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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정각,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道聖諦]


정각,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道聖諦]

여기에 소개하는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과 보충설명은 냐나띨로까(Nyanatiloka) 비구가 빠알리어(갠지스 강 유역의 고대인도 민중어 중 하나로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고대인도어)로 기록된 경전모음인 니까야에서 발췌하여 1906년에 독일어로 번역 편집한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 가운데 사상제[四聖諦] 챕터(chapter, 章) 중에 도성제[道聖諦]의 팔정도 챕터의 정견[正見] 절(4장 1절)에 수록된 것으로 정원 김재성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본 포스팅은 정견[正見] 절의 2/2회차 포스팅입니다.

범례
[*]의 문장은 냐나띨로까 비구의 보충설명
<역주>는 역자의 보충설명

1. 정견[正見; Samma-ditthi] (후반부)

<전반부(1.1~1.13절)은 정견[正見] 절의 1/2회차 포스팅 참조>

[*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맨 처음 시작하는 단계는 초보적인 최소한의 바른 이해(또는 견해)인 지식차원의 정견(正見)를 계발하는 것이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맨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 있어서, 초보적인 최소한의 바른 이해(또는 바른 견해; 正見)가 요구되는 이유는 그러한 이해(견해)가 있어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지런히 바른 길(팔정도)을 계발하는 실천을 하는데, 확고한 이유를 알고 고무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 사실, 진실)과 진리(진실한 이치)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른 이해(또는 바른 견해; 정견)가 팔정도의 맨 처음의 위치에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법[法, 담마; 실상과 진리,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초보적인 단계의 이해는, 팔정도의 다른 부분들의 도움과 함께 점차로 향상되어가서, 궁극적으로는 네 부류의 성인의 깨달음(四果)과 열반을 얻기 위한 직접적인 조건인, 가장 높은 통찰지혜(꿰뚫어 보는 지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1.14 자아에 대한 견해(我見)

법[法, 담마; 실상과 진리]에 대한 올바른 견해[正見]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 무엇을 자아[아트만]라고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增支部 I 15. AN I, 27.

“아난다여, '감각적인 느낌이 나의 자아[아트만; 실체(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감각적인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 그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것을 당신의 자아라고 여기겠는가?' 이 세 가지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경험하고 있을 때는 다른 두 가지 느낌은 없다. 세 가지의 감각적인 느낌은 변하기 쉽고[無常, a·nicca; 항상하지 않고],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되어 파괴되기 쉽고, 시들어버려 단절되기 쉽다. 이 세 가지의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하나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 느낌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느낌이 사라진 후에는 자신의 자아도 사라져버렸다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삶에서 자신의 자아가 변해버리기 쉽고,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뒤범벅되어 있으며, 생겨났다가는 소멸해버리는 것으로 이미 간주해 버린 것이 된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사람이 감각적인 느낌은 자신의 자아가 아니며, 감각적인 느낌에 의해서는 자신의 자아에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자 그럼 당신에게서 감각적인 느낌이 없는 곳이 있다면, 그때 당신은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지도 모른다. '감각적인 느낌은 정말로 나의 자아는 아니다. 하지만 감각적인 느낌에 의해서 자아에 다가갈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느끼는 주체는 나의 자아이며, 나의 자아가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감각적인 느낌이 모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자 느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후, 어떤 느낌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이것이 나의 자아[아트만]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말할 수 없습니다.“

長部 15 <大緣經> DN II, 66-7.

'눈(眼)이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눈에는 생겨남도 소멸함도 있음이 확인된다. (눈이 자아라고 주장한다면) 자아[아트만]에는 생겨남도 소멸함도 있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눈(眼)이 자아이다'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요컨대 눈은 무아[無我, an·atta, an·atman]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형태나 색깔(色)은 무아이며, 눈의 의식(眼識)은 무아이며, 눈의 접촉(眼觸)은 무아이며, (눈의 접촉에 의해 생긴) 느낌(受)은 무아이며, (느낌에 의해 생긴) 갈애(渴愛)는 무아이며, 내지, 마음(意)은 무아이며, 마음의 대상(法)은 무아이며, 마음의 의식(意識)은 무아이며, 마음의 접촉(意觸)은 무아이며, (마음의 접촉에 의해 생긴) 느낌은 무아이며, 갈애은 무아이다.

