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자각과 중도
자각(自覺)과 중도(中道), 이것이 위빠싸나 명상이다. 이 둘을 함께 훈련하는 사람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만일 이 자각(自覺)과 마음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쪽으로 기울지 않고 평형을 유지하는 객관적인 입장인 중도(中道)를 취하지 못하면, 마음의 낡은 습관을 깨뜨리고 해방으로 가는 길에 진전을 이루기가 어렵다.
자각과 중도는 마치 새가 날기 위해서 두 날개가 필요하고, 수레가 움직이기 위해서 두 바퀴가 필요한 것처럼, 깨달음에 있어서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다.
그리고 만일 수레의 두 바퀴가 한 쪽은 크고 한 쪽은 작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돌게 되듯이, 명상을 하는 사람이 깨달음의 길을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각과 중도를 함께 균형있게 발달시켜야 한다.
우리는 마음과 물질이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서는 일치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된다. 마음과 물질이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물리적 운동이나 사고와 같은 피상적인 측면을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 감각에 대한 자각을 발달시켜야만 하고, 자각된 감각 에 대해서 싫거나 좋다라는 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중도를 유지 해야만 된다.
만일 우리가 자각을 하고 있어도 중도가 없으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감각이 의식적으로 될수록 우리는 더 민감해지고 더 쉽게 반응하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고통이 증가된다. 그런 까닭으로 자각능력은 우수하되 중도의 태도를 기르지 못한 사람들이 가끔은, 명상 도중에 일어나는 감각에 끌려서 일순간에 일어나는 엄청난 분노나 슬픔, 즐거움이나 그 외 여러가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정서적 반응으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는 수가 있다.
그러한 현상은 반응의 크기에 따라서 잠깐동안 일어나다 말기도 하지만 심한 경우,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정서적 재앙을 입을 수 도 있다. 흔히 참선 도중에 산기(散機)를 입거나 참선 중에 눈에 띄는 정서적 행동을 하는 것은 대개가 자각능력과 중도능력의 불 균형에서 초래되는 현상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중도는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각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다면, 그때의 중도는 단지 피상적인 것이며, 실제로는 마음 깊숙한 수준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반응을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중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외형적으로는 똑같이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자각하는 정도가 다르다면, 감각을 자각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는 정도가 심하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나 싫고 좋은 결과를 더 오래 가지고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자각과 중도를 발달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식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그것은 또한 변화할 것이라는 진리를 이해하면서 의식한 감각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흔히 명상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런 의식적인 노력도 하지 말며, 무조건 앉아 있기만 하라고들 한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 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바른 노력, 그것이 바로 자각과 중도를 발달시키는 노력이다.
이것이 진정한 지혜다. 지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이해이고, 내면 깊숙이에서 진리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성취되는 이해이다. 이것 이 바로 붓다가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관찰하는 데서 일어나는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로서 우리는 고통으로부 터 벗어날 수 있다. 일어나는 모든 감각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무상(無常)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생겨 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무상을 이해할 때 모든 반응이 멈추고, 반응이 멈춤으로써 반응에 의해서 형성되는 모든 갈망과 혐오가 멈춘다. 실재를 어떻게 관찰하는가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자연히 고통을 창조하는 모든 행위를 멈추게 될 것이다.
과거 반응(行)의 축적 : 반응(行, 상카라 sankhara)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각을 자각하고 자각된 감각에 대해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도는 새로운 반응을 멈추는 방법이고, 새로운 불행의 근원을 멈추는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다루어야만 하는 또다른 차원이 있다. 이 순간부터 앞으로는 반응을 멈춤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의 불행의 원인을 창조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과거에 했던 반응의 총합인 축적된 조건화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축적된 과거반응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고 해도, 축적된 낡은 상카라가 여전히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킬 것이다.
‘상카라’ 라는 말은 형성하는 행위나 형성이 되는 행동, 둘 다를 의미하는 ‘형성(formation)’으로 번역될 수 있다. 모든 반응은 정신과정이 일어나는 순서에서 마지막 단계인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정신과정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응은 새로운 정신과정에서 첫번째 단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상카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조건화인 동시에, 반응의 결과가 되는 조건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조건화는 두번째 정신기능인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작용한다. 의식은 기본적으로 차별(差別) 또는 변별 능력이 없다. 의식의 목적은 단순히 마음과 몸에서 접촉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등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각은 접촉된 감각을 차별한다. 지각은 인지된 새로운 현상을 평가하고 범주화 하기 위해서 이미 저장되어 있는 과거 경험에 의존한다. 즉 우리가 그와 관련된 현상에 대해서 과거에 어떻게 반응했었는가에 따라서 새로이 접촉된 감각을 판단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과거의 반응들은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분별하는 핵심이 된다. 우리는 과거의 상카라에 따라서 새로운 경험을 판단하고 분류하게 되는 것이다.
