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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제10장. 삶의 기술

제10장. 삶의 기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편견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편견은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가정을 토대로 우리는 자아를 우주의 중심으로 만들면서 자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서 자아는 오직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아에 대해서 얼마만큼 과장을 해서 생각하든지 관계없이 시간과 공간적으로 무한한 우주에 비한다면 정말로 무시해도 좋은 정도다. 자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명백한 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 전부를 자기 충족을 찾는 데 바친다.

그러나 자의식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고통인가 하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욕구와 공포와 자존감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세상과는 단절된 자기라고 하는 좁은 감옥 속에 갇히게 된다. 그와 같은 자기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으로 속박에서 벗어나서 보다 본질적인 충족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생과 타인에게 개방된 세계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나 자기억압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방의 길이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실재가 순간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위빠싸나 명상법은 바로 그 통찰을 얻는 방법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모두 일시적이라는 본질을 스스로 경험하지 않고는 에고이즘에 사로잡히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단 영원성에 대한 착각이 무너지면 ‘나’에 대한 착각은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도 사라진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자아와 세계가 본질적으로는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해방의 문을 여는 열쇠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주제는 비 영속성에 대한 이해다. 그리고 붓다는 비 영속성, 즉 무상(無常)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기(生起)하고 사라지는 실재를 알고 하루를 사는 것이, 그것을 모르고 100년을 사는 것보다 낫다."

붓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쇠퇴하는 본질을 가졌으니 비 영속성에 대한 자각을 올바로 깨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비 영속성에 대한 진리를 단순히 지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비 영속성의 개념은 정서와 헌신적인 노력없이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내면에서 비 영속성의 실재를 경험해야만 된다. 비 영속성에 대한 경험적인 이해, 그리고 그러한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수반되는 에고의 착각과 함께 따르는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해탈로 이끄는 진정한 통찰이며 올바른 이해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도덕훈련과 집중훈련과 지혜의 훈련을 바 탕으로 해서 이와 같은 해방의 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훈련을 따라서 나아가지 않으면 진정한 통찰에 이를 수 없으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설사 그것이 순전히 고통의 본질에 대한 지적인 인식이라 하더라도 몇 가지 지혜를 가져야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이냐에 관계없이 그러한 이해 없이는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 자체가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귀한 팔정도로 나아가는 길에서 첫 두 단계는 ‘올바 른 이해’와 ‘올바른 사고’에 있다고 붓다는 말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어야 된다. 그것이 가능할 때, 법의 길을 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조절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계율을 지킴으로써 도덕훈련을 시작한다. 나아가서 도덕훈련을 바탕으로 집중훈련과 호흡에 대한 자각을 훈련함으로써 집중력을 발달시키면 서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몸을 통해서 감각 을 관찰함으로써 조건화 된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임상적인 지혜 를 발달시킨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이해가 일어날 때 다시 올바른 이해는 법의 길을 따르는 첫번째 단계가 된다. 위빠싸나 훈련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무상의 개념, 즉 비 영속성의 본질을 깨달아 갈망하고 혐오하고 무지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생각을 하는것은 불가능하다. 대신에 오직 모든 사람을 향해서 선한 의지와 자비와 고요함과 평화로 가득 찰 뿐이다.

그런데 도덕훈련으로 생기는 고요함은 집중력을 발달시키도록 돕는다. 그리고 집중력이 강해질수록 지혜의 관통은 쉽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훈련은 자유의 길로 인도하는 데 있어서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순환이다. 이 세 훈련은 서로를 지탱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세 개 중에 어느 것도 없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길이가 같아야 똑바로 유지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명상을 할 때는 도덕훈련과 집중훈련과 지혜훈련을 똑같이 발달시키기 위해서 함께 훈련해야 된다. 붓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바른 이해로부터 올바른 생각이 일어난다.

올바른 생각으로부터 올바른 말이 일어난다.

올바른 말로부터 올바른 행동이 일어난다.

올바른 행동으로부터 올바른 호구지책이 일어난다.

올바른 호구지책으로부터 올바른 노력이 시작된다.

올바른 노력으로부터 올바른 자각이 일어난다.

올바른 자각으로부터 올바른 집중이 일어난다.

올바른 집중으로부터 올바른 지혜가 일어난다.

올바른 지혜로부터 올바른 해방이 일어난다.