中部 148 <六六經> MN III, 282-3.

<역주 : 이 경전은 이른바 여섯 감각기관(六根)과 감각대상(六境), 여섯 가지 의식(六識)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접촉(六觸), 감각적 느낌(六受), 갈애(六愛)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기법(緣起法)의 체계가 생멸 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에는 자아[아트만; 실체(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무아[無我, an·atta, an·atman; 실체가 아님, 비실체]을 밝힌 경전이다.>

<역주 : 무아(無我)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아낫따[an·Atta 빠알리어, an·Atman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an·Atta(an·Atman)는 'Atta(Atman;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 실체)가 아니다(an)'라는 뜻이다. 

무상(無常)은 아닛짜[a·Nicc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아닛짜[a·Nicca]는 ‘Nicca(항상)하지 않다(a)'라는 뜻이다.

(영어 un·happy의 ‘un’처럼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서 ‘an’과 ‘a’는 단어 앞에 붙는 부정형 어두인데 모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는 ‘an’이,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는 ‘a’가 붙는다)

'무아(無我), 나(我)는 없다(無)'라는 말과 '아낫따[an·Atta], 나(를 포함하여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Atta]가 아니다[an]'라는 말의 차이는 천지차이다. 특히 부처님 가르침(불교, 불법)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잘 이해한 후에는 그 차이가 미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내(我)가 없다(無)'는 가르침이 아니라, '나(我)에 대한 식(識;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아식/바왕가)의 착각(전도)'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수많은 가르침은 무지(인식의 착각, 의식과 무의식의 착각, 전도된 생각)를 극복하고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 사실;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통찰지를 계발하여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비구들이여, 
배움이 없는[無聞] 범부는 (地水火風의) 네 가지 요소[四大]에 의해 이루어진 육신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마음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육신(물질작용 무더기; ‘地水火風’ 작용 무더기)의 생멸 변화가 마음(정신작용 무더기; ‘受想行識’ 작용 무더기)의 생멸 변화 보다는 더디기 때문이다.

相應部 XII 62. <無聞經> SN II, 96.

<역주 : (육체보다) 더 빠르게 생멸(생기 소멸) 변화하는 마음보다는 더 느리게 생멸 변화하는 육체를 자아[아트만]라고 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러나 결국 이 육체도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을 직접 보고 알게 되면, 육체가 자아라는 견해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 어떤 물질(色) 현상이라도,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멀리 있는 것이든 가까이 있는 것이든, 이 물질(色) 현상(육신)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

相應部 XXII 59. <五比丘經> SN III, 68.

비구들이여, 
이 육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구성되어진 그대로 (네 가지) 기본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즉, “이 육신에는 땅의 기본 요소(地大), 물의 기본 요소(水大), 불의 기본 요소(火大), 바람의 기본 요소(風大)가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소를 도살해서 사거리의 큰 길에 부위별로 해체해 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이,

바로 이처럼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바로 자신의 육신을 (네 가지) 기본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즉, “이 육신에는 땅의 기본 요소(地大), 물의 기본 요소(水大), 불의 기본 요소(火大), 바람의 기본 요소(風大)가 있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292-5.

