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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제4장. 문제의 뿌리

제4장. 문제의 뿌리

 

 

붓다가 말하기를 “고통의 진리는 그 바닥까지 탐색되어져야만 된다.”고 했다.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기 전날 밤 그는 고통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는지를 알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앉았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붓다는 분명히 고통이 존재하는 것을 보았다. 고통은 아무리 싫어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통은 삶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자궁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의식적인 기억은 없지만 우리는 모두 울면서 자궁 밖으로 나왔다. 그 누구도 웃으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만큼 출생은 그 자체가 엄청난 마음의 손상이다. 삶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병들고 늙는 고통을 직면하게 되어있다. 얼마나 더 병들고 더 빨리 늙어가느냐에 관계없이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엄청난 두려움이고 고통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죽음의 고통을 경험해야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유형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과 만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원치 않는 일도 해야되고, 또 원하지만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원치 않는 것을 얻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이 고통이다. 경전에 보면 고통의 현상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生老病死),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고 얻고 싶지 않은 것을 얻는 괴로움(求不得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원수와 만나는 고통(愛別離苦, 怨僧會苦), 육신과 마음의 작용으로 인한 고통(五陰盛苦). 이처럼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서는 조금이라도 덜 늙고 싶어서 온갖 정성을 다하고 종국에는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죽어간다. 그러므로 붓다는 아예 삶 자체, 존재 자체를 고통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붓다는 지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면서 고통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하고자 했다. 

 

마침내 그는 5가지 집합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존재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원인 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통은 육신과 인지, 지각, 감각, 반응을 가진 마음의 아주 깊은 수준에서 우리가 발달시켜온 비정상적인 집착이다. 실제로는 오직 순간순간 전개되는 흐름이 있을 뿐인데, 우리는 정신적 물리적 존재에 강하게 매달린다. 즉, 자기라고 하는 비(非) 실제적인 관념과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것에 매달리는 것이 고통이다.

 

 

 

 

 

집착(執着)

 

집착에는 여러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감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습관에 집착하는 것이다. 약물중독자들은 약물을 복용할 때 오는 쾌감을 경험하기 위해서 약물에 탐닉한다. 그들은 약을 복용하면 할수록 더욱 더 탐닉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갈망이라고 하는 마음의 조건에 중독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자마자 우리는 또다른 욕망을 만들어 낸다. 어떤 의미에서 욕망의 대상은 오히려 2차적이다. 실제로는 끊임없이 갈망하는 상태 자체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갈망 자체가 즐거운 감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뭔가 마음 한구석에 적지 않은 공허와 결핍감을 느끼면서, 주어진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편안하게 즐기기 보다는 오히려 그 여유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열과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 있는 대상이나 집단을 찾는다.

 

현대인은 누구나 여유를 원하지만 막상 여유가 생겼을 때는 결 코 그것을 합리적이고 차분하게 감당하지 못한다. 아무도 자신이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와 가정적인 책임 이외의 역할을 강 요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여러가지 집단을 찾아다니거 나 단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회장이니 총무니 간사니 하는 각종의 명함을 달고 다니면서 시간에 쫓기고 관계에 얽혀서 살아간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가 겉으로는 쉬고 싶다는둥 사람들 속에 시달려서 괴롭다는 등의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혼자 있는것을 두려워하고 결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강박증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잠시라도 뭔가 일을 벌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못견디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그들은 뭔가를 갈망하는 것이 깨뜨릴 수 없는 습관이 되어서, 갈망 그 자체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리고 약물 중독자들이 약물을 복용할수록 약물에 대한 내성이 커지기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약을 복용해야 되듯이, 인간의 갈망 역시 원하면 원할수록 더 큰 것을 원하기 때문에 갈망은 끝이 없다. 우리가 갈망하는 한 당장은 생기있어 보이고 뭔가 활기찬 삶처럼 보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내면으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 사건을 벌이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이나 만족으로 갈 수가 없다.

