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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삶의 나침반

소유냐 존재냐 - 서론 읽기




서론: 위대한 약속, 이행되지 않은 약속과 새로운 선택


한 그릇된 환상의 종말


무궁한 발전에 대한 위대한 약속一一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무제한적인 개인의 자유에 대한은 산업시대 개막 이래로 여러 세대에 걸쳐서 희망과 믿음을 지탱해온 토대였다. 사실상 인간의 문명은 인간이 자연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산업시대가 개막되기 이전까지는 그 지배력에 한계가 있었다.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을 기계 에너지가, 나중에는 핵 에너지가 대신하고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가 대신하기까지 산업의 발달은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무한한 생산과 아울러 소비의 도상에 있으며, 과학과 기술에 힘입어서 우리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리라는 확신 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제2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막강한 존재, 즉 신(神)들이 되어가고 있었고, 자연이란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물을 지을 벽돌이나 공급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남자들, 그리고 갈수록 여자들도 새로운 자유의 느낌을 체험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다. 봉건사회의 사슬은 끊어져나갔고, 사람들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기 뜻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느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중산층 및 상류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획득한 자유의 느낌은 다른 계층에게도 전이(轉移)되어 산업화가 지금 같은 속도로 진행되기만 한다면 결국 새로운 자유가 모든 사회와 모든 구성원에게까지 확산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지향하는 운동에서 급선회하여, 만인에게 해당되는 부르주아적 삶이라는 이상(理想), 다시 말하면 미래의 남녀가 누릴 보편적 부르주아라는 이상을 수립하는 세력으로 변했다. 우선 모든 사람이 부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면, 이어서 누구나 무한히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무제한의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이라는 삼위일체가 발전이라는 새로운 신앙의 핵심을 이루었고 "하나님의 성도(聖都)"의 자리에 발전이라는 지상(地上)의 새 도시가 들어섰다. 이 새로운 신앙이 그 신도들의 마음을 에너지와 활력과 희망으로 가득차게 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산업시대가 이룩했던 물질적 및 정신적인 눈부신 업적과 그것이 준 위대한 약속의 파장을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그 위대한 약속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오늘날 야기되 는 정신적 충격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산업시대는 그 위대한 약속을 이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행복과 최대치의 만족은 모든 욕망의 무제한적인 충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복지상태(well-being)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 우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독자적 주인이 되리라는 꿈은 우리 모두가 관료주의 체제라는 기계의 톱니바퀴로 물려들었음을 인식함과 더불어 깨어져버렸다.

▶︎ 우리의 사고, 감정, 취미는 매스 미디어를 지배하는 산업 및 정부기구에 의해서 조정되고 있다.

▶︎ 경제적 성장은 부강한 나라들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부강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왔다.

▶︎ 기술적 진보는 생태학적 위험과 핵전쟁의 위험을 필연적으로 수반해왔고, 그 각각의 위험 또는 두 가지 위험이 뭉뚱그려져서 모든 문명에, 어쩌면 모든 생명체에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알베르토 슈바이처는 1954년 11월 4일 노벨 평화상을 받으러 오슬로에 왔을 때 온 세계인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과감히 지금의 상황을 보십시오. 인간이 초인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초인은 초인적 힘을 지닐 만한 이성의 수준에는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온전히 인정 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 이 초인은 자신의 힘이 커짐과 동시에 점점 더 초라한 인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이제는 명명백백 해졌습니다.…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의식해야 할 점은, 이미 오래 전에 의식해야만 했던 점은 초인으로서익 우리는 비인간(非人間)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A. Schweitzer, 1966, 181쪽 이하)



위대한 약속은 왜 실현될 수 없었는가?


