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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제2장. 출발점

제2장. 출발점

 

고통의 근원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실체를 이해할 때,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고 현명한 사람은 모두 충고한다. 모든 문제해결은 우리자신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우리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이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자기자신이 중요하고 소중하며, 진정으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우리자신에 대해서 알고있는 지식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끊임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면서 유치원교육에서 출발해서 인생의 긴 시간을 배우는 일로 소모하지만 정작 자기자신에 대한 공부는 하지않고, 모두 자기 밖의 대상에 몰두하기 때문에 내면의 보다 깊은 수준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자신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붓다는 오직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동시에 스스로가 연구자가 되면서 자신의 본질을 검증함으로써 인간존재의 현상을 검증했다. 동시에 붓다는 이론적인 호기심이나 생활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존재의 본질과 인간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자신을 대상으로 스스로를 탐색하는 것이 그냥 그대로의 삶 자체였고 존재 자체였기 때문에, 모든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서 경험되는 순수체험일 수가 있었다. 붓다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실체를 탐색한 결과, 존재하는 모든 것은 5가지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중 4가지는 정신적인 것이고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다. 우선 물질적인 것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물질(物質)

 

우리의 몸은 외형적으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고, 감각적으로 쉽게 지각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정말로 일부분일 뿐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사람은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다. 몸은 우리의 의식적인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고 행동한다.

그러나 또다른 수준에서 보면 몸의 내부 기관들은 우리의 통제 를 벗어나서 우리의 지식없이 기능한다. 그리고 보다 세부적인 수준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 몸의 각 세포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끊임없는 생화학적인 반응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 몸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라고 알고있는 세포 또한 궁극적인 실체는 아니다. 겉으로 봐서는 분명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딱딱한 육체가 실제로는 전자입자와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그러한 미세입자는 부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들 가운데서 어느 한 개가 존재하는 기간은 1조 분의 1초 보다도 훨씬 더 짧다. 입자들은 진동의 흐름처럼 존재의 안과 밖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이것이 붓다가 발견한 모든 물질, 우리 육체의 궁극적인 실체다.

현대 과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우주물질의 궁극적인 실체가 바로 미세한 입자들의 파동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들 과학자들은 붓다가 말한 존재의 실체를 그들의 연구결과로 증명했지만, 붓다처럼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와지거나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그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들의 지식을 사용하고, 도구에 의존해서 우주의 본질을 연구해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붓다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 깨달음의 길을 찾아나섰고, 종국에는 깨달음에 이르신 분이다.

붓다는 자신의 마음 외에는 다른 아무런 도구도 사용하지 않았 다. 붓다가 발견한 진리는 지적인 결과가 아니고 그 자신의 직접 적인 경험이다. 그것이 붓다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붓다는 물질로서의 우주는 팔리어로 카라파스(kalapas), 또는 더 는 쪼갤 수 없는 극미세분자 단위로 불리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입자들은 물질의 기본적인 특질(부피, 은도, 운동, 응집) 로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것들은 마치 물질이 어떤 영원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를 형성하면서 결합하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모두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태의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물질의 궁극적인 실체다. 우리 몸은 파장 또는 입자의 연속적인 흐름이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그렇게도 집착하고 있는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의 본질이다.

 

 

마음(心) Mind

 

신체과정과 마찬가지로 마음이라고 하는 정신과정이 있다. 비록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만지거나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육체와는 다른 뭔가로서, 우리자신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이 죽어서 영혼만 남은 미래의 어떤 존재는 그려볼 수 있지만, 마음이 죽고 육신만 남아있는 어떤 존재는 상상이 잘 안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마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적다. 그리고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더욱 미약하다.