<역주 : ‘육신의 네 가지 기본 요소(또는 작용)’를 한문 번역 경전에서는 ‘사대(四大) 또는 사대색(四大色)’이라고 한다. 사대색(四大色)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색(色)은 현대식 용어로 ‘물질’을 의미하는데 고대인도어 루빠[rūp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루빠[rūpa; 물질, 물체]는 색깔(色)과 형태(모양, 형체)를 지니는 것이 그 특징이다”라는 부처님의 설법(법을 설명함)에 따라, 표의문자의 특성상 한 글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루빠[rūpa]를 ‘색(色)’으로 번역했다.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물질[물체, 육체, 육신; rūpa]을 형성하는[bhūta] 기본[mahā] 작용(또는 요소)’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부처님께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실상과 진리를 관찰 탐구(조사 분석)하여 발견하시고 나서 설(설명)하신 ‘물질을 형성하는 기본 작용(또는 요소)’은 (1) 地[pathavi] 작용, 무거움(중력 또는 질량) 작용, (2) 水[apo] 작용, ‘수축, 응축, 인력, 잡아당김’ 작용, (3) 風[vayo] 작용, ‘팽창, 척력’ 작용, (4) 火[tejo] 작용, ‘변화, 열’ 작용이다.

물질의 기본 구성체(물질의 최소단위;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용어로는 깔라빠kalāpa)인 원자도 물질이기 때문에 극미하지만 얼마간의 ‘地[pathavi; 무거움 또는 질량] 작용‘이 있다. 이 무거움(질량, 地) 작용은 다른 작용, ’水[apo; 수축인력] 작용’에 의해서 잡아당겨져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또 다른 작용, ‘風[vayo; 팽창척력] 작용’에 의해서 어느 정도 밖으로 당겨져 형체적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또 다른 작용, ‘火[tejo; 변화] 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매 순간 변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로서의 원자는 없다. 원자(깔라빠)로 구성된 모든 물질(물체, 육체)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 그리고 깔라빠(원자)로 구성된 모든 루빠(물질, 물체, 육체)는 실체(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매순간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하며 변화하는 사대[四大; 地水火風] 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흐름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이다.

이처럼 사대[四大; 地水火風] 작용이 ‘인연(인因-직접조건,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면’(연기 작용하면, 인연 화합하면)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라는 물질현상으로 인식된다.

물질세계의 실상과 진리 및 사대[四大; 地水火風] 작용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792149094430991&set=a.1791487057830528.1073741831.100009077529459&type=3&theater 참조>

[* 오온의 무상[a·nicca; 매순간 생멸 변화], 고[dukkha; 근원적 괴로움], 무아[an·atta; 실체 아님, 비실체]에 대한 앎이 있을 때, '자아'이니 '나의 것'이니 하는 견해가 없어진다. 

존재의 비실체성(空性)을 말하기 위해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

바람이라는 현상이 있을 뿐, 바람의 실체나 주체는 없다.

괴로움이라는 현상이 있을 뿐, 괴로움을 받는 자는 없다.
행위(業)가 있을 뿐, 행위를 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
길(道)이 있을 뿐, 그 길(道)을 가는 자는 없다.

淸淨道論 XVI, Vism 513.

1.15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자아

칫타여, 만일 과거에 존재하는 자아가 당신의 자아라면 과거의 존재와는 다른 현재의 존재는 누구의 자아인가?. 또 앞으로 변해버릴 미래의 자아는 누구의 자아인가?

그리고 칫타여, 만일 현재에 존재하는 자아가 당신의 자아라면 현재의 존재와는 다른 과거의 존재는 누구의 자아인가?. 또 앞으로 변해버릴 미래의 자아는 누구의 자아인가?

長部 9 <포타파다經> DN I, 200-201

1.16 '자아'는 언어적인 표현에 불과

칫타여, 예를 들면 소에게서 우유가, 우유에서 요구르트가, 요구르트에서 생버터가, 생버터에서 버터가, 버터에서 크림(제호)이 생겨난다. 우유가 있을 때, 그것을 요구르트라거나 생버터라거나, 버터라거나, 크림(제호)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이, 과거의 나의 자아가 있었을 때, 미래와 현재의 나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현재의 나의 자아가 있을 때, 과거와 미래의 나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미래의 나의 자아가 있을 때, 과거와 현재의 나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자아, 현재의 자아, 미래의 자아라고 하는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세간의 호칭이며, 세간의 언어이며, 세간의 관용어이며, 세간의 개념(관념)이다. 여래는 (애욕과 사견에) 집착함이 없이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長部 9 <포타파다經> DN I, 201.

