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상(我相; 스스로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 자아식)
🌳사람에게 '자아식((自我識, 스스로(自) 나(我)라는 앎(識))'은 어떻게 형성되고 자라서 견고해지는가?
세파에 찌든 어른이 되면 누구나 대개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어른보다 상대적으로 에고심(아상) 없는 어린 시절이 "마음이 순수하고 평화롭고 행복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일정기간(대략 생후 6~8개월)이 지나면, 일상적인 감각(시각, 촉각, 청각..)을 통해서 분별개념이 형성되면서 ‘나(我)라는 개념체'를 만들어 인식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몸(육신)을 '나'라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태어나서 맨 처음 일으키는 '나'에 대한 앎, 이것이 금생(今生)에 형성되는 ‘스스로(自) 나(我)라는 앎(識), 자아식(自我識)’의 첫 껍질이다.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스스로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심'을 한문으로는 아상(我相), 아상이 강화된 형태를 영어로 에고(ego) 또는 에고심 이라고 한다.
아상(我相)은 아기가 말(언어)을 배우면서 부터 급격히 강화되고 점점 더 견고해 진다.
아기가 말을 배우면서, 엄마, 아빠,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 할머니, 할아버지..를 분별하여 알고 그 그룹을 '내' 가족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가족과 타인의 가족을 분별하여 알고, 이웃사람, 가까운 사람, 먼 사람, 학교, 선생님, 급우, 친구, 선배, 후배, 우리나라 사람, 외국사람... 그렇게 '나(我)'를 기준으로 분별(구분)해서 아는 사람을 늘려가면서 아상(에고)은 더욱 커지고 강화된다.
장난감을 알고,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해서 알고.. 더럽고 깨끗함,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좋음과 싫음, 사랑과 미움..을 '나(我)'를 기준으로 구분(분별)해서 알고 ....그렇게 아상(에고)은 '나(我)'를 기준으로 분별해서 아는 것을 늘려가면서 그 세력을 키우고 더욱 견고해진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파에 물든 어른이 되면 누구나 대개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마다 아상(ego)은 완전히 같지도 않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으나 서로 충돌하게 되고,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좋으니 싫으니..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 앎을 비교하고 바꾸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주입시키며... 그렇게 자라서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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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일(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아상(ego)은 감각과 언어 그리고 이성(생각)과 감성(느낌)을 넘나드는 수많은 반복적 학습을 기반으로 끊임없는 순환(윤회) 과정을 통해 형성된 신기루적 현상일 뿐이다. 앎의 기억들이 시공간적으로 짜깁기하듯 엮어져서 만들어낸 허깨비와 같은 개념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라는 개념체는 일단 한번 형성되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단단한 존재로서 자리 잡는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와 존엄이 된다. 자아의 보호, 유지, 확장(내 것의 확장)이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된다.
그리고 내 몸을 비롯하여 '내 것'이라고 인식되는 모든 것(내 물건, 내 사람, 내가 속한 집단.., 내 생각, 내 느낌.. 등)에 대해서 굉장한 집착을 갖게 된다.
모든 '종교적, 사상적, 철학적, 사회적, 경제적'인 갈등과 고민들은 바로 이 ‘나’라는 존재감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상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인류 역사는 지나치게 강화된 아상(에고심) 때문에 생기는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으로 얼룩져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변치 않는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아상은 착각이며, 아상(그리고 아상이 강화된 에고심)의 착각이 커지고 강하고 견고해질수록, 스스로의 생각, 감정, 식(識)에 갇혀서 자신도 모르게 편견과 아집이 세지고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되며, 그러한 존재일수록 병에 더 쉽게 걸리고, 더 외롭고, 더 괴롭고, 더 힘든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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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품고 있는 모든 고(苦); 괴로움, 비참함, 참혹함, 폭력, 테러, 학살, 전쟁.. 등의 모든 고통과 불행은 나(我) 그리고 나의 확장인 내 가족, 내 회사, 내 나라, 내 종교 등에 속한 구성원 자신들만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온다.
All the misery the world contains
Has come through wanting happiness just for oneself."
-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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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잘못 알고있는 부처님 가르침 중에 무아(無我)는
'내(我)가 없다(無)'는 가르침이 아니라, '고정불변하는 내가 있다는 착각된 앎' 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일상적인 감각(시, 청, 촉각..)과 언어에 의한 앎(識)에 세뇌된다.
그 세뇌의 무서운 점은 자신이 세뇌(길들임) 당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식(識)의 세뇌는 세뇌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즉시 그 세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감각과 언어에 의한 의식과 무의식의 세뇌, 그 착각과 집착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다. 특히 '나'라는 상대적 분별식(아상)의 세뇌, 그 착각과 집착은 훨씬 더 뿌리 깊은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앎(식識)의 세뇌를 통해서 형성된 아상(ego)이 앎의 착각이라는 점에서 '가짜 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뭔가 '변치 않는 진짜 나'(진아, 영혼, 아트만Atman, Atta 따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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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분석과 명료한 설법으로 대중을 제도한 제자, 마하깟짜야나(마하가전연 존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스승님, 나와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입니까?"
