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은 사람(부처)이 되는 여덟(八) 부분(支)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聖) 바른(正) 길(道)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법(法; 실상과 진리)’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붓다께서는 경험적⋅합리적 이해와 수행의 직접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포함한 우주자연의 ‘법(法; 실상과 진리)’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으시고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를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신 ‘부처(깨달은 자)’가 되셨습니다. '법(法; 실상과 진리)'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으면 부처가 됩니다.
붓다께서는 부처가 되신 후 사람들에게 '부처가 되는(정각으로 가는) 바른(正) 길(道)'을 가르치셨습니다. 붓다께서 가르치신 팔정도(八正道, 八支聖道)는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八) 부분(支)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입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은 정각으로 가는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바른 수행법, 바른 실천법’입니다.
‘붓다(佛)의 가르침(法, 敎), 불법(佛法), 불교(佛敎)‘는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실천하여 직접 경험(체험)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당신을 또는 당신의 가르침을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이해하고 실천하여 직접 경험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께서 경험적⋅합리적 이해와 수행의 직접 경험으로 ‘법(法; 실상과 진리)’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으신 것처럼, 우리도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바른 실천법’인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실천하여 수행 실천의 직접 경험으로 ‘법(法; 실상과 진리)’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모든 가르침은 무조건적인 믿음의 강요가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바른 실천을 유도하는 한에서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예컨대 수학선생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스스로 문제를 바르게 풀도록 유도해야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사람들의 ‘근기(경험,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가지 능력-이해력, 이치를 이해하는 능력, 인내력, 집중력 등등)‘에 따라 ’법(法; 실상과 진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시키시고 나서 실천(수행)을 가르치셨습니다. 이해하면, 피상적인 이해라 해도 실천할 마음을 갖게 되고 실천하면 이해가 더 깊어지고 다시 더 깊은 실천을 하게 되어 결국 피상적인 이해는 실천경험(수행경험)을 통해서 자신과 세상의 ’법(法; 실상과 진리)‘을 꿰뚫어 보는 통찰지혜(bhāvanā-mayā-paññā; 수행의 통찰 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가 됩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 생기는 통찰지혜는 무명(無明)을 완전히 부수고 자신과 세상의 '법(法; 실상과 진리)'을 완전히 바르게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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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깊은) 이해 ◁〓 (피상적인) 이해 .. [반복] .. 팔정도 계발 수행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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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지혜(수행의 통찰 겸혐에 의해 생기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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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시작은, 붓다께서 가르치신 '법(法; 실상과 진리)'을 선입견과 편견 없이 바르게 배우고 (시작은 피상적이라 할지라도)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인 '정견(正見; 바른 이해/견해)을 계발하는 수행'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 나와 세상 그리고 삶의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바르게 추구하여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은 수행의 일부이므로 단순한 지식축적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커다란 마흔의 경(Mahā-cattārīsaka-sutta),
바른 이해(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바른 이해(견해)에서 바른 생각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생각에서 바른 언어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말에서 바른 행위(業)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바른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saṅkhāra; 業)가 모여서 현재의 습관과 현재의 생활을 만들고 현재의 내 모습과 현재의 내 삶, 그리고 현재의 나의 수행 실천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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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을 처음에 지식으로 공부하여 피상적이나마 바른 이해(견해)를 갖게 되면 바른 생각이 열리고, 바른 생각이 깊어지면(발전향상하면) 바른 이해가 깊어지고(발전향상하고), 바른 생각이 생기면 바른 언어가 열리고, 바른 언어의 사용은 바른 생각과 바른 이해를 더 깊게(발전향상하게) 하고, 바른 이해와 바른 생각이 깊어지면(발전향상하면) 바른 언어가 깊어지고(발전향상하고) 바른 행위와 바른 생활(삶)이 생겨나는 등등으로, 팔정도 각각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수행은 ‘상호의존’한 선(善)순환의 ‘순환 병행식 반복'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정각을 향해가는 8차선 도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은 국부적으로는 순차적인 수행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반드시 병행해 가야만 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의 수행입니다. ‘바른 이해(견해, 봄), 정견(正見)’을 계발하는 수행을 완전히 완성한 다음에 ‘바른 생각(사유), 정사유(正思惟)’를 계발하는 수행을 완성하고 그 다음에 ‘바른 언어, 정어(正語)’를 계발하는 수행을 완성하는 식으로 1차선 도로를 따라 진행되는 수행이 아닙니다.
