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수행을 따라서, 붓다의 길따라
붓다가 설(설명)한 수행에 관한 설법(법法을 설명함) 및 붓다의 수행을 따라서 수행하고자 하는 nswsam님의 글 등 수행 관련 글 모음
붓다의 길따라(In the footsteps of Buddha)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를 뜻하는 고대인도어로 일반명사다. 고타마Gautama 붓다Buddha(석가모니불)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불佛 또는 불타佛陀는 고대인도어 붓다Buddha를 중국어(한문)로 음사한 것이다. 우리말(한국어, 한글)로는 부처라고 한다.
그러면 깨달은 자, 븟다는 무엇을 깨달았나?
붓다는 법法을 깨달았다.
붓다는 법法을 깨닫고 나서 법法을 가르쳤다.
붓다의 가르침인 법法은 '깨달은 내용'(깨달음의 내용)과 '깨닫는 방법'(깨달음의 길)을 통칭한 것이다.
붓다가 가르친 '깨달은 내용'은 '존재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다.
붓다가 가르친 '깨닫는 방법'은 '팔정도(깨달은 자가 되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를 닦는 수행'이다.
붓다는 수행을 통해서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나서, 자신의 수행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으로 정리하여, 자신과 같은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는, 달리 말하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 줄임말로 팔정도라 이름 짓고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바와나Bhāvanā는 계발 수행을 뜻하는 고대인도어)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쳤다.
붓다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 계발하는 수행, 닦는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고, 설법(법을 설명함) 시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사마디 바와나)을 사마타, '사마타 후에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 바와나)을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였다. ('실라 바와나'는 그냥 실라)
팔정도 바와나, 즉 실라(戒; 정어·정업·정명)•사마디(定; 정정진·정념·정정)•빤냐(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를 한문 번역경전의 표현으로 말하면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고 붓다가이 사용한 고대인도어로 말하면 실라•사마타•위빠사나다.
부파불교(소승불교)든, 상좌불교든, 대승불교든, 중관불교든, 유식불교든, 밀교(금강승불교, 티벳불교)든, 선종(선불교)이든, 화엄종(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든, 일본 법화종(남묘호렌게쿄, 나무묘법연화경교,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파, 국제창가학회 SGI)이든, 조계종(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든, 천태종(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든...
붓다佛가 가르친 '깨달음의 내용'(깨달은 내용; 존재의 실상과 진리)은 어느 정도 유사하게 가르친다 할지라도,
(중국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노장사상에서도 '깨달음의 내용, 즉 도道를 깨달은 내용'을 부처님이 가르친 '법法을 깨달은 내용'과 어느 정도 유사하게 가르친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의 사상이나 교리를 '깨달음의 내용'이 어느 정도 유사한 노장사상을 적용하여 이해하는 중국의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예컨대, 노장사상의 "무無" 또는 "허虛" 개념을 적용하여 반야경般若經의 "공空" 개념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러나 노자-장자의 가르침에는 ‘도道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깨닫는 방법'과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인 자비Metta-Karuna'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붓다佛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친 구체적인 '깨닫는 방법'(실천법, 수행법)인 '팔정도를 닦는 수행'(실라•사마타•위빠사나; 팔정도 바와나)을 변질 없이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불교는 부처님佛이 가르친 법法(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을 온전히 가르치는 불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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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 가르침(법法)은 현세에 유익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와서 보라' 할 만하고
실생활에 적용되고
슬기로운 사람 각자에게 경험된다."
