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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제6장. 집중훈련

제6장. 집중훈련

 

 

도덕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말과 행동을 통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고통의 원인은 정신적인 내용에 있기 때문에 만일 마음이 욕망이나 분노에 들끓고 있다면 아무리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당장은 욕망과 분노에 이글거리는 마음을 억누를 수 있지만 오래지 않아서 폭발하거나 아니면 안으로 병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해롭게 만든다.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수천년 동안 모든 종교가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통제하는 일에 치중했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거나 유혹을 받으면 쉽게 무너진다. 술과 담배가 해롭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욕구가 일어나면 좀처럼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웬만해서는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는데, 이유는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지못한 정신적인 행동을 멈추는 방법을 배우면 좋지못한 말과 행동을 삼가하는 것은 쉬워진다.

모든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 또한 마음의 수준에서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쓰는 말로서 우리가 넘어지면 바로 넘어진 그 자리를 짚고 일어서야 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아주 단순한 행동습관에서 비롯된 것은 행동 자체를 수정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모든 문제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근본원인을 뿌리뽑기 위해서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수행단체들은 마음의 문제보다는 수행자들의 행동을 일치시키고 외적인 행동을 통제하고 훈련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러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상당한 진전이 있어 보이고 때로는 장엄해 보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 그 장소나 상황을 벗어나면 훈련효과는 빠르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주 작은 부분만이 단순한 생활습관이나 태도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습관이나 태도를 훈련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훈련을 위한 전단계로서의 중요함을 갖는 것이지, 마음훈련을 소홀히 다루고 말과 행동을 삼가는 일에 치중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일차적인 것과 이차적인 것을 혼동한 결과다.

그러므로 도덕훈련은 팔정도(八正道)로 나아가는 길에서 가장 초보적인 훈련이지만, 동시에 마음훈련을 하는 과정과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올바로 다스리면 말과 행동은 저절로 통제되지만 말과 행동을 통제한다고 해서 마음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움을 줄 뿐이다.

그러면 좋지 못한 마음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훈련을 해야 되는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브하바나(bha-vana), 즉 정신발달 또는 일반적인 말로서 명상훈련을 해야만 된다. 브하바나는 특별한 정신훈련, 정확히 말해서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마음을 정화하기 위한 기법이다. 브하바나는 집중력 훈련과 지혜를 훈련하는 두 가지 정신훈련을 포함하고 있다. 집중력 훈련은 마음의 고요함을 발달시키는 것이고, 지혜를 훈련하는 것은 통찰력을 발달시키는 훈련이다. 집중력 훈련은 팔정도에서 두 번째 단계의 훈련이다. 집중력 훈련은 정신과정을 통제함으로써 어지러운 마음에 끄달리지 않고, 자기자신이 바로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이다. 집중력 훈련에는 바른 노력, 바른 자각, 바른 집중력이 있다.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노력은 마음의 고요함과 통찰을 발달시키는 첫걸음이다. 마음은 무지에 의해서 쉽게 정복당하고, 갈망과 혐오에 의해서 쉽 게 흔들린다. 마음을 확고하게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의 아주 세밀한 수준에까지 굳어져서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마음의 상태를 확인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자신의 본질을 규명하고 검증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를 강화시켜야 한다.

의사가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려면 환자의 피를 뽑아서 그것을 전자현미경 위에 놓고 검사를 해야 되며, 혈청을 자세히 검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미경을 적절하게 맞춘 다음 초점을 고정시켜야 한다. 의사는 환자의 피를 뽑아서 조사함으로써 질병의 원인을 발견하고 거기에 따르는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특정한 주의대상에 고정을 시키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때로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나’라고 하는 너무나 미묘한 본질을 검증하기 위한 도구를 만든다.

붓다는 수행을 원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각자에게 맞게 마음을 집중시키는 다양한 기법을 처방해 주었다. 내면의 실재를 탐색하기 위해서 붓다 자신이 훈련했던 가장 알맞는 기법은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 훈련으로서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는 방법이다.

