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
책의 첫머리에 인용한 칼 마르크스의 말이다. 사실 이 한마디에 이 책의 핵심이 축약되어 있다.
에리히 프롬 최고의 역작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의 마지막 역작으로, '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함께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이다. 이 책이 1976년에 나왔고 에리히 프롬이 1980년에 죽었으니 사실상 그의 평생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심리학, 사회학, 신학, 역사, 철학 등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다양한 방면에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만큼이나 소중한 책으로, 몇 차례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고전이다. 또한 삶의 방향을 소유가 아닌 존재로 전환할 수 있게 힘을 붇돋우는 고마운 책이다.
소유와 존재의 차이의 중요성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소유냐 존재냐의 양자택일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눈에는 소유한다는 것이 삶에 포함된 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사물을 당연히 소유한다. 그뿐이랴, 사물을 즐기기 위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하는 것을, 점점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는 사회,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백만 불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 소유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 어찌 양자택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존재의 본질이 바로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그래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찍이 인생의 위대한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의 양자택일에서 그들의 철학적 관점의 핵심을 찾아냈다. 석가모니는 인간으로서 자기 도야의 최고 단계에 이르려는 사람은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설법한다. 또한 예수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누가 복음" 9: 24-25)라고 말한다. 수사(修士) 에크하르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어서 "비우는 것", 자아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는 것이 영적(靈的) 부(富)와 힘을 얻는 전제라고 가르친다. 또한 마르크스는 사치야말로 빈곤과 마찬가지로 큰 악덕이며, 우리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내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마르크스는 철저한 휴머니스 트로서의 진짜 마르크스이며, 소련 공산주의에 의해서 실천된, 변조된 다른 종류의 마르크스가 아니다 ).
이처럼 소유와 존재를 구분하는 문제는 몇 년 전부터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빌려서 개인이나 집단을 구체적인 고찰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두 실존양식의 차이를 이루는 경험적 토대를 찾아보고자 했다. 나의 고찰이 이끌어낸 명백한 결론은 이 차이는 생명에의 애착과 죽은 자에 대한 애착의 차이와 함께 인간실존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를 구성 한다는 것과 또한 인류학과 정신분석학의 경험적 자료들이 제시한 바로는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문학에 나타난 예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의 차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고인이 된 스즈키가 "선종(禪宗)에 대하여"라는 강론에서 인용한 유사한 내용의 두 편의 시를 여기에 재인용하기로 한다. 그중 한 편은 일본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色蒸)가 지은 하이쿠(俳句)이며, 다른 한 편은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이다. 두 시인 모두 동일한 체험, 즉 산책 길에서 본 꽃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테니슨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째로 손 안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그러나 만약 내가
뿌리째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신(神)과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련만.
그리고 바쇼의 하이쿠는 다음과 같다.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
두 편의 시의 현격한 차이는 얼른 눈에 띈다. 꽃을 본 테니슨의 반응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그는 꽃을 "뿌리째로" 뽑아든다. 꽃에 대한 그의 관심은 꽃의 생명을 단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꽃이 신과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도 있으리라는 지적 사색으로 끝을 맺으면서 말이다. 이 시에서의 테니슨은 생명체를 해부하면서 진실을 추구하는 서구 과학자들에게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꽃에 대한 바쇼의 반응은 판이하다. 그는 꽃을 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건드려보려고 조차 않는다. 그는 "알아보기" 위해서 다만 "눈여겨 살펴볼" 뿐이다.
이 시에 대해서 스즈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D. T. Suzuki, 1960, 1쪽). "아마도 바쇼는 시골길을 따라 걷다가 울타리 곁에서 희미한 무엇인가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그것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눈에는 띄지도 않는 하찮은 야생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이것이 이 시 안에 그려진 단순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일본어로 ‘가나(かな)’라고 울리는 마지막 두 음절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시적 감흥이 표현된 대목도 찾을 수 없다. 흔히 명사나 형용사, 또는 부사를 수식하는 이 조사(助詞)는 감탄이나 찬양, 고통이나 기쁨의 감정을 표현하며, 서구어로 번역할 때는 감탄부호로 나타내면 상당히 적중할 수 있다. 앞에 예시된 하이쿠에서는 시 전체가 이와 같은 감탄부호로 마무리된 셈이다." 테니슨은 사람과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히 꽃을 손에 쥘 필요가 있었고, 꽃은 그의 소유가 됨으로써 파괴된다. 바쇼는 다만 바라보기를 원한다. 또한 꽃을 그냥 관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꽃과 일체가 되기를, 꽃과 결합하기를 원한다—그러면서 꽃의 생명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테니슨과 바쇼의 차이는 괴테의 다음 한 편의 시에 명시되어 있다.