위대한 약속이 실현되지 못한 근거는 산업주의 체계에 내재한 경제적 모순들 이외에도 그 체계 자체가 지녔던 두 가지 중요한 심리학적 전제들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다시 말하면 최대치의 쾌락이라는 전제이다. 행복이라는 것을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소망 또는 주관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해한 점이다(극단적 쾌락주의). 둘째, 자기중심주의, 이기심, 탐욕——체계의 존속을 촉진시키는 특성들——이 조화와 평화로 통하리라는 전제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여러 역사적 시대에 걸쳐서 극단적 쾌락주의는 부유한 계층만이 누리며 발전한 것이었다. 예컨대 로마의 특권층,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특권층, 18,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엘리트 계급처럼 무한한 자력(資太) 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들은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극단적 쾌락주의는 이렇듯 특정 시대의 특정 계층에서 통용된 실례들을 보이고 있지만——단 하나의 예외적 인물을 제외하고는——중국 및 인도, 근동, 유럽의 인생철학 대가들이 전개해온 "행복한 삶"의 이론에서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유일한 예외적 인물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티포스(기원전 4세기 중엽)이다. 그는 인생의 목표는 육체적 쾌락의 최적치(最適値)를 향유하는 것이며, 행복이란 향유한 쾌락의 총화라는 가르침을 펼쳤다. 지금 우리가 그의 철학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 최소한의 지식도 실은 *1)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의해서 전수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언 만으로도 아리스티포스야말로 유일한 극단적 쾌락주의자였으며, 그에게 욕구의 실체는 곧 그것을 충족시킬 권리, 따라서 삶의 목표, 즉 쾌락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된다.


*2)에피쿠로스는 아리스티포스와 같은 계열의 쾌락주의의 대표자로 간주될 수는 없다. 물론 에피쿠로스도 "순수한" 쾌락을 최고의 목표로 보았지만, 그러나 그에게 이 개념은 "고통의 부재 (aponia)"와 "영혼의 평안(ataraxia)"을 의미했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욕구를 층족시킨다는 의미에서의 쾌락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런 쾌락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감이 뒤따르며, 그럼으로써 인간은 그의 참목표, 즉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진다는 요지이다(에피쿠로스의 학설은 여러 면에서 프로이트의 학설과의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해서는 여러 엇갈리는 해석들이 나와 있지만 그중에서 결정적인 해석을 한줄기 뽑아본다면, 어쨌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대조적으로 일종의 주관주의를 대표했던 철인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 이외에는 "욕망의 사실상 현존이 윤리적 규범을 구성한다"는 가르침을 펼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한사람도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인류 최적의 복지상태(vivere bene)였다. 그들 사상의 핵심적 요체는 오로지 주관적으로 감지되어 그 충족이 순간적인 쾌락으로 이어지는 욕구들(소망들)과, 인간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그것의 실현이 인류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다시 말하면 행복(eudaimonia)을 불러오는 욕구들을 엄연히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꾸어말하면, 그들은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감지되는 욕망과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욕망을 구분지어 생각했다—— 이때 후자의 욕망은 인간본성의 욕구와 일치하는 반면, 전자의 욕망 가운데 어떤 것은 인간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보았다. 

인생의 목표는 개개인의 소망충족이라고 보는 학설은 고대의 아리스티포스 이래 17, 18세기의 철인들에 이르러 다시 제기되어 명백히 표방되었다. "이익"이라는 말이 "영혼을 위한 이득"이라는 의미이기(성서의 경우가 그렇고,  스피노자까지만 해도 그런 의미였다)를 멈추고 그 대신 물질적, 재정적 이윤을 뜻하게 된 그 시기에, 그것은 쉽게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관념이었다. 그 때는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을 묶고 있던 정치적 족쇄뿐 아니라 사랑과 연대감의 끈까지 풀어던진 시기였고, 따라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보다 나은 자아를 거둔다는 믿음이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3)홉스의 경우 행복이란 하나의 욕구(cupklitas)에서 다음 욕구로 끊임없이 이행해가는 과정이었다. *4)라 메트리는 그것이 적어도 행복의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는 이유로 환각제 복용까지 권장했고 *5)사드는 잔인한 충동마저도 그런 충동이 엄존하며 충족되기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충족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결정적으로 개가를 올린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들이다. 그 옛날 귀족계급이 철학과는 무관하게 누렸던 이 관념이 이제 부르주아 계급의 이론과 실천의 바탕이 되어버린 것이다. 