갈망과 혐오의 반응들은 그와 같은 원리로서 현재 우리의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는 대신에 우리는 필터를 통해서 본다. 외부와 내면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과거의 조건화인 편견이나 편애에 의해서 왜곡되고 흐려진다. 왜곡된 지각에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중성인 감각이 즐겁거나 즐겁지 않은 것으로 바뀌게 되며, 바뀐 감각에 다시 반응하게 됨으로써 지각을 한층 더 왜곡시키는 새로운 조건화가 창조된다. 이와 같이 각각의 반응은 모두 과거에 의해서 조건화 되고, 그것은 바로 미래를 조건화 하는 미래반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상카라의 이중기능은 조건화된 발생의 연쇄고리에서 볼 수 있다. 연쇄고리에서 첫번째 정신과정인 의식의 발생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전제조건이 상카라다. 동시에 상카라는 의식, 지각, 감각 다음으로 일어나는 마지막 정신과정이다. 상카라는 연쇄 고리에서 감각에 이어서 혐오와 갈망의 반응형태(行)로 다시 나타난다.
갈망이나 혐오는 집착으로 발달하고 그것은 몸과 마음의 새로운 활동단계를 자극하는 힘이 된다. 그렇게해서 이와같은 정신 과정은 자체 내에서 저절로 공급되고 스스로 촉진되고 형성되어 간다.
모든 형성, 행(行), 즉 상카라는 새로운 업을 낳는 사건의 고리를 물고 끝없이 반복되는 새로운 사건고리인 악의 순환을 만들어간다. 우리가 반응하는 모든 순간은 정신적인 반응습관을 강화시킨다. 우리가 갈망하거나 혐오하는 순간들은 또다시 갈망이나 혐오를 계속해서 생성해내는 마음의 경향성을 강화시킨다. 한번 정신적 패턴이 형성되면 우리는 그 속에 잡히게 된다. 예를들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자. 그러면 자연히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감정은 그 사람의 인격에 근거를 두기 보다는 그가 자신의 욕망을 좌절 시켰다는 사실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자신의 욕망이 상황에 맞았는지 얼마만큼 타당한 것이었는지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좌절되었다는 사실이 무의식적인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과의 이후 접촉은 그것에 의해서 물이 들었고 즐겁지 않은 감정을 일으켰으며 그것이 다시 새로운 혐오를 낳고 혐오는 한층 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심지어 두 사람이 20년이라는 공백기가 지난 후에 만났는데도 까마득한 과거에 방해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즉각적으로 그 사람은 나쁘고 싫다는 감정을 일으킬 수 있다. 이미 그 사람은 20년 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변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경험에 근거해서 그를 판단한다. 이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과거 사건에 근거한 맹목적인 반응 때문에 생긴 편견으로 인한 잘못된 신념이다.
이번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누군가가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하도록 도와주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자신은 그를 좋아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그 사람의 인격을 주의깊게 고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어쨌든 그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은 무의식 속에 기록되고 즐거운 감정을 주면서 그 사람과의 이후 접촉을 물들였다. 물들여진 접촉은 보다 더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한충 더 그 믿음을 강화시켰다. 몇 년이 지나서 다시 만나도 똑같은 패턴은 새로운 접촉과 함께 반복된다. 우리는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오직 그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 정신적 조건, 즉 상카라는 즉각적으로 또는 먼 미래에 새로운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다시 다음 반응의 원인이 되고 그것이 더 많은 불행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이것이 반응의 반복과정, 고통의 반복과정이다. 실제로 우리는 감각에 반응을 하면서 마치 외부 실재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응한 것은 객관적인 외부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기관과 외부 대상이 접촉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감각에 반응한 것으로서 감각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지각에 의해서 조건화 되고 지각은 다시 우리의 과거 경험에 의해서 형성된 반응에 의해서 조건화 된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새로운 업을 만드는 작업을 멈춘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누적된 과거의 정신적 조건에 직면해야만 된다. 과거의 낡은 축적 때문에 반응경향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로운 불행을 낳는 무의식적인 반응 습관을 반복할 수 있다. 그러한 낡은 조건화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오래된 반응 습관을 뿌리뽑을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위빠싸나 명상과정을 보다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은 조건화를 뿌리뽑는 일
위빠싸나 훈련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그냥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감각이 왜 일어났는지 감각의 원인을 살필 필요는 없다. 다만 모든 감각은 내적인 변화를 암시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내적인 변화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며 마음과 몸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므로 몸에서 일어난 것은 쉽게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에서 일어난 것은 금방 몸으로 전달된다.