바른 봄(이해/견해, 관찰/통찰; 正見), 바른 생각(사유; 正思惟); 바른 언어(말과 글; 正語), 바른 행위(身口意 행위; 正業), 바른 삶(생활/생계; 正命); 바른 노력(정진; 正精進), 바른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 正念), 바른 삼매(몰아 고요집중; 正定)를 계발하는 수행 각각이 서로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하여 서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시켜서 ‘지혜’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궁극에는 팔정도 전체와 지혜가 완성되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해탈,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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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으로 본 붓다(석가모니 부처님; BC 624~544)의 하루 일과
일생이 뭇 생명(중생)을 향한 무한한 자비(慈悲, 멧타-까루나;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연민)의 발현이셨던 부처님.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어떠했을까?
경전에는 부처님의 하루 일과가 이렇게 묘사돼 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한 시간 정도 멸진정에 드신 후…. 하루 두 번씩 세상을 살피시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시거나 찾아온 사람들과 제자들을 만나 종일 법을 전하시고…. 잠은 사띠하시며 아라한의 경지에서 한 시간 정도 주무시고….”
위없는 바른 스승이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들어있는, ‘상응(相應)하는 주제에 따라 함께 엮은 가르침(설법 또는 경전)들의 모음’이란 뜻을 지닌 (2천 8백 89개의 경전을 상응하는 주제에 따라 함께 모아 엮은) <쌍윳따(상응) 니까야>를 토대로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쌍윳따 니까야>에 해당하는 한문 번역경전 모음은 <잡아함>이다)
새벽 4시 ~ 5시 :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1시간 정도 멸진(상수멸) 상태에 드시어 열반(saupadisesa nibbana; 유여 열반) 상태에 머무심.
새벽 5시 ~ 6시 : 대자비삼매(大慈非三昧:maha karuṇa samapatti)에 드시어 뭇 생명(중생; 생명의 무리)들의 괴로움을 살피심.
오전 6시 ~ 12시 : 탁발하러 가심. 고요집중의 사띠(하늘 눈)로 세상을 살피셔서 중생들을 찾아가 도와주시고 대중들에게 설법(법法을 설명)하심.
오전 6시 경이 되면 부처님께서는 발우를 들고 제자들과 함께 마을로 나가신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신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 각각의 근기(경험,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가지 능력-이해력, 인내력, 집중력.. 등등)에 맞춰서 그들을 제도하시거나 필요한 도움을 주신다.
탁발을 마치시면 머무는 곳으로 돌아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발우 공양을 하셨다. 공양 초대를 받은 날은 초대한 집으로 가셔서 공양을 마치시고 대중들에게 법을 설(설명)하셨다. 탁발하시여 공양을 하시든 초대한 집에서 공양을 하시든 공양은 정오 전에 끝마치시고 오후에는 물을 제외하고는 음식을 드시지 않았다.(이른바 오후불식)
12시 ~ 오후 6시 : 일반 사람들을 제도하시거나, 사문(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재가, 출가 수행자)들에게 법을 설(설명)하시고 수행을 지도하심.
공양 후의 시간은 제자들의 수행(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지도하시고 간간이 승가의 일을 처리하시는 시간이다. 공양 후에는 늘 간단하게라도 법을 설(설명)하셨으며 출가를 원하는 이가 있으면 그들의 현재의 근기와 인연을 살피셔서 이를 허락하셨다. 낮 12시 이후, 부처님께서 법석에 자리를 잡으시면 제자들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인다. 이때 수행에 관한 질문도 하고 적합한 수행 주제를 받기도 한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물러가면 부처님은 처소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신다. 필요할 경우 잠시 수면을 취하기도 하셨다. 그런 뒤 다시 대자비삼매에 드시어 세상을 통찰(깊이 관찰)하시며 중생의 괴로움을 살피신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 가셔서 도와주시고 일반 사람들을 제도하시거나 재가 제자들을 살피시고 그들이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도록 지도해 주시기도 하신다.