18세기 이래로 수많은 윤리적 이론들이 터져나왔다—— 한편으로는 공리주의처럼 비교적 권위 있는 쾌락주의 형태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6)칸트, 마르크스, 소로, *7)슈바이처의 주장처럼 엄격한 반(反)쾌락주의 체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 우리의 시대는 이론과 실천 면에서 극단적 쾌락주의로 퇴행해 있다. 무한한 쾌락이라는 표상이 숙련된 작업이라는 이상(理想)과 묘한 대립관계에 있으며, 강박으로 받아 들여지는 작업윤리가 휴가기간이나 퇴근 후 자유시간에 누리는 완전한 안락이라는 이상과 모순관계에 있다. 한편으로는 관료주의적 루틴과 컨베이어 벨트가, 다른 한편으로는 텔레비전, 자동차, 섹스가 모순에 찬 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강박적으로 일에만 몰두하는 것도 철저한 무위도식도 모두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 것이다. 일과 휴식이 적절히 배합되어야만 우리의 삶은 견딜 수 있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모순관계에 있는 이 두 가지 삶의 태도는 하나의 경제적 필연성과 맞물려 있다. 20세기 자본주의는 숙련화된 팀워크를 전제함과 동시에 생산된 상품의 최대한의 소비와 최대한의 서비스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앞에서 말한 여러 이론의 고찰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극단적 쾌락주의는 결국 "훌륭한 삶"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 아니라는 귀결에 이르게 하며, 왜 그럴 수 없는가를 제시해준다. 그러나 굳이 이론적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눈앞의 경험적 자료들만 가지고도 우리는 우리가 벌이고 있는 "행복 사냥"이 복지라는 목표에는 결코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겪는 불행으로 악명이 높다. 이를테면 고독과 불안에 시달리며, 의기저상해 있고, 파괴적이며, 의존적인—— 요컨대, 그들이 끊임없이 절약하려 드는 바로 그 시간을 성공적으로 "죽일 때" 쾌락을 맛보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현재 우리는 쾌락(복지와 기쁨 같은 적극적 감정과는 대비되는 소극적 감정으로서의)이 과연 인간의 실존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최대의 사회적 실험을 벌이고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수 특권층뿐 아니라 적어도 산업국가에 사는 인구 절반이 그들이 추구하는 쾌락을 실제적으로 충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앞의 의문에 대해서 이미 부정적인 답을 내리고 있다. 산업시대의 두번째 심리학적 전제, 즉 개인적 이기주의를 배제하면 조화, 평화, 만인의 복지를 가져오리라는 전제는 그 이론적 발단부터 오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들에서도 기만이었음이 확증되고 있다. 위대한 고전경제학파 가운데 유독 *8)리카도 만이 부인했던 이 원칙이 반드시 정답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기주의란 나의
태도의 한 측면일 뿐만 아니라 나의 성격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이기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공유(公有)가 아닌 점유(占有)만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 ;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 나는 모든 타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나의 고객들에 대해서 속임수를 쓰고 나의 경쟁자들을 파멸시키고자 하며 내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싶어한다. 나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 나는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을 시기하지 않을 수 없고, 나보다 더 적게 소유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나 자신을 그렇게 보이려고 하듯이, 친절하고 성실하며 분별있고 미소 짓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모든 감정을 몰아내야 한다. 소유의 추구는 계급간의 끝없는 전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계급을 타파함으로써 계급투쟁에 종식을 고하겠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은 엄연한 허구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체제 역시 근본적으로는 삶의 목표로 무제한의 소비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한 계급은 형성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계급투쟁도, 세계적 시각에서 보면 국제적 전쟁도 불가피한 것이다. 소유욕과 평화는 서로 배척관계에 있다.


만약 18세기에 근본적 변혁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극단적 쾌락주의와 무제한적 이기주의가 경제행위를 주도하는 원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세사회나 그밖의 시대 여러 문명사회에서는, 또한 원시사회에서도 경제행위의 결정요인은 어디까지나 윤리적 규범이었다. 예컨대 스콜라 학파 신학자들에게는 상품가격이나 사유재산 같은 경제적 범주가 바로 도덕신학의 한 과제였다. 물론 신학자들도 자기네 도덕률을 새로운 경제적 요구에 적용하는 공식들을 끊임없이 물색하기는 했지만(이를테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적정 임금[just price, der gerechte Lohn〕"에 대한 개념수정처럼), 그럼에도 경제행위는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인간적 행위로 남아 있었고, 따라서 휴머니즘 윤리의 가치표상에 종속되어 있었다. 18세기 자본주의는 단계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경제행위가 윤리 및 인간적 가치에서 떨어져나오게 된 것이다.

