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각(正覺)에 이르는 바른 실천 [팔정도 바와나의 완성 단계]
부처님의 성도(정각 이룸), 오도송, 그리고 유언
부처님께서는 무상정등각(줄임말로 정각; 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신 후 당신께서 깨달으신 실상과 진리, 그리고 당신께서 수행하신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으로 정리한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사람들에게 설법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소수의 지배계층(브라만계급)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당시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갠지스강(항하恒河) 유역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마가다(Māgadha)국의 대중들이 사용하던 고대인도 민중어인 마가다어를 사용해서 설법을 하셨다. 그러나 마가다어는 사장되었고 마다다어와 가장 (거의) 유사한 고대인도어가 빠알리(Pāli)어인데, 이 빠알리어가 후대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 모음인 니까야(Nikāya)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빠알리어는 부처님 말씀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고대인도 민중어였기도 하다)
(참고로 2001년 기준으로 인도에는 총 3,372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이중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 중인 언어는 216개, 헌법이 인정한 지정 언어는 22개이다.)
니까야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언행록(言行錄;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을 적어 모은 기록)이다. 이 언행록에 실려있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부처님의 생활(行)은 매우 검소하고 소박하면서도 정갈하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설법(법法을 설명)하시는 부처님의 언어(言) 또한 매우 소박하면서도 적확(적절+명확)하다.
니까야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인 초전법륜경에서부터 마지막 설법인 대반열반경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하여 모아 놓은 빠알리어 경장(經藏; 경전 모음)으로 5부로 분류되어 있다. 5부 니까야는 '디가니까야(長部), 맛지마니까야(中部), 상윳따니까야(相應部), 앙굿따라니까야(增支部), 쿳다까니까야(小部)'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입멸(빠리-닙바나, 무여열반)하신 직후 얼마 동안은 제자 아라한들이 부처님 말씀(가르침, 법法)을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했다. 합창을 하면 한 사람이 틀린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대한 변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아라한의 수가 줄어들고 전쟁 등의 장애요소가 생기고 부처님 말씀(가르침, 법法)을 전파하는 지역이 넓어지면서 문자로 기록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겼다.
빠알리어로 기록된 니까야를 산스크리트어로 옮겨서 편찬한 경전 모음을, 이른바 대승경전(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등)이 중국어(한문)로 번역되던 AD 5세기 경 이후에, 중국에서 번역 편찬한 경전 모음이 아함경(阿含經)이다. 아함(阿含)은 산스크리트어 아가마(āgama)를 중국어(한문)로 음사한 것으로 법장(法藏) 또는 전교(傳敎)라고 한역된다. 산스크리트어 아가마(āgama)의 뜻은 전승(傳承), 즉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전해져 내려왔다는 뜻이다. 아함경(阿含經, 아가마 수트라)은 '붓다의 말씀(가르침, 법法)을 전하는 경전 모음'이라는 뜻이다. 아함경은 장(長)아함, 중(中)아함, 잡(雜)아함, 증일(增一)아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까야와 아함경은 생각보다 꽤 차이가 있다. 그 원인은 첫째, 옛날에는 요즘처럼 정보의 전달이 상대적으로 원활하고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보다 번역 시 오류가 상대적으로 많다. 둘째, 산스크리트어로 편찬된 불교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하던 시대의 중국인들은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과 같은 주요 대승경전에 비해서 아함경을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함경의 번역에 상대적으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고 번역이 상대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고 허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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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성도(成道; 정각 이룸)
부처님께서 팔정도 바와나를 완성하셔서 정각을 이루시기 전후의 과정, 이른바 부처님의 성도 과정은 맛지마 니까야(中部)의 36번째 경(M36)인 <삿짜까 경, Saccaka Sutta, M36>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 경(삿짜까 경)은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가 질문한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에 관한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경이다. 이 질의 응답 중에 부처님께서 당신이 깨달음을 이루는 전후 과정을 삿짜까에게 설(설명)하신 내용이 있다.
