戒定慧에 대해서 - 황인찬 신부님.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어릴 때 아팠던 치아 두 개가 결국 말썽이 되어 치료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치아가 썩어서 아파도 참아야 했던 농촌에서 자라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충치는 결국 군 생활 동안 더 썩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씌웠었는데 몇 년 전에 벗겨져 버린 것을 방치했더니 어쩔 수 없이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
몹시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안 가는 것을 보면 나도 역시 촌사람이다.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해도 병원에 가서 온갖 검사를 다 받고 어떤 판정을 받는 것이 너무 싫다. 사실 내 나이가 되면 지금 죽어도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도 뉴스를 통해서 내 나이의 어떤 분이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하면 별로 슬퍼지지 않는다. 고향 초등학교 동창이 108명이 졸업했는데 벌써 11명이 먼저 세상을 버렸다. 이런 소식을 듣고부터 나는 이제부터 사는 인생은 덤이라고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내 인생에 앞으로 더 살아봐야 더 좋은 일도 신나는 일도 없을 것은 뻔할 뻔 자다. 그래서 치과에 다니는 것도 즐겁다.
어려서 병치레를 많이 했던 내가 지금까지 한옥 목수로 육체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밤이면 공부를 하며 살아가는 것만 해도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성공한 내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딱 한 가지를 하라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라”이다.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 중의 하나가 이웃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중에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잘못된 교설 때문에 지금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렇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지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다. 전제되어 있는 “네 몸과 같이”를 간과하면서 생기는 문제가 바로 건강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최대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자칫 식상한 이야기로 잔소리 같지만 사실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에 꺼내는 것이다. 이번 추석 연휴에 이 산골에서 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해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혼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분들이 함께 모여서 외로움을 나누며 지내면 좋겠다는 취지였다. 명절에 교통도 불편한 이곳에 올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열 분이 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함께 송편을 만들어 가마솥에 솔잎을 넣고 쪄서 나누어 먹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서로 즐겁게 지냈다. 문제는 일정이 다 마치고 밤이 되니 술판이 벌어지는 것에서 나는 아연실색했다. 고요한 산골의 밤을 즐기는 방식이 나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면 잠을 자기 시작해야 하는데, 손님들은 그 시간부터 술을 먹으며 새벽까지 잠을 안 자는 것이었다. 나도 첫날이니 그러려니 이해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며칠 동안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이런 프로그램을 앞으로 더 진행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성인들이라서 생활습관을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잘 알기에 다른 말은 더 하지도 않았다. 규칙을 정해서 해도 안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사실 한옥학교를 운영하면서 수없이 느꼈던 것이 바로 이런 문제였다. 기술을 배우려면 먼저 몸을 바르게 해야 하는데 술과 담배를 끊지 않고 조상들의 지혜가 가득 담긴 최고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맑은 공기와 황토 한옥에서 몸과 마음을 닦아서 새로운 삶의 충전소가 되기를 바랐던 내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져서 한옥학교 운영도 포기했다.
잠을 제때에 안 자고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사는 생활습관이 지금 바로 이 사회의 거대한 암 덩어리다. 사람들은 온갖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면서 이런 습관이 더 문제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도시 생활에서 오는 온갖 스트레스를 왜 이런 산골에 와서 잠을 안 자고 술로 풀려고 하는 것인지 내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난 그래서 세상의 부적응아인가 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 사제연수회를 가보면 으레 술판이 벌어지는 것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제들끼리 월요일에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밤새도록 화투판이 벌어지는 그런 모임에 나는 가기 싫었고, 결국 왕따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느날 서품동기들과 월악산으로 내 차를 몰고 하루 휴가를 가는 길이었다. 네 명 중에 나만 담배를 피지 않고 세 명이 담배를 피웠다. 그것도 차 안에서 말이다. 나는 담배를 피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세 명이 “형만 담배 피우면 돼”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귀 두 개 있는 사람이 한 개 있는 마을에 가면 귀를 한 개 잘라야 한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이 사회에 만연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자리에 함께하지 않는 사람이 늘 이상한 사람이다.
