고뇌와 두려움 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두카는 우리에게 몰래 떠맡겨진 어떤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 우리의 고 통과 혼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개념, 이론적인 테두리, 집착, 마음의 경향성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의심도 또한 끝 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앎이 더 이상 직접적·즉각적 경험 밖의 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를 ‘보는’ 것은 개념, 언어, 기억을 요구하지 않는다. 붓다는 말했다.


“여기에서 앎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속에 자유가 있다.

진리와 실재에 대한 어떤 비밀스러운 가르침도 없다. 진리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이곳에 있 다. 우리도 역시 지금 바로 ‘볼’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세계는 아무 의도도, 마음의 치우침도 없어

세계는 수많은 형상들로 채워진 듯이 보이지만, 전체로서의 세계는 우리와 달리 아무런 의 도도, 마음의 치우침도 지니지 않는다. ‘전체’는 우리의 의지가 담긴 행위가 할 수 없는 방 식으로 스스로 분명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의도 없는 행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풀밭에 쌓이는 나뭇잎처럼 자연스러운 패턴을 만들 것이 다. 반면 의도가 담긴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의도가 있는 행위(갈망과 혐오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적 마음에서 나온 행위)는 환상, 즉 개 념에 기초하고 있다. 개념들은 ‘이것’과 ‘저것’이 각각 현실적이며 견고하고 본질적으로 분 리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생겨난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의지가 작동하기 위한 활동 무대로 세워진 가정일 뿐이다.

반면 ‘전체(로서의 세계)’는 의도하는 바가 없다. 어떤 것을 향해 치우치지도, 반대쪽으로 치우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정확히 붓다가 전체의 관점에 서 행동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만성적인 문제는 바로 이 의도와 관련이 깊다. 우리는 전체를 무시하면서 부분적인 것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의식의 대상들(우리의 개념)에 사로잡히고, 갈망과 혐오, 탐욕과 분노로 마음이 어딘가를 향하거나 반대로 회피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것이 두카 다.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며, 그리고 언제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의 자세한 내 용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체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전체 자체를 알고 있다. 실재에 애매모호한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언제나 현존하며, 분명하고 확실하 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마음속에서 지어내고자 노력하는 대신, 있 는 그대로를 ‘보려고’ 노력하거나 전체와 재결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마 음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매 순간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무언가를 향하거나 무언가를 회피함으로써) 갈망과 혐오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그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지는 마라. 앞 서 살펴본 것처럼 치우친 마음을 치우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치우침일 뿐이다(“나는 정말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를 원해”라는 식이다). 그저 언 제 당신의 마음이 치우치는지를 자각하고, 마음의 치우침이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 라. 이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노력한다면 마음의 치우침이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본다는 것이 무위(無爲)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오해한다. 행동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우리가 깨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매 순간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한 것이 아 니라 ‘본 것’에 행동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 황벽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리석은 자는 그들이 보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따르며, 현명한 자는 그들 이 생각하는 것은 거부하고 그들이 보는 것을 따른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제로 ‘볼’ 수 있을 때, 사물의 자연적 질서(어떻게 이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실재를 무시하며 행동하는 것을 멈추게 될 것이다.

자신을 잊어버려라. 마음이 어떻게 치우쳐 있는지를 보라.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이미 제 자리에 있다. 단지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느끼던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만 하 면 된다.

마음의 자유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거나 선을 행하고자 하는 바람에 따라 행동함으 로써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두카로 가는 또 다른 길일 뿐이다. 대신 우리의 행동 은 오직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해야 한다.

전체의 마음을 보라

우리의 삶은 고장난 바퀴와 같다.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저 밖에’ 내가 얻어야 할 무언가 가 있다. 그리고 ‘저 밖에’ 내가 멀리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 우리 외부에 있는 무엇에 대한 이러한 욕구, 치우침, 갈망, 이것이 바로 굴레다. 그것은 자신을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된 실 재적인 것으로 보는 잘못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삶에서 할 수 있는 유 일한 선택은, 깨달을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세상사가 어디서 무의미해지는지, 언제 일이 뒤엉켜버리는지, 어디서 삶이 처절하게 좌절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얼마나 큰 아픔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며,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무지와 혼란을 ‘보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것은 ‘저 밖에’ 없다. 꼭 획득해야 하거나 물리쳐야 하는 것은 ‘저 밖에’ 없다. 사실 ‘저 밖에’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어떤 것도 밖에 있다가 마음 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마음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일단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지 속에서 커다란 매력을 지녔던 것을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타오르는 불 속에 손 을 넣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자신을 두카에 빠지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가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지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을 때, 그것이 바로 ‘전체의 마음’이다.

직접적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라. 수행으로 자신의 마음을 닦아라. 자신의 마음 작용과 치우 침에 주의하라. 그러면 많은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될 것이다.

지혜의 눈을 떠라. 그리고 전체의 마음을 ‘보아라’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