호흡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주의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숨을 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흡은 명상의 대상으로서 누구든지 쉽게 채택할 수 있다. 호흡에 대한 자각을 훈련하기 위해서 명상가들은 앉아서 등을 세우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는다. 명상을 할 때는 가능한한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고요하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해야만 된다. 외부세계로 향해 있던 모든 주의와 의식을 내면의 세계로 돌림으로써 그 순간 숨을 쉬는 활동이 자신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이 되도록 한다. 그러므로써 자연히 호흡에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고 숨이 콧구멍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자신이 숨쉬고 있는 상태를 지켜보는 것은 호흡훈련이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자각(自覺)훈련이다. 의식적인 노력을 해서 호흡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숨쉬고 있는 상태가 거칠면 거친대로 부드러우면 부드러운대로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대로 자연스럽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가능한 한 자각의 고리를 깨뜨리는 분산된 의식없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호흡에 주의를 고정시킨다.

우리는 평소에 숨을 쉬고있는 상태를 의식하면서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식없이 그냥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활동에 새삼스럽게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면 상당히 어렵다. 마음을 호흡에 고정시키려고 노력하자마자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하고 어딘가 몸이 근질근질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지우고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기가 무섭게 천 가지 만 가지 생각들이 마음 속에 잔뜩 들어 찬다. 온갖 과거의 기억, 앞으로의 계획, 희망, 공포, 분노 등이 우리의 주의를 빼앗고, 잠시후면 호흡에 대해서 완전하게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다시 새롭게 결심하고 주의를 호흡에 기울이지만, 마음은 또다시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몰래 빠져나가 버린다.

훈련을 시작해보면 우리는 한 순간도 제대로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 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맬려고 해도 어느새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서 온갖 생각과 기억들로 채워버린다. 마음은 마치 버릇없는 어린 아이가 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다른 것을 만지고, 금새 또 싫증내고 다른 것을 만지는 것처럼, 마음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뛰어다닌다. 주의가 산만한 어린이가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몸을 비틀듯이 마음은 잠깐동안도 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하고 있는 마음의 실상이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나름대로 통제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대로 함께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자신의 본질을 연구하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달아나는 마음을 붙잡아 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적 습관패턴을 바꾸고 진정한 본질을 배워야만 된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정신적 습관은 주의를 호흡에 고정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 주의를 호흡에 고정시키려고 하 면 할수록 주의는 이리 저리 떠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주의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떠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즉시 차분하 고 참을성있게 다시 호흡에 집중시킨다.

그러나 잠시 후면 주의는 또 엉뚱한 데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긴장 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꾸준하게 반복해야 된다. 긴 세월을 쌓아온 인생의 습관이 단 몇 분 동안에 변화되지는 않는다. 자각훈련은 끊임없는 반복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인내심과 차분함을 요구한다. 이것이 본질에 대한 자각을 발달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이 바른 노력이다.

 

붓다는 네 가지 바른 노력을 설명했다.

1)악과 불건강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

2)만일 좋지 못한 마음상태가 일어나면 금지시킬 것.

3)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건강한 상태를 일으킬 것.

4)성장을 발달시키고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서 건강한 상태를 일으키되 거기에 빠지지 말고 그것을 유지시킬 것.

호흡에 대한 자각을 훈련함으로써 우리는 네 가지 바른 노력을 훈련한다. 바른 자세로 앉아서 방해하는 생각없이 호흡에 주의를 고정시킨다. 만일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에 끄달리지 말고 주의를 호흡으로 돌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분산되지 않도록 하는 마음의 능력을 발달시킨다.

 

 

바른 자각(正念)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바른 자각을 훈련하는 수단이다. 우리의 고통은 무지에서 나온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우리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반응한다. 마음은 언제나 싫고 좋은 감정에 끄달리고 미래를 두려워 하거나 욕망에 빠져서 환상과 착각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갈망과 혐오 속에서 현재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다. 우리는 과거에 살 수 없으며 미래에 살 수가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고, 미래는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시간이다.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살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현재의 순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항상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게 되고 미래는 언제나 도달될 수 없는 꿈으로 남게 된다. 오직 우리가 현재의 순간을 자각하는 능력을 개발할 때만이 비로소 과거는 미래의 행동을 지시하는 안내자로 쓰여질 수 있다. 현재의 순간을 통제할 수 있어야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현재를 자각하고 통제하지 못하면서 미래를 꿈꾸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므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참고자료로서는 가치가 있지만 과거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살기 보다는 과거를 살거나 미래를 산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고 뜬구름일 뿐이다.

붓다가 가르치는 법의 길은 지금-여기(here and now)의 길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 순간을 자각하는 능력을 발달시켜야만 된다. 우리는 바로 이 순간에 존재하는 우리자신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바로 이 순간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나’라고 하는 실재(實在)에 대한 자각을 발달시킨다. 호흡에 대한 자각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현 순간을 자각하게 된다.