경제적 메커니즘이 인간의 욕구나 의지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자율적 전일체로——고유의 법칙에 따라서 자동으로 작동되는 체계로 간주되었다. 끝없는 콘체른(기업연합)의 팽창으로 인해서 점점 잦아지는 소규모 기업들의 도산과 노동자들의 곤경은 유감스럽기는 하되 자연법칙의 영향처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필연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경제체계의 발달은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보다는 그 체계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경제 체계의 성장에 유리한 것은(하다못해 단 하나의 콘체른에라도 유리한 것은) 인간의 행복도 촉진시키는 것이라는 명제를 내세워서 그 첨예한 모순을 얼버무리려고 했다. 이 명제를 뒷받침해준 것은 경제체계가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자질——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소유욕 등——이야말로 바로 인간이 타고난 속성이라는 것, 그러니까 그 자질들은 체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본성에서 조장된 것이라는 일종의 견강부회(奉强附會)였다.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소유욕이 자리 잡지 못한 집단들은 "원시적" 집단으로, 그 구성원들은 자격 미달의 "미숙한" 인물들로 비하되었다. 이 특성들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자연적 충동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제약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이 있으니,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심히 적대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한 변종"이다. 실존적 조건들로 보면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 이지만, 그 타고난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메시아적 환상을 포기함으로써 우리의 실존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해왔다. 그래서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자연을 뜯어 맞추어 변형시켰고, 그렇게 자연을 지배하는 형태가 갈수록 심화되어서 마침내는 자연을 파괴하기에 이르렸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정복욕과 적대감은 자연자원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바닥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 자연 역시 인간의 강탈욕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이 멀게 했다. 산업사회는 자연을 소홀히하며, 마찬가지로 기계에 의해서 생산되지 않은 모든 것을 경시한다——심지어는 기계를 생산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최근에 와서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예외가 되었지만, 모든 유색인종을) 경시한다. 현대인은 기계적인 것, 막강한 기계, 생명 없는 것에 매료되어 있으며, 그래서 갈수록 점점 더 과괴에 휩쓸려들고 있다.



인간의 변화를 위한 경제적 필연성


지금까지 나는 우리의 사회경제적 체제, 즉 우리의 생활방식의 특성들이 병적 요소를 품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병든 인간과 병든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나온 제2의 논의들이 있다. 즉 인간의 근본적 심리변화에서 경제적 및 생태학적 파국에 맞서는 대안을 모색하는 측면이다. 이 논의는 *9)로마 클럽(The Club of Rome)에서 나온 두 편의 보고서——그 하나는 메듀스를 대표로 하여 작성된 것(1972)이며 또 한편은 메사로비치와 페스텔에 의해서 작성된 것(1974)이다——에서 찾아진다. 두 보고서 모두 세계 전반에 걸친 기술적, 경제적 발전 및 인구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펼친다. 메사로비치와 페스텔은 세계적 차원에서 세워진 하나의 계획에 따라서 과감하게 수행는 경제적, 기술적 변혁 만이 "어마어마한 파국, 궁극적으로는 지구 전체의 파국"을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와 같은 주장의 명제를 증명하려고 그들이 끌어들인 자료는 지금까지 시행된 것 중에서 가장 방대한 것이며, 또한 체계적인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이처럼 이들의 연구는 메듀스가 주도한 보고서에 비해서 방법론적인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먼저 나온 메듀스의 연구는 재난을 예방하려면 근본적인 경제적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을 훨씬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메사로비치와 페스텔은 앞에서 말한 경제적 변혁에 선행하는 조건으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입장과 새로운 윤리라는 의미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들어서야만 인간의 근본 가치와 그가 취하는 입장(또는 내가 이름한다면, 인간의 성향)도 바뀐다는 점을 결론적으로 제시한다(M. D. Mesarovic/ E. Pestel, 1974, 135쪽 참조). 이들의 주장은 사실상 그들의 보고서가 나오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이 주장한 견해를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즉, 새로운 사회는 그 발전과정에 새로운 인간의 발전을 반드시 병행해야만 가능하다는, 좀더 학술적인 표현을 쓰자면 오늘날 인간의 지배적 성격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두 보고서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특성인 물량화, 추상성, 탈인격화의 정신으로 작성되었다는 점과 또한 정치적, 사회적 요인들이 모두 외면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현실적 전략도 세울 수 없는 법인데도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의 보고서는 어쨌든 귀중한 자료의 뒷받침을 받아서 인류 전체의 경제적 상황을 취급하여 전 인류의 가능성과 위기를 다룬 최초의 연구임에는 틀림 없다. 자연을 대하는 새로운 입장과 새로운 윤리가 필히 요청된다는 그들의 결론적 주장은 그들이 펼친 철학적 전제들과 확연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에 그만큼 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역시 경제학자이면서 투철한 휴머니스트인 슈마허도 인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그의 주장은 오늘의 사회체계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으며, 사회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경제적 파국에 이르리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인간변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윤리적, 종교적 요구에 그치는 것도, 현재 우리 사회의 특성이 지닌 병적 (病的) 요인에 근거한 심리적 요구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적나라한 전제이다. 올바른 삶이 윤리적, 종교적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육체적 생존이 인간정신의 근본적 변화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의 변화도 과감한 경제적,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 외부의 변화가 인간 자체에 변화할 기회를 주며,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용기와 상상력을 부여할 것이다.



