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체험담을 적어 볼테니, 사유 한 번 해보셔요.
자.. 결가부좌를 하고, 마음을 자유롭게 놔두면서, 마음속에서 오고 가는 것들을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어느 정도 고요해지면, 마음은 늘 가던대로, 호흡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호흡자체를 지켜보는데, 결가부좌에서 통증을 느낍니다.
"이런..! 호흡보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놈의 망할 통증..!" 하고 짜증이 나고 악의, 적개심, 분노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결국 좌선을 풀고 일어나버리게 됩니다.
또 호흡보기를 하는데, 과거의 오래전의 안좋았던 일들이 마음에 침투합니다. 괴롭습니다.
지켜보는 관찰자가 행위자에 끌려가서 , 또다른 행위자가 되서 행위자가 하라는 대로 술먹고 놀고 고함지르고 합니다.
"이런 망할놈의 생각들, 기억들..!"
그래서 결국 다리를 풀고 일어납니다. 마음이 찜찜합니다. 상쾌하지 못합니다.
좌선을 새벽시간에 했는데, 오히려 마음이 어둡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수행이나 자신에 대한 악의나 분노심에 사로잡힙니다.
이는 문제의 발생에 대한 붓다의 방법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는 이런식으로 치료가 될수 없지요.
붓다는 이런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자.. 마음은 호흡을 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통증이 왔습니다.
마음은 호흡에 집중해야 하는데, 통증때문에 짜증이 나려고, 통증에 대한 악의로 통증과 싸울 준비로 긴장하려 합니다.
"아니다. 마음아. 항상 움직이던 사람인데, 멈출라고 하니, 통증이 오는게 당연한것인데, 마음아. 너가 왜 화를 내고 통증과 싸울라고 하느냐?"
통증이 오는게 자연의 당연한 이치 아니냐?
오히려 찾아온 통증에 대해서, 자애심을 가지고, 연민을 가지고..
"통증아 잘왔다, 편하게 놀다 가렴, 난 통증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 가득하다. 넌 내게 소중한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야..."
마음이 이런 식을 가질때, 통증은 이상하게도 힘을 쓰질 못합니다.
기껏 힘을 써도, 금방 주저 앉지요.
그럼 다시 호흡을 봅니다.
상쾌해지고, 고요해지고, 행복해졌지요?
다른 생각에서, 기억에서 오는 감정들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괴로운 생각에 자애와 연민을 가지고 마음대로 와서 놀다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마음대로 편하게 놀 수 있도록, 내버려 둡니다. 즉 '렛잇비'이지요.
생각에 대한 집착, 통증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포기하고 내버려 두면서,
오히려 자애와 연민으로 사랑과 동정을 명상의 적들에게 보냅니다.
그러면 희안하게도 적이라고 여겼던 자들이 스스로 맥없이 고꾸라 집니다.
다시 호흡을 봅니다. 고요해집니다. 행복해집니다.
그러다가 희안한 것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러나 희안한 것에 결코 집착하지 않습니다.
단지 고요히 앉아 있으면서 지켜보는 것에 만족해 합니다.
이것이 감각을 떠난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을 느끼는 것임을 알게됩니다.
희안한 것들속에서 마음은 강력하고 엄청난 힘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 붓다에 대해서 존경심과 예경심이 샘물처럼 솟아 나오게 합니다.
자신이 붓다의 제자중의 일원이 된 자신의 선업에,
그런 수행을 해볼수 있는 기회를 가진것에 스스로 감동합니다. 자뻑합니다. ^^
미운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있는데
악의를 일으키는 상대한테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봐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 마음을 낼 수 없다면 차선으로 내버려둬라.
각자 자기 성품대로. 갈길로 나갈것이니 흘러가도록 내버려둬라.
집착함을 버려나가는 수행, 즉 사성제의 집성제. 연기.. 갈애를 지워나가는 과정에 들어서게 됩니다.
자꾸 그런 연습을 하다보면, 위대한 스승들은 집착함이 자연스럽게 버려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하지요.
자애와 연민으로 대할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게 붓다의 방법입니다.
- 소요유 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