늦은 오후가 되면 일반 사람들과 재가 제자들이 설법을 듣기 위해 찾아온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근기(경험,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성품, 여러가지 능력-이치를 이해하는 능력, 인내력, 집중력 등)에 맞춰서 한 두 시간 정도 설법(법을 설명함)을 하신다.
저녁 6시 ~ 밤 10시 : 출가 수행자(비구, 비구니)들과 수행(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팔정도 바와나)에 관한 질의응답(문답)의 대화를 나누시고 수행을 지도하심.
일반 사람들과 재가 제자들이 물러간 후 오후 6~10시까지 출가 제자(출가 수행자)들을 지도하신다. 이때 수행자들은 스승에게 법과 수행(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에 관해 질문하고 가르침(수행 지도)을 받는다. 이러한 문답은 매우 자유롭게 이뤄진다. 수행 중에 생긴 의문을 풀고 수행의 방향을 바로잡아 수행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밤 10시 ~ 새벽 2시 : 범천 등과 같은 욕계를 벗어난 색계 유정(생명)들을 제도하심
밤10시 이후는 범천 등과 같은 욕계(욕망의 세계; 인간, 짐승 등이 사는 세계)를 벗어난 색계(물질세계;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는 있지만 물질적 욕망이 거의 없는 세계)의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들이 부처님을 찾아오는 시간이다.
새벽 2시 ~ 3시 : 경행(經行)
새벽 3시 ~ 4시 : 사띠하시며 취침
이들이 물러가는 새벽 2시경에 부처님께서는 한 시간 정도 천천히 걸으시며 경행을 하신다. 그리고 새벽 3시가 되면 오른 편으로 누워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하시며 아라한의 경지(상태)에서 잠자리에 드신다. 그리고 1시간 후 새벽 4시가 되면 또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신다.
정각을 증득하신 후 입멸하실 때까지 부처님께서는 매일같이 맨발로 걷고 걸식(탁발)하시면서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시며 그들의 근기(경험, 소질, 적성, 성향, 성격, 능력 등)와 처지(처한 환경과 상태)에 맞춰서 아무 차별(분별) 없이 정각에 이르는 바른 실천(팔정도 바와나;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가르치셨다. 일생이 뭇 생명(중생)을 향한 무한한 자비(멧따-까루나;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연민)의 발현이셨던 부처님, 그러한 위 없는 바른 스승이셨던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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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을 이룬 후에 팔정도(완성된 팔정도)는 계발해야하는 수행이 아니라 그냥 생활(또는 삶) 그 자체가 된다. 부처님께서는 입멸하시는 순간까지 생활화된 팔정도를 항상 실천하셨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많은 아라한들(이른바 천이백 아라한) 중에 '생사에도 선악에도 그 무엇에도 걸림없는 대자유'를 얻었다고 여느 선사나 도사들처럼 막행막식한 사람(팔정도에서 벗어난 생활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부처님께서 입멸(pari-nibbana; 반열반, 무여열반)하시는 순간까지 항상 실천하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가르침의 시작과 끝은 팔정도이다(초전법륜경 ~ 대반열반경). 꼰단냐를 비롯한 최초의 다섯 제자들에게 정각에 이르는 바른 길(팔정도)을 가르치신 초전법륜의 사성제('고집멸도' 성제) 가르침을 시작으로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에게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실천을 간곡히 당부하시는 마지막 가르침까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가르침의 시작과 끝은 '깨달은 사람(붓다)이 되는, 정각으로 가는 바른 길, 팔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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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八正道, 八支聖道, Ariya Atthangika Magga)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八) 부분(支)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 팔정도(八正道, 八支聖道, Noble Eightfold Right Path)'의 여덟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정견(正見), Rightly View(바르게 봄)
정견(正見)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정(正)으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삼마(Sammā)는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바르게, 여실히(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我, ego)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완전히 바르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rightly(바르게), thoroughly(철저하게, 완벽하게), properly; in the right way, as it ought to be, best, perfectly(완전하게)' 등으로 번역한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견(見)으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딧티(Diṭṭhi)는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봄, 관찰, 통찰(깊은 관찰), 조사; 앎, 이해, 견해 또는 믿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view(보다, 봄), observe, insight, investigate, speculative opinion, speculation(추론, 견해), dogma, theory, belief' 등으로 번역한다.