파국에 대비할 다른 선택이 있는가?


지금까지 인용한 자료들은 이미 발표되어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그럼에도 거의 믿기지 않는 점은 우리에게 이미 고지된 운명을 전환시키려는 진지한 노력들이 지금껏 전혀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사생활에서 자신의 실존이 전면적으로 위협을 받는데도 두 손 놓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정작 공공복지를 담당한 책임자들은 실제적으로 아무 대책도 강구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그들 공복에게 의탁하고 있는 국민들도 그들의 무대책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본능 가운데 가장 강한 본능인 자기 보존 본능이 아예 작동을 멈춘 것 같은 이런 사태가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가? 이것을 설명해주는 가장 명백한 요인 중의 하나는 정치가들이 번잡스러운 제스처를 통해 재난을 모면할 무슨 효과적인 조처를 취하는 듯이 호도(梅塗)하고 있는 현실이다. 끝도 없는 회담, 결의안, 군축회의 등 그들은 마치 스스로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그 해결방안에 따라서 무엇인가 실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도움이 될 대책은 사실상 아무것도 진행되는 것이 없다. 통치자도 피통치자도 마치 대책을 알고 그것을 진척시키는 듯이 호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양심과 아울러 생존에의 소망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요인은 체제에서 야기된 이기심이 정치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 그들 개인의 성공에 더 큰 비중을 두게끔 만드는 현실이다. 설령 정부나 기업 운영자들이 그들 개인에게는 이득이 되겠지만 공동사회에는 위해(危害)한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아무도 그 결정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긴 자기중심주의가 오늘날 통용되는 윤리체계의 버팀목의 하나라면, 그들이라고 해서 달리 행동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지도자들은 탐욕이(굴종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는 사실에, 자기 목숨이 걸려 있든 처자의 생존이 얽혀 있든 간에, 탐욕은 자신의 참관심사를 쫓아 갈 수 없게끔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에(J. Piaget, 1932 참조) 눈이 멀어 있는 듯하다. 아울러 보통 사람의 경우에도 자기 개인사에 이기적으로 몰입하는 나머지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체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두지 않는 실정이다.


우리의 자기 보존 본능을 마비시키는 또 다른 근거는 개개인이 당장 눈앞에서 감당해야할 희생보다는 차라리 아득해 보이는 막연한 재난 쪽을 택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널리 만연된 태도이다. 커스틀러가 스페인 내전(內戰)에서 겪은 체험담은 이런 태도에 대한 적절한 예를 보여준다. 프랑코 군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커스틀러는 마침 한 친구의 안락한 별장에 머물러 있었다. 군대가 그날 밤 안으로 그 집에 당도 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총살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고, 도망을 친다면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다. 그러나 바깥은 춥고 비 내리는 어둠뿐이었고 집 안은 따스하고 아늑했다. 그래서 그는 주저 앉았고, 결국 포로가 되었다. 그는 동료 기자들이 백방으로 애쓴 덕분에 몇 주일 뒤에 기적처럼 구출되었다. 이와 똑같은 태도를 중병의 진단이 내려져서 대수술을 받을지도 모를 진찰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생명을 모험에 거는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앞에 열거한 설명 이외에도 사활이 걸린 문제에서 인간이 취하는 치명적인 수동성을 설명해주는 또 한 가지 요점이 있다. 이것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의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독점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나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또는 "미소 띤 얼굴을 한" 관료주의적 파시즘에 맞서서 그것을 대치할 다른 선택이 없다고 여기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가 일반화된 근거는 상당 부분 지금껏 대폭 새로운 사회형태의 실현 가능성을 연구하고 그것에 상응하는 실험을 하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로 소급된다. 또한 이것은 여기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자연과학과 기술로 메워진 우리 학자들의 두뇌 속에 사회혁신 문제가 얼마간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학문이 지금껏 자연과학과 기술이 차지했던 매력을 탈환하지 못하는 한 현실적이고 새로운 선택들을 찾아낼 혜안과 능력은 여전히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인간의 두 가지 실존양식, 즉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첫 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눈에 띄는 두 실존양식의 차이에 대해서 몇 가지 고찰하기로 한다. 둘째 장에서는 독자도 쉽게 자신의 경험과 끼워맞출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의 실례들을 통해 두 양식의 차이를 제시할 것이다. 셋째 장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에크하르트 수사(修士)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소유와 존재에 관한 견해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후의 장들에 제시한 것이 나로서는 가장 어려운 과제들이다. 그것은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의 차이를 분석하는 작업으로, 작업과정에서 나는 경험적 자료들을 토대로 이론적 결론을 끌어내는 시도를 하기로 한다. 여기까지 이 책은 인간의 두 가지 기본적 실존양식을 주로 개인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이와는 달리 마지막 장에서는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를 태동시키는 데에서의 두 실존양식의 중요성을 고찰하고, 파국에 맞서서, 소모적인 개인의 병든 상태(iU-being, Krank-Sein)와 파멸을 향해 가는 전 세계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맞서서 그것에 대처할 선택의 가능성들을 구명(究明) 하고자 한다.