<역주 : 앞의 경문에 이어지는 부분이다. 일상적인 언어표현으로 쓰이는 '자아'라는 용어를 여래도 그대로 사용하시지만 자아가 실체라고 하는 사견에 사로잡힘이 없이 자아에 대한 애착(애욕의 집착)이 없이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예컨대, 부처님 가르침에서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라’처럼 '자아'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지만 이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실천의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역주 :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자아[브라만]이라는 것은 없고(無我) 존재하는 것은 단지 조건에 따라서 일어났다가 사라져가는 정신적·물질적 현상(名色)만이 있을 뿐이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쳐서 불변하는(늘 동일한) 자아라고 하는 것은 없다. 

언어 표현상 필요에 의해 사용하는 자아라는 것은 ‘조건에 따라 상호의존’(연기) 작용하여 끊임없이 생멸(생기·소멸) 변화하는 ‘마음(정신작용, ‘수상행식’작용 무더기)과 육체(물질작용, '지수화풍'작용 무더기)의 연기적 결합체, 즉 오온(‘색수상행식’작용 무더기)의 연기적 결합체‘에 대한 세간의 호칭일 뿐이다.>

1.17 오온에 대한 무지

‘색[色, rupa; 물질작용], 수[受, vedana; 감수작용, 감각 받음 작용], 상[想, sanna; 표상작용], 행[行, sankhara; (업)형성작용], 식[識, vinnana; 인식작용]’ 온[蘊, khandha; 무더기, 쌓임, 집적]을 (실체가 없음, 무아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이 다섯 무더기[五蘊]의 발생(생기)과 소멸 그리고 그것들의 적멸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여래(如來)가 사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견해에 빠지기 쉽다.

相應部 XLIV 4. <生起經> SN IV, 386.

<역주 :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실재인 오온(五蘊)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여래의 사후 존재여부에 대한 이런저런 사견에 빠진다는 말이다.>

1.18 두 가지 극단과 중도[中道]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jiva]이 육체와 같다는 견해[斷見]를 고집한다면, 그는 고귀한 삶[梵行]을 영위하지 못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은 육체와는 완전히 별개인 어떤 것(예컨대, 혼, 영혼, 우주아, 진아, 아트만 등)이라는 견해[常見]를 고집 한다면, 이런 경우에도 역시 고귀한 삶은 불가능하다. 완전히 바른 깨달음을 얻은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연기[緣起]라는 중도[中道]를 보여주었다.

相應部 XII 35. <無明緣> SN II, 61.

마하깟짜야나(마하가전연 존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세존이시여, 나와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입니까?"

“그는 자신과 세상(모든 물질현상과 정신현상, 달리 말하면 모든 오온)이 지금 사라지고(滅, 소멸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나와 세상이 있다(有)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자신과 세상이 지금 일어나고(生, 생기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아 나와 세상이 없다(無)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

相應部 <가전연경(Kaccaayana-gotta)經> SN.12.15

<역주 : 위의 부처님 가르침은 ‘나와 세상’이라는 모든 현상[法; 모든 물질현상과 정신현상, 달리 말하면 모든 오온五蘊]이 지금(현재 순간, 매 순간) 일어나고(生) 사라지는(滅) 것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보아서, 내가 그리고 세상이 있다(有)는 것에도 없다(無)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이른바 양 극단, 생멸, 유무 .. '나(我, ego)'를 기준으로 한 선악,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좋고 싫음, 사랑과 미움 .. 등등에서 벗어나라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다.