2장에서 논의했듯이 몸은 아원자 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 들은 매순간 엄청난 속도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입자들은 일어 나고 사라지면서 무한히 다양한 조합으로 물질의 기본적인 특질 (부피, 온도, 응집력, 운동)을 드러내면서 우리 안에서 전체 감각을 일으킨다.
아원자 분자의 생성에는 네 가지 가능한 원인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고 둘째는 우리가 사는 환경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마음의 상태 또한 아원자 분자의 생성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립자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과 우리가 사는 환경 뿐만 아니라, 현재 이 순간에 일어나는 정신반응이나 현재의 마음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반응으로 인해서 일어날 수 있다. 우리 몸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음식이 필요하다.
만일 음식공급이 중단된다면 우리의 육신은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다. 물론 얼마 동안은 몸 속에 저장된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지탱할 수 있지만, 저장된 에너지를 모두 쓰고 나면 몸은 붕괴되고 죽게 된다. 육신이 무너지면 신체적인 흐름은 끝난다.
같은 방법으로 마음은 의식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활동을 요구한다. 그와 같은 정신활동이 상카라다. 조건화 된 생성고리에 따라서 의식은 반응으로부터 일어난다. 즉 정신반응은 의식의 흐름에 자극을 초래한다. 몸이 그날 그날 일정한 간격과 일정한 양의 음식을 요구하듯이 마음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요구한다.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의식의 흐름은 한 순간도 지속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떤 특정한 순간에 혐오를 낳으면 다음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은 곧바로 혐오가 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혐오반응을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반복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새로운 입력을 계속 준다.
그러나 위빠싸나 명상을 훈련함으로써 반응하지 않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주의가 주어지는 순간에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상카라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에 새로운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 정신의 흐름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해도 의식의 흐름은 즉각적으로 멈추지 않는다. 누적된 과거의 반응들이 흐름을 지속하기 위해서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조건화 된 반응이 일어날 것이고, 거기에서 일어난 기본의식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져서 지속될 것이다. 과거의 조건화는 특정한 아원자 분자 유형을 일으키면서 몸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신체 내에 있는 감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감각을 싫어하는 것으로 반응하면 새로운 혐오가 창조된다. 그러므로써 우리는 의식의 흐름에 혐오라고 하는 새로운 입력을 주기 시작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축적된 과거 반응들이 의식수준으로 떠오를 때, 과거 반응 그대로 새로운 혐오반응을 저장하고 강화할 뿐이다.
그러나 만일 즐겁지 않은 감각이 의식표면에 떠올라도 싫다는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새로운 정신활동이 창조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과거 반응의 저장고에서 일어나는 정신활동은 지나가 버린다. 다음 순간에는 또다른 정신활동이 감각으로 일어날 것이다. 역시 그것에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마음의 평정과 중도를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의식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누적된 과거 반응들이 감각으로 나타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점차 감각을 향해서 자각과 중도를 유지하게 되고 과거의 조건화는 뿌리 뽑히기 시작한다.