《맛지마 니까야(중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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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부처님 가르침; 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의 변질'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들을 참조해 보세요.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941014976211068&set=a.1941014946211071.1073741843.100009077529459&type=3&theater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821521144827119&set=a.1941014946211071.1073741843.100009077529459&type=3&theater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868272370151996&set=a.1844617145850852.1073741835.100009077529459&type=3&theater
오늘날 남방불교든 북방불교든, 상좌불교(또는 소승불교)든, 대승불교든, 티벳불교든, 선종(선불교)이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法(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을 변질없이 가르치는 종파(또는 전통)와 승려(스님, 비구, 비구니)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등명 자등명, 법法(붓다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는 유훈이 더욱 절실해지는 오늘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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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현명한 도반을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자들의 논쟁을 벗어나서
진정한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을 찾은 사람은
이제 바른 길(팔정도)을 찾았으니
법法을 등불로 삼고(법등명) 자신을 등불로 삼아(자등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비구들이여, 너희는 아침에 해가 뜨는 과정을 잘 알고 있으리라. 해가 나올 때가 되면 먼저 동쪽 하늘이 밝아지고, 그 다음에 빛이 눈부시게 발산되면서 해가 솟는다. 즉 동녘 하늘이 밝아짐은 해가 뜰 선구요 전조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고귀하고 성스러운 팔정도를 추구하는 데도 그 선구가 있고 전조가 있나니, 그것은 선善(kusala)한 벗(선우善友, 선지식善知識, 도반道伴; kusala-mitta, kalyāṇa-mitta)과 사귐이니라.
비구들이여, 그렇기에 선善한 벗(선우, 선지식, 도반)과 함께 하는 비구라면, 그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팔정도를 닦는 행(수행修行)을 배우고 익히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느니라."
《선우善友경(kusala-mitta sutta), 쌍윳따 니까야》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901067550205811&set=a.1844617145850852.1073741835.100009077529459&type=3&theater
부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르치신 법法(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을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바른 도반(바른 수행자, 바른 스승; 부처님께서는 자신도 도반이라고 하셨습니다)과 함께 법法을 등불로 삼고(법등명) 자신을 등불로 삼아(자등명) 바른 길(팔정도)을 따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당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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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정법正法(변질되지 않은 바른 가르침)을 따라
지혜(빤냐; 연기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자비(멧따;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속에서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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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사는게 괴롭습니다. 제가 마음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A : 말씀하시는 '마음공부'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법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리자면...
부처님(佛) 가르침(法, 敎)을 불법佛法 또는 불교佛敎라고 합니다. 불법佛法이라는 표현은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의 뉘앙스가 강하고, 불교佛敎라는 표현은 종교 또는 신앙이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물론 불교는 'religion, re(다시)+lig(신과 잇는)+ion(것)'이라는 의미의 신을 믿는 종교(religion)는 아닙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은 모두 ‘완전한 행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천국이라고, 노자-장자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은 ‘도道 또는 법法의 깨달음'이라고, 공자님은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己)를 극복(克)하여 예禮의 경지로 다시 돌아감(復)’이라고,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자신들과 같은 철인(철학자, philosopher;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서 '이데아'가 실현된 '이상국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禮’는 공자님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이데아'라는 이상세계처럼) 완전한 행복인 지선至善의 경지입니다. 노자-장자님의 도道와 부처님의 법法은 그 내용(깨달음의 내용)이 매우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노자-장자님의 가르침에는 ‘도道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깨닫는 방법'(도道를 깨닫는 방법; 실천법, 수행법)이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노자-장자님의 가르침에는 '나(我, 에고)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중생; 생명의 무리)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괴로움, 번뇌, 근심, 슬픔, 불만족 등을 근원(근본 원인)적으로 극복하고 완전한 행복의 경지(상태)에 도달하는 진리(진실한 이치, 근본 이치; 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른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지혜(빤냐/반야; 반야는 고대인도어 빤냐의 한문 음사)는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존재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이자,
'우리가 괴로움의 굴레에 어떻게 빠져드는지, 또한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근원적으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진실한 이치)를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세상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자비(멧따-까루나; 자비는 고대인도어 멧따-까루나의 한문 번역)는 사랑이라는 표현에 익숙한 요즘 시대의 표현으로, '나(와 너)를 초월한 큰 사랑' 또는 '나(我, 에고)를 초월하여 모든 존재를 분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사랑하는 바른 사랑', '나(我, 에고)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또는 '아상我相('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합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수행 경험과 제자들에게 수행을 지도하신 경험에 비추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면 지혜(빤냐, 반야; 바른 지혜)와 자비(바른 사랑)가 함께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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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말씀(가르침, 설법; 법을 설명함)이 기록된 글을 불경佛經(불교경전)이라고 하는데, (예수님도 그러하셨지만) 부처님께서는 직접 글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 부처님과 같은 경지(완전한 바른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지혜와 자비의 경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신 분들이 1200분(또는 1250분) 정도 계셨다고 하는데, 이 분들이 처음에는 단체 암송(합창과도 같이 한 사람이 틀리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을 하여 부처님의 말씀(가르침, 설법)을 전달하다가, 훗날 빠알리어(갠지스강 유역의 고대인도 민중어)로 기록한 경전모음을 니까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아함경은 빠알리어로 기록된 니까야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경전모음인 아가마를 다시 중국어(한문)로 번역한 경전모음입니다. 아함은 아가마를 중국어(한문)로 음사한 것입니다.