머리가 나쁜 사람은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법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자기 몸을 사랑한다.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고 한결같이 말한다. 그러나 나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자기 몸을 잘 닦으며 살아가면 병이 들러붙지 않는다. 무절제한 생활 특히 잠을 경시하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술 담배를 탐닉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더욱 악화시키는 어리석은 행위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어떻게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가? 그런데 자신의 몸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정신도 강해지고 어떤 스트레스가 와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아직 인생을 다 살진 않았지만, 이것은 영원한 진리라고 여겨진다.
신학교에서 3S를 가르치는 멋진 전통이 있다. 그 순서를 신학교에서는 영성(Sanctitas), 지혜(Scientia), 건강(Sanitas)으로 보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 ‘건강’이 먼저고 ‘지혜’가 다음이고 마지막이 ‘영성’이다. 어쩌면 셋은 그 순서를 뒤섞어도 될 만큼 불가분의 관계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영성이 훌륭하려면 학문을 배워서 지혜를 쌓아야 한다. 매일 성전에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영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망상하는 것이고 마지막엔 정신병에 이르는 길이다. 영성은 분별력이다. 신과 소통하기 이해서는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 신학만 배워서는 뜬구름 잡게 된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신을 알려고 하는지 신기할 뿐이다. 그래서 성경만 읽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학문하려면 맑을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머리가 흐리멍덩한 채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온종일 앉아 있어 봐야 헛일이다. 머리를 맑게 유지하려고 나는 신학교에서 오후만 되면 테니스를 무조건 쳤다. 땀을 흘리고 샤워한 다음 책을 집어 들면 신기하게도 집중이 잘 되는 걸 체험했다. 요즘도 아무리 세미나 준비할 것이 많아도 나는 밖에서 몇 시간씩 노동한다. 몸을 움직이며 일한 다음 저녁에 피곤해서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는 시간이 반복되는 것은 내 삶의 패턴이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결심한 것은 어제 도올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佛敎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三學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서다. 삼학은 戒,定,慧 세 가지를 말한다. 나는 사실 戒에 대해서 잘 못 이해하고 있었다. 정과 혜는 신학교에서 배웠던 靈性, 智慧와 같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었는데 계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오류에 대해서 통렬하게 반성하게 되었다. 戒가 삼학에서 빠지면 나머지 定,慧도 없는 것이다. “In Deo in Regula”는 “규칙 안에서 사는 것이 곧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는 신학교 규칙이다. 모든 수도원들에서도 이 규칙은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참 좋은 것인데 그것의 참 뜻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고 규칙에 어긋나면 무조건 고행성사를 하거나 심지어 쫒겨나야 한다는 것이 규칙으로 알아들었다. 지금은 워낙 聖召者가 없으니 잘 안 그러겠지만 신학교 교수신부들은 스승보다 신학생을 자르려고 존재하는 분들 같았다. 그래서 규칙 혹은 계라고 하면 무조건 배척하며 살려고 했다. 교회법도 헌법도 다 싫어서 산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신학교에서 健康, 즉 戒에 대해서 올바르게 가르쳤는데 나만 못 알아듣고 있다가 이제야 알았으니 참 어리석다.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 계는 정과 혜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몸의 단련을 한다는 것은 집중력(정)과 지혜(지식)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즉 계 속에는 정과 혜가 들어있다. 정은 계와 혜를 위한 것이다. 선정을 잘함으로써 계율을 더 잘 지킬 수 있게 되고, 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계율도 그 계율을 왜 지켜야 하는지를 모르고 지키면 그것은 괴로운 타율적인 인생이 된다. 戒定慧 三學은 모든 인간이 행복하고 자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배움의 과정이다. 인격 완성을 위한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세 가지 배움이 진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술 좀 마시지 말자”, “담배 좀 피지 말자”, 그리고 “일찍 자자” 이것이 내가 알아낸 戒다! 얼마나 위대한 깨달음인가?
ㅎㅎ 나도 이 글을 쓰면서 꼰대의 반열에 접어들었음을 자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