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23일 식욕의 배리(背理 사리에 맞지 않음)
겨울철에 구워먹는 상원사의 감자맛은 일미다.
선객의 위 사정이 가난한 탓도 있겠지만 장안 갑부라도 싫어할 리 없는 맛이 있다.
요 며칠 전부터의 일이다. 군불 땐 아궁이의 꽃불이 죽고 알불만 남으면
고방에서 감자를 몇 됫박 훔쳐다가 아궁이에 넣고 재로 덮어버린다.
저녁에 방선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 감자구이 담당 스님이
아궁이로 감자를 꺼내러 간다. 뒷방에서는 공모자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기다린다.
감자는 아궁이에서 몇 시간 동안 잿불에 뜨뜻하게 잘 구워졌다.
새까만 껍질을 벗기면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맛은 틀림없이 삶은 밤맛이다.
서너개 먹으면 허기가 쫓겨 간다. 잘 벗겨 먹지만 그래도 입언저리가 새까맣다.
서로를 보며 웃는다. 스릴도 있고 위의 사정도 좋아지니 여유가 생겨서다.
처음에는 화대(火臺)스님이 주동이 되어 몇몇 스님만 방선 후에
아궁이 앞에서 재미를 보았는데 이제는 뒷방에서 재미를 본다.
살림살이 책임자인 원주스님은 큰 방에서 자지 않고 별채에 있는 원주실에서 잔다.
그러기 때문에 뒷방의 감자구이가 가능하다.
규모가 커졌다. 공모자가 많으니 감자의 절취량도 많아야 한다.
감자껍질 뒤처리는 당번스님이 철저히 한다.
그러나 계량심(計量心)의 천재인 원주스님이 감자가 없어지는 것을 오래도록 모를 리 없다.
그렇다고 대중공사를 열어서 감자를 구워먹지 못하게 할 정도로 꽉 막힌 스님도 아니다.
그래서 고방문에는 문고리가 박아지고 자물통이 채워졌다.
그러나 감자구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감자구이 공모자 가운데는 못과 손톱깎기만 있으면 웬만한 자물통은 다 따는 스님이 있다.
이 스님의 재주를 미처 몰랐던 원주스님의 실책이었다.
아무 말 없이 감자 유출을 막기 위한 비상책을 강구하던 원주스님이 강릉을 다녀왔다.
손에는 큼직한 번호 자물통이 들려있었고 틀림없이 고방에 채워졌다.
그러나 감자구이는 계속되었다.
그날 감자구이 당번은 40대의 원두(園頭)스님인데 이 스님은 묘한 습성이 있는 분이다.
어느 절엘 가거나 절간 방에 문이 채워져 있으면 돌쩌귀를 뽑아 버린다.
중이 감출게 무엇이 있으며 도둑맞을 것은 무엇이 있느냐면서
중생의 업고와 무명을 가두어 놓은 것 같아 갑갑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스님이다.
원주스님이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잠갔던 고방문이 돌쩌귀째 뽑혀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주스님은 언짢아서 우거지상을 지우질 못했지만 감자구이 동호인들의 희색은 만면하다.
원주스님의 판정패다.
그렇다고 판정패를 당하고 선선히 감자를 대중에게 내맡길 원주스님은 아니다.
와신상담의 며칠간 고심 끝에 묘책은 강구되었고 드디어 실천에 옮겨졌다.
주부식의 원료가 감자 편중(偏重)이다.
쌀과 감자의 비율이 6:4이던 점심이 4:6으로 뒤바뀌고
잡곡과 감자가 비율이 반반이었던 저녁은 3:7로 되었다.
부식도 매끼마다 감자국에다 감자나물이 올랐다.
대중이 항의를 하자 원주스님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감자 먹기가 얼마나 포원이 되었으면 그 부족한 밤잠을 줄여가면서까지 감자를 자시겠소.
스님들의 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감자 일변도의 메뉴를 짰을 뿐입니다.
일주일 내로 메뉴표를 고칠 것을 약속합니다.”
대중들은 틀림없이 감자에 질리고 말았다.
감자구이는 끝이 나고 동호인들이 뿔뿔이 헤어졌다.
인간 식성의 간사함을 잘 파악하고 이용한 원주스님에게 판정승이 돌아갔다.
역시 살림꾼인 상원사 원주스님다운 책략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상원사 원주스님을 조계종 원주감으로는 제일인자라고 공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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