 

위빠싸나 훈련은 또한 여기-지금에 깊은 훈련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일상의 삶에서 마음의 중도를 위협하는 상황은 수없이 발생한다. 예상 못한 어려움이 일어난다. 예고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하고 비난한다. 결국 위빠싸나 훈련 자체가 일상의 삶에서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배를 조정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항해사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폭풍은 오게 마련이다. 문제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폭풍이 일어나는 자체나 문제가 발생하는 것 자체를 원망하고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대신에 적절한 방법으로 폭풍을 피해가고 문제를 해결해 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문제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해야만 된다. 무지(無知)는 고통의 원인을 외부 사건이나 사람을 비난하도록 만들고 외부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도록 만든다. 그러나 위빠싸나 훈련은 우리 자신 외에는 아무도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든다. 문제는 맹목적인 반응 습관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폭풍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된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외적으로만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의 수준에 조건화 된 반응 습관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진행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많은 부분들은 이해하기는 아주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자신을 관찰할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분노, 공포, 미움과 같은 부정적인 반응들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것을 관찰해서 인식하기 전에 대개는 그 감정에 압도당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기 쉽다. 그리고 뒤늦게 일이 터지고 나서 실수를 인식하고 후회한다. 그리고 다음에 또다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또는 분노의 반응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관찰하려고 시도하면 화가 난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분노가 이미 일어나 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은 오히려 분노를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인이나 상황과 분리된 정서를 관찰하는 것은 대부분 우리의 능력을 능가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인 실재를 연구함으로써 붓다는 마음에서 반응이 일어날 때마다 두 가지 유형의 변화가 신체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중의 하나는 호흡이 약간 거칠어지는 것으로 쉽게 외형적으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생화학적 반응과 감각이 몸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보다 미세하다. 그런데 적절한 훈련과 함께 평균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은 호흡과 감각을 관찰하는 능력을 쉽게 발달시킬 수 있다. 호흡과 감각에서의 변화를 우리는 그것이 위험한 힘으로 모이기 훨씬 앞서서 부정적인 반응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경고신호로 사용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호흡과 감각에 대한 관찰을 계속한다면 쉽게 부정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물론 반응 습관은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모두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명상훈련을 하다보면 반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관찰하는 경우가 있어진다. 점차적으로 관찰하는 순간이 증가하고 반응의 순간은 줄어들게 된다. 설사 우리가 부정적으로 반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반응 기간과 반응 강도는 감소한다. 마침내 아주 자극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호흡과 감각을 관찰할 수 있고 차분하고 중도적인 자세로 남아 있을수 있게 된다. 그러다보면 마침내 마음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부터 균형을 유지하는 중도의 자세로 진정한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진정한 반응은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다. 다른 사람의 부정성에 대해서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에 이를테면 우리가장 유익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분노에 이글거리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무지한 사람은 스스로 분노하고, 그 결과 두 사람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싸움을 일으킨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순간 차분하고 중도적인 자세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분노로부터 벗어나서 문제를 건설적으로 다루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의 감각을 관찰하면 우리가 부정적인 에너지에 의해서 압도당할 때마다 우리는 고통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분노에 휩싸인 사람에게 자비심을 느끼고 그들을 보다 불행하게 만드는 반응을 하기 보다는 불행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

자각과 중도를 발달시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되어가 는대로 내버려두는 무감각함이나 식물인간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데 몰두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해지는 것도 아니다. 법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복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복지 에 대해서도 책임을 갖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남을 돕는 데 필요한 행동은 무엇이든지 수행하면서도 항상 마음의 중도를 유지한다. 늪에 빠진 사람을 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정신을 못차리고 무조건 뛰어들어서 건져 내려다가 자신마저도 빠지고 말지만, 현명한 사람은 냉정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유지하면서 그 사람을 건질 수 있는 가지나 끈을 던져서 안전하 게 그를 끌어 올린다. 갈망과 혐오의 늪 속으로 남들을 따라 뛰어드는 행동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된다. 우리는 갈망과 혐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확고한 마음의 중도적 영역으로 데려와야 한다.

살다가 보면 때로는 강한 행동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거듭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부드럽고 점잖은 말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데도 그 사람이 충고를 무시한다고 하자. 그 사람이 분명한 말과 행동을 제외하고는 어떤것도 이해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행동하기 전에 우리는 마음이 중도를 유지하고 있는지, 잘못 행동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만 된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 행동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정말로 아무도 돕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자비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잘못 행동할 수가 없다.

