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의 동짓달은 매섭게 차갑다.
앞산과 뒷산 때문에 밤도 무척이나 길다.
불을 밝히고 먹는 희멀건 아침 죽이 꿀맛이다.
오후 다섯시에 먹은 저녁은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완전소화가 되어
위의 기능이 정지 상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상원사 김치가 짜냐? 주안 염전의 소금이 짜냐?”고 물을 정도로
상원사 김치는 짜기로 유명하다.
그런 김치를 식욕이 왕성한 젊은 스님들은 나물 먹듯이 먹는다.
식욕을 달래기 위해서다.
하기야 상원사 골짜기의 물은 겨울에도 마르지 않으니까
염도(鹽度)를 용해시킬 물은 걱정 없지만.
선객에게 화두 다음으로 끈질기게 붙어 다니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은 식사(食思: 먹는 생각)다.
출가인은 욕망의 단절상태에 있지 않고 외면 내지는 유보상태에 있을 뿐이라고
이 식욕은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 바로 식본능(食本能)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공포가
바로 기아(飢餓)에서 오는 공포라고 결론지어 준다.
화두에 충실하면 견성이 가능한 것처럼 식사(食思)에 충실하다보니 먹는 공사가 벌어진다.
대중공사에 의해 어려운 상원사 살림이지만
초하루 보름에는 별식을 해먹자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별식이란 찰밥과 만두국이다.
절에서 행해지는 대중 공사의 위력이란 비상계엄령보다 더한 것이어서
일단 통과된 사항이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소를 잡아먹자고 의결되었으면 소를 잡아먹어야 하고
절을 팔아먹자고 의결되었으면 절을 팔아먹어야 한다.
대중공사의 책임은 대중 전체가 지는 것이며
또 토의는 극히 민주적이고 여러 가지 여건에 충분히 부합되어야만 결의되기 때문에
극히 온당하지만 약간의 무리도 있을 수 있다.
상원사 김치를 먹어보면 원주스님의 짭짤한 살림솜씨를 알 수 있지만
대중 공사에서 통과된 사항이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원주실에 비장해둔 찹쌀과 팥과 김이 나왔다.
부엌에서 팥이 삶아져가자 큰방에서 좌선하고 있는 스님들의 코끝이 벌름거리더니
이내 조용히 입맛을 다시고 군침을 넘기는 소리가 어간에서나 말석에서나 똑같이 들려왔다.
사냥개 뺨칠 정도로 후각이 예민한 스님들이고 더구나 거듭되는 식사(食思)로 인해
상상력은 기막힌 분들이라 화두를 잠깐 밀쳐놓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찰밥을 기름이 번지르한 김에 싸서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다가 목구멍으로 넘기면 뱃속이 뭉클하면서 등골에 붙었던 뱃가죽이 불쑥 튀어나오는 장면까지 상상하게 되면 약간 구부러졌던 허리가 반듯해지면서 밀쳐놓았던 화두를 꼭 붙잡게 되고 용기백배해진다.
이 얼마나 가난한 풍경이냐.
이 얼마나 천진한 풍경이냐.
찰밥 한 그릇이야말로 기막히게 청신한 활력소이다.
인간의 복수심과 승리욕은 자기 밖에서 보다 자기 안에서 더욱 가증스럽고 잔혹하다.
별식은 넉넉히 장만하여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기 식량(食量)대로 받는다.
주림에 무척이나 고달픔을 겪은 선객들이라 위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발우 가득히 받아 이제까지의 주림에 대한 복수를 시원스럽게 한다.
찰밥이고 보니 격에 맞춰 상원사 특유의 산나물인 곰취와 고비나물까지 곁들여 상을 빛나게 해 준다. 발우 가득한 찰밥과 나물을 비우고서는 포식과 만복이 주는 승리감에 젖어 배를 내밀고 거들먹거리면서 “평양 감사가 부럽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합창한다.
생식하는 스님에게 죄송하다고 고하니
자기도 찹쌀을 먹었으니 뱃속에서야 마찬가지라고 대꾸한다.
불경은 가르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 괴롭다’라고.