“그는 자신('나')과 세상이 지금(현재 순간, 매 순간) 사라지고(滅, 소멸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나와 세상이 있다(有)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자신('나')과 세상이 지금(현재 순간, 매 순간) 일어나고(生, 생기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나와 세상이 없다(無)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
- <가전연경, 잡아함; 깟짜야나-곳따 숫따(Kaccaayana-gotta Sutta), 상윳따니까야, S.12.15>
부처님 가르침은 나와 세상이 지금(현재 순간, 매 순간) 일어나고(生) 사라지는(滅)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내가(그리고 세상이) 있다는 것(有)에도 없다는 것(無)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이른바 양 극단, 생멸, 유무 .. '나(我)'를 기준으로 한 선악,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좋고 싫음, 사랑과 미움 .. 등등에서 벗어나라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다.
동일(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Atman, Atta)로서의 내(我)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적 현상(자연현상)으로서의 내(吾)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와 세상의 모든 존재는 변치 않는 동일하고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Atta, 我)가 아닌(an, 非, 無), an-Atta(무아(無我)],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적으로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 [항상 (Nicca, 常) 하지 않은(a, 非, 無), a-Nicca, 무상(無常)] 하나의 연기적 현상으로 존재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내(我)가 없다(無)'는 가르침이 아니라, '나에 대한 착각된 앎(식識)'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수많은 가르침은 무지를 극복하고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통찰지를 계발하여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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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컨대 부처님 가르침은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립적이고 고정불변한 실체(Attā)가 아니라(an) = ( an·Attā, 非我), 인과 연기적으로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 (항상Nicca 하지 않은(a),= ( a·Nicca한, 無常한) 하나의 연기적 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이라는 존재의 실상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존재의 실상과 진리를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즉 계(戒, 실라; 정어·정업·정명) - 정(定, 사마디; 정정진·정념·정정) - 혜(慧, 빤냐; 정견·정사유)를 계발하는 수행(실라-사마타-위빠사나)을 바르게 실천하여
무지(인식의 착각, 전도된 생각)를 극복하고 미시(찰나)-일상-거시(생로병사, 성주괴공) 순환(삼사라)적 수준에서 '있는 그대로'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통찰지(수행의 통찰 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통찰 지혜)를 계발함으로써,
좁쌀만한 아(我, 아상, 에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대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빤냐/반야)로운 바른 사랑'(자비)의 마음으로 세상을 완전히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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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 존재의 세 가지 특성(삼특상 또는 삼법인),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ā)
아닛짜(a·nicca)의 글자 뜻은 '항상(常, nicca)하지 않음(非, a)'이다. 아닛짜는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생명이든 비생명이든)이 매 순간 변한다"는 진리(法)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다.
둑카(dukkha; 근원적 괴로움)는 "모든 괴로움은 근원(근본 원인)이 있는 괴로움이다, 모든 고(苦)는 조건지어진 고(苦), 즉 존재의 무상성(무상한 성질)과 무명(無明, avijjā)으로 인해서 근원적으로 조건지어진(conditioned; saṅkhāra) 고(苦)이다"라는 진리(法)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다
아낫따(an·attā)의 글자 뜻은 '실체(attā, 我)가 아님(非, an)'이다. 아낫따는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생명이든 비생명이든)은 고정불변(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 attā, atman)가 아니다"라는 진리(法)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ā)를 (한문은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한 글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하고 비非자 보다 무無자를 선호하는) 중국의 번역자들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랫동안 한자문화권에 있었던 우리에게 무상, 고, 무아가 익숙하니 이를 사용하더라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ā)의 본래의 의미를 바르게 분명히 알고 사용하면 혼란과 오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 인간의 모든 고(苦; dukkha)를 근원적으로 조건짓는 존재의 무상성(무상한 성질)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고(苦)를 조건짓는 또 하나의 근원(근본 원인)인 무명(無明)은 부처님께서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바른 실천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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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 '나' 그리고 세상(우주자연)의 모든 것은 변치 않는 동일하고 독립적인 실체(Atta, Atman, 我)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an, 非) (an·Atta; 비아非我 또는 무아無我),
'인연조건(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인과 연기)적으로 매 순간 생멸(생기 소멸;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화하는 (항상Nicca常 하지 않은a非, a·Nicca한; 비상非常 또는 무상無常한) 하나의 연기적 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으로 존재한다.
‘없는 듯 있는'(매 순간 인과 연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 '나’가 '나'라는 생명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의 실상(실제 모습)임을 알지 못하고 ... '(꿈처럼) 있는 듯 없는'(매 순간 인과 연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게 세상임을 알지 못하고 ...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실상)를 모르는 게 식(識, 앎; 의식+무의식)임을 알지 못하고 ... 거짓 앎과 거짓 나를 실체라고 착각하고 ... 온갖 욕망을 쫓아 괴롭고 힘들게 이리저리 우왕좌왕 몰려다니며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쫓기듯이 허겁지겁 아웅다웅 살고 있는 중생(생명의 무리)들 ...
그것이 안타깝고 가여워서 부처님께서는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신 후 입멸하실 때까지 45년 동안을 매일같이 맨발로 걸으시고 걸식(탁발)하시면서 사람들(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시며, 그들이 고통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진실(실상, 존재의 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법, 法; 연기의 진리)를 깨우치도록 가르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