 

또다른 중요한 집착은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 지로서 ‘나’ 또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마치 철로 둘러싸여 있는 커다란 자석처럼 행동한다. 자석은 자동적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패턴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자극이나 정보조차도 본능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세계를 배열하려고 하고, 즐거운 것은 끌어당기고 즐겁지 않은 것은 밀어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자석은 다른 자석과 부딪치게 되어있다. 자기가 찾는 패턴은 다른 사람의 자석영역에 의해서 방해받게 되고 ‘나’라고 하는 자석도 다른 자석에 의해서 끌리거나 밀려나는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행이나 고통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우리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하고,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나’가 영원히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지 않아서 서로 분리되고 만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종국에는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고 만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이나 아니면 죽음의 순간이나 우리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에 강하게 매달렸으면 매달렸을수록 더 큰 고통이 따라오게 된다.

 

그리고 집착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나 우리의 신념으로 확 장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무엇이든 그것이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우리가 그것에 집착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견해나 가치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비판 받는다면 상당히 혼란되고 분노하게 될 것이다. 또 자신의 가치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고 싶어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역시 분노하고 미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이에는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된다. 그러므로 누구의 견해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다. 보다 유익한 것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사실 자체를 이해할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서로 다르거나 대립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신의 견해나 가치에 집착한다면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견해와 부딪침으로써 갈등을 낳게 되고 결국은 불행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집착에는 종교적인 형태나 종교적인 의식에 대한 집착이 있다. 우리는 종교의식이 가지고 있는 그 이면의 의미보다는 종교의 외형적인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의식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종교인이 아니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본질이 없는 종교의 형식적인 측면은 텅빈 껍질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진정한 종교인이 될려면 진정한 종교적인 태도를 발달시켜야만 된다. 진정한 종교적인 태도는 종파에 구속됨이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이를테면 맑은 가슴과 존재에 대한 자비나 사랑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의 외형적인 형태에 집착하기 때문에,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정신보다는 형식에 중요성을 두도록 만든다. 더욱이 오늘날의 종교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성한 본질에 대한 추구가 약하기 때문에 상업화되고 타락되면서 급기야는 집착과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파간의 갈등과 미움을 낳는 반종교적인 단체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인간의 고통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집착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집착과 고통은 항상 함께 붙어 다닌다. 그러므로 집착이 없는 곳에는 고통도 없다. 이교도(異敎徒)의 진정한 의미는 지혜로운 가슴과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지 자기가 믿는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가 절을 하는 십자가 앞에서 함께 절을 하는 사람은 자기와 같은 신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또다른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가 절을 하는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는 사람은 자기와 똑같은 부처님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은 소위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의 숫자만큼이나 많고, 부처님은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유일신이 아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존재를 상정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비롭고 전지전능한 부처님이나 하느 님을 생각하고 받들어도, 역시 자기 범위 안에서의 부처님이고 신 이지 그 이상의 모습은 설정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가 설정하는 신이나 부처님은 자신의 크기 만큼이다.

 

그래서 실재의 부처님과 신이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 라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이나 부처님에 대한 견해와 가치와 편견이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과 부처님을 비교하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부처님과 신의 본질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주의나 주장을 비교하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자기 자신들을 비교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본질적이고 진정한 종교적인 태도를 발달시킴으로써 종파의 허구성을 극복하고, 종교가 갖는 본래적인 신성한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우리 인간의 생김새가 다른만큼 종파는 다양할 수 있으되, 종파나 의식이 집착의 대상이 되고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조건화된 발생 : 인과의 고리

 

그런데 무엇이 집착을 일으키고 집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붓 다는 자신의 본질을 분석한 결과, 집착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순간 적인 정신적 반응들 때문에 발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의식 적인 마음의 반응은 순간순간 반복되고 강화되면서, 좋아하는 것 에는 강하게 끌리고 싫어하는 것은 강력하게 밀어내는 마음의 습 관을 만들어냄으로써 종국에는 끈질긴 집착으로 성장한다.