애증을 떠나 단무심(但無心)으로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이 경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선객들이지만 주림에 시달림을 받다보니
스스로 경구를 어기고 포식을 했으니 그 과보가 곧 나타났다.
오후 입선시간에 결석자가 10여명이 넘었다.
좌선에 든 스님 중에서도 신트림을 하고 생목이 올라 침을 처리하지 못해
중간 퇴장을 하는 스님들이 너댓명 되었다.
결가부좌의 자세를 갖춘 스님중의 몇 분은 식곤증이 유발하는 졸음을 쫓지 못하여
끄덕거리는 고개짓을 되풀이한다.
통계에 의하면 선객의 9할이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위장병 환자라 한다.
식본능에 무참히 패배당한 적나라한 실상이다.
노년에 이르도록 견성하지 못한 선객은 만신창이가 된 위장을 어루만지면서
젊은 선객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뒷방 신세를 지다가
마침내는 골방으로 쫓겨 가서 유야무야(有耶無耶) 사라져 간다.
그래서 선객은 이중으로 도박을 한다. 세간(인생)에 대한 도박, 출세간(僧伽)에 대한 도박.
언제나 모자라는 저녁 공양이 남아돌아갔다.
위가 소화불량을 알리느라 신트림을 연발하는 스님들은 공양시간에 참석하지 않았고
끼니를 거르기가 아쉬워 참석한 스님들은 물에 말아 죽처럼 훌훌 둘러 마신다.
그렇게도 죽 먹기를 싫어하는 스님들인데도.
저녁 시간 큰방은 결석자가 많이 휑뎅그렁하여
파리 몇 마리가 홰를 치면서 제 세상을 만난 듯 자유롭다.
대신 뒷방은 만원사례다. 뒷방 조실의 코믹한 면상에 희색이 역연하다.
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에 누운 지객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학부출신에다 대교과를 마친 분이지만 과묵해서 시비에 끼어들지 않는 스님이다.
“인간의 본능억제란 미덕일까요? 부덕일까요?”
“정신적인 기능을 개발하기 위해선 약간의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육체적인 조화를 위해선 부덕이겠지요.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겐 악덕이겠고 노인들에겐 무덕이겠지요.”
한참 후 다시 물어왔다.
“선객은 반드시 본능억제를 행해야만 견성이 가능할까요?”
“본능을 억제한다고 해서 반드시 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객에겐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있지요.
본능억제는 필요조건에 해당되고 견성은 충분조건에 해당되겠지요.
필요조건은 수단 같은 것이어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본능억제가 하나의 수단이라면 그 역(逆)인 본능개발도 또한 수단이 되겠지요.
필요조건인 본능억제가 없더라도
충분조건인 자성이 투철하면 견성의 요건은 충족 되겠지요.”
“함수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변수가 본능억제라면
다른 하나의 정수는 자성에 해당되겠지요.
그런데 함수관계에서 변수가 없어도 함수관계가 성립될까요?”
“수리학적인 공리를 선리(禪理)와 대조 내지는 결부시킬 수는 없잖을까요.
전자는 형이하학적인 것이고 후자는 형이상학적인 것인데.”
“선객의 필요조건인 본능억제와 충족조건인 자성에서 필요조건은 없어도 충분조건만 있다면 견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인가요?”
“그렇지요.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형이하학적인 한계성과 가능성은 배제되고 필연성만이 문제되는 거지요. 이렇게 지껄이는 내 자신이 가능성의 존재인지 불가능성의 존재인지 현재의 나로서는 알 수 없기에 가능성 쪽에 매달려 정진하고 있을 뿐이지요.주사위는 이미 던져져있으니까요.”
“무서운 도박이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무서운 운명이지요.”
“퍽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명제(命題)군요.”
“명제가 아니라 문제지요. 해답은 충분조건이 충족될 때 얻어지겠지요.
어서 잡시다. 다사(多思많은 생각)는 정신을 죽이고 포식은 육체를 죽인답니다.”
밖에서는 설한풍(雪寒風)이 굉음을 울리면서 지각을 두들겼다. -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