마음은 좀처럼 우리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수시로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한다. 때로는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고 싶어도 그렇게 쉽게 되지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식적인 마음의 상태도 쉽게 조절이 안 되는데 하물며, 무의식적인 마음상태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통제능력과 이해를 넘어서는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 속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거나 자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붓다는 육체를 검증했듯이 마음도 같은 방식으로 검증 함으로써, 마음은 의식, 지각, 감각, 반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첫번째 과정인 의식(意識)은 마음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부분으로서 지각(知覺)이나 인지(認知)와는 구분되는 작용이다. 의식은 단순히 어떤 현상의 존재를 등록하거나 어떤 물리적, 정신적인 입력정보를 등록한다. 즉 의식은 들어오는 정보를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꼬리표를 붙이거나 가치있는 판단을 하지않고 경험된 자료를 그냥 그대로 기록한다.

두번째 정신과정은 재인(再認)작용인 지각(知覺)이다. 마음작용에서 지각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아무런 판단이나 해석없이 받아들여서 기록해 둔 것을 확인하는 작용을 한다. 지각은 들어 오는 원자료를 분류해서 꼬리표를 붙이고 긍정 또는 부정의 평가를 내린다.

마음과정에서 세번째 부분은 감각(感覺)이다. 실제로 마음에 어떤 입력정보가 받아들여지자마자 감각이 일어난다. 감각은 마음 안에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다. 만일 입력된 정보가 지각작용에 의해서 평가되지 않는 한은 감각은 중성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오는 자료에 평가를 담은 꼬리표가 부착되 면 감각은 주어진 평가에 따라서 즐겁거나 즐겁지 않은것으로 분류된다.

감각의 내용이 즐거운 것이면 마음은 그 경험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거나 강화시키고 싶어한다. 만일 그 경험이 즐겁지 않은 경험이면 그것을 중단하거나 밀어내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당연히 들어오는 정보가 좋은 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면 좋아하고, 싫은 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면 싫어하는 것으로 반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다면 의식은 그 소리를 아무런 평가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지각작용이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를 평가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감각작용이 일어난다. 만일 그 말이 칭찬하는 것이면 즐거운 감각이 일어나고, 비난하는 소리면 불쾌한 감각이 일어난다. 그리고 각각에 따라서 반응이 동시에 일어난다. 만일 감각이 즐거운 것이면,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더 많은 칭찬을 듣고 싶어한다. 반대로 감각이 즐겁지 않은 것이면, 그것을 싫어하기 시작하고 비난을 중지시키고 싶어한다. 다른 종류의 감각정보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단계가 일어난다. 그런데 의식, 지각, 감각, 반응의 네가지 정신기능들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찰나적으로 존재하는 입자들 보다도 더 덧없는 것이다. 감각은 어떤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마다 이 네가지 정신과정은 빛처럼 빠르게 일어난다. 그것은 너무나 빨리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은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자각하지 못한다. 그것을 의식 수준에서 자각할 수 있으려면, 특정한 반응이 장기간 반복됨으로써 확인되고 강화된 형태를 취할 때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들여다봐야 하는것은 이와같은 인 간존재의 본질에도 불구하고,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간에 우리는 우리 내면 어딘가에 ‘나’ 라고 하는 연속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주체가 있다는 선천적인 가 정(假定)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10년 전에 존재했던 사람이 오늘 존재하는 사람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지금부터 10년간 존재 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어떤 철학이나 이론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든지간에 우리는 모두 “나는 지금까지 존재해왔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나는 존재할 것이다.” 라는 뿌리깊은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런데 붓다는 모든 사람이 굳게 믿고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붓다가 부정한 것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믿고있는 믿음을 단순하게 제거하려거나, 아니면 자신의 사색적인 견해를 제안했던 것이 아니다. 붓다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설명했고, 누구든지 붓다가 경험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깨달은 사람은 모든 이론을 버린다.”고 붓다는 말했다. 왜냐하면 붓다는 물질, 감각, 지각, 반응 그리고 의식의 실재를 보았고, 그것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일정하게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지 외적으로 보여지는 실재일 뿐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붓다는 말했다.

우리는 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강은 결코 멈추지 않는 물의 흐름이다. 우리는 촛불을 연속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정말로는 순간 순간마다 새로운 불꽃으로 바뀌는 양초심지로부터 일어나는 불꽃이다. 전기불 역시 우리의 느낌이나 의식으로는 고정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빠르게 깜박거리는 불빛으로서 강처럼 연속적인 흐름으로 존재한다. 전기불의 경우는 필라멘트 안에서 아주 높은 빈도의 진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흐름이다.