 

집착은 단순한 순간순간의 반응들이 발달된 형태다. 아주 직접 적인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 속담에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라 든가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하찮 고 작은 것이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시 하고 내버려 두면 나중에는 정말로 심각한 수준으로 발달하게 된 다는 의미에서 보면 그럴듯한 설명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처음에는 단순한 반응이었던 것이 쌓이면, 결국은 습관 으로 바뀌고 습관은 다시 그 사람의 인격으로 바뀌게 된다.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그리고 대부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쌓여서 무서운 집착으로 발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고통받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우리가 부딪히는 순간순간의 경험들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싫다거나 좋다 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마음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싫어하고 좋아하는 반응은 무엇이 일으키는가? 붓다 는 깊은 내성법(內省法)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반응은 감 각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즐겁다는 감각을 느 끼면 그것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우리는 불쾌한 감각을 느끼면 그것을 싫어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감각은 어디서 왔는가? 감각은 누가 일으키는가? 붓다는 여전히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 결과, 감각은 접촉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았다. 사물과 눈의 접촉, 소리와 귀의 접촉, 냄새와 코의 접촉, 맛과 혀의 접촉, 무엇인가와 감촉되는 몸의 접촉, 그리고 사고, 정서, 관념, 심상, 기억 등과 마음의 접촉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눈,귀,코,혀,몸의 5가지 신체감각과 의식을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경험한다. 

 

이 6가지 기본적인 구조 眼,耳,鼻,舌,身,意 가 특정한 대상이나 외부현상과 접촉할 때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각이 일어난다.그러면 접촉은 왜 일어나는가? 붓다는 5가지 신체감각과 의식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한 접촉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았다. 이 세계는 소리, 냄새, 향기, 색깔, 사고, 정서 등을 가진 온갖 다양한 존재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각기관이 살아서 기능하는 한, 접촉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면 왜 5가지 감각요소와 의식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마음과 물질의 흐름에 본질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마음과 물질의 흐름이 있는가? 무엇이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가? 그것이 일어나는 과정은 ‘아는 자’와 ‘알려지는 자’, ‘주체’와 ‘객체’, ‘나’와 ‘타인’으로 세계를 분리시키는 인지작용인 의식 때문에 일어난다고 붓다는 보았다. 그러한 분리가 나와 너라고 하는 이원성을 낳는 근원이다.

 

의식은 모든 순간에 일어나고 특정한 정신적 물리적 형태를 가 정한다. 다음 순간에 다시 의식은 약간 다른 형태를 취한다. 사람 의 존재를 통해서 의식은 흐르고 변화한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육신은 더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썩어서 없어지지만 의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의식은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를 취하고, 한 존재로부터 다음 존재로, 또 현재의 삶에서 내생의 삶으로 의식의 흐름은 계속된다.

 

죽음에 관한 티벳인의 책 (The tibetan book of the dead)에서는 인간이 죽고 나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스러운 사건이기도 하려니와, 죽음 직후의 사후세계에서는 마치 우리가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처럼 무력하고 당황스럽기 때문에, 죽어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시체 앞에서 기도와 염불로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의식의 흐름을 일으키는가? 의식은 반응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붓다는 보았다. 마음은 끊임없이 반응하고 모든 반응은 의식의 흐름을 촉진 시킴으로써, 의식은 다음 순간으로 계 속 이어진다. 반응이 강할수록 그것이 주는 자극도 강해진다. 한 순간에 일어나는 약한 반응은 단지 의식의 흐름을 잠깐동안 유지시킨다.