요컨대,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삼마(Sammā; 正) 딧티(Diṭṭhi; 見), 정견(正見)'은 '바르게, 여실히(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我, ego)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상(에고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완전히 바르게' '봄, 관찰함, 통찰함, 조사함, 앎, 이해함, 견해를 가짐'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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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팔정도), 즉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계발하는 수행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의 수행이기 때문에 여덟 부분 각각의 순서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어쨌든,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처음 시작은 '지식차원의 정견(正見)을 계발하는 수행'이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첫 단계인 '지식차원의 정견(正見)을 계발하는 수행'은,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 그리고 '우리가 괴로움의 굴레에 어떻게 빠져드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근원적으로 완전히 벗어나서(해탈해서)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진실한 이치)를 설(설명)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을 정견(正見; 바르게 보고 읽음 또는 들음)하여 생기는 지식차원의 지혜(문혜聞慧, 들은 지혜; 수타 빤냐)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수행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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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차원의 정견(正見; 바른 앎/이해/견해)이라해도 바른 앎(이해, 견해)은 매우 중요하다. 바른 앎(이해, 견해)이 서 있어야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바른 앎(이해, 견해)은 부처님께서 강조하셨듯이, 처음에는 머리로 공부하여 사성제를 피상적이나마 지식차원에서 스스로 바르게 아는(이해하는,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바른 앎(이해, 견해; 正見)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자들이여, 괴로움(고苦, 둑카; 생명의 근원적 괴로움)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생성(집集, 근원; 근본원인)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소멸(멸滅; 정각, 해탈, 열반)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소멸(정각,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도道; 팔정도)에 대하여 바르게 알면(이해하면), 수행자들이여, 이것을 바른 앎(이해, 견해; 正見)이라고 한다”
- <분별경; 위방가경(Vibhanga Sutta), 상윳따니까야, S44.1.1.8>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설법)은 사성제로 포섭되고, 사성제는 팔정도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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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정견(正見)'과 '깊은 정견(正見)'
습관에는 얕은 습관이 있고 깊은 습관이 있다
착각에는 얕은 착각이 있고 깊은 착각이 있다
무지에는 얕은 무지가 있고 깊은 무지가 있다
지혜에는 얕은 지혜(지식차원의 지혜; 문혜聞慧-들은 지혜, 사혜思慧-사유 지혜)가 있고 깊은 지혜(경험차원의 지혜; 수혜修慧-수행 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가 있다
관찰에는 얕은(피상적인) 관찰이 있고 '깊은 관찰'(통찰)이 있다
앎(이해)에는 얕은 앎(지식차원의 앎/이해)이 있고 깊은 앎(경험차원의 앎/이해)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팔정도, 즉 '정견(正見; 바른 봄/관찰/통찰, 앎/이해/견해), 정사유 ·· 정념(바른 사띠), 정정(바른 삼매)'에는 얕은 '정견··정정'이 있고 깊은 '정견··정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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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정견(正見; 바른 봄/관찰/통찰, 앎/이해/견해)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수행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바른 설법; 正法)을 지식차원에서 이해한 피상적인 얕은 앎(이해, 견해), 지식차원의 얕은 정견에서 시작하여
나머지 팔정도의 각 부분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한 수행, 즉 실라(정어·정업·정명 계발 수행)-사마타(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의 바른 실천을 통해서
궁극에는 무명(인식의 착각, 전도된 생각)을 완전히 극복하고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꿰뚫어 바르게 보는 것(통찰 경험차원의 깊은 정견)으로 발전 향상하는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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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무상정등각(줄임말로 정각; 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시고 난 후,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암중모색하여 완성한 수행의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 = 과학적)으로 정리하여 자신과 같은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는, 무상정등각(정각)에 도달하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 줄임말로 '팔정도'라고 이름 붙이시고, 그 바른 길(팔정도)을 계발하는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몸과 마음의 '행(行)을 닦음(修)'이라는 뜻을 지닌 '수행(修行)'은 '경작하다,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다'라는 뜻을 지닌, 부처님께서 사용한 고대인도어 '바와나(Bhāvanā)'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영어 경전에서는 'meditation(명상 수행), mental development(정신 계발), developing by means of meditation, cultivation by mind, culture(경작하다, 배양하다), increase(향상하다, 상승하다)' 등으로 번역한다.