이 경전(삿짜까 숫따)에 있는 부처님의 성도 과정에 관한 내용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행자를 위한 몸과 마음, 사념처의) 단계별 길들임 경, Dantabhūmi Sutta, M125>과 <성구경(聖求經; 성스러운 참구의 경), Ariyapariyesanaa Sutta, M26>을 함께 반영해서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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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보살은 출가하여 찾아갔던 (삼매에 의한 해탈을 가르치는 요가수행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라는 두 분의 스승에게서 삼매(사마디, 定)에 드는 수행을 배워서 두 분 스승이 성취한 경지(단계)의 삼매를 모두 성취했다.
"가장 높은 경지(단계)의 삼매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매에서 나온 후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번뇌는 되살아나고 생사의 의문도 여전히 풀리지 않으니, 이는 완전한 해탈과 열반이 아니다. 이 법은 빤냐(반야; 바른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못 된다.”
- <성구경(聖求經; 성스러운 참구의 경), Ariyapariyesanaa Sutta, M26>
그 후 고타마 보살은 고행에 의한 해탈을 가르치는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고통스러운 수행을 하였으나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 고타마 보살은 자신의 수행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해탈과 열반)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수행을 모색했다. 부처님이 되신 후, 당신께서 정각을 이루기 위해 하신 수행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으로 정리하시어 '팔정도(다른 표현으로 중도中道) 바와나(계발 수행)'라 칭하시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셨다.
"이제 나는 우유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모든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마음의 탐색작용(위딱까)과 회귀반성작용(위짜라)이 아직 있는 상태(마음의 미세한 진동 또는 동요가 아직 있는 상태)에서, 신체감각(오감각)을 멀리 떠난 삼매에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를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를 가라 앉힌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비교적 거친) 희열(삐띠)을 가라 앉힌 삼매에서 생겨나는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괴로움(둑카)도 즐거움(숙카)도 뛰어넘은 깊은 삼매에서 생겨나는 깊은 고요함(평정; 우빽카)과 깊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이와 같은 선정에 들었다 나옴으로써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상기하여 관찰했다. 한 생, 두 생, 열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우주)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여러 겁의 여러 삶들을 관찰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용모, 신체)을 가졌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행복과 어떤 고통을 경험했고 어떤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과 모습을 가졌고... 이처럼 한량없는 인과 연기적인 전생의 삶들을 상기하여 깊이 관찰했다. …그리고 이렇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 이것이 내가 초경(初更)에 도달한 첫 번째 지혜다." [이른바 숙명명(宿命明)]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이러한 지혜(숙명명)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 삶(중생; 생명의 무리)과 모든 존재들의 생기 소멸(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한 눈으로 인간을 뛰어넘어 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 이것이 내가 이경(二更)에 도달한 두 번째 지혜다." [이른바 천안명(天眼明)]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에 대한 관찰과 사유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것이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의 실존 양상(실상)인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삼사라(순환; 윤회)다'[고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중생의 실존 양상(고苦의 순환)이 발생하는 원인이다'[집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와 삼사라(순환; 윤회)의 소멸이다'[멸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와 삼사라(순환; 윤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도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이른바 아라한도의 혜慧 해탈),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했다. 그리하여 모든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혐오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이른바 아라한과의 심心 해탈).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다(이른바 아라한과의 혜慧 해탈).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생사 순환(삼사라;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나는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내가 삼경(三更)에 도달한 세 번째 지혜다." [이른바 누진명(漏盡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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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고타마 보살은 먼저 사선정(四禪定)에 들었다 나와서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고, 맑고, 밝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타마 보살은 인과 연기적인 과거 생의 일들을 상기하여 깊이 관찰하고, 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깊이 관찰하고, 번뇌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깊이 관찰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과 세상(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상)을 '있는 그대로' 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달리 표현하면 사념처(四念處, 신수심법身受心法;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거친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 현재에서부터 과거(12연기 역관), 현재에서부터 미래(12연기 순관), 안과 밖,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 저열한 것과 수승한 것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하고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했다.
그리하여 고타마 보살은 초경에 첫 번째 밝은 지혜(명지明知)인 숙명명를 이루고, 이경에 두 번째 명지인 천안명을, 그리고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한 후 삼경에는 마침내 지고(至高)의 밝은 지혜(명지明知)인 누진(멸진)명을 이루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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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註]으로 정각을 증득한 후, 반조에 들어가서 4주(또는 7주) 동안, 모든 고(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지고의 행복(至福), 완전한 행복, 열반락 속에서 좌선과 경행을 반복하며 반조하고,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의 성취를 반복하며 정각의 증득을 반조했다. 이렇게 고타마 보살은 고타마 붓다가 되셨던 것이다.