 

그러나 만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순간적 반응이 갈망이나 혐오를 느낄 정도로 강한 것이라면 ,그러한 반응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의식의 흐름을 유지시키게 된다. 그리고 갈망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이 계속해서 반복되면, 의식의 흐름은 여러 날이나 여러 달, 심지어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생활 속에서 어떤 특정한 반응을 반복해서 하게되면 그것은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고, 순간은 다시 시간으로 시간은 날로, 날은 달로, 달이 다시 해로 바뀌고 나아가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의식의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러한 반응을 일으키는가? 붓다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를 관찰한 결과, 그와 같은 반응은 바로 무지(無知)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평소에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가 반응하는 것의 진정한 본질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영원한 것이 아니며, ‘나’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동시에 영원하지도 않고 ‘나’라고 하는 나는 ‘너’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런데도 ‘나’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처럼 집착하는 것이 바로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외부 자극에 대해서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눈 먼 반응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것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 때문에 반응하는 습관에 갇혀 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원인이다.

 

 

 

만일 무지가 일어나면 반응이 일어난다.

 

반응이 일어나면 의식이 일어난다.

 

의식이 일어나면 마음과 물질이 일어난다.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면 6가지 감각이 일어난다.

 

6가지 감각이 일어나면 접촉이 일어난다.

 

접촉이 일어나면 감정이 일어난다.

 

감정이 일어나면 갈망과 혐오가 일어난다.

 

갈망과 혐오가 일어나면 생성의 과정이 일어난다.

 

생성의 과정이 일어나면 탄생이 일어난다.

 

탄생이 일어나면 쇠퇴와 죽음이 슬픔과 비통,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함께 일어난다.

 

그러므로 고통의 덩어리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인과(因果)의 고리(조건화된 발생 ) 에 의해서 우리는 현재의 존재상태로 옮겨져 왔으며, 고통의 미래를 직면하고 있다. 마침내 진리가 분명해졌다. ‘나’라고 이름붙여진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실재에 대한 무지에서 고통은 시작된다. 그리고 고통의 두번째 원인은 반응의 정신적 습관이다. 무지에 의해서 가려져있기 때문에 우리는 갈망과 혐오의 반응을 낳고, 그것은 갖가지 불행을 낳는 집착으로 발달한다. 바로 반응습관이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고 결정하는 카르마다. 그리고 반응은 오직 본질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어난다. 갈망, 혐오, 무지 는 삶에서 오는 모든 고통을 자라게 하는 세 가지 뿌리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고통의 본질과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알고 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인과의 법칙, 카르마의 법칙을 기억해 보자. 만일 이것이 존재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발생함으로써 저것이 일어난다. 만일 이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멈춤으로 저것도 멈추어진다. 원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원인이 제거되면 거기에는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고통이 일어나는 과정은 역전될 수 있다.

 

 

 

만일 무지가 뿌리뽑히면 반응이 멈추어진다.

 

반응이 멈추어지면 의식이 멈추어진다.

 

의식이 멈추어지면 마음과 물질이 멈추어진다.

 

마음과 물질이 멈추어지면 여섯 가지 감각이 멈추어진다.

 

6가지 감각이 멈추어지면 접촉이 멈추어진다.

 

접촉이 멈추어지면 감정이 멈추어진다.

 

감정이 멈추어지면 갈망과 혐오가 멈추어진다.

 

갈망과 혐오가 멈추어지면 집착이 멈추어진다.

 

집착이 멈추어지면 생성과정이 멈추어진다.

 

생성과정이 멈추어지면 탄생(근원)이 멈추어진다.

 

탄생이 멈추어지면 쇠퇴와 죽음이 슬픔과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함께 멈추어진다.

 

그러므로 고통의 덩어리가 모두 멈추어진다.

 

만일 우리가 무지를 끝내면 모든 고통은 각성으로 바뀌기 때문 에 눈 먼 반응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 한 평화와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것이다. 고통의 수레바퀴는 해방의 수레바퀴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고타마.싯타르타가 우리들로 하여금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가르친 것들이다.

 

우리는 각자 우리의 고통을 일으키는 반응에 책임을 져야된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스스로 책임져야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연속적인 존재의 흐름

 

붓다는 인과(因果)의 수레바퀴에 비유해서 환생과 윤회의 과정 을 설명했다. 붓다 당시의 인도에서는 환생의 개념이 사실로 받아들여졌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할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창조설이나 예수재림설 처럼 쉽게 인정할 수 없는 하나의 교의(敎儀)같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된다.