주)


*1)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os): 3세기 전반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철학자. 10권으로 된 저술 「위대한 철인들의 생애와 사상(Vitae philosophoruni)」은 역사적 원전으로 가치가 있다.


*2)     에피쿠로스(Epikouros, 기원전 342?-기원전 271): 고대 그리스 철학자.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 금전욕, 음욕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공공생활의 잡사를 피하여 은둔하는 것, 헛된 미신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 빵과 물만 마시는 질박한 식사에 만족하는 것, 우애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등이 그의 쾌락주의의 골자였다. 


*3)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영국 철학자. 자연상태로 방치한다면 인간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세계가 되므로 사회적 제약이 필요하다는 "사회계약설"을 주창했다.


*4) 라 메트리(Julien Offroy de La Mettrie, 1709-51): 프랑스 철학자로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 유물론자. 감각적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덕을 자기애로, 무신론을 행복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5) 사드(Donatien Alphonse Francois de Sade, 1740-1814): 프랑스 작가. 1777년부터 근 30년간을 감옥에서 지냈고, 1803년부터는 샤랑톤 정신병원으로 이감되어 일생을 마쳤다. 처음에는 성범죄 때문에, 1793, 94년에는 반혁명적 태도 때문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저작 때문이었다. 그의 저작의 대부분은 감옥에서 쓰였다. 그는 무신론자임을 표방하고,  선악의 가치를 순전히 냉혹한 천성에 맞추어서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이라고 보았다. 문학은 인간의 사악함을 끝까지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용기가 그를 19세기 문학의 선구자로 만들었고, 보들레르, 플로베르, 아폴리네르의 찬탄을 받게 했다. 19세기 말부터는 정신분석학, 심리학, 문예학에서 그의 핵심 관념인 악에 뿌리를 둔 초인간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6)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관념철학의 선구자. 뉴턴의 물리학과 루소의 사상을 기초로 삼고 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뿌리까지 파고들어서 전면적으로 재편성함으로써 그의 고유의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7)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사상가이며 저술가. 그의 대표작이자 미국의 고전으로 알려진 「월든(Walden, or Life in the Woods)」(1854)은 그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그렸다. 그는 또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서, 1846년에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를 거부한 죄로 투옥된 적이 있고, 그때의 경험을 기초로 쓴 「시민의 반항(0/ie Civil Disobedience, 1849)은 훗날 간디 등의 무저항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8)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영국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에서 출발한 고전학파 경제학의 완성자. 노동가치설, 임금생존비설을 제창했다.


*9) 로마 클럽(The Club of Rome) : 1968년 4월 이탈리아 실업가 A. 페체이의 발의로 서유럽의 정계, 재계, 학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서 결성한 국제적 미래문제 연구기관. 1979년 현재 30개국 90명의 회원이 있다. 매사추세츠 공 과대학의 D. 메듀스 교수 팀이 1972년 연구발표한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인구와 경제의 발전이 지구적 제약에 가로막혀서 21세기에는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다는 경고를 함으로써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74년 M. 메사로비치, E. 폐스텔 팀은 "전환기의 인류"라는 보고서에서 생존을 위한 전략을 연구했다.



▶︎ 소유와 존재의 차이


▶︎ 당신은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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