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고귀한 진리, Four Noble Truths ; Cattāri Ariya Saccā]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되고, 사성제는 팔정도로 귀결된다.
인생을 바르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성제와 팔정도 : 사성제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깨달음이요 진리다, 팔정도는 고[苦]와 집[集; 근본 원인]의 멸[滅]을 실현하는 길[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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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모든 동물의 발자취는 다 코끼리의 발자취 속에 들어온다. 코끼리의 발자취는 그 크기가 동물 중에 으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모든 선한 진리는 다 사성제[四聖諦] 안에 포섭된다."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중부(中部) 28; 중아함(中阿含) 30> 中에서
1) 상적유대경은 ‘코끼리 발자취로 비유한 경’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의 발자취에 모든 동물의 발자취가 그 속에 들어가 버리므로 가장 포괄적인 것을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것이다.
2) 이른바 부처님의 으뜸 제자인 사리뿟따(사리불)는 스승인 부처님을 대신하여 젊은 제자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해설했던 일이 여러 경전에 나타나 있거니와, 이 경에서도 그는 스승이 설한 사성제를 해설하기 위하여 경의 첫머리에 코끼리 발자취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비유는 아마도 코끼리가 많은 인도 특유의 것이리라. 그리고 사라뿟따는 가장 포괄적인 것을 상징하는 코끼리 발자취의 비유를 들어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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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적 사유와 논리에 몰입하여 실천(수행)을 게을리하는 마룬캬라는 제자에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마룬캬여,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대로, 내가 설한 것은 설한 대로 수지(受持; 받아들여 지님)함이 좋으니라. 그러면 마룬캬여,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이던가? '이것은 고[苦]이다', '이것은 고의 발생의 근원[集]이다', '이것은 고의 멸진[滅; 완전한 소멸]이다', '이것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道]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마룬캬여, 왜 나는 그것들을 설했던가? 마룬캬여, 그것들은 진정한 이익(진정한 행복, 마음의 부정성의 소멸, 탐진치의 소멸, 나와 너를 초월한 바른 사랑의 증대)에 도움이 되며, 청정범행(청정하고 선하고 훌륭한 행위)의 기초가 되며, 무상정등각(줄임말로 정각; 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과 해탈(완전한 자유)와 열반(완전한 행복)에 이바지 하느니라. 그러하기에 설했음을 알라."
<마룬캬경, 맛지마니까야(中部) 63; 전유경(독화실 비유 경), 중아함 221>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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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고통받으며 이 윤회의 굴레에서 헤매야만 했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dukkha]의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이 윤회의 굴레에서 헤매야만 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발생 근원[dukkha-samudaya]의 고귀한 진리’를 ... ‘괴로움의 소멸[dukkha-nirodha]의 고귀한 진리’를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dukkha-nirodha-gamini-patipada]의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이 윤회의 굴레에서 헤매야만 했다."
<디가니까야(長部) 16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DN II, 90> 中에서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 '여실지견[如實知見; 있는 그대로 보고 앎]'하지 않았더라면, 비구들이여, 나는 '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했다고 공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여실지견하였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하고 바르게 깨달았다."
<쌍윳따니까야(相應部) LVI 11 『여래소설(如來所說)』 SN V, 422-3> 中에서
"심오하며,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며, 수승하며, 단순한 논리적 사유로는 얻을 수 없는, 현자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이 법을 나는 증득하였다. 하지만 세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ālaya; 욕망, 애착]에 머물러,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있다. 감각적 욕망에 머물러,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있는 이러한 세간사람들은 이 법, 즉 '이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음[此緣性]', '조건에 의존 된 발생[paticca-sam-uppada; 緣起]의 법'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법, 즉 모든 형성작용[行; sankhara]의 소멸과 모든 윤회[samsara]의 뿌리[upadhi]를 끊어버리는 것과, 갈애[渴愛]의 소멸[滅]과 해탈과 열반을 이해하기 어렵다."
<맛지마니까야(中部) 26 『성구경(聖求經)』 MN I, 167-8>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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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법륜경이라 불리는 부처님의 첫 설법(법法을 설명함)에는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설명이 보다 상세하게 나온다. 아마도 정각을 증득하신 후 처음으로 첫 제자들에게 설(설명)하시는 것이라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으리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생로병사는 고이다. 시름, 근심, 걱정, 슬픔,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비탄, 불행, 번뇌는 고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고이다. 욕심 나는 것을 얻지 못함은 고이다. 뭉뚱그려 말한다면 다섯 무더기[오온五蘊]에 대한 취착 자체가 고이다. 이처럼 인간의 생의 양상은 근원적 고를 품고 있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발생 근원[集]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후유(後有 또는 과보果報)를 일어나게 하고, 세속적인 기쁨과 탐욕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그것이다. 갈애에는 욕망에 대한 갈애[욕애慾愛; 물욕, 식욕, 성욕, 명예욕, 권력욕 등], 존재에 대한 갈애[유애有愛; 자아와 내 것을 존속시키고자 하는 욕망],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무유애無有愛]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滅]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 갈애를 남김 없이 멸하고, 버리고, 벗어나는 경지(상태)에 이르는 것이 그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길[道]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여덟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 팔지(八支)의 성스러운 바른 길(道)이 그것이니,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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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다야(녹야원)의 나무 밑에 앉아서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으로 설(설명)하신 것은 바로 이 '네 가지 성제[四聖諦]'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부처님께서는 그 진리의 명제들을 먼저 제시한 다음에 차례차례 설명을 덧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설명이 결코 그들 다섯 비구에게 대번에 이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경전, 이를테면 <성구경(聖求經), 중부 26>에도 그런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리하여 두 명의 비구에게 설명할 동안은 다른 셋이 나가서 탁발하여, 세 비구가 탁발해 온 것을 가지고 여섯 명이 살아갔다. 또 세 명의 비구에게 가르치고 있을 때는 두 비구가 탁발하여, 그들이 탁발해 온 것으로 여섯이 생활했다."