호흡에 대한 자각을 발달시키는 또다른 이유는 우리는 우리자신의 본질적인 존재를 경험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호흡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무의식적인 마음을 의식으로 가져오도록 도와준다. 호흡은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호흡은 의식적으로도 기능할 수 있고 무의식적으로도 기능하기 때문이다.

호흡을 통제하기 위해서 호흡을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주의를 보다 쉽게 고정시키기 위해서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숨을 힘들게 쉬다가 점차 호흡에 대한 자각이 분명하게 고정되면 자연스럽게 힘들거나 부드럽게, 깊거나 얕게, 길거나 짧게 호흡이 이루어지도록 내버려 둔다. 그리고 더이상 호흡을 조절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호흡을 자각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자연적인 호흡을 자각함으로써 몸의 자연적인 기능을 관찰하기 시작하고, 대개는 무의식적인 활동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다소 의도적으로 시작되었던 거친 실재를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점차 자연적인 호흡으로 옮겨가는 보다 섬세한 실재를 관찰하는데로 나아간다. 즉 시작단계에서 거칠고 고르지 못했던 호흡에서 점차 고르고 부드러운 호흡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호흡에 대한 우 리의 관찰 역시 피상적인 모습을 넘어서서 보다 미묘한 본질적인 모습에 대한 자각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한다.

호흡에 대한 자각을 발달시키는 또다른 이유는 호흡을 자각함으로서 끊임없는 욕망과 미움과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다. 호흡은 그 사람의 정신상태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마음 의 어지러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이 평화롭고 차분하면 호흡이 규칙적이고 부드럽다. 그러나 마음에 분노, 미 움, 공포, 욕망 등 부정적인 것이 떠오르면, 호흡은 보다 거칠고 무겁고 빨라진다. 그러므로 호흡은 우리의 마음상태를 알리고 그 것을 조절하도록 도와준다.

자각을 훈련하는 대상으로 호흡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목적은 마음이 부정적인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단계가 순수하고 건강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조심해야 된다. 만일 우리가 주의를 집중시키는 대상이 평소에 우리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자각을 훈련하는 그자체가 원래의 목적과는 관계없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낡은 정신적 반응습관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

사마디(samadhi)를 발달시키는 초기 단계에서 부터 건강한 주의대상을 사용해야 된다. 호흡은 바로 그러한 대상이다. 호흡을 향해서 우리가 갈망이나 혐오를 가질 수는 없다. 호흡은 우리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대상과는 거리가 먼 성격의 활동이다. 그리고 호흡은 착각이나 환상과는 관계가 없는 실재다. 그러므로 호흡은 주의를 집중시키는 수단으로서 가장 적절한 대상이다.

마음이 호흡에 완전하게 맞추어진 순간에 마음은 갈망과 혐오와 무지로부터 자유롭다. 마음이 호흡에 완전하게 집중된 순간은 아무리 짧아도 강력한 힘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모든 조건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집중되자마자 누적된 모든 반응이 일어나고 그것은 신체적 정신적인 다양한 어려움으로 나타나서 자각을 발달시키는 노력을 방해한다.

때로는 그것이 뭔가를 갈구하는 욕망의 형태로 나타나서 참기 힘든 경험을 하게 되거나, 아니면 뭔가 진전이 느리거나 변화가 없다고 느끼면서 분노심이 일어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때로는 무기력에 빠지거나, 명상을 하기 위해서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지기도 한다. 어떤 때는 원인도 없이 안절부절하거나 명상이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기도 한다. 심지어는 회의론에 빠져서 자신은 명상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한다. 명상 도중에 갑자기 그러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훈련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그와 같은 장애는 호흡에 대한 자각훈련이 성공했을 때만이 그러한 반응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잘 견디어내면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반복해서 극복해가다 보면 작업은 더 쉬워지게 된다. 호흡에 대한 자각 훈련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의식이 호흡에 완전하게 맞추어질 때 마다 마음의 표면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그것을 잘 참고 견디면 마음은 표면에서 부터 점차 깊숙한 곳까지 깨끗하게 청소되기 시작하면서 해방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한다.