우리에게는 수행이라는 말이 매우 익숙하니 바와나는 '계발 수행', 팔정도 바와나는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또는 '정각(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을 계발하는 수행'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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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사(正思 또는 정사유正思惟), Rightly Thought(바르게 생각함)
정사(正思 또는 정사유正思惟)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상깝빠(Saṅkapp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사(思 또는 사유思惟)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상깝빠(Saṅkappa)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생각, 사유, 분석'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thought(생각, 사고, 사유), analysis(분석), intention, purpose, plan' 등으로 번역한다.
3. 정어(正語), Rightly Speech(바르게 말함)
정어(正語)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와짜(Vācā)'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어(語)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와짜(Vācā)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언어, 말, 글'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speech(말하기), saying, voice(말로 나타내다, 표현하다), word(단어, 말을 골라 표현하다)' 등으로 번역한다.
4. 정업(正業), Rightly Doing(바르게 행동함)
정어(正語)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깜만따(Kammant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업(業)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깜만따(Kammanta)는 영어 경전에서는 'doing(함, 행동), acting(행위), working; work, business, occupation, profession' 등으로 번역한다.
행위에는 반드시 업(業)이 지어지고 업은 행위로 귀결되기 때문에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를 의미한다.
5. 정명(正命), Rightly Living(바르게 삶, 생활함)
정명(正命)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아지와(Ajīv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명(命)으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아지와(Ajīva)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삶, 생활, 생계'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livelihood(생활, 생계), mode of living(삶의 형태, 방법, 상태), living(삶), subsistence' 등으로 번역한다.
6. 정근(正勤 또는 정정진正精進), Rightly Striving(바르게 노력함)
정근(正勤 또는 정정진正精進)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와야마(Vāyām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근(勤 또는 정진精進)으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와야마(Vāyāma)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노력, 정진'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striving(노력함), effort, exertion, endeavour' 등으로 번역한다.
7. 정념(正念), Rightly Sati(바르게 알아차림)
정념(正念)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사띠(Sati)'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념(念)으로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사띠(Sati)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마음챙겨 알아차림, 삼빠자나(sampajāna; 대상에 대한 바른 알아차림, 빤냐로 봄/앎), 깨어있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mindfulness(주의깊음, 마음챙김), memory(기억함), recognition(알아차림),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깨어있음) of mind,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self-consciousness' 등으로 번역한다.