부처님의 성도(정각 이룸)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모든 괴로움과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 완전한 자유)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빠알리어: 닙바나Nibbana,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 완전한 행복)을 실현한 것이다. 성도하기 이전의 고타마를 보살이라고 하고, 붓다(Buddha, 부처; 깨달은 자)가 되신 후에는 세존(世尊, 바가와Bhagavā, 바가바트Bhagavat)이라고 존칭(尊稱)되었다.
보살(菩薩)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보디삿따(Bodhisatta,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한문으로 음사한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줄임말이다. 보디삿따(보디사트바; 보리살타, 보살)는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자'를 지칭하는 고대인도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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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 : 삼명(三明)을 이루면 정각을 증득한 자(부처, 아라한)가 된다. 삼명이란 정각(또는 아라한과)을 성취한 사람이 갖게 되는 세 가지 밝은 지혜인데, 한문 경전에서는 숙명명, 천안명, 누진명(또는 멸진명)이라고 번역했다
(1) 숙명명(宿命明) : 고타마 보살은 현재에서부터 과거를 통찰(깊이 관찰)하여 갖게 된 숙명명으로 인과 연기적인 업(業)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지나온 과거 생을 상기하여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하고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지혜로, 인과 연기적인 업(業; 깜마Kamma, 카르마Karma)에 대해 완전히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과거 여러 생에 걸친 전생을 한문으로 숙세(宿世)라고 한다. 즉 숙명명은 겹겹이 쌓인 과거 전생의 인과 연기적인 업을 '있는 그대로' 통찰(깊이 관찰)하여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인과응보의 법칙 또는 업의 법칙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보고 완전히 바르게 아는 것이다
(2) 천안명(天眼明) : 고타마 보살은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을 통찰(깊이 관찰)하여 갖게 된 천안명으로 우주자연의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 자연의 이치/법칙)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거리의 가깝고 멀고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의 모든 고락(苦樂)의 모습(相)과 물질(色; 루빠rupa, 물질작용)과 정신(名; 나마nama, 정신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분석 사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지혜로, 연기의 실상과 연기의 진리에 대해 완전히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미시(찰나)-일상-거시(성주괴공, 생로병사)적으로 매 순간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의 순환(삼사라samsara; 윤회輪廻-바퀴처럼 돌고 돎)을 계속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고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요컨대 천안명은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하고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다.
숙명명과 천안명은 모든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 무생물)의 실상(실제 모습 또는 실존 양상)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한다.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그래서 세간(감각적 욕망의 세계; 욕계)의 조건 지어진(conditioned, saṅkhāra) 부질없는 것들에 집착한다. 중생은 그런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무명(인식의 착각, 그리고 그로 인한 전도된 생각)과 집착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생사의 순환(삼사라samsara; 윤회)을 반복하며 근원적 괴로움(둑카dukkha)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3) 누진명(漏盡明) : 고타마 보살은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여 갖게 된 누진(멸진)명으로 사성제를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정각을 증득한 자(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 부처)가 되었다.
이른바 숙명명으로 숙세의 연기적 인과관계(업)를 꿰뚫어 보고, 천안명으로 자신과 중생(생명의 무리)의 실존 양상(실상)을 꿰뚫어 보게 되면[고성제],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샹; 연기의 실상)과 진리(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완전히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왜 그런 실존 양상을 갖게 되는지 그 근본 원인을 완전히 꿰뚫어 보게 된다[집성제].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알기 때문에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게 된다[멸성제].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괴로움(고통, 번뇌)을 근원적으로 다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중생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그 길(팔정도)을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완전히 바르게 아시게 되었던 것이다[도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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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오도송
부처님께서 정각(正覺; 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신 후 읊으신 이른바 부처님의 오도송은 부처님의 설법 게송을 모은 경전인 <담마빠다(Dhamma-pada)>에 포함되어 전해지고 있다.
<담마빠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숫따니빠따(Sutta Nipāta)>와 함께 쿳다까 니까야에 포함되어있다. <담마빠다>는 여러 언어로 번역이 많이 되었는데, 한문 번역본으로는 <법구경(法句經)>과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이 대표적이다.