 

 

올바른 집중(正定)

호흡에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은 현 순간에 대한 자각을 발달시킨다. 가능한 한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러한 자각을 잘 유지하는 것이 올바른 집중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역시 효과적인 일처리를 위해서 집중력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집중을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감각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집중한다. 고양이는 쥐가 나타나면 덮칠 준비를 하고 쥐구멍에 주의를 집중해서 기다릴 수 있다. 소매치기는 다른 사람의 지갑을 훔치기 위해서 남의 주머니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무서운 동화책을 읽은 어린이는 밤에 괴물이 나타날 것을 상상하면서 방구석을 응시할 수 있다. 그러한 경우는 모두 올바른 집중이 아니다. 그와 같은 집중은 해방을 위해서 사용될 수 없는 집중이다. 집중은 모든 갈망과 혐오와 무지로부터 자유로운 어느 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

호흡에 대한 의식을 훈련하는 사람들은 의식을 깨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주의를 호흡에 고정시키겠다고 아무리 확고하게 마음을 먹어도 의식은 어느새 몰래 빠져나가 버린다. 우리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안되고 비틀거리는 사람과도 같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에 대한 무지와 착각에 취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나 미래, 갈망이나 혐오 속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의식을 받치고 있는 곧바른 길에 머무르지 못한다.

우리는 명상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울해 지거나 실망하는 대신, 긴 세월에 걸쳐서 뿌리깊어진 정신적 습관을 변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이해해야 될 것이다. 훈련은 반복해서 참을성있게 지속적으로 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가 비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호흡에 주의를 되돌리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방황하는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소중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흩어지는 주의를 되돌리고 다시 또 되돌리다 보면 점차적으로 망각의 기간이 짧아지고 의식의 기간이 길어진다.

집중력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이완되고 행복하고 충만된 에너지 를 느끼기 시작한다. 호흡은 조금씩 변화되면서 규칙적이고 부드 러워지고 가벼워진다. 때로는 호흡이 모두 멈추어진 것처럼 보이 기도 한다. 마음이 조화를 이루고 안정되기 시작하면 몸은 차분 해지고 신진대사는 느려지기 때문에 산소가 더 적게 요구된다.

이 단계에서 호흡에 대한 자각을 훈련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다양한 특이한 경험들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동안에 빛이나 환영을 보고 이상한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초감각적인 경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마음의 집중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의를 두어야 하는 대상은 호흡이다. 호흡 이외의 모든 것은 분산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경험은 사람에 따라서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다만 초감각적인 경험들은 훈련이 진전되고 있다는 이정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신경험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이정표가 시야에 가려져 있거나 있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곧장 나아갈 정도로 자신의 목적에 빠져 있을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중간과정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이정표를 마지막 목적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매달리면 진전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훈련을 한 아무런 보람도 없이 무익하고 이상한 감각경험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붓다가 가르치는 길을 가는것은 이상한 감각을 경험하고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자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호흡에만 주의를 두어야만 된다. 마음이 점점 집중될수록 호흡은 더 섬세해지고 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므로 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한 방법으로 마음을 갈고 닦아서 집중력을 날카롭게 하면서 내면 깊숙이에 있는 미묘한 실재를 관찰하기 위해서 외형적인 모습을 넘어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도구로 만들어야 된다.

집중력을 발달시키는 데는 많은 기법들이 있다. 어떤 단어나 시각적인 이미지나 신체적인 활동을 반복해서 수행하는것 등이 있다. 그렇게 하므로써 집중의 대상에 몰입하게 되고 더없는 초월의 상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집중상태가 지속되는 순간에는 즐겁고 황홀하지만, 그것이 끝나고 나면 이전과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기법들은 마음의 표면에서 기쁨의 층을 발달시키는 작용을 하지만 내면 깊숙이 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집중력을 얻기 위해서 사용되는 단어나 시각적인 이미지, 또는 신체활동과 같은 대상들은 순간 순간 변화하는 자신의 실재와는 연결성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얻어지는 기쁨은 자신의 온갖 마음의 찌꺼기를 걸러낸 정화된 마음의 깊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집중하는것 자체가 정신적인 성취는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위성과 착각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된다.

붓다의 가르침 안에서도 얻어질 수 있는 다양한 초월상태가 있 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여덟가지 정신적인 몰입상태를 배웠고 그것을 계속해서 훈련했다. 그러나 초월상태만으로는 붓다는 해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붓다는 집중력을 훈련하는 것은 통찰을 발달시키는 디딤돌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명상가들은 축복이나 황홀경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실재를 검증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조건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마음을 닦는다. 이것이 올바른 집중이다.