념(念)은 '지금(今)+마음(心)'의 합성어다. 사띠(Sati)를 한글로 번역하면, '지금(현재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또는 작용)을 전념하여(바르게 기억하여 또는 바르게 새겨) 마음챙겨 알아차림'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하나로 가르치신 '삼마 사띠(Samma Sati)'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정전념(正專念 or 정억념正憶念) + 정지(正知)' 또는 정념지(正念知)로 번역하는 것이 사띠의 두 가지 측면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즉, 삼마 사띠(Samma Sati) = <대상에 대한 바른 전념(正專念 or 正憶念; 바르게 대상에 마음챙김, 바르게 대상을 기억함)> + <정지(正知, 삼빠자나sampajāna; 바르게 대상을 알아차림)>
8. 정정(正定), Rightly Samādhi(바르게 고요집중함)
정정(正定)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마(Sammā) 사마디(Samādhi)'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사마디(Samadhi}는 한문 경전에서 정(定), 삼매(三昧; 사마디의 한문 음사), 사마지(三摩地; 사마디의 한문 음사), 등지(等持), 심일경(心一境), 정신통일(精神統一)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concentration(집중); lit. 'the (mental) state of being firmly fixed', onepointedness of the mind, 또는 absorption(전념), ecstasy(황홀경, 무아지경, 무아의 경지) 등으로 번역하고, 'a concentrated, self-collected(차분한, 고요한), intent state(몰두 상태) of mind and meditation, which, concomitant with right living, is a necessary condition to the attainment of higher wisdom and emancipation(해탈)'로 그 의미를 설명한다
사마디(Samādhi)를 한글로 번역하면, '몰아(沒我) 고요집중'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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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는 '한 가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를 말한다. 보통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할 때, 독서에 대한 정신집중으로 고요한 상태에 빠졌다는 의미이다. 깨어있는 상태로 고요한 것이지 졸면서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하나의 대상에 심취하여 어느 순간 자기(我)를 잊어버리면 그 무아지경(無我之境, 沒我之境, 삼매)의 행복은 매우 크다. 독서삼매라든가 진짜 삼매와 약간 닮은 상태조차도 매우 행복하다. 음악이나 춤 등에 빠져서 어느 순간 자기를 잊어버리고 어느 정도라도 근사 삼매(무아지경, 몰아지경)의 기쁨과 행복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그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한다. 수행이 깊어지면서 경험하는 진짜 바른 삼매(삼마 사마디, 정정正定)는 그 기쁨(삐띠)과 행복(수카)이 더욱 더 크고(至福) 차원이 높다.
삼매는 일상의식으로는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지극한 행복(至福), 신성한 황홀경, 마음의 청정함, 청정한 성스러움, 비이원성, 궁극성, 시간의 멈춤, 시공(시간-공간) 초월 등의 느낌이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체험이므로, 그 체험은 수행자를 압도한다
그러나 삼매에서 나온 후 그 체험이 서서히 잦아들어 사라지고 다시 일상의식으로 돌아오면, 다시 번뇌가 되살아난다
삼매의 경험(지극한 행복, 무아지경의 신성한 황홀경 등)은 절대자, 신,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브라만,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 해서 배화교라 불렸다)의 거룩한 불의 신 .. 등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신비체험)이 아니라,
언제 하든, 어디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과학적 경험처럼, 언제 하든(2500년 전에 하든 지금 하든), 어디서 하든(인도에서 하든 한국에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마음의 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대한 경험이므로 일종의 과학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은 아니다.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들어가면 외부의 오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물질 감각, 신체 감각)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전오식 사라짐; 오감각으로부터의 해탈?) '나(我) 또는 내 몸'이 사라진 듯이 느껴진다. 무아(無我)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自)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자아의식, 아상我相)'이 삼매 상태에서는 한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기서 몰아(沒我)는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 또는 자아(自我; 스스로自 '나我'라는) 의식이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잠길 몰沒) 상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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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사마디; 몰아 고요집중)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수행(수련, 훈련)을 부처님께서는 '사마디(삼매) 바와나(계발 수행) = 사마타'라고 지칭하셨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의 측면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여 가르치셨는데, 삼매(사마디) 계발 수행을 지칭하는 사마타(사마디 바와나)는 '정정진(바른 노력/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바와나(계발 수행)를 통칭한 것이다
'사띠(알아차림) 초점 확립 계발 수행'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정정진(바른 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계발 수행’(=사마타)을 통해서 사띠(알아차림) 대상의 범위를 점점 줄여가면 마침내 사띠(알아차림)의 초점이 하나로 모여져 고요히 집중되는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바른 관찰, 통찰)·정사유(바른 사유, 분석) 바와나(계발 수행), 즉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위빠사나)를 통해서 바와나빤냐(수행지혜, 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데 필요한
초강력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과 우빽카(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는 초선정 삼매 상태에서부터 계발되는데 4선정(네 번째 단계의 선정) 삼매 상태에서 극대로 개발된다. 삼매에 들었다 나오면 삼매 상태에서 계발된 초강력 고요집중의 사띠(알아차림) 능력이 '한시적'으로 유지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약해진다
삼매에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은 삼매의 깊이와 수행자가 처한 주변상황(경계)에 따라 다르지만 4선정 삼매 상태에 들었다 나온 경우 길게는 수 일 동안 '한시적'으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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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강조하셨듯이, 사마타의 삼매에서 나온 후 법열(法悅; 삼매 체험으로 생기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취해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삼매 상태에서 나온 '직후'에 사마타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알아차림) 능력과 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정심(우빽카;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를 이용해서
자신과 세상(달리 표현하면 신수심법身受心法)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바른 지혜(빤냐/반야;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 통찰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위빠사나)을 해야만 한다.