마찬가지로 붓다는 우리 인간 역시 외형적으로는 항상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순간순간으로 흐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육안으로 보이는 인간의 육체가 항상 존재해 보이는 것으로 느껴질 뿐, 본질적으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는 진동이나 파장이며, 그것들이 끊임없이 흐르고 생성되는 연속적 과정일 뿐이다.

물론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느정도까지는 다소 한정되고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해야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외부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외형적인 실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기능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피상적인 것이다. 보다 깊은 수준에서의 본질적인 실체는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생물, 무생물을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 전 우주가 매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끊임없는 생성상태에 있다. 현재 이 순간에도 이 우주는 계속해서 거대한 진화과정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거대한 우주의 흐름에 비해서 훨씬 더 빠르게 변화하는 의식, 지각, 감각, 반응 과정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립자의 과정이다.

이것이 우리 각자가 그렇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기(self)의  궁극적인 실체다. 만일 우리가 명상과 같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단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문답(問答) Q&A ( 답변 : 고엔카 )

 

Q: 당신이 마음이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 하게 알 수가 없다. 나는 마음을 발견할 수가 없다.

A: 마음은 모든 원자와 함께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어떤 것을 느낄 때마다 마음은 거기에 있다. 마음은 느낀다.

 

Q: 그러면 뇌를 의미하는 것인가?

A: 아니다. 정말 아니다. 아니고, 또 아니다. 마음이 오직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개념이다. 

 

Q: 마음은 전체 몸에 있는가?

A: 그렇다. 전체 몸은 마음을 포함하고 있다. 마음은 몸 전체에 있다.

 

Q: 당신은 ‘나’에 대한 경험을 오직 부정적인 용어로 말했다. 긍 적적인 측면은 없는가? 나에 대한 경험이 사람을 즐거움, 평화,  황홀로 채워주는 것은 없는가?

A: 명상을 통해서 당신은 그러한 감각적인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 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다. 만일 ‘나’ 라고 하는것이 그것들을 정말로 즐길 수 있다면, 그것들이 나의 즐거움이라면 그때 나는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통제력을 가져야만 된다. 그러나 감각은 나의 통제없이 그냥 일어났다가 지나간다. ‘나’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있는가?

 

Q:  나는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깊은 수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A: 그 수준에서 ‘나’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그 수준에 도달했을 때 에고(ego)는 용해된다. 거기에는 오직 기쁨만이 있다. ‘나’ 에 대한 의문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Q: ‘나’ 대신에 사람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겠는가? 

A: 느낌이 느낀다. 느낌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물은 단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전부다. 지금 당신에게는 느끼는 ‘나’가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명상을 깊이 하다보면 당신은 에고(ego)가 용해되는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의문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Q: 나는 여기에 와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A: 맞다. 정말로 사실이다. 우리는 익숙해진 삶의 습관 때문에 ‘나’나 ‘나의’ 로 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을 궁극적인 실재처럼 부여잡고 매달려 있는 한은 오직 고통만을 경험할 뿐이다.

 

Q: 나는 나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서 고민을 했었다.

A: 아무도 당신에게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당신은 스스로의 마음 안에서 긴장을 일으킴으로써 고통을 일으킨다. 만일 당신이 어떻게 하면 긴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가를 배운다면, 당신은 모든 상황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Q: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했을 경우는 어떻게 하는가?

A: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잘못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가 뭔가를 할 때마다 그는 타인을 해치는 동시에 그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가 잘못하도록 허용 한다면 당신은 그가 잘못하도록 부추긴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힘을 그가 멈추도록 하는데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한 오직 좋은 의지와 자비와 동정심으로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미움과 분노로 행동하면 당신은 그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지 않으면, 당신은 그러한 사람에게 선한 의지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 내면에 평화를 발달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Q: 세계에 평화가 없을 때 평화를 구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A: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해야만 세계는 평화로워 질 것이다. 변화는 각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만일 정 글이 말라서 그것을 소생시키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 정글에 있는 각각의 나무에 물을 주어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세계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평화스럽게 만드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오직 그렇게 해야만이 세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Q: 나는 명상이 부적응적이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 울 수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고 이미 행복한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가?

