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부록1. 붓다의 가르침에서 감각의 중요성

부록 I

 

붓다의 가르침에서 감각의 중요성

 

붓다의 가르침은 자기 변형을 위한 수단으로서 자신에 대한 지식을 발달시키는 체계다. 자기 본질의 실재에 대한 실험적인 이해를 얻음으로써 우리가 그릇되게 행동하고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착각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는 실재와 일치되게 행동함으로써 생산적이고 유용하고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것을 배운다.

자각에 대한 설명에서 붓다는 자기 관찰을 통해서 자기 지식을 발달시키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그 기법이 위빠싸나 명상법이다.

‘대체 내가 나라고 부르는 이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인가’ 그 ‘나’라고 부르는 것은 신체적인 측면의 몸과 정신적인 측면의 마음인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두 가지를 관찰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몸과 마음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설명을 받아들이거나 단순히 머리로 이해되는 지식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타인의 설명이나 지적인 이해는 자기를 탐색하는 작업으로 이끌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자신 안에서 직접적으로 실재를 탐색하고 경험해야만 된다.

 우리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신체감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것을 느낌으로 몸의 실재를 경험한다. 우리는 눈을 감고 있어도 손이나 다른 신체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외형적인 형태와 내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듯이 신체구조는 외형적이고 객관적인 실재인 몸과 그리고 감각에 대한 내적, 주관적 실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책 안에 쓰여진 모든 단어를 읽어서 책을 소화하듯이 감각을 느낌으로써 몸을 경험한다.

감각에 대한 자각없이 신체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있을 수 없다. 감각에 대한 자각과 신체구조에 대한 지식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신구조도 마음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정서, 기억, 희망, 공포, 정신적 사건 등 형태와 내용으로 분리될 수 있다. 몸과 감각이 따로 분리되어 경험될 수 없듯이 마음을 마음의 내용과 별도로 관찰할 수 없다. 그런데 마음과 물질 또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쪽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붓다의 핵심적인 발견이고 붓다의 가르침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붓다는 그것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나 감각에 의해서 수반된다.’’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감각을 관찰하는 것은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포함하는 개인의 전 존재를 검증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실재에 대한 네 가지 차원 즉, 몸과 감각의 신체적 측면과 마 음과 마음의 내용인 정신적 측면은 모든 인간존재에게서 공통적 이다. 그것은 자각의 네 가지 영역을 제공하고 자각을 수립하는 네 가지 길이고 인간현상을 관찰하는 네 가지 관점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가 완성되려면 모든 측면이 경험 되어져야만 된다. 그리고 네 가지 모두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경험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붓다는 감각에 대한 자각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한다. 붓다는 “깨달은 사람은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 그것 의 즐거움, 그것의 위험,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봄으로써 모든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와진다.”라고 했다.

붓다는 감각에 대한 자각은 사성제(四聖請) 즉 무엇이 고통이 고, 무엇이 고통의 원인이며, 무엇이 고통의 멈춤이고, 무엇이 고 통의 멈춤으로 나아가는 깨달음의 길인가를 가르치는 네 가지 고 귀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감각은 무엇인가? 붓다는 그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했다. 붓다는 감각을 마음을 구성하는 네 가지 과정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정의하면 감각은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 둘 다를 가지고 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물질만 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예를 들면 시체는 아무런 감각이 없다. 감각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느끼는 것 은 신체적인 요소다.

신체적인 요소는 붓다의 가르침을 훈련하는 데 중요한 핵심이 다. 훈련의 목적은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모든 변화를 중 도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명상 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중도적 자세에서 관 찰하는 것을 배운다. 중도로 맹목적인 반응 습관을 깨뜨리고 어 떤 상황에서나 가장 유익한 행동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섯 가지 신체감 각과 마음인 여섯 가지 지각의 문을 통해서 부딪치게 된다. 정신 적인 현상이든 신체적인 현상이든 그 여섯 가지 문 가운데 어느 문에서나 접촉이 일어나자마자 감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의를 주지 않으면 우리는 감각 을 의식수준에서 자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무지의 어둠 속에서 감각을 향해서 좋아하고 싫어 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그 반응이 종국에 가서는 갈망 과 혐오로 발달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반응은 그것이 의식적인 마음에 부딪쳐 오기 전에 무수히 반복되고 강화된다. 만일 명상 이 의식적인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에만 중요함을 둔다면 우리는 이미 반응이 일어난 후의 과정을 자각하게 되고 그것은 우리를 압도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위험한 힘으로 모아진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반응을 소거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맹렬한 불을 타 오르게 하는 감각의 불꽃을 허락해서 불필요한 어려움을 만드는 결과가 된다. 반면에 신체 안에 있는 감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 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큰 화제를 일으키지 않고 불꽃이 스스 로 일어났다가 꺼져버리도록 만들 수가 있다. 마음의 의식수준에 서가 아니라 신체적인 감각수준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감각이 일어나자마자 감각을 자각하고 일어난 감각에 반응하는 무의식적 인 과정을 방지할 수가 있다.