자신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여러 가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는 위빠사나를 하다가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이 약해지거나 더 강력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이 필요해지면 수행자는 하시라도 사마타(사마디 바와나; 삼매 계발 수행)를 하고 더 깊은 삼매를 계발한다.
사마타는 위빠사나를 계발(열고 발전향상) 시키고 위빠사나는 사마타를 발전향상 시킨다. 부처님께서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의 바와나(계발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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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만 하는 수행자는 하급 수행자다
몸으로만 하는 수행자는 중급 수행자다
머리와 몸으로 하는 수행자야 말로 상급 수행자다"
-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지혜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는 단계에 따라, 지혜(빤야/반야)를 세 단계의 세 종류의 지혜, 즉 수타빤냐(들은 지혜; 문혜聞慧), 찐따빤냐(사유지혜; 사혜思慧), 바와나빤냐(수행지혜; 수혜修慧)로 분류하셨다
우선 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붓다, 부처)의 바른 가르침, 즉 연기의 실상과 진리에 대한 지식차원의 바른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실천(정각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을 계발하는 수행; 팔정도 바와나)에 대한 바른 가르침(바른 설법; 正法)을
듣거나 읽어서 갖게 되는 수타빤냐(들은 지혜; 聞慧), 그리고 듣거나 읽은 것을 바르게 사유해서 갖게 되는 찐따빤냐(사유지혜; 思慧)를 스스로 계발(열고 발전향상)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바른 설법; 正法)을 바르게 배우고(듣고, 보고/읽고) 바르게 사유해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를 계발(바와나)하는 것이 팔정도 바와나의 첫 단계인 머리로 하는 '지식차원의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이다
다음 단계(지식의 실천 단계; 경험차원의 단계)로 문혜와 사혜를 바탕으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를 통해서 청정한 삶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마타(사마디/삼매 바와나; 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 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 바와나;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를 바르게 실천해서 바와나빤냐(수혜修慧, 수행지혜/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스스로 계발한다
지식차원의 지혜(들은 지혜와 사유지혜)를 넘어선 경험차원의 지혜인 바와나빤냐(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가 모든 사람을 완전한 깨달음(완전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경지로 이끄는 궁극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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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의 진행 단계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 머리로 하는 지식차원의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 단계
(2) 몸으로 하는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 단계
(3) 몸으로 하는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 단계
; 사마타 = 사마디 바와나,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
(4) 몸과 머리로 하는 경험차원의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 단계
; 위빠사나 =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 바와나빤냐(수행지혜/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
(5) 몸과 머리로 하는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완성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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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순환하며 구르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훗날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법륜(法輪; 법의 바퀴)은 불교(佛敎; 부처님 가르침)의 상징(symbol)이 되었습니다
마치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순환'하며 구르듯이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계발 수행)-사마타('정定; 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혜慧;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를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으로 반복 '순환'해서 바르게 실천함으로써 팔정도의 여덟 부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여
결국에는 정각을 증득함과 함께 팔정도 전체와 바른 지혜(반야/빤냐;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바른 사랑(자비/멧따-까루나;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을 완성하고, 완전한 자유(해탈; 모든 번뇌, 괴로움, 苦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도 용기를 내어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첫 걸음을 내디뎌 봅시다. 수 없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걸음마를 배우고 익히는 어린 아기처럼..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i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dukkha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해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