부처님께서 고대인도어로 읊으신 오도송과 그에 대한 한글 번역은 아래와 같다.
Dhammapada 153
Anekajā-ti-saṃsāraṃ 수많은 생을 윤회(saṃsāra)하면서
sandhāvissaṃ anibbisaṃ 나는 보지 못한 채 치달려 왔네
gahakāraṃ gavesanto 집 짓는 자 찾으면서
dukkhā jāti punappunaṃ 괴로운 생(dukkhā jāti)은 거듭되고 또 거듭되었네
Dhammapada 154
Gahakāraka diṭṭhosi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 보여 졌구나
puna gehaṃ na kāhasi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sabbā te phāsukā bhaggā 모든 서까래는 부러졌고
gahakūtaṃ visankhataṃ 대들보는 해체되어 쓰러졌네
vi-sankhāra-gataṃ cittaṃ 마음(citta)은 업 형성 작용(sankhāra)을 멈추었고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갈애(taṇhā)는 부서져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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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서까래는 모든 ‘번뇌’, 대들보는 ‘무명’에 대한 비유인데, 마치 대들보가 모든 서까래를 받치고 있듯이 무명이 모든 번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오염원이라는 의미다.
부처님께서는 바른 수행을 통한 바른 통찰(깊은 관찰)에 의하여 갈애(taṇhā)라는 ‘집 짓는 자’를 발견하고 서까래라는 모든 번뇌를 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무명이라는 대들보도 해체하여 제거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음(citta)의 업 형성 작용(sankhāra)이 멈추어서 다시는 윤회(saṃsāra)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른 수행을 통한 바른 통찰(깊은 관찰)에 의해서 갈애(딴하tanha)와 무명(아윗짜avijja; 실상과 진리를 완전히 자각하지 못함)이 윤회(순환; 삼사라saṃsāra)의 원인임을 밝혀내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윤회의 삶은 갈애와 무명 때문에 좁쌀만 한 아(我, ego)의 세계에 갇혀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탐진치에 매달려 아등바등 거리며 흘러간다. 이것이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들의 실존 양상이다.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증득하신 후 다섯 비구에게 하신 첫 설법에서, 중생의 실존 양상인 고(苦; 둑카)의 순환(삼사라; 윤회)을 설하셨고, 그런 실존 양상의 원인(集)을 설하셨고, 고(苦)의 순환에서 벗어난 상태(滅)를 설하셨고, 고(苦)의 순환에서 벗어난 상태(경지)로 가는 길(道)인 팔정도와 그 길(팔정도)을 계발하는 수행인 팔정도 바와나를 설하셨다. 이 첫 설법을 초전법륜이라고 한다.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는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증득하신 후 자신의 수행경험을 '경험적+합리적'으로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수행이다. 팔정도 바와나는 '정각으로 가는, 달리 말하면 정각을 증득한 자(붓다, 아라한)가 되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줄임말로 팔정도)을 바와나(계발)하는 수행이라는 뜻이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완성하여 정각을 증득한 자가 되면 팔정도는 더 이상 계발해야 하는 수행이 아니라 생활, 삶 그 자체가 된다. 부처님을 포함하여 정각을 증득한 아라한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여느 선사나 도사들처럼 대오각성하여 어디에도 걸림 없는 대 자유를 얻었다고 오도송을 고성방가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막행막식(幕行幕食)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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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지고(깨달음)의 자리에 ‘하나’를 세웠다.
어떤 이는 지고(깨달음)의 자리에 '공(空)'을 세웠다.
; 중관(中觀) 학파, 오직 공(空) 학파, 금강경파
어떤 이는 지고(깨달음)의 자리에 '식(識)'을 세웠다.
; 유식(唯識) 학파, 오직(唯) 식(識) 학파, 금강경파, 화엄경파
어떤 이는 지고(깨달음)의 자리에 '법신(法身)'을 세웠다.
; 청정법신(法身) 비로자니불 = 아미타불, 법화경파, 정토경파
어떤 이는 지고(깨달음)의 자리에 '본래면목'을 세웠다.
; 선종파 .. 노장파, 도가도비상도파, 불립문자파, 화두파
어떤 이는 지고(깨달음)의 자리에 ‘대아(진아)’를 세웠다.
