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아는 것(앎, THE KNOWN),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 진실로 안다고 믿고 있는 것(예컨대, 사랑, 우정, 미움, 분노, 기쁨, 슬픔, 행복 ... 신념, 믿음 ... '나' 등)에 대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소위 산파술이라는 끝없는 질문, '사랑'이란 무엇인가? .. '행복'이란 무엇인가? ... ... '나'란 무엇인가?라는 등의 질문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산파술이라는 끝없는 질문을 한 뒤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 말은 앎(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의 착각, 특히 '나에 대한 앎'(자아식)의 착각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앎(식識)의 착각을 피상적이나마 이해하고 서양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그 착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서양사람들에게 '서양철학의 아버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서양철학의 아버지이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자 세계 4대 성인(聖人) 중의 한 사람으로 서양사람들에게 추앙 받는 소크라테스 조차도 앎(식識; 의식/일상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의 착각, 특히 '스스로(自) 나(我)라는 앎(식識), 자아식(自我識)' 또는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의 착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되지 못했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는 것(앎)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THE KNOWN'을 이루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물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아느냐?" 이때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또 다른 유명한 말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처럼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바르게 알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다이몬이라는 신(일종의 영혼의 신격화, 신격화된 영혼 또는 일종의 귀신)과 다이몬의 윤회를 믿었고, 인간이 경험하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세계의 배후에 영원히 변치 않는 완전한 실체의 세계이자 절대적이고 완전한 지선(至善)의 이상세계(이데아의 세계; 다이몬들을 비롯한 신들이 거주하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믿음)를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들(다이몬과 이데아의 세계)을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과 아테네 시민들에게 가르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소트라테스는 자신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이몬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하면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인간의 내면에 있는 다이몬을 믿고 섬겨야 하며 다이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소크라테스는 두 차례에 걸친 아테네의 재판 절차를 거쳐서 독배형을 선고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기소장에 따르면 그의 죄목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아테네 시민이 믿는 신이 아닌, 동방(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이교도의 신 다이몬을 섬긴 것. 둘째, 다이몬을 섬기도록 아테네 젊은이들을 부추김으로써 그들을 타락시킨 것. 다이몬(daimon)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인 데몬(demon)은 오늘날 '악마 또는 악령(惡靈; 악한 영혼 또는 악한 귀신)'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의 윤회'와 '이데아의 세계'를 굳게 믿었고, 자신은 자신의 지성으로 이데아의 세계를 아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에 죽으면 자신의 다이몬(신격화된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자신의 지성으로 이데아의 세계를 아는 지혜를 가진 다이몬들을 비롯한 신들이 거주하는 세계)에 반드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이 어리석지만 확고한 믿음이 (아테네 위정자들이 자신의 철학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존중하지 않는) 불만족스러운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죽음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며 그토록 의연하고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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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인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앎, THE KNOWN)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THE KNOWN>이라는 유명한 책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즉 ‘아는 것(앎, 식識;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해방, 해탈)'를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와 언어(영어)로 저술한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동,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인도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이자 작가이자 연설가다, 브라만 계급의 몰락한 가정 출신인 그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우주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신지학회의 회장(일종의 교주)인 애니 베산트에게 후계자이자 '세계의 교사' 후보자로 14세에 발탁되어 세계의 여러 종교, 철학, 사상들을 교육받으며 '세계의 교사'로 키워졌으나, 성인이 된 후 34세에 교주자리를 거부하고 그(세계의 교사)를 중심으로 창설된 '동방의 별의 교단'(동방성단)과 그를 추앙해 온 거대한 조직과 수십 만 회원을 해산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책에서, 서양 철학의 관점이 아니라 동양 사상(정확히는 붓다 사상)의 관점으로 기술된 크리슈나무르티의 인식론은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서양 철학자들로부터 철학사(정확히는 서양 철학사)의 인식론을 바꾸어 놓은 분수령이 되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고타마 붓다가 가장 강조하여 가르친 ‘아는 것(앎, 식識;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해탈)’에 도달하는 방법(실천법, HOW)에 대한 가르침이 누락된 아쉬움이 있다.
참고로 붓다의 가르침과 유사한 사상을 담고 있는 동양 사상이 노장(노자-장자) 사상이다. ‘아는 것(앎)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의 노장사상 식 표현은 '인위(人爲)로 부터의 완전한 자유'(無爲)다.
그러나 노자의 저서 <도덕경(도경 & 덕경)>에도, 장자의 저서 <장자>에도 ‘인위(人爲)로 부터의 완전한 자유, 인간이 아는 것(앎, 식識; 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이 발현된 인위(人爲)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무위(無爲)의 경지, 도(道)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실천법, 수행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사실상 거의 없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 장자의 가르침은 사람들, 특히 동양 사람들의 정신적인 자유와 평화와 행복에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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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붓다가 안내한(가르친) 길(방법, 실천법, 수행법)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앎, 식識;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상카라(마음의 습관적 반응 또는 작용, 의식 및 무의식적인 탐진치 작용)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둑카(근원적 괴로움)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완전한 해탈)를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한 완전히 깨달은 사람(아라한)이 되었다.(소위 붓다의 십대 제자를 포함한 천 이백 아라한)
고타마 붓다 재세 당시의 인구 추정치와 역사적 자료를 참고한 학자들의 추정치에 의하면 붓다가 활동했던 갠지스강(항하恒河) 중북부 지역에서 사문(재가, 출가를 포함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수효가 대략 십만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약 천 명 정도(백 명당 한 명 꼴)를 자신과 같은 아라한(완전히 깨달은 사람; 고타마 붓다도 아라한이다.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아라한)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붓다의 스승으로서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이들 아라한들 중에는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논리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토론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두타행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청소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브라만 계급도 있고, 크샤트리아 .. 불가촉천민 계급도 있다. 붓다를 포함한 아라한들은 그 출신과 근기(경험, 소질, 적성, 성향, 취향, 성격, 능력 등)는 모두 다르지만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여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또는 아상)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머무는 사람이 되었다.
담마(붓다의 가르침)의 실천(수행)은 실천이기 때문에 문헌 상의 기록만으로는 구체적인 실천 상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붓다의 직접 저술을 보고 직강을 듣거나 직접 지도를 받으면 좋을 텐데, 붓다는 예수처럼 저술을 하지 않았고 적멸한지 2500년이 지나면서 기록물의 변형, 즉 후대 제자들에 의한 경전의 기록, 번역 시의 오류, 언어의 시대적 변천, 그리고 개인적 집단적 욕망(또는 사리사욕)이 개입된 변질 변형이 있으므로 붓다가 가르친 실천법(수행법)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는데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붓다의 가르침은 매우 경험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붓다가 구사한 언어는 매우 적확(적절+명확)하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에서 변질 변형된 부분을 걷어내고 보면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이해하기가 가능하며 또한 바르게 실천(수행)한 결과(성과, 성취)를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수행의 중간 과정에서도 식(識; 앎, 알음알이)의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정도 만큼, 특히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 에고심)의 착각과 집착 그리고 탐(갈망, 욕망, 탐욕), 진(갈망의 다른 측면인 혐오, 미움, 성냄, 증오, 분노, 두려움), 치(갈망과 혐오, 탐·진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정도 만큼 저마다의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바른 사랑(자비)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