 

문답(問答) Q&A

Q: 호흡훈련을 할 때 단전이 아닌 콧구멍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 호흡은 위빠싸나 훈련을 위한 준비단계로 훈련한다. 위빠싸나 와 같은 유형은 특별히 강한 집중이 필요하다. 주의를 기울이는 영역이 제한될수록 보다 강하게 집중할 수 있다.

 

Q: 호홉을 자각하는 훈련을 하면서 숨을 세거나 들이쉴 때는 ‘안’이라고 하고 내쉴 때는 ‘밖’이라고 말해도 되는가?

A: 안된다. 호흡훈련을 하는 데 어떤 연속적인 언어화가 있어서 는 안된다. 만일 호흡을 자각하는 과정에 말을 보태면 점차 말이 지배적으로 되기 때문에 호흡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숨을 들이쉬거나 내쉬는 것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안’이라고 하거나 ‘밖’이라고 말하는 것은 관계없다. 그런 경우는 그 말이 만트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호흡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호흡만이 남는다.

 

Q: 집중훈련만으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가?

A: 집중훈련을 통해서 발달되는 마음의 순수는 일차적으로 조건 화의 제거가 아니라 억압에 의해서 성취된다. 그것은 마치 더러 운 물탱크를 명반과 같은 침전제를 넣어서 청소하는 작업과 같 다. 명반은 물 속에 떠있는 더러운 분자를 탱크바닥에 가라앉히 므로써 맑고 투명한 물을 만든다. 그와 비슷한 원리로 집중훈련 은 마음의 어두운 부분, 즉 미워하고 갈등하고 불안한 마음을 무 의식층으로 내려 보내고, 맑고 고요하고 순수한 마음이 의식수준 으로 떠오르게 만든다. 우리가 진정한 해방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의식층에 잠재된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해야만 된다.

 

Q: 과거와 미래를 잊고 오직 현재의 순간에만 주의를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결국 그것은 동물이 사는 방법이 아닌가? 분명히 과거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반복된 실수를 하게 되므로 남의 비난을 사게 되지 않겠는가?

A: 여기서 말하는 기법은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리거나 미래에 관 심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신적인 습관패턴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갈망, 공포, 계획속에 빠져서 현재를 무시하게 만든다. 지금-여기(here and now)에 존재하면서,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는 불건강한 정신적 습관은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과거나 현재에 자아실현을 성취했던 위대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성은 모두가 현재에 충실했다는 사실이다. 건강하고 효과적인 삶의 시작은 얼마나 현재의 순간에 충실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명상을 통해서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실재(Reality)에 확고한 발판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현재의 삶을 중심으로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이 적절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간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미 지나가고 없는 과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꼴이 되고 만다.

 

Q: 명상을 하면 마음이 방황스럽고 갈망으로 동요된다. 어떻게 다루어야 되는가?

A: 왜 갈망때문에 동요되는가? 갈망하는 사실을 그냥 받아 들여 라. ‘아 갈망하고 있구나.’라고. 그것이 전부다. 그러면 그것에서 벗어날 것이다. 마음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받아 들여라. 마음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아라. 그러면 마음은 자연히 호흡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갈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방황스러운 마음이 일어난다고 해서 긴장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또다른 혐오를 낳게 된다. 일어나는 그 마음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냥 바라보면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Q: 불교에서 하고 있는 모든 명상기법은 이미 요가에 알려져 있 다. 붓다가 가르치는 독특한 점은 무엇인가?

A: 오늘날 요가라고 부르는 것들은 실제로는 붓다 이후에 발달한 것들이다. 파탄잘리는 불멸 후 약 500년 경에 산 사람이다. 자연 이 파탄잘리에 의한 요가경전은 붓다의 가르침의 영향을 나타낸다. 물론 요가훈련은 붓다 이전에도 인도에서 알려져 있었으며, 붓다 역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그들과 함께 실험을 했다. 그 러나 요가의 모든 훈련은 8단계의 전념수준까지 모두 집중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도덕훈련과 집중훈련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감각 경험의 영역 안에 있다. 붓다는 9단계의 집중을 발견했는데 그것 이 모든 감각경험을 넘어서서 통찰을 발달시켜 명상가를 궁극적 인 목적으로 데려가는 위빠싸나다.