니까야와 아함경은 생각보다 꽤 차이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첫째, 옛날에는 요즘처럼 정보의 전달이 상대적으로 원활하고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보다 번역 시 오류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둘째, 산스크리트어는 (빠알리어 또한) 표음 문자인데 반하여 중국어(한자)는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경전의 미묘한 내용을 서로 다른 구조의 언어로 번역하는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참고로 한글과 영어는 표음 문자입니다) 셋째, 산스크리트어로 번역 편찬한 경전(아가마)과 산스크리트어로 저술 편찬한 경전(대승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하던 시대의 중국인들은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과 같은 주요 대승경전에 비해서 아함경(아가마)을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함경(아가마)의 번역에 상대적으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고 번역이 상대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고 허술합니다.
좀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경전에는 기록 과정의 오류와 (산스크리트어, 한문, 티벳어, 한글, 일본어, 영어 등으로) 번역 시의 오류와 언어의 시대적인 변천과 신조어 사용에 따른 변질 오류, 그리고 개인적 집단적 욕망(사리사욕과 어리석음 또는 탐진치)이 개입된 변질 변형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삼특상 또는 삼법인三法印-세 가지 법法(부처님 가르침)의 인장’이라는 판단 기준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삼법인(삼특상)도 오류 없이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삼법인과 (삼법인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한) 연기 또는 연기법, 사성제(이지연기二支緣起이기도 함),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혹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지식(교학) 차원에서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실천인 '팔정도八正道(정각으로 가는 가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해서 바르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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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 계발하는 수행, 닦는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시고, 설법(법을 설명)하실 때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이셨습니다.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는 그냥 실라.
참고로, 정혜쌍수, 지법-관법, 계정혜 삼학 등은 후대 중국의 불교인들이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우선 준비 단계로 '삼법인, 연기 또는 연기법, 사성제, 십이지연기, 5계' 등과 '팔정도를 닦는 수행(실라-사마타-위빠사나; 팔정도 바와나)'에 대한 변질되지 않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지식(교학) 차원에서 바르게 보고 읽고 바르게 사유하여 바르게 학습(배우고 익힘; 공부)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바른 공양과 5계 등의 실천을 포함한 실라[계戒; 정어(바른 말)·정업(바른 행동)·정명(바른 삶/생활)]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자발적으로(스스로) 바르게 실천하여 청정한 생활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고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사마타 수행으로 바른 삼매, 즉 정정正定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 청정하게 닦습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 계발된 실라, 즉 초선정 삼매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청정해진 6근(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사마타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사마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가 계발됩니다. 발전향상된 사마타는 실라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키고, 발전향상된 위빠사나는 사마타와 실라를 더 발전향상시키며, 발전향상된 실라는 다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킵니다.