이런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인 꼰단냐(교진여)가 사성제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경전은 그것을 "꼰단냐가 먼저 '법안[法眼]; 진리(法; 진실한 이치, 바른 이치)를 보는 눈(眼)'을 떴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본인도 기뻤으려니와, 아마도 그 이상으로 기뻐한 이는 부처님이셨을 것이다.
"꼰단냐(Kondanna) 안냐따(Annata)! 꼰단냐가 알아들었다! 꼰단냐는 이해했다!"
그때 부처님께서 외치신 기쁨의 탄성을 경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제껏 혼자서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던 깨달음의 내용을 가까스로 남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던 부처님의 무량한 감개가 함축되어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로부터 꼰단냐는 '안냐 꼰단냐'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별칭은 '알아들은(이해한) 꼰단냐'라는 뜻이어서 "꼰단냐 안냐따!"라고 외치신 부처님의 기쁨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를 상상하게 해준다. 이윽고 나머지 네 명의 비구들도 마침내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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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진리(法, 진실한 이치)
"자신의 괴로움을 만드는 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바르게 알지(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는 결코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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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 바른 봄/관찰/통찰, 앎/이해/견해]은 매우 중요하다. 바른 앎(이해, 견해)이 서 있어야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바른 앎(이해, 견해)은 부처님께서 강조하셨듯이, (처음에는 머리로 공부하여) 사성제를 (피상적이나마)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바른 앎(이해)'[正見]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자들이여, 괴로움(dukkha; 생명의 근원적 괴로움)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생성 근원(근본원인)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멸진; 정각, 해탈, 열반)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이해하고),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정각)에 이르는 길(팔정도)에 대하여 바르게 알면(이해하면), 수행자들이여, 이것을 '바른 앎(이해)'[正見]이라 한다”
<분별경; 위방가경(Vibhanga Sutta), 상응부(상윳따니까야) S44.1.1.8>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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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는 몸과 마음이라는 ‘물질[色; 四大] 작용과 정신[名; 수상행식] 작용의 다섯 무더기,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지(무명; 실상을 모름, 실상을 완전히 깨닫지 못함)로 인해 무상하게 매 순간 생멸하며 변하는 오온에 집착하여 오온을 실체[Atta, Atman, 我;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여기고 오온에 취착하고 오온이 탐하는 대상을 갈애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모든 괴로움[苦; dukkha]을 일으킨다는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고성제[苦聖諦]와 집성제[集聖蹄]다.
사성제[四聖諦]의 맨 처음인 고성제는 "이것이 둑카[dukkha; 苦]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양상(현실)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철저한 통찰이며 자각이다.
부처님 자신도 이런 인간의 현실(실존양상; dukkha)을 정면으로 직시하시고 나서 그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양상인 둑카[dukkha; 苦]에 대한 철저한 통찰과 자각은 마침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는 열쇠[고성제]가 되었던 것이다.
고[苦, dukkha; 고통, 괴로움]는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행복)을 향해가는 모티브(Motive, 동기)가 될 때에만 성스러운 진리[고성제]가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고통 자체가 성스러울 게 뭐가 있겠는가?!
요컨대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양상(dukkha; 苦)에 대해서 철저히 자각[고성제]하고 그 발생 근원[근본원인, 무명, 갈애; 집성제]을 해결[해탈; 멸성제]하고자 바르게 노력[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도성제]할 때, 그 근원적 괴로움(dukkha; 苦)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성스러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행복, 완전한 해탈, 열반; 멸성제]을 증득하는 성스러운 진리[고성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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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반드시 고(苦, dukkha; 고통, 괴로움)로부터 벗어나는 바른 길(팔정도)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바른 길(팔정도)을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해야만 비로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어떤 것이 진짜 진리인가?"라고 묻는 깔라마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진리[사성제]가 사람들의 '진정한 이익', 즉 '진정한 행복, 괴로움의 근원적 소멸, 탐진치의 소멸, 마음의 부정성의 소멸, 자비심(나를 초월한 지혜로운 바른 사랑의 마음)의 증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이것이 신이 아닌 인간 부처님의 실용주의이며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正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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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에는 단순한(얕은) 착각이 있고 깊은 착각이 있다.
무지에는 단순한(얕은) 무지가 있고 깊은 무지가 있다.
관찰에는 피상적인(얕은) 관찰이 있고 깊은 관찰(통찰)이 있다.
앎(이해)에는 피상적인(얕은) 앎(이해)이 있고 깊은 앎(이해)이 있다.
정견[正見]에는 피상적인(얕은) 정견[正見]이 있고 깊은 정견[正見]이 있다.
부처님께서 강조하셨듯이, (처음에는 피상적이나마) 꼰단냐(Kondanna)처럼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안냐따Annata)'[正見]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정각을 향해가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팔정도)을 계발하는 수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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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꼰단냐처럼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여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바른 신념을 확립하고 바른 실천법인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실천하여 부처님께서 도달하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와 평화, 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해탈, 열반)를 증득하는 사람이 되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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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i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dukkha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완전히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