우리가 만약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러한 불건강한 행동을 멈추게 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성적인 어떤 사람들은 희생자에 대한 동정을 하거나 공 격자에게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명상을 훈련하는 우리는 희생 자는 해로움으로부터 보호를 하고, 공격자는 자신의 불건강한 행 동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해롭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야 한 다. 두 사람에 대해서 동일한 자비심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강한 행동을 취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행동을 취하고 나서 단순하게 되돌아 보면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일 우리자신이 내면에서 평화와 조화를 경험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도 평화와 조화를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자비심을 갖되 냉철할 수 있어야 된다. 자각과 중도를 발달시키는 작업은 모두의 선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훈련이다.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긴장과 스트레스에 우리가 아무 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다. 우리 자신들의 부정적인 반응 습관이 바로 세상의 고통이며 그 고통의 원인이다. 마음이 순수해질 때 삶의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리고 진정한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문답 Q&A

Q: 나는 요가를 훈련하고 있다. 요가를 위빠싸나와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는가?

A: 요가는 신체 건강에 아주 유익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요가를 훈련하는 것으로써 감각을 관찰하기 위해 필요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트라와 시각화를 사용 하는 요가적인 명상기법은 전반적으로 위빠싸나에 도움이 안 된 다. 그 기법을 혼합해서는 안된다.

 

Q: 요가의 호흡훈련과 어떻게 다른가?

A: 요가는 신체훈련으로서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기법을 호 흡훈련과 혼합해서는 안된다. 호흡훈련에서는 자연적인 호흡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지 통제해서는 안된다. 요가에서 하는 호흡통제 훈련은 신체훈련이고 명상에서의 호흡훈련은 집중훈련이다. 

 

Q: 나는 터무니없이 깨달음에 집착되어 가는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A: 만일 당신이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다면 당신은 깨달음과는 반 대방향으로 가고있는 것이다. 집착을 하는 한 결코 경험할 수 없다. 단순히 깨달음이 뭔지 이해하라. 그리고 그 순간의 실재를 관찰하는 데 맞추고 깨달음이 오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러나 그것이 오지 않는다고 혼란되지 말아라. 당신은 그냥 자신의 일을 하고 결과는 법에 맡겨 두어라. 그렇게 한다면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고 결과는 반드시 올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은 그냥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다. 그것을 책임으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집착없이 하라.

 

Q: 어린이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법을 가르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출생 전이며, 임신 동안에 임산부가 위빠싸나를 훈련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어린이는 이미 올바른 태도와 올바른 생각 위에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시기를 놓쳤더라도 아이들과 법을 나눌 수 있다. 이를테면 위빠 싸나 훈련은 마음의 평화와 조화를 발달시키고 그것은 다른 사람 들과 나누는 친절한 정신발달 기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의 아이가 훈련을 하기에 너무 어리다면 당신의 친절함이 그들을 향하게 하라. 그러면 그들 또한 당신의 훈련결과로 유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서 어느정도 이해를 하게 되면 그들에게 맞게 설명해 주고, 보다 더 자라면 호흡을 훈련하는 법을 가르쳐 주라. 어떤 경우에도 강제로 억누르지 말고 잠깐 동안만 함께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고 그리고는 나가서 놀도록 하라. 그러면 명상은 그들에게 놀이처럼 될 것이다. 그들은 명상을 하는 것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신 스스로가 건강한 법의 삶을 살아야 된다. 당신이 자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당신은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는 평화스럽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야만 된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자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이다.

 

Q:  나는 편두통을 심하게 앓아 왔다. 이 기법을 통해서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A: 법의 목적은 신체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위빠싸나를 하는 목적이라면 당신은 병원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 다. 법의 목적은 인생의 모든 불행을 치료하는 것이다. 당신이 가 지고 있는 질병은 정말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작은 부분 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다만 정신적인 정화의 과정에서 오는 부산물로서이다. 만일 당신이 부산물로서 일어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다면 당신은 법의 가치를 너 무 감소시키는 것이다. 신체적인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훈련을 시작하라.

 

▶︎ 부록1. 붓다의 가르침에서 감각의 중요성

 

부록1. 붓다의 가르침에서 감각의 중요성

부록 I 붓다의 가르침에서 감각의 중요성 붓다의 가르침은 자기 변형을 위한 수단으로서 자신에 대한 지식을 발달시키는 체계다. 자기 본질의 실재에 대한 실험적인 이해를 얻음으로써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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