혐오의 조건화가 남아있는 한 무의식적인 마음의 경향성은 삶에서 어떤 즐겁지 않은 경험을 만날 때 혐오로 반응할 것이다. 갈망의 조건화가 남아 있는 한 마음은 자연히 즐거운 상황에서 갈망으로 반응할 것이다. 위빠싸나는 이와 같이 조건화된 반응들을 없애는 작업을 한다. 우리가 명상훈련을 하다보면 때로는 즐거운 감각도 만나고 때로는 즐겁지 않은 감각과도 부딪치게 된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중도의 입장에서 싫다 좋다라는 반응을 하지않고, 모든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점차적으로 갈망과 혐오의 경향성을 약화시키고 파괴해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특정한 유형의 조건화 된 반응이 뿌리 뽑히면 우리는 뿌리 뽑힌 유형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모든 조건화 된 반 이 차례로 뿌리 뽑힐 때 마음은 전체적으로 해방된다. 이 과정을 잘 이해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으로 영원하지 않은것은 조건화 된 것이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본질을 가졌다. 만일 그것이 일어나서 소거된다면, 그것의 근절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온다. 모든 정신적 활동은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고 다음 순간에 다시 일어나고 끝없이 반복된다. 만일 우리가 지혜를 발달시켜서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하면 그러한 반복은 멈추어지고 근절이 시작된다. 마음의 층충마다 낡은 정신활동이 반응하지 않으므로 제거되기 시작한다. 정신활동이 제거되는 만큼 우리는 행복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의 행복을 즐기게 된다. 만일 과거의 모든 정신 활동이 근절되면 우리는 무한히 충만된 해방의 기쁨을 즐길 것이다. 그러므로 위빠싸나 명상은 우리가 몸의 조건을 수정하기 위해서 단식훈련을 하듯이 과거 조건화를 제거하기 위해서 마음의 조건을 바꾸는 일종의 정신적인 단식훈련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 삶을 통해서 모든 순간에 반응을 생성한다. 이제 우리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자각을 통해서 중도의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반응하지 않는 몇 순간을 성취하고 어떤 정신활동도 생성하지 않는 순간을 성취한다. 반응하지 않은 순간은 아무리 짧아도 그것은 아주 강력하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비록 너무나 짧은 한 순간의 성취라고 해도 그것은 마음의 흐름에서 반대과정을 시작하고 정화작업을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과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대해서 어떤 반응도 하지 말아야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이 어떤 것이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단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기만 해야 한다. 이러한 자각과 중도를 취하는 행동이 낡은 반응들을 제거한다. 마치 빛이 방안의 어둠을 몰아내듯이.
한번은 붓다가 엄청난 보시를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각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누군가 엄청난 보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불법이나 모든 깨달은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받아들여서 위안을 삼는 것보다는 못하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불법과 깨달은 사람을 진정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의지처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섯 가지 계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못하다. 그런데 그가 다섯 가지 계율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시간을 향해서 선한 의지를 배양하는 것 보다는 유익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했다고 하더라도 눈썹을 까딱 하는 찰나 동안 무수한 감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비 영원성 즉, 무상에 대한 각을 발달키는 것보다는 유익하지 못하다.
실제로 명상을 하다 보면 엄청난 잡념에 시달리다가 어느 한 순간에 몸 안에 있는 감각의 실재를 자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감각은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감각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반응하지 않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짧은 순간적인 경험이라고 해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참을성을 가지고 반복하다 보면, 그러한 몇 순간들의 중도적 자세가 증가하게 되고 반응하는 순간들은 상대적으로 감소할 것이다. 점차적으로 정신적 반응 습관은 부숴질 것이고, 오래된 낡은 조건화는 근절되면서 마음은 과거 현재의 모든 반응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 오게된다.
문답(問答) Q&A
Q: 오늘 오후에 나는 움직이지 않고 등을 곧게 세우고 오랫동안 앉아 있기에 쉬운 자세를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감각을 느 낄 수가 없었다.
A: 불편한 자세를 취해서 일부러 감각을 일으키려고 하지 말라. 만일 도움만 된다면 가시방석 위에라도 앉으라고 할 것이다. 그 러나 극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몸을 바르게 유지할 수 있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감각이 자연적으로 오게 두라. 그것을 강제로 일으키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일어나게 하라. 감각은 올 것이다. 감각은 우리 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전에 경험했던 감각을 찾고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밖의 다른 것일 수도 있다.
Q: 처음에 했던 자세는 움직이지 않고 오래 앉아 있기가 힘이 들 었는데, 지금 자세에서는 편안하기는 한데 감각이 이전에 비해서 미약하다.