발견
나 홀로
숲속을 거닐었지.
아무것도 찾을 뜻은 없었네.
그런데 그늘속에 피어 있는
작은 꽃 한송이 보았지.
별처럼 반짝이고
눈망울처럼 예쁜 꽃을.
그 꽃을 꺾고 싶었는데,
꽃이 애처롭게 말했네.
내가 꺾여서
시들어버려야 되겠어요?
하여, 꽃을 고스란히
뿌리째로 캐어,
예쁜 집 뜨락으로
옮겨왔지.
조용한 자리에
다시 심어놓으니,
이제 늘상 가지 치고
꽃 피어 시들 줄 모르네.
괴테는 아무런 목적 없이 산책하다가 반짝이는 작은 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도 테니슨과 똑같이 꽃을 꺾고 싶은 충동을 느꼈음을 보고한다. 그러나 테니슨과는 달리 그는 그렇게 하면 꽃이 죽을 것을 깨닫는다. 괴테에게 그 꽃은 말을 걸어와서 경고를 할 수 있을 만큼 살아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테니슨과도 바쇼와도 다른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꽃을 고스란히 캐내어 그 생명이 보존되도록 이식(移植)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괴테는 바쇼와 테니슨의 중용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생명에 대한 그의 사랑이 순전한 지적 호기심을 능가한다. 이 아름다운 시는 자연탐구에 대한 괴테의 근본 입 장을 명백히 표현해주고 있다.
꽃과의 관계에서 테니슨이 보여주는 특성은 소유양식, 또는 소유욕의 양식에 속한다. 이 경우에서는 물론 물질적 소유가 아닌 지적 소유이다. 바쇼와 괴테의 꽃에 대한 관계는 존재양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지금 내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을 의미한다.
열정적 삶의 옹호자요, 인간의 기계화와 해체(解煙)에 맞서서 싸운 작가인 괴테는 수많은 시작품에서 소유에 반대하면서 존재의 편을 들었고, 극작품 「파우스트(Faust)」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를 소유의 대표로 내세우면서, 존재와 소유 사이의 갈등을 극화시켰다. 존재의 특질을 더없이 간결하게 표현한 그의 짧은 시가 한 편 있다.
고유의 재산
나는 알고 있네, 내게 속한 것은 다른 아무것도 없음을.
오로지 나의 영혼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 나오려는 사상과,
자애로운 운명이 베풀어준,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향유하는 은총의 순간순간뿐임을.
그러나 존재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차이가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의 차이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을 중심으로 여기는 사회와 사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지향은 돈, 명예, 권력에의 탐욕이 삶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버린 서구 산업사회 인간들의 특성이다. 중세사회나 주니 인디언(Zuni Indians, Zuni-Indianer) 사회, 또는 특정한 아프리카 부족사회처럼 현대적 "진보"사상에 감염되지 않은 덜 소외된 사회에는 그들 고유의 바쇼가 살아 있다. 그런가 하면 산업화를 몇 세대 거치고 난 뒤의 일본인은 어쩌면 그들 고유의 테니슨을 가지게 될는지 모른다. 문제는 (*융의 견해처럼) 선종(禪宗)과 같은 동양적 사고체계에 대해서 서구인의 이해능력이 못 미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무릇 모든 현대인이 소유와 탐욕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사회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기인한다. 에크하르트 수사의 가르침도 실은 바쇼나 선(禪) 못지않게 난해하기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에크하르트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다른 언어로 된 동의어인 것이다.
*주1)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로서 프로이트의 수제자.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앞서서 인식하고 연상실험을 창시하여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적 요소를 입증,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 나 이후 프로이트에 의해서 성적 영역에 국한되었던 "리비도" 개념을 일반적 에너지로 주장함으로써 프로이트와 갈라졌다. 심리학 일반에서 "내향성"과 "외향성"을 구분한 것은 그의 공적으로 인정된다.
▶︎ 소유냐 존재냐 서론 : 위대한 약속, 이행되지 않은 약속과 새로운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