; 대아, 진아, 우주아, 우주의식, 우주식.., 브라만 논사파, 힌두 논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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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싯달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아무 것도 세우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진정(眞正)으로 완전히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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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유언
살아 생전에 종교(Religion) 창시지가 되기를 거부하는 의사를 누누이 밝히고 강조하신 고타마 싯달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 BC 624 ~ 544)께서는 당신 사후에 당신에 대한 우상화(형상의 우상화, 부처의 신격화)와 가르침에 대한 우상화(관념의 우상화, 가르침의 절대화)를 통해서 종교, 종파 등을 만들고 그것에 집착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경계하셨다.
오늘날 여러 불교의 여러 종파(예컨대 밀교, 금강승불교, 티벳불교, 카담불교, 부탄불교, 중관불교, 유식불교, 선종,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 조계종, 천태종, 태고종, 원불교..)와 여러 전통(예컨대 씨암파, 아마라뿌라파, 라만냐파.. 마하니까야파, 담마유트니까야파.. 수담마파, 쉐진파, 아짠문 전통, 아짠차 전통, 마하시 전통, 쉐우민 전통, 모곡 전통, 순룬 전통, 우바킨 전통, 파옥 전통..) 등은 부처님께서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 불교인들이 만든 것이다.
바른 불자(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는 자)라면 이들 종교집단의 소위 유명하다는 어느 한 사람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찾아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사유해서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은 참고서일 뿐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모든 스승들은 AT(Assistant Teacher, 보조교사)일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뗏목, 안내판에 비유하면서 바른 수행(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이 어느 단계 이상으로 깊어지면 당신의 가르침조차도 다만 참고서일 뿐, 각자 스스로의 바와나빤냐(수행지혜/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완성하라고 누누이 당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입멸하시기 전까지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시며 당부하셨다.
"너희들은 자신(Atta)을 자신의 섬(dīpa*)으로 만들지 다른 어떤 것도 의지처(dīpa)로 삼지 말라. 너희들은 담마(Dhamma, 붓다의 가르침, 진리; 法)를 자신의 섬으로 만들지 다른 어떤 것도 의지처로 삼지 말라.”
한문 경전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註] : 고대인도어 dīpa*는 ‘섬(또는 의지처)’과 ‘등불(燈)’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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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법륜경에서부터 대반열반경에 이르기까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하신 가르침의 시작과 끝은 팔정도다.
꼰단냐를 비롯한 최초의 다섯 제자들에게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팔정도)을 설하신 초전법륜의 사성제('고집멸도'성제) 가르침을 시작으로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에게 팔정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의 실천을 간곡히 당부하시는 마지막 가르침까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하신 가르침의 시작과 끝은 팔정도다.
반열반(무여열반, 입멸)을 앞두신 부처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팔정도와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수밧다에게 가르치실 시간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며 마지막 제자 수밧다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히 당부하셨다.
"수밧다여, 팔정도가 없으면 첫 번째 ~ 네 번째 사문(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 또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도 없느니라. 수밧다여, 팔정도가 있으면 첫 번째 ~ 네 번째 사문(사부대중;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도 있느니라"
"수밧다여, 부디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는 사람들(또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 사문)과 함께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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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듯이, '팔정도'(정각으로 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와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지 않는 사람과 집단은 '부처님의 사문(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불자; 또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 승가, 절, 사찰)'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가르침을 지식으로만 공부하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실천법(수행법)인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직접 바르게 실천하여 스스로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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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시는 과정(부처님의 성도 과정)'과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후 읊으신 게송(부처님의 오도송)' 그리고 '부처님의 유언'을 오늘날의 용어를 함께 사용해서 우리말로 소상히 옮긴 것입니다.
- 다음 글 : 정각(正覺)에 이르는 바른 실천 [마무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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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상) : 부처님의 성도(成道; 정각을 이룸)
사진(좌하) : 불전 문학에는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셨을 때 보리수 나무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묘사한다.
사진(중하) : 담마빠다(Dhamma-pada)는 부처님의 오도송을 비롯하여 부처님께서 읊으신 설법 게송을 모은 경전이다.
사진(중하) :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은 부처님께서 고대인도어로 남기신 유언의 키워드인 "Atta dīpa, Dhamma dīp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