A: 보다 편안한 자세를 발견한 것은 좋은 일이다. 이제 감각을 떠나서 본질로 가자. 아마 이제는 거친 감각이 사라졌으니 보다 미세한 감각을 다루어야만 된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 그것을 느낄 만큼 충분히 날카롭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서 얼마 동안 호흡에 대한 자각을 연습하라. 그것이 집중력을 증가시키고 미세한 감각을 느끼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Q: 나는 감각이 거칠면 좋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낡은 정신활동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A: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다. 낡은 정신활동도 아주 미세한 감각 으로 나타난다. 왜 거친 감각을 갈망하는가? 거친 것이나 미세한 것이나 무엇이 일어나든지 당신이 해야할 일을 그냥 관찰하는 것 이다.
Q: 어떤 유형의 감각이 어떤 유형의 반응과 연합되어 있는지 확 인해야 되는가?
A: 그것은 쓸 데 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다. 당신은 이미 위빠싸나라고 하는 비누를 받았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오직 마음의 얼룩을 제거하는것 뿐이다. 만일 당신이 특정한 감각을 찾는다면 당신은 지적인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와같은 주지화(注知化)는 당신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도와주지 못한다.
Q: 나는 누가 관찰을 하고 무엇이 관찰을 받고 있는 것인지 혼동 된다.
A: 지적인 대답이 당신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당신은 스스로 연 구해야만 된다. ‘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나’는 누구인 가? 계속해서 탐색하고 분석하라. 어떤 ‘나’가 오는지 보라. 만일 오거든 그것을 관찰하라.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아! 이 ‘나’는 착각이구나! 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Q: 긍정적인 정신적 조건화도 있는데 왜 그것을 뿌리 뽑아야 되 는가?
A: 긍정적인 조건화는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향해서 작업 하는 것을 동기화 시킨다. 그러나 그 목적에 도달되었을 때 모든조건화는 긍정과 부정의 이면에 남는다. 마치 그것은 강을 건너 기 위해서 뗏목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해 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지만 일단 강을 건너고 나면 머리 위에 뗏 목을 얹어서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다. 뗏목은 뗏목으로서의 제 목적을 다했다. 이제 더이상 뗏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뗏목은 뒤에 남겨두어야 된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자유로워진 사람은 조건화에 대한 아무런 필요성이 없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긍정적인 조건화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함 때문이다.
Q: 왜 우리가 위빠싸나 훈련을 시작할 때 불쾌한 감각을 먼저 경 험하고 나중에 유쾌한 감각이 오는가?
A: 위빠싸나는 먼저 가장 거칠고 순수하지 못한 감각을 먼저 뿌 리 뽑는다. 당신이 마루마닥을 청소할 때 먼저 큰 덩어리의 쓰레 기나 휴지조각을 줍고 나서 보다 깨끗하고 작은 먼지들을 닦아낸 다. 위빠싸나 훈련에서도 마찬가지다. 먼저 거친 마음을 제거하 고 점차 즐거운 감각으로 나타나는 미세한 것까지 제거해 간다. 그러나 조심해야 될 것은 유쾌한 감각에 대해서 반응을 하면 위 험하다. 그렇게 되면 즐거운 감각에 대한 갈망을 발달시키는 위 험을 갖게 된다. 즐거운 감각경험을 최종의 목적으로 삼지 않도 록 조심해야 된다. 당신은 모든 조건화된 반응을 뿌리 뽑기 위해 서 모든 감각을 오직 객관적으로 관찰해야만 한다.
Q: 우리는 우리의 더러움을 드러내고 그것을 씻어내기 위해서 위 빠싸나라고 하는 비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 비누가 다 떨어진 것을 느꼈다. 아침에는 훈련이 아주 강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오후가 되면서 나는 무력해지기 시작하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명상이 강해지니까 내 안에 있는 적(아마 에고)이 그 힘에 도전해서 나를 다운시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맞서서 싸울 만한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럴때는 어딘가 옆길로 비켜가는 방법이 있는가? 지나치게 투쟁하지 않고 피해가는 현명한 방법은 없는가?
A: 중도를 유지하라.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당신이 경험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방법이다. 명상이 제대로 되어가면 마음은 균형을 유지하게 되고 깊은 무의식의 속을 꿰뚫어 보게 된다. 그렇게 깊은 수준에서 작업을 하다보면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반응들이 혼들려서 마음의 표면수준으로 올라오게 되고 자연히 폭풍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덩어리를 만나게 되어 있다. 그 상황에서 중도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의 감각이 당신을 압도하기 때문에 더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중도적인 힘이 약하면 호흡에 대한 자각을 훈련하기 시작하라. 큰 폭풍을 만나면 닻을 내리고 그것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호흡이 당신의 닻이다. 그것을 가지고 작업을 하라.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그와 같은 부정적인 감각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닦아 낼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평형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쉽게 사라질 것이다.