위빠사나 또는 사마타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 강조하셨듯이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 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참고로,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의 본격적인 실實수행 단계인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바른 실천은 바른 도반(바른 실천 경험을 가진 바른 수행자, 바른 스승; 부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포함하여 스승도 도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지식(교학)으로만 공부하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을 직접 바르게 실천하여 스스로 지혜롭고 자비로운(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면 수행의 중간 단계에서도 무명(무지), 전도된 생각, 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의 착각과 집착, 특히 아상我相('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의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정도 만큼, 그리고 탐(갈망, 욕망, 욕심, 탐욕), 진(혐오, 미움, 성냄, 증오, 분노, 두려움), 치(갈망과 혐오, 탐과 진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가 줄어드는 정도 만큼 저마다 나름대로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래 포스팅도 함께 참조해 보시면 팔정도를 닦는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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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길따라(In the footsteps of Buddha)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를 뜻하는 고대인도어로 일반명사다. 고타마Gautama 붓다Buddha(석가모니불)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불佛 또는 불타佛陀는 고대인도어 붓다Buddha를 중국어(한문)로 음사한 것이다. 우리말(한국어, 한글)로는 부처라고 한다.
그러면 깨달은 자, 븟다는 무엇을 깨달았나?
붓다는 법法을 깨달았다.
붓다는 법法을 깨닫고 나서 법法을 가르쳤다.
붓다의 가르침인 법法은 '깨달은 내용'(깨달음의 내용)과 '깨닫는 방법'(깨달음의 길)을 통칭한 것이다.
붓다가 가르친 '깨달은 내용'은 '존재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다.
붓다가 가르친 '깨닫는 방법'은 '팔정도(깨달은 자가 되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를 닦는 수행'이다.
붓다는 수행을 통해서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나서, 자신의 수행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으로 정리하여, 자신과 같은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는, 달리 말하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 줄임말로 팔정도라 이름 짓고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 바와나Bhāvanā는 계발 수행을 뜻하는 고대인도어)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쳤다.
붓다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 계발하는 수행, 닦는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고, 설법(법을 설명함) 시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사마디 바와나)을 사마타, '사마타 후에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 바와나)을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였다. ('실라 바와나'는 그냥 실라)
팔정도 바와나, 즉 실라(戒; 정어·정업·정명)•사마디(定; 정정진·정념·정정)•빤냐(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를 한문 번역경전의 표현으로 말하면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고 붓다가이 사용한 고대인도어로 말하면 실라•사마타•위빠사나다.
부파불교(소승불교)든, 상좌불교든, 대승불교든, 중관불교든, 유식불교든, 밀교(금강승불교, 티벳불교)든, 선종(선불교)이든, 화엄종(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든, 일본 법화종(남묘호렌게쿄, 나무묘법연화경교,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파, 국제창가학회 SGI)이든, 조계종(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든, 천태종(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든...
붓다佛가 가르친 '깨달음의 내용'(깨달은 내용; 존재의 실상과 진리)은 어느 정도 유사하게 가르친다 할지라도,
(중국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노장사상에서도 '깨달음의 내용, 즉 도道를 깨달은 내용'을 부처님이 가르친 '법法을 깨달은 내용'과 어느 정도 유사하게 가르친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의 사상이나 교리를 '깨달음의 내용'이 어느 정도 유사한 노장사상을 적용하여 이해하는 중국의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예컨대, 노장사상의 "무無" 또는 "허虛" 개념을 적용하여 반야경般若經의 "공空" 개념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러나 노자-장자의 가르침에는 ‘도道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깨닫는 방법'과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인 자비Metta-Karuna'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붓다佛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친 구체적인 '깨닫는 방법'(실천법, 수행법)인 '팔정도를 닦는 수행'(실라•사마타•위빠사나; 팔정도 바와나)을 변질 없이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불교는 부처님佛이 가르친 법法(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을 온전히 가르치는 불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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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 가르침(법法)은 현세에 유익하고
시간을 초월하고
'와서 보라' 할 만하고
실생활에 적용되고
슬기로운 사람 각자에게 경험된다."