고정불변(동일)하고 독립적인 실체[Atman, Atta]로서의 내(我)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적 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으로서의 내(吾)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와 세상(우주자연)의 모든 존재는 변치 않는 동일하고 독립적인 실체[Atta, Atman, 我]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an·Atta, 無我],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적으로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a·Nicca, 無常)한] 하나의 연기적 현상(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으로 존재한다.>

<역주 : 연기[緣起]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빠띳짜삼뭇빠따[paṭiccasamuppād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빠띳짜삼뭇빠따[paṭicca-sam-uppāda]는 ‘조건에 따라[paṭicca] 함께[sam; 상호 의존하여] 일어남[생기함, 발생함; uppāda]’이라는 뜻이다.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인(因: 직접조건, 원인,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조건, 간접적 원인)에 따라서 생기함’의 줄임말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산스크리트어 프라티트야삼무파다(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pratītyasamutpāda)를 발랄저제야삼모파다(鉢剌底帝夜參牟播陀)로 음사하여 표기한 경우도 있다. 영어 경전에서는 ‘dependent arising(의존하여 생기함), conditioned genesis(조건 지워진 생성), dependent co-arising(의존된 상호발생), 또는 interdependent arising(상호 의존하여 생기함)’ 등으로 번역한다.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조건(직간접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하여 생기함(또는 발생함)’ 또는 ‘조건에 따른 상호의존에 의한 생기(또는 발생)’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예컨대, ‘사과나무는 사과 씨를 인(因: 직접조건)으로 해서 토양, 햇빛, 빗물 등을 연(緣: 간접조건)으로 해서 이들이 상호의존 작용해서 생기한다.’ 이를 연기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하면, ‘사과나무는 사과 씨, 토양, 햇빛, 빗물 등이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해서 생기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조건(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의존하여 생기하고(일어나고, 발생하고), 그 조건(인연)이 다하면 소멸한다'는 연기법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정신적인 것이든지 간에 예외가 없는 우주자연의 법칙이다.>

1.19 연기[緣起]와 법[法]

연기[緣起]를 보는 자, 그는 법[法]을 본다. 법을 보는 자, 그는 연기를 본다.

中部 28 <象跡喩大經> MN I, 190-1.

<역주 : 법[法]은 고대인도어 다르마[Dharma 산스크리트어, 담마Dhamma 빠알리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달마(達磨)는 다르마를 한문으로 음사(음역)한 것이다. 

경전에서 담마[Dhamma, 法]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경문에서는 실상(존재의 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법; 연기의 진리)를 뜻한다. 

법[法]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는 다름 아닌 연기의 법[法; 실상과 진리]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이다.>

1.20 연기[緣起; 조건에 따른 상호의존에 의한 생기]

무명[無明; 완전히 바르게 깨닫지 못한 상태의 무지 또는 어리석음]을 조건으로 해서 업의 형성작용[行]이 일어난다. 업의 형성작용을 조건으로 해서 의식작용[識; 재생연결식 작용]이 일어난다. 의식작용을 조건으로 해서 정신·육체[名色]적 작용이 일어난다. 정신·육체적 작용을 조건으로 해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이 생기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조건으로 해서 (6근과 6경과 6식의) 접촉[觸]이 발생한다. 접촉을 조건으로 해서 느낌[受; 감각 받음 작용]이 일어난다. 느낌을 조건으로 해서 갈애[愛]가 일어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착[取]이 일어난다. 취착을 조건으로 해서 존재화 과정[有]이 일어난다. 존재화 과정을 조건으로 해서 태어남[生]이 일어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老死],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생겨난다. 이것을 '괴로움 발생의 고귀한 진리'[苦聖諦]라고 한다.

相應部 XII 1. <法說> SN II, 1.