 

Q: 나는 수시로 남을 얕잡아 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은가.

A: 명상으로 해결하라. 만일 에고(ego)가 강하면 다른 사람을 얕 보려고 하고 상대방의 존재를 낮추고 자신을 올리려고 한다. 그 러나 명상은 자연적으로 그러한 마음을 용해시킨다. 그러한 마음 이 용해될 때 더이상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 다. 명상을 하라.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Q: 때로 나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A: 죄책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해로움을 일으킨다. 죄 책감을 갖는 것은 법의 길을 따라 사는 것과 관계가 없다. 자신이 잘못된 방식으로 행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행위를 판단하거나 숨기려 하지말고 단순히 받아들여라. 경우에 따라서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다음에는 명상을 하라. 그러면 오래지 않아서 자신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Q: 나는 왜 에고를 강화시키는가? 왜 ‘나’라고 하는 나를 만들려 고 하는가?

A: 그것은 무지로 인해서 마음이 조건화된 것이다. 그러나 위빠 싸나 훈련은 당신을 그러한 해로운 조건화로부터 해방시킬 것이 다. 항상 자아를 생각하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Q: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A: 첫단계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자기사랑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 훈련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까지도 사 실은 자기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누구를 사 랑하는가?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기 때문에 누 군가를 사랑한다. 나는 그가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그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그에 대한 나의 모든 사랑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나자신을 사랑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지적으로가 아니라 명상훈련에 의해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일단 직접적으로 깨달아가기 시작하면 자신의 이기심으로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 무언가 되돌아 올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하나의 길을 발달시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비뚤어진 우유퍼딩

아주 가난한 두 어린 소년이 이집 저집 걸식을 하면서 살았다. 그 중에 한 소년은 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장님이어서 다른 한 소년이 그를 도와주면서 함께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눈먼 소년이 병이 나서 쉬고 나머지 소년이 혼자서 두 사람 몫을 동냥하러 나갔다. 그날 소년은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얻어서 아주 행복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친구를 위해서 가져갈 그릇이 없어서 혼자서 다 먹게 되었다. 소년은 눈먼 친구에게 돌아와서 말했다. 

“오늘은 너무나 미안하다. 나는 오늘 너무나 맛있는 우유퍼딩을 얻었지만 너를 위해 서 가져올 수가 없었어.” 

눈먼 소년이 물었다.

“우유퍼딩이 뭔데?’’

“응, 흰색인데 우유가 흰거야.”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소년은 이해하지 못했다.

“흰게 어떤건데?’’

“흰것이 뭔지 모르니?”

“응, 몰라.”

“그건 검은것과 반대야”

그는 검은것이 어떤건지 역시 몰랐다.

“그래? 뭐가 검은건데?”

“응, 흰게 뭔지 알아봐라.”

그러나 눈먼 소년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흰두루미를 잡아서 눈먼 친구에게 가지고 와서 말했다.

“흰것은 이 새와 같은거다.”

앞을 못보기 때문에 눈먼 소년은 두루미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아, 이제 알겠다. 흰것은 부드러운 것이구나.’’

“아니 색깔은 부드러운 것과 관계가 없어. 흰 것은 흰거야. 이해하도록 애써 봐.’’

“방금 네가 두루미와 같은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두루미를 만져보니까 부드러운데 그래. 그러니까 우유퍼딩은 부드러운 것이고 흰 것은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는것 아니야?”

“아니, 너는 잘못 이해했어. 다시 해봐.”

다시 눈먼 소년은 두루미를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부리에서 목으로, 몸으로 꼬리 끝까지 지나갔다.

“아, 이제 알았다. 흰것은 꾸부러진 거구나. 우유퍼딩은 꾸불한 것이구나.”

소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무엇이 흰 것인지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현상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전에 한번도 깨달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먼저 온갖 어지러움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집중훈련을 통해서 정화하므로써 우선 마음의 눈을 뜨고 그리고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재를 경험해가야만 된다. 그렇지 않고 미움과 갈망과 불안과 갈등으로 덮혀진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비뚤어진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 제7장. 지혜의 훈련

 

제7장. 지혜의 훈련

제7장. 지혜의 훈련 도덕훈련이나 집중훈련은 붓다만이 가르친 유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훈련은 붓다 이전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던 기존의 훈련방법이었다. 붓다 역시 자유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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