《맛지마 니까야(중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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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부처님 가르침; 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의 변질'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아래 포스팅들을 참조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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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방불교든 북방불교든, 상좌불교(또는 소승불교)든, 대승불교든, 티벳불교든, 선종(선불교)이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法(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을 변질없이 가르치는 종파(또는 전통)와 승려(스님, 비구, 비구니)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등명 자등명, 법法(붓다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는 유훈이 더욱 절실해지는 오늘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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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현명한 도반을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자들의 논쟁을 벗어나서
진정한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을 찾은 사람은
이제 바른 길(팔정도)을 찾았으니
법法을 등불로 삼고(법등명) 자신을 등불로 삼아(자등명)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비구들이여, 너희는 아침에 해가 뜨는 과정을 잘 알고 있으리라. 해가 나올 때가 되면 먼저 동쪽 하늘이 밝아지고, 그 다음에 빛이 눈부시게 발산되면서 해가 솟는다. 즉 동녘 하늘이 밝아짐은 해가 뜰 선구요 전조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고귀하고 성스러운 팔정도를 추구하는 데도 그 선구가 있고 전조가 있나니, 그것은 선善(kusala)한 벗(선우善友, 선지식善知識, 도반道伴; kusala-mitta, kalyāṇa-mitta)과 사귐이니라.
비구들이여, 그렇기에 선善한 벗(선우, 선지식, 도반)과 함께 하는 비구라면, 그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팔정도를 닦는 행(수행修行)을 배우고 익히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느니라."
《선우善友경(kusala-mitta sutta), 쌍윳따 니까야》 https://www.facebook.com/
부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르치신 법法(깨달은 내용과 깨닫는 방법)을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바른 도반(바른 수행자, 바른 스승; 부처님께서는 자신도 도반이라고 하셨습니다)과 함께 법法을 등불로 삼고(법등명) 자신을 등불로 삼아(자등명) 바른 길(팔정도)을 따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당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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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정법正法(변질되지 않은 바른 가르침)을 따라
지혜(빤냐; 연기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자비(멧따;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속에서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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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사는게 괴롭습니다. 제가 마음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A : 말씀하시는 '마음공부'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법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리자면...
부처님(佛) 가르침(法, 敎)을 불법佛法 또는 불교佛敎라고 합니다. 불법佛法이라는 표현은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의 뉘앙스가 강하고, 불교佛敎라는 표현은 종교 또는 신앙이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물론 불교는 'religion, re(다시)+lig(신과 잇는)+ion(것)'이라는 의미의 신을 믿는 종교(religion)는 아닙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은 모두 ‘완전한 행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천국이라고, 노자-장자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은 ‘도道 또는 법法의 깨달음'이라고, 공자님은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己)를 극복(克)하여 예禮의 경지로 다시 돌아감(復)’이라고,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자신들과 같은 철인(철학자, philosopher;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서 '이데아'가 실현된 '이상국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禮’는 공자님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이데아'라는 이상세계처럼) 완전한 행복인 지선至善의 경지입니다. 노자-장자님의 도道와 부처님의 법法은 그 내용(깨달음의 내용)이 매우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노자-장자님의 가르침에는 ‘도道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깨닫는 방법'(도道를 깨닫는 방법; 실천법, 수행법)이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노자-장자님의 가르침에는 '나(我, 에고)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중생; 생명의 무리)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 괴로움, 번뇌, 근심, 슬픔, 불만족 등을 근원(근본 원인)적으로 극복하고 완전한 행복의 경지(상태)에 도달하는 진리(진실한 이치, 근본 이치; 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른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지혜(빤냐/반야; 반야는 고대인도어 빤냐의 한문 음사)는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존재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이자,
'우리가 괴로움의 굴레에 어떻게 빠져드는지, 또한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근원적으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진실한 이치)를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세상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자비(멧따-까루나; 자비는 고대인도어 멧따-까루나의 한문 번역)는 사랑이라는 표현에 익숙한 요즘 시대의 표현으로, '나(와 너)를 초월한 큰 사랑' 또는 '나(我, 에고)를 초월하여 모든 존재를 분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사랑하는 바른 사랑', '나(我, 에고)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또는 '아상我相('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합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수행 경험과 제자들에게 수행을 지도하신 경험에 비추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면 지혜(빤냐, 반야; 바른 지혜)와 자비(바른 사랑)가 함께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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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말씀(가르침, 설법; 법을 설명함)이 기록된 글을 불경佛經(불교경전)이라고 하는데, (예수님도 그러하셨지만) 부처님께서는 직접 글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 부처님과 같은 경지(완전한 바른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지혜와 자비의 경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신 분들이 1200분(또는 1250분) 정도 계셨다고 하는데, 이 분들이 처음에는 단체 암송(합창과도 같이 한 사람이 틀리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을 하여 부처님의 말씀(가르침, 설법)을 전달하다가, 훗날 빠알리어(갠지스강 유역의 고대인도 민중어)로 기록한 경전모음을 니까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아함경은 빠알리어로 기록된 니까야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경전모음인 아가마를 다시 중국어(한문)로 번역한 경전모음입니다. 아함은 아가마를 중국어(한문)로 음사한 것입니다.