 

환생(還生)은 과거의 삶과 미래의 삶을 잇는 반복되는 존재의 순환이다. 우리가 현재 하고있는 행위들은 다음의 삶 속으로 밀어넣는 힘이다. 즉 미래의 삶은 현재 우리가 행위하는 데 따라서 비천하거나 고귀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삶은 바로 과거의 삶에서 우리가 행위했던 것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환생의 개념은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죽은 후에 즉, 미래의 세계에서 보상받거나 심판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여러 종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붓다는 현재 우리의 삶에서 행한 행위를 신이나 염라대왕과 같은 제 삼자가 있어서 심판하고 죽어서 가는 세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각자가 행한 행위, 그 자체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붓다는 아무리 고귀하고 훌륭한 존재로 태어난다고 해도 고통은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훌륭하고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현생에서 좋은 인연을 지어서 내생에는 좋은 조건에서 태어나기를 갈구하고 심지어는 어떤 비구니들은 내생에는 남자로 태어나서 출가 수행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붓다가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본질적인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환생도 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출생의 조건이 수행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길은 본질적으로 부자로 태어나든 가난하게 태어나든 여자로 태어나든 남자로 태어나든 관계가 없다. 부자다 가난하다 남자다 여자다 라고 하는 의식자체가 이미 수행의 길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모두 중생심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고통 또한 피할 수 없다. 우리의 목적은 일체의 고통으로 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의 순환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장 순수한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붓다는 바로 현재 이 순간의 삶에서 그와 같은 행복을 경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환생은 반복되는 화신(化身)을 통해서 고정된 특질을 유지하고 있는 영혼이나 자아(self)가 윤회한다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이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죽으면 육신은 없어져도 영혼은 현재 이대로의 상태로 변화하지 않은 채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붓다는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지면서 변화하지 않는 주체는 없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소에서 우유가 나오는 것과 같다. 우유에서 응고된 우유가 나오고, 응고된 우유에서 버터가 나오고, 신선한 버터에서 정제된 버터가 나오고, 정제된 버터에서 크림이 나온다. 소 에서 우유가 나온다고 해서 소를 보고 우유라고 하지 않으며, 우유를 보고 신선한 버터나 크림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든지 지금 존재하고 있는 현상태를 본질적인 실재로 생각하거나 과거나 미래의 것은 ‘실재’로서 생각하지 않는다.

 

붓다는 고정된 에고(ego)원리가 윤회된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과거나 미래의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의 행위가 자극을 주는 한,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이동하고 변화해가는 생성의 과정만이 계속된다고 설명했다. 설사 현재의 삶 외에는 과거의 생이나 미래의 삶을 믿지않고 부정해도 인과의 고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가 행하는 맹목적인 반응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지금-여기를 경험하는 고통을 창조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맹목적인 반응을 깨닫고 그것을 멈출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평화를 경험할 것이다. 천당과 지옥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천당과 지옥은 지금의 삶 안에서, 이몸 안에서 경험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따로 막연히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없다. 그러므로 붓다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삶이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삶에서 미움, 질투의 반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킴으로써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과거나 미래의 실존을 믿든 믿지 않든, 우리는 현재 당장의 삶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러한 삶의 문제는 바로 자극에 대해서 무조건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데서 일어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자극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낡은 반응습관을 멈추고, 고통의 길로 치닫고 있는 삶의 방향을 돌려서 해방의 길로 나아가는 행복을 경험해야 된다.

 

 

 

조약돌과 버터기름

 

어느날 젊은 남자가 붓다에게 와서 울고 또 울었다. 그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붓다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젊은이여?”

 

“예, 어제 부친이 사망했습니다.”

 

“그래, 만일 부친이 사망했다면 운다고 해서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데리고 올 수는 없지 않는가?’’