Q: 실제로 내가 고통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훈련으로 그렇게 좋아진 것인가?
A: 만일 당신이 감각을 자각하고 그 자각된 감각에 대해서 균형 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때는 고통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당신의 훈련은 진전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훈련과정에서 반드시 아픔을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아픔이 없으면 아픔이 없는 그 상태를 받아들이면 된다. 당신은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만 관찰하라. 어제 나는 마치 온 몸이 녹는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진동의 덩어리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지금껏 나는 그 경험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았는데 그것이 다시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자연적으로 그 경험이 계속되기를 원했고 연장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변화했고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다시 돌아오도록 작업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오늘 아침에 나는 단지 거친 감각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그 경험을 얻기 위해서 노력함으로써 자신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특정한 경험을 얻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든 경험을 반응없이 관찰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훈련하는 것이다. 명상에서 중요한 것은 중도를 발달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직 바라만 볼 뿐이다.
붓다 당시에 지금의 봄베이에서 가까운 곳에 아주 거룩한 은둔자가 살고 있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순수함 때문에 그를 존경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해방된 사람으로 생각했다. 자신에 대한 칭송을 들은 은둔자는 자신이 정말로 완전히 해방된 사람으로 생각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직한 그는 자신을 깊이 검증한 결과 여전히 자신의 마음 속에는 맑지 않은 흔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분명히 맑지 않은 뭔가가 남아 있는 한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사바티에 살고 있는 붓다라고 불리는 승려가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며 그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가르친다고 대답했다.
은둔자는 그 길로 붓다를 만나서 완전히 해방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중앙인도를 가로질러서 마침내 사바티에 도착 했다. 그는 곧장 붓다의 명상센터로 가서 붓다를 찾았는데, 마침 붓다는 공양을 위해서 탁발을 하러 도시에 가고 없었다. 그는 붓 다의 제자들이 여독을 풀고 기다리라는 권유를 만류하고 붓다를 찾아나섰다. 은둔자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도시 한가운데로 나가서 거기서 먹을 것을 탁발하면서 집집마다 다니는 수도승을 만났다. 은둔자는 그 수도승에게서 풍기는 평화와 조화와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끼고 한 눈에 그가 바로 붓다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은둔자는 길 한복관에서 붓다에게 절을 하고 그의 발을 잡고 “스승이여, 나는 당신이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부디 저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말했다.
“그래, 내가 그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대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마. 그러나 지금은 적절한 시간도 장소도 아니니 내 명상 센터에 가서 기다려라. 곧 돌아가서 그대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아, 아닙니다. 스승이시여, 저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잠깐이면 된다.’’
“안 됩니다. 스승이시여. 저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그 사이에 제가 죽을지 스승께서 죽을지. 그러면 저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울 수 없습니다. 지금이 때입니다. 부디 지금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그를 보았다. ‘맞다. 이 사람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구나. 이 사람은 곧 죽을 사람이구나.’ 그런데 거리 한복판에 서서 어떻게 법을 가르칠 것인가? 붓다는 오직 몇 마디만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전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대가 보는 데는 오직 보는 것만이 있어야만 된다. 듣는 데는 듣는 것 뿐이고, 맛보는 데는 맛보는 것 뿐이고, 닿는 데는 오직 닿는 것 뿐이며, 인지하는 것에는 오직 인지하는 것 뿐이다. 여섯 가지 감각경험 가운데 어느 것을 통해서 접촉이 일어나도 거기에는 가치평가나 조건화 된 지각이 없어야 된다. 일단 지각이 어떤 경험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자신의 낡은 맹목적인 반응때문에 왜곡된 방식으로 세계를 본다. 모든 조건화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과거 반응에 기초해서 평가하는 습관을 멈추는 방법을 배워야만 된다. 그래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접촉을 아무런 평가나 반응없이 자각하는 것을 배워야만 된다.”
이 은둔자는 이와 같은 몇 마디가 그에게는 충분할 정도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길 옆에 앉아서 주의를 자신 안에 있는 실재에 고정시켰다. 아무런 평가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단순하게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에서 마지막 몇 분을 앞두고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는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