니까야와 아함경은 생각보다 꽤 차이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첫째, 옛날에는 요즘처럼 정보의 전달이 상대적으로 원활하고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보다 번역 시 오류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둘째, 산스크리트어는 (빠알리어 또한) 표음 문자인데 반하여 중국어(한자)는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경전의 미묘한 내용을 서로 다른 구조의 언어로 번역하는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참고로 한글과 영어는 표음 문자입니다) 셋째, 산스크리트어로 번역 편찬한 경전(아가마)과 산스크리트어로 저술 편찬한 경전(대승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하던 시대의 중국인들은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과 같은 주요 대승경전에 비해서 아함경(아가마)을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함경(아가마)의 번역에 상대적으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고 번역이 상대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고 허술합니다.
좀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경전에는 기록 과정의 오류와 (산스크리트어, 한문, 티벳어, 한글, 일본어, 영어 등으로) 번역 시의 오류와 언어의 시대적인 변천과 신조어 사용에 따른 변질 오류, 그리고 개인적 집단적 욕망(사리사욕과 어리석음 또는 탐진치)이 개입된 변질 변형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삼특상 또는 삼법인三法印-세 가지 법法(부처님 가르침)의 인장’이라는 판단 기준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삼법인(삼특상)도 오류 없이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삼법인과 (삼법인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한) 연기 또는 연기법, 사성제(이지연기二支緣起이기도 함),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혹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지식(교학) 차원에서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실천인 '팔정도八正道(정각으로 가는 가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해서 바르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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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 계발하는 수행, 닦는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시고, 설법(법을 설명)하실 때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이셨습니다.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는 그냥 실라.
참고로, 정혜쌍수, 지법-관법, 계정혜 삼학 등은 후대 중국의 불교인들이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우선 준비 단계로 '삼법인, 연기 또는 연기법, 사성제, 십이지연기, 5계' 등과 '팔정도를 닦는 수행(실라-사마타-위빠사나; 팔정도 바와나)'에 대한 변질되지 않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지식(교학) 차원에서 바르게 보고 읽고 바르게 사유하여 바르게 학습(배우고 익힘; 공부)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바른 공양과 5계 등의 실천을 포함한 실라[계戒; 정어(바른 말)·정업(바른 행동)·정명(바른 삶/생활)]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자발적으로(스스로) 바르게 실천하여 청정한 생활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고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사마타 수행으로 바른 삼매, 즉 정정正定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 청정하게 닦습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 계발된 실라, 즉 초선정 삼매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청정해진 6근(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사마타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사마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가 계발됩니다. 발전향상된 사마타는 실라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키고, 발전향상된 위빠사나는 사마타와 실라를 더 발전향상시키며, 발전향상된 실라는 다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킵니다.
위빠사나 또는 사마타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 강조하셨듯이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 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참고로,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의 본격적인 실實수행 단계인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바른 실천은 바른 도반(바른 실천 경험을 가진 바른 수행자, 바른 스승; 부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포함하여 스승도 도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지식(교학)으로만 공부하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을 직접 바르게 실천하여 스스로 지혜롭고 자비로운(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면 수행의 중간 단계에서도 무명(무지), 전도된 생각, 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의 착각과 집착, 특히 아상我相('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의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정도 만큼, 그리고 탐(갈망, 욕망, 욕심, 탐욕), 진(혐오, 미움, 성냄, 증오, 분노, 두려움), 치(갈망과 혐오, 탐과 진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가 줄어드는 정도 만큼 저마다 나름대로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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