A: 인생의 피상적인 즐거움에 만족하고 머물러 있는 사람은 마음 내면의 깊은 동요를 알지 못한다. 그는 착각 속에서는 행복한 사 람이지만, 그 즐거움이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 안에서 생성된 긴장이 증가되면, 오래지 않아서 의식수준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세상의 누구도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영원히 행복하거나 불행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마치 순간의 만족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믿고, 지금 여기서 자신의 본질을 바로 들여다 보는 작업을 시작하지 않는가! 

 

Q: 당신의 가르침은 마하야나(대승)인가, 아니면 히나야나(소승) 인가?

A: 둘 다 아니다. 야나(yana)라는 말은 원래, 당신을 마지막 목적 지까지 데려다 주는 ‘탈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것이 잘 못 사용되어서 종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되었다. 붓다는 결코 어떤 종파를 가르치지 않았다. 붓다는 보편적인 법을 가르쳤다. 그 보편성을 나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이끌었으며, 붓다의 가르침은 나에게 유익함을 주었다. 그래서 그 보편적인 법을 나의 모든 사랑과 자비로 모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법은 마하야나도 아니고 히나야나도 아니며 어느 분파도 아니다.

 

 

붓다와 과학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붓다가 몸소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수행법을 통해서 마음을 완전하게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본 질을 깊이 관통했고 그결과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끊임없이 일어 났다가 꺼지는 극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손가 락을 튕기거나 눈썹을 깜박거리는 동안에도 수 조 개의 극미립자 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붓다는 말했다.

눈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인간의 겉모습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붓다가 수 조 개라고 한 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관용적인 표현이라고 가정하곤 했다. 그런데 현대과학이 붓다가 무려 2500년 전에 깨달은 사실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수년 전에 미국인 과학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그는 물리적인 우주가 구성되어 있는 극미립자에 대해서 연구하고 실험을 했다. 그러한 미립자들이 반복해서 엄청난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이제 이 과학자는 1초 동안에 몇번이나 미립자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가를 셀 수 있는 기구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도구를 거품상자라고 불렀다. 그는 1초에 극미립자가 10의 22승 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과학자가 발견했던 진리는 붓다가 발견했던 것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 과학자 역시 깨달은 사람인가? 그러나 아무도 그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위빠싸나 명상훈련을 받았던 미국인 학생 가운데 몇 명이 후에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이 과학자를 방문했다. 그들이 본 그 과학자는 붓다와 동일한 진리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불행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그 과학자는 깨달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배운 것은 여전히 오직 지적인 지혜였다. 그는 그 진리를 스스로 체험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고안해 낸 도구를 믿었기 때문에 그 도구를 통해서 드러난 진리를 믿었다. 붓다는 아무런 도구없이, 있다면 오직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는 도구를 통해서, 붓다 자신이 연구자인 동시에 연구되는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모두가 과학자다. 현 대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기 밖에 있는 것들일 뿐, 자기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 우리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넘치도록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내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빈약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정보가 불균형을 이룰수록, 그만큼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내면세계에 대해서도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내면세계의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붓다처럼 스스로 연구하는 사람이 되는 동시에 연구되는 대상이 됨으로써, 진리를 직접적으로 체험해야만 된다. 진리는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진리의 체험이 마음의 습관적인 패턴을 변화시키고 진리에 따라서 사는 삶을 시작하게 만든다. 나아가서 진리에 의해서 사는 사람의 모든 행위는 저절로 그 자신의 선과 타인의 선을 향하게 된다. 만일 과학자가 스스로의 체험을 외면하고 내면의 경험을 놓쳐버린다면, 과학은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서 잘못 쓰여지기 쉽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내면의 진정한 실존에 관한 과학자가 된다면, 우리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과학을 보다 적절하게 사용할 것이다.

 

▶︎ 제 3장 : 직접적인 원인

 

제3장. 직접적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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