신체적인 감각의 측면은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영원하지 않은 실재를 생생하고 확실하게 경험하도록 해준다. 감각의 변화는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바로 감각의 수준에서 우리 존재의 비 영원성이 경험 되어져야만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이 매우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그러한 인식은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너무나 일시적인 것에 애착해서 온갖 인간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분명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자동적으로 감각에 따르는 반응을 분리시켜 갈망이나 혐오반응을 신선하게 전환시킬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반응습관 자체를 제거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우리는 점차 고통스런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감각에 대한 자각이 신체적인 측면에 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 된다. 따라서 붓다는 신체감각을 통해서 비 영원성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체를 향해서 자각을 집중시키고, 불건강한 행동을 삼가고, 해야만 하는 일은 할려고 노력하는, 완전한 이해로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의 오염된 마음으로부터 자유롭다.

고통의 원인은 즐거운 감각은 갈망하고 즐겁지 않은 감각은 혐오하는 데 있다. 갈망하고 혐오하는 마음은 신체감각이나 마음이 일상 속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대상을 향해서 그것을 좋아하고 싫 어하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붓다는 우리가 부딪치는 대상 과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 사이에 그 둘을 연결하는 연결고 리(감각)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외부실재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감각에 반응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망과 혐오로 반응하지 않고 감각을 관찰하는 것을 배운다면 고통의 원인은 사라지기 때문에 고통은 멈추어진다.

따라서 감각을 관찰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훈련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관찰은 감각에 대한 자각을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서 신체적 감각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된다. 신체감각을 자각함으로써 우리는 문제의 뿌리까지 꿰뚫어 볼 수 있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감각을 관찰하는 중요한 핵심을 이해함으로 써 완성된 자각으로 가는 신선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붓다는 완성된 자각에 이르려는 목적을 존재의 순수함, 슬픔과 비탄의 초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소거, 진리의 길의 훈련,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등으로 언급했다.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몸은 몸으로 관찰하고, 감각은 감각으로 관찰하고, 마음은 마음으로 관찰하고, 마음의 내용은 마음의 내용으로 관찰 함으로써 세상을 향한 갈망과 혐오를 버리고 철저한 이해와 완전한 자각으로 머문다.”

몸은 몸으로 관찰하고 감각은 감각으로 관찰하고 마음은 마음으로 관찰하고 마음의 내용은 마음의 내용으로 관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빠싸나 명상을 하는 사람에게 그 표현은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몸, 감각, 마음, 정신적 내용은 인간존재의 네 가지 차원이다. 이 인간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해야만 된다.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을 하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사람은 완전한 자각과 철저한 이해능력을 발달시켜야만 된다. 그것을 ‘자각의 완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완전한 자각은 우리 내면 깊숙이에 서 ‘나’라고 부르는 것의 비 영원성에 대한 통찰과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각의 완성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본질적으로 순간적인 존재임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그러한 개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 해방으로 이끄는 올바른 자각이 확고하게 수립된다. 그 순간 갈망과 혐오는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외부세계를 향한 것 뿐만 아니라 자기 안의 세계를 향한 것도 마찬가지다. 갈망과 혐 오는 우리 안에 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본능적인 애착을 갖는다. 그와같이 무의식적인 애착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붓다의 ‘자각의 완성에 관한 말씀’은 먼저 몸의 관찰을 논의한다. 몸은 정신신체구조에서 드러 난 측면이 기 때문에 자기 관찰 작업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지점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감각의 관찰, 마음의 관찰, 정신적 내용의 관찰이 자연적으로 발달한다. 몸을 관찰하기 시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가장 공통적인 방법은 호흡에 대한 자각이다. 또 다르게 시작하는 방법으로는 몸의 움직임에 주의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출발을 어디서 어떻게 하든지 마지막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단계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또는 둘 다로든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는 몸에서 지나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고 지나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제 자각이 그에게 스스로를 “이것이 몸이다.”라고 드러낸다. 그때의 자각은 오직 이해와 관찰만이 남아 있는 정도까지 발달하고 그는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도 매달림 없이 분리된다.