무명[無明]의 남김 없는 소멸에 의해 업의 형성작용[行]의 소멸한다. 업의 형성작용의 소멸에 의해 의식작용[識; 재생연결식 작용]이 소멸한다. 의식작용의 소멸에 의해 정신·육체[名色]적 작용이 소멸한다. 정신적·육체적 작용의 소멸에 의해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의 발생이 소멸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소멸에 의해 (6근과 6경과 6식의) 접촉[觸]의 소멸한다. 접촉의 소멸에 의해 느낌[受]의 발생이 소멸한다. 느낌의 소멸에 의해 갈망[愛]의 발생이 소멸한다. 갈망의 소멸에 의해 취착[取]의 발생이 소멸한다. 취착의 소멸에 의해 존재화 과정[有]이 소멸한다. 존재화 과정의 소멸에 의해 태어남[生]의 발생이 소멸한다. 태어남의 소멸에 의해 늙음과 죽음[老死],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의 발생이 소멸한다. 이것을 '괴로움 소멸의 고귀한 진리'[滅聖諦]라고 한다.

相應部 XII 1. <法說> SN II, 1-2.

<역주 : 괴로움 발생과 괴로움 소멸의 연기[緣起]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794059254239975&set=a.1791487057830528.1073741831.100009077529459&type=3&theater 참조>

하지만 비구들이여, 무명[無明; 완전히 바르게 깨닫지 못한 상태의 무지 또는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명지[明; 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상태의 밝은 지혜]가 생겨난 비구는 선한 업[善業]을 쌓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선하지 않은 업[惡業]을 짓지 않으려고 애쓸 것도 없으며, 흔들림이 없는 업[무색계에 도달하는 업]을 쌓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相應部 XII 51. <思量> SN II, 82.

1.21 무명[無明]과 갈애[愛], 또는 탐[貪], 진[瞋], 치[痴]의 업 - 윤회의 원인

벗들이여, 실로 무명[無明]에 가리우고, 갈애[愛]에 속박된 중생들은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찾아 헤메인다. 따라서 새로운 윤회의 생존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中部 43 <有明大經> MN I, 294.

<역주 : 갈애[愛]에는 갈망[貪]에 대한 갈애와 혐오[瞋]에 대한 갈애가 있다. 탐[貪], 진[瞋], 치[痴]는 무명[無明; 무지, 어리석음]과 갈애[愛]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탐[貪; 갈망, 탐욕]에서 비롯된 업, 탐[貪]에서 생겨난 업, 탐[貪]을 원인으로 하는 업, 탐[貪]을 조건으로 하는 업, 진[瞋; 혐오, 성냄]에서 비롯된 업, 진[瞋]에서 생겨난 업, 진[瞋]을 원인으로 하는 업, 진[瞋]을 조건으로 하는 업, 치[痴; 어리석음, 무지]에서 비롯된 업, 치[痴]에서 생겨난 업, 치[痴]를 원인으로 하는 업, 치[痴]를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러한 업이 있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 그 곳이 그 업이 무르익어 과보를 맺는 곳이다. 그 업이 무르익을 때, 현재의 삶[現生]이던지, 다음 생[來生]이던지, 아주 먼 후생이던지 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增支部 III 33. AN I, 134.

1.22 업의 소멸

벗들이여, 실로 무명[無明]이 없어짐에 의해, 명지[明]가 생김에 의해, 갈애의 소멸에 의해서 새로운 윤회는 없어진다.

中部 43 <有明大經> MN I, 294.

비구들이여, 무탐[無貪; 탐貪이 없음]에서 비롯된 업, 무탐[無貪]에서 생겨난 업, 무탐[無貪]을 원인으로 하는 업, 무탐[無貪]을 조건으로 하는 업, 무진[無瞋; 진瞋이 없음]에서 비롯된 업, 무진[無瞋]에서 생겨난 업, 무진[無瞋]을 원인으로 하는 업, 무진[無瞋]을 조건으로 하는 업, 무치[無痴; 어리석음이 없음]에서 비롯된 업, 무치[無痴]에서 생겨난 업, 무치[無痴]를 원인으로 하는 업, 무치[無痴]를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렇게 탐[貪], 진[瞋], 치[痴]를 벗어남에 의해서, 마치 타라수 나무의 뿌리가 끊어져 다시는 싹이 나지 않는 것처럼, 윤회의 생존이 없어진다.

