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비담마의 주석서들
이런 방대한 아비담마 논서들은 다시 붓다고사 스님에 의해서 5세기경에 세 권의 주석서로 장엄이 되었다. 이 가운데서 『앗타살리니(Atthasaalinii)』는 칠론의 첫 책인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이고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ii)』는 두 번째인 『위방가』의 주석서이다. 세 번째인 『빤짜빠까라나 앗타까타(Pan$cappakaran*a At*t*hakathaa)』는 말 그대로 나머지 다섯 가지(pan$ca) 책(pakaran*a)의 주석서이다.
전통적으로 이들 주석서들은 모두 그 이전에 있었던 싱할리 주석서들과 안다라(Andhara, 인도의 안드라쁘라데시와 타밀나두 지역)의 주석서(Andhaka-at*t*hakathaa)(K.R. Norman, 121.) 등을 토대로 붓다고사 스님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서양 학자들은 붓다고사 스님의 편찬이라는데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 세 아비담마의 주석서들은 『청정도론』을 위시한 네 가지 경장의 주석서들과 견해가 다른 부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논장의 이 세 주석서들은 붓다고사의 감수 하에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특히 『앗타살리니』는 『마하왐사(Mahaavam*sa)』등의 빠알리 역사서에 근거하여 붓다고사가 인도에 있을 때 지은 것인데 후에 스리랑카로 건너와서 대사(Mahaavihaara)파의 싱할리 주석서들을 참고하면서 다시 개작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Ibid. 123-25.)
그렇지만 이들 세 주석서들이 붓다고사 스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청정도론』을 참고할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청정도론』에서 이미 설명한 부분은 주석을 깊이 가하지 않는다.(Ibid.) 더군다나 붓다고사 스님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은 확정적인 증거가 없다. 오히려 주석서라는 문헌의 성격이 주석을 다는 그 책의 내용에 따라서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붓다고사 스님이 지은 방대한 양의 모든 주석서들이 한 부분에서도 견해를 달리하지 않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붓다고사 스님 시대가 그 이전에 남방에서 전승되어오던 모든 다른 견해들을 빠알리 주석서로 정착화시키는, 어찌 보면 온갖 견해가 난무하던 때라서 주석서마다 다른 견해가 나타날 가능성은 아주 많을 것이다. 또한 붓다고사 스님 스스로도 세월이 가면서 자신의 견해나 관점이 더 정교해지면서 초기에 결집한 주석서가 후대에 결집한 것과 다른 견해를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주석서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통해서 밝혀질 것이다.
붓다고사 스님의 저술이든 아니든 이 아비담마 주석서들은 아비담마가 남방에서 정교한 틀로 정착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책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칠론에 버금갈 정도로, 아니 어쩌면 칠론보다도 더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는 책들일지도 모른다. 이 주석서들을 정확한 한글로 옮기면서 바르게 이해하고 소개하는 것이야말로 남방 아비담마의 방대한 체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무엇보다도 남방 아비담마가 완성된 체계로 정착되기까지 있었던 무수한 견해들을 우리나라 불교학계가 소화해내는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이 논장의 주석서들에 대한 복주서(t*iikaa)들은 붓다고사 스님과 몇 십 년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아난다(aananda) 스님에 의해서 역시 세 권으로 쓰여졌다. 아난다 스님은 붓다고사의 정통 견해와는 다른 여러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난다 스님의 복주서들은 빠알리로 쓰여진 문헌들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책에 속한다고 정평이 나 있으며 띠까 문헌들 중에서도 최초의 책들이다. 그래서 『물라띠까(Muulat*iikaa)』라 불린다. 물라(muula)란 근원이나 뿌리라는 말이다. 이 책들은 다시 아난다 스님의 제자이거나 적어도 영향을 많이 받은 스님이라고 여겨지는 대 주석가 담마빨라(Dhammapaala)<주해1> (6세기) 스님이 아누띠까(Anut*iikaa)로 주석하였다. 상좌부의 본산인 대사(Mahaavihaara)파의 견해를 대변하는 붓다고사 스님의 견해와 상충되는 아난다 스님의 견해들을 논박하고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방 아비담마 불교는 완성이 되기에 이르렀고 남방 상좌부의 세 파<주해2> 들 가운에서 대사파가 완전히 교리논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담마빨라 스님의 안목이 큰 역할을 했다. 역자(대림 스님)는 담마빨라 스님이 지은 『청정도론』의 대복주서인 『빠라맛타만주사(Paramatthaman$jusa)』를 읽으면서 담마빨라 스님의 예지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주해1> 담마빨라(Dhammapaala)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분분하다. 한 사람이다, 두 사람이다, 세 사람이다, 대승논사이며 날란다 대학의 총장이기도 했던 Dharmapaala와 같은 사람이다, 아니다 등이 그것이다. 지금은 담마빨라와 다르마빨라는 동일인이 아니라는 쪽으로 굳어졌으며 담마빨라가 두 사람이냐 한 사람이냐를 두고 아직 완전히 판명되지는 않았다. 담마빨라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주석서들은 크게 『소부』의 시로 된 7가지 경, 즉 『우다나(Udaana)』 『이띠웃따까(Itivuttaka)』 등에 대한 주석서와 『장부』 『중부』 『상응부』의 띠까와 『위숫디막가』의 『마하띠까』와 세 가지 논장의 주석서에 대한 『아누띠까』 등의 복주서(t*iikaa)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서 7가지 『소부』의 앗타까타를 지은 담마빨라와 나머지 띠까들을 지은 담마빨라가 같으냐 다르냐를 두고 논의가 진행 중이다. 최근(1996)의 견해(Hinuber, 168)에 의하면 주석서를 지은(at*t*hakathaa-kaara) 담마빨라와 복주서를 지은(t*iikaa-kaara) 담마빨라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역자들도 몇 가지 이유로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다. 역자(대림 스님)의 박사학위 청구논문 ‘A Study in Paramatthaman$juusa’의 서문에 학계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으니 참조할 것.
<주해2> Mahaavihaara(大寺)와 Abhayagirivihaara(無畏山寺)와 Jetavanavihaara의 세 파가 스리랑카에서 각축을 벌였다. 붓다고사 이전에는 한때 무외산사파가 큰 위력을 떨쳤으며 무외산사파에서는 Vimuttimagga(解脫道論)를 내놓을 정도로 학문과 수행의 깊이와 체계를 갖추었다고 생각된다. 12세기에 뽈론나루와로 도읍을 옮긴 빠락까마바후(Parakkamabaahu) 1세 왕에 의해서 무외산사파와 제따와나파의 승려들은 모두 대사파로 강제 흡수되어 이 두 파는 불교역사에서 사라져버렸고 그 문헌들조차 남아 있지 못하다.(Hinuber, 22 참조)
BUDDHISM/아비담마 길라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