위의 글에서 중요한 사실은 몸에 관한 언급이 몸의 관찰 뿐만 아니라 감각의 관찰, 마음의 관찰, 정신적 내용의 관찰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이다. 나중의 세 부분에서 ‘몸’이라고 하는 말은 ‘감각’ ‘마음’ ‘정신적 내용’으로 각각 대치된다. 위의 문장은 자각의 완성을 훈련하는데 공통적인 배경을 설명한다. 그러나 어렵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장에 관한 해석은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위의 문장을 감각에 대한 자각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려움은 사라진다. 자각의 완성훈련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포괄적인 통찰을 해야만 된다. 완전하게 관통을 하는 통찰을 하기 위한 수단은 감각에 대한 관찰이다. 감각에 관한 관찰은 인간현상의 나머지 세 차원에 대한 관찰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첫 단계는 다를 수 있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훈련은 감각에 대한 자각을 포함해야만 된다.

따라서 명상을 하는 사람은 몸의 내부든 외부든 아니면 둘 다 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즉 처음 시작할 때는 어떤 부분에서는 감각을 자각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자각을 못하지만 점차적으로 몸의 전 부분을 통해서 감각을 느끼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훈련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한동안 감각이 일어나고 지속되는 것으로 보이는 감각의 강한 본질을 경 험할지 모른다. 그리고 좀더 지나면 감각이 일어나고 얼마 후에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단계에서는 여전히 몸과 마음이 통합되어 있고 겉으로 보이기에 딱딱하고 지 속적인 본질인 외형적인 실재를 경험한다. 그러나 훈련을 계속하 면 딱딱함이 용해되는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진동의 덩어리로서의 진정한 본질을 경 험한다. 그러한 경험이 있을 때 이제 적어도 몸, 감각, 마음, 마음의 내용들이 정말로는 비 개인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는 점차적 으로 개인의 착각, 잘못된 생각, 편견을 파괴한다. 심지어 오로지 믿음이나 지적인 영역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던 올바른 개념도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인 실재를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요구한다. 점차 내면의 실재를 관찰함으로써 지각을 왜곡시킨 모든 조건화는 제거된다. 단지 순수한 자각과 지혜만이 남는다.

무지가 사라질 때 갈망과 혐오의 반응 경향성은 뿌리 뽑히고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집착이 제거되면 고통은 사라지고 해방된다.

“느껴지는 것은 무엇이나 고통과 관계되어 있다.”고 붓다는 자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감각은 고통에 대한 진리를 탐색하는 이상적인 수단이다. 즐겁지 않은 감각은 분명히 고통이다. 그러나 가장 즐거운 감각 또한 아주 미묘한 동요의 형태다. 모든 감각은 영원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즐거운 감각에 집착한다면 그 순간 즐거운 감각은 사라지고 고통만이 남는다. 모든 감각은 불 행의 종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붓다는 고통의 멈춤으 로 인도하는 길에 대해서 감각이 일어나는 길과 그 감각의 멈춤으로 인도하는 길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마음과 물질의 조건화된 영역 안에 머무르는 한 감각과 고통은 지속된다. 고통은 오직 궁극적인 실재를 경험하기 위해서 마음과 물질의 영역을 초월할 때만 멈추어진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에 정말로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법에 대해서 너무 많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법에 대해서 거의 들은 적이 없을 수 있지만 만일 그가 자신의 몸을 수단으로 자연의 법칙을 이해한다면 그는 진실로 법에 따라 살며 결코 법을 쉽게 잊어버릴 수 없다.

우리 자신의 몸은 진리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 자신 안에서 진리를 발견할 때 진리는 그들에게 진정한 것이 되며, 그들은 진리에 따라서 산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감각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얻을 수 있다.

 

▶︎ 부록2. 진정한 믿음 

 

부록2. 진정한 믿음

부록 II 진정한 믿음 일전에 한 신도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신과 인간이라고 하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설정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인간이 일방

mkmk.tistory.com

목차로 바로가기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