增支部 III 33. AN I, 135.

[* 연기[緣起; 조건에 따른 상호의존에 의한 생기 또는 발생]는 모든 정신적·육체(물질)적인 작용과 현상의 조건에 따른 상관성에 대한 가르침으로, 무아(비실체성)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초석이 되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사람, 개, 돼지, 고양이, .. 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다양한 육체적·정신적 생명현상들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因; 원인, 직접조건)과 연(緣; 간접조건)에 따른 상호의존에 의한 산물임을 연기의 가르침은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위에 수록된 연기의 설법(법을 설명함)은 윤회에 의한 존재와 괴로움이 어떻게 조건에 의존되어 발생하는가를 분명하고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리고 의존된 조건(원인)의 소멸에 의한 괴로움의 소멸을 분명하고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연기의 설법(법을 설명함)은 사성제 중에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集聖諦]와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聖諦]를 분명하고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역주 : 여기 정견[正見; Samma-ditthi] 절에 수록된 경전과 보충설명은 냐나띨로까(Nyanatiloka) 비구가 빠알리어(갠지스 강 유역의 고대인도 민중어 중 하나)로 기록된 경전모음인 니까야에서 발췌하여 1906년에 독일어로 번역 편집한 것의 영역본을 정원 김재성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이다.

정견(正見)은 빠알리어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삼마[sammā]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에서 '바르게, 여실히(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我, ego)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심, 에고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완전히 바르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삼마[sammā]를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정(正), 완전(完全)’ 등으로 번역하고, 영어 경전에서는 'rightly(바르게), thoroughly(철저하게, 완벽하게), properly; in the right way, as it ought to be, best, perfectly(완전하게)' 등으로 번역한다.

딧티[diṭṭhi]는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에서 '봄, 관찰, 통찰(깊은 관찰), 조사; 앎, 이해, 견해 또는 믿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딧티[diṭṭhi]를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견(見), 견해(見解), 의견(意見), 신념(信念)’ 등으로 번역하고, 영어 경전에서는 'view(보다, 봄), observe, insight, investigate, speculative opinion, speculation(추론, 견해), dogma, theory, belief' 등으로 번역한다.

요컨대,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에서 '삼마[sammā; 正] 딧티[diṭṭhi; 見], 정견[正見]'은 '바르게, 여실히(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我, ego)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상(에고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완전히 바르게' '봄, 관찰함, 통찰함, 조사함, 앎, 이해함, 견해를 가짐'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역주 : 이리하여 냐나띨로까 비구가 니까야(경전모음)에서 발췌 편집한 ‘초보적인 최소한의 바른 이해(또는 바른 견해; 正見)’의 절이 끝났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맨 처음 시작하는 단계는 초보적인 최소한의 바른 이해(또는 견해)인 지식차원의 정견(正見)을 계발하는 것이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맨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 있어서, 초보적인 최소한의 바른 이해(또는 바른 견해; 正見)가 요구되는 이유는 그러한 이해(견해)가 있어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지런히 바른 길(팔정도)을 계발하는 실천을 하는데, 확고한 이유를 알고 고무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자신과 세상의 실상(실제 모습, 사실, 진실)과 진리(진실한 이치)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른 이해(또는 바른 견해; 정견)가 팔정도의 맨 처음의 위치에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법[法, 담마; 실상과 진리,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초보적인 단계의 이해는, 팔정도의 다른 부분들의 도움과 함께 점차로 향상되어가서, 궁극적으로는 네 부류의 성인의 깨달음(四果)과 열반을 얻기 위한 직접적인 조건인, 가장 높은 통찰지혜(꿰뚫어 보는 지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i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dukkha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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