 

“예, 여래이시여 그것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울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러나 저는 여래께 한가지 부탁을 가지고 왔습니다. 부디 죽은 저의 부친을 위해서 뭔가를 해주십시오’’

 

“어허, 내가 그대의 죽은 부친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래시여. 부디 뭔가를 해주십시오. 여래께서는 특별한 분이십니 다. 분명히 여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여래께서 저의 돌아가 신 부친을 위해서 의식을 행하신다면 영원히 천당에 머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부탁입니다. 부디 저의 부친을 위해서 뭔가를 해 주십시오” 딱한 젊은이는 어떤 합리적인 주장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 가득 차 있었다. 붓다는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다른 방법 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붓다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 시장에 가서 흙으로 빚은 항아리를 두 개 사오너라.”

 

젊은 남자는 붓다가 자기 부친을 위해서 의식을 행하는 데 동의했다고 생각하고 너무나 행복했다. 그는 시장으로 달려가서 항아리 두 개를 사가지고 돌아 왔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항아리 하나에는 버터를 채우고 나머지 하나에는 조약돌을 채워라.”

 

젊은 남자는 그렇게 했다.

 

“이제 항아리를 적당하게 채우고 연못 속에 넣어라.” 젊은 남자는 그렇게 했다. 그러자 두 항아리는 바닥으로 가라 앉았다. 이제 붓다가 말씀 하셨다. “큰 막대기를 가지고 오너라. 그리고 항아리를 쳐서 부수어라.” 젊은 남자는 붓다가 자기 부친을 위해서 훌륭한 의식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척이나 행복해 했다.

 

고대 인도인의 풍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아들이 부모의 시체를 화장터로 가지고 가서 화장용 장작 위에 얹고 태운다. 시체가 반쯤 타면 굵은 막대기로 두개골을 부순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두개골이 부서지자마자 천당의 문이 열린다. 이제 젊은 남자는 혼자서 생각했다. “아버지의 몸이 어제 재로 변해버렸다. 아마 여래께서 상징적으로 나에게 물 속에 든 항아리를 부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는 의식을 행하면서 너무나 행복했다.

 

붓다가 시키는대로 막대기를 잡고 젊은 남자가 힘차게 내리쳐서 두 항아리를 깨뜨렸다. 그러자 곧바로 버터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물 표면에 뜨기 시작했다. 다른 항아리에 있는 조약돌은 엎질러져서 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 때 붓다는 말했다.

 

“그래 젊은이, 나는 다했다. 이제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을 불러서 주문과 기도를 부탁하거라. 오, 조약돌아 떠올라라. 떠올라라. 오! 버터야 가라앉아라 가라앉아라.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나에게 보여달라.”    

 

“오! 여래이시여 농담을 하시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 합니까? 조약돌은 물보다 무거워서 바닥에 가라앉게 되어 있습니다. 조약돌은 떠오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버터는 물보다 가볍기 때문에 표면에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버터는 물에 가라앉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젊은이여 그대는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알고 있으면서 왜 다음과 같은 이치는 모르는가? 만일 그대의 부친이 살아 생전에 조약돌처럼 무거운 행위를 하면서 살았다면 자연히 가라앉게 되어 있다. 누가 그를 떠오르게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만일 그가 살아서 한 행위가 버터처럼 가볍다면 그는 떠오르게 되어 있다. 누가 그를 밑으로 밀어 넣을 수 있겠느냐?”

 

우리가 자연의 이치를 보다 일찍 이해하고 그 이치대로 살아간다면, 그만큼 일찍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 제5장. 도덕적인 행위의 훈련

 

제5장. 도덕적인 행위의 훈련

제5장. 도덕적인 행위의 훈련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지(無知)와 갈망(渴望)과 혐오(嫌惡)에서 비롯되는 고통의 원인을 뿌리뽑음으로써 고통을 뿌리뽑는 것